항일운동의 본산지 만주에는 대종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갔다. 그 결과 일본 총독부는 종교통제안을 공표하였다. 모든 종교는 총독부에 소정의 서류를 제출하여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다음부터 활동하라는 규제법령이었다. (22)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은 구월산 삼성사에서 목숨을 끊었다. 그곳은 단군이 승천한 곳이었다. 민족종교로서 만주땅에 가장 큰 교세를 일으켜놓은 전남 벌교 사람 나철은 창교 8년 만에 한을 품은 채 저 세상으로 떠나간 것이었다. (26)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 완료는 1918년 6월 18일. 그 8년간에 걸친 사업으로 조선총독부는 조선땅의 45%를 차지한 최대 지주가 되어 있었다.(70)
동회는 향촌 어디에서나 저마다 운영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동네마다 당산나무가 있듯 동회가 없는 마을은 없었다. 동회는 마을을 위해 서로 힘을 모아야 하는 대소사에서부터 공동의 질서와 규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모임이었다. 동네 제사 날짜, 계모음, 두레와 품앗이 순서, 농로나 수로 보수의 부역, 명절놀이 계획, 예절과 풍기, 각종 부조, 남녀 품삯, 구휼 같은 것을 결정해서 서로서로 힘을 합쳐 돕고 마을이 화목하고 평온하게 유지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여러 가지 마을일들을 결정하는 기본이 되는 규약이 바로 향약이었다. (86)
서간도, 북간도 지역에는 일본 밀정들의 움직임들이 늘어났다. 대표적 인물로 양치성이 등장한다. 양치성은 입신양명을 위해 독립운동 단체 거물급 인사들을 찾아 나서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방대근의 누이 수국이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수국이가 마음을 열어 주지 않자 임형사와 모종의 계약을 맺는다. 수국이는 임형사에게 수난을 당한 뒤 결국 양치성의 여자가 되어 버린다. 구구한 일생이다. 방영근은 하와이 노동자로 끌려가고, 방대근은 독립 운동 투사로 일하며, 언니 보름이는 일본 경찰 세야키의 첩살이를 하고, 수국이는 백남일에게 치욕을 당한 뒤 만주로 떠나 왔지만 결국 일본 밀정 양치성의 농간에 빠져 버린다.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들도 여러 성격을 띄고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가의 독립을 위해서라는 일차적인 목적으로 연합하고 있었다. 복벽주의를 외치는 대한독립단도 있었고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단체, 공산주의를 주창하는 단체들도 있었지만 다행인 것은 서로가 양보하고 타협하며 일차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두가 상해 임시정부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대한독립단은 지난발 의병에 나섰던 양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거의가 평안도 출신인 그들은 양반 의병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던 유인석의 문하이기도 했다. 유인석은 평민 출신의 부하장수가 양반 출신의 부하장수에게 상반의 예를 갖추지 않고 덤볐다 하여 그 목을 쳐서 죽여버릴 정도로 상반의식이 철저한 인물이었다. 그런 유인석이 평안도에서 몇 년 머무르며 서원생활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공부를 한 사람들이 을사보호조작과 함께 의병을 을으켜 싸우다가 형편이 여의치 못하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갔던 것이다.(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