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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스크랩 성철스님 법어 모음
이슬(신행화) 추천 0 조회 31 13.01.20 14: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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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법어
대중스님에게 설법

산은 산 물은 물
( 중략)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0. 종정수락 법어
만법이 불법

동녁 하늘에서 오색구름이 열리고, 둥근 새해가 찬란한 빛을 놓으니 우주의 모든 생명이 환희와 영광에 가득차 있습니다.

만법이 불법 아님이 없고 만사가 불사아님이 없어서 높은산, 흐르는 강은 미묘한 법문을 설하고 나는 새 기는 짐승은 무한한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 착한 사람 모두 부처님의 모습이요, 맑은 물 탁한 물 모두 자비의 줄기이니 온 세상에 훈훈한 봄바람이 넘치고 있습니다.

모든 동포 자매들이여 !
눈을 들어 앞을 바라봅시다.

끝없는 광명이 우주를 비춰서 항상 빛나고 있으니 우주 자체가 광명입니다.
이 영원한 광명속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앞으로 앞으로 힘차게 나아갑시다. 눈 앞에는 평화와 환희와 영광이 있을 뿐입니다.

들판에 가득찬 황금물결은 우리생활의 곧집이요 공장을 뒤흔드는 기계소리는 우리 앞날의 희망입니다.
우리 모두 두손을 높이 모아 이렇듯 신비한 대자연 속 아름다운 강산에서 춤추고 노래하여 생명들을 축복합시다.

1982. 1.1 신년법어


붉은 해가 높이 뜨니
캄캄한 밤중에 붉은 해가 높이 떠서 우주를 밝게 비치니 서있는 바위 좋아라고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펄펄 끓는 용광로에 차디찬 맑은 물이 넘쳐흘러서 천지에 가득 차니 마른나무 꽃이 피어 울긋불긋 자랑합니다.

노담과 공자는 손을 잡고 석가와 예수 발을 맞추어 뒷동산과 앞뜰에서 태평가를 합창하니 성인 악마 사라지고 천당 지옥 흔적조차 없습니다.

장엄한 법당에는 아멘소리 진동하고 화려한 교회에는 염불소리 요란하니 검다 희다 시비싸움 꿈속의 꿈입니다.
길게 뻗친 만리장성은 거품위의 장난이요, 웅대한 천하통일은 어린이의 희롱이니 나 잘났다고 정신없이 날뛰는 사람들이여,
칼날위의 춤을 멈추소서.

일체의 본 모습은 유무를 초월하고 유무를 포함하여 물심이 융화하며 피아가 상통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대해가 다 말라도 항상 변함없이 안전하고 자유롭습니다.

끊임없는 욕심에 눈이 가리워 항상 빛나는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암흑세계를 헤매며 엎치락 뒷치락 참담한 비극이 계속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욕심에 가려져 있는 본 모습은 먼지가 덮여 있는 구슬과 같아서 먼지가 아무리 쌓여도 구슬은 변함없으니 먼지만 닦아내면 본래 깨끗하고 아름다운 구슬은 천추만고에 찬란하게 빛이 납니다.
허망한 꿈속의 욕심을 용감하게 버리고 영원한 진리인 본모습을 빨리 봅시다.
눈부신 광명과 끊임없는 환호소리는 산천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높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벗삼아서 항금병의 감로수를 백옥잔에 가득 부어 마시고 또 마시며 함께 같이 찬양합시다.

1986. 1. 1 신년법어

생명의 참모습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만법의 참모습은 둥근 햇빛보다 더 밝고 푸른 허공보다 더 깨끗하여 항상 때묻지 않습니다.

악하다 천하다 함은 겉보기 뿐, 그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숭고합니다.

그러므로 천하게 보이는 파리, 개미나 악하게 날뛰는 이리, 호랑이를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여야 하거늘 하물며 같은 무리인 사람들끼리는 더 말할 것 없습니다.

살인 강도 등 극악죄인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할 때 비로소 생명의 참모습을 알고 참다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광대한 우주를 두루 보아도 부처님 존재 아님이 없으며 부처님 나라 아님이 없어서 모든 불행은 자취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영원한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서로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1981. 사월 초파일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읍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여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 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 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오,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 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1982. 사월초파일


물 속에서 물을 찾는다.

사탄이여 !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은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줄 알 때에 착한생각 악한생각, 미운마음, 고운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같이 부처로 스승으로 부처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다 없어지고 이 세계는 본래로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임을 알게됩니다.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가장 근본적인 길은 거룩한 부처인 당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에 온 세계는 본래 부처로 충만해 있음을 알게됩니다.
더러운 뻘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 피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아 !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
이 진리를 두고 어디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겠습니까.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 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 악이 융화 상통할 때에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연꽃마다 부처요 극락세계 아님이 없으니 이는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을 바로 볼 때입니다.

1987. 사월초파일


참다운 불공

집집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참다운 부모님입니다. 내 집안에 계시는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거리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잘 받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발 밑에 기는 벌레가 부처님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벌레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머리 위에 나는 새가 부처님입니다.
날라 다니는 생명들을 잘 보호하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넓고 넓은 우주, 한없는 천지에 모든 것이 다 부처님입니다.
수 없이 많은 이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가도 부처님, 부처님을 아무리 피하려고 하여도 피할 수가 없으니 불공의 대상은 무궁무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공을 하여도 끝이 없습니다.

이렇듯 한량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항상 불공하며 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께 한없는 공양구를 올리고 불공하는 것보다,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들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억천 만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복이 많다고 석가세존은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불보살의 큰 서원이며 불교의 근본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듯 거룩한 법을 가르쳐주신 석가세존께 감사하며 항상 불공으로 생활화합시다.

1983. 5.
천지는 한 뿌리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없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구름 되어 둥둥 떠 있는 변화무쌍한 부처님들, 바위 되어 우뚝 서있는 한가로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물 속에서 헤엄치는 귀여운 부처님들, 허공을 훨훨나는 활발한 부처님들, 교회에서 찬송하는 경건한 부처님들, 법당에서 염불하는 청수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천지는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이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세계는 모든 고뇌를 초월하여 지극한 행복을 누리며 곳곳이 불가사의한 해탈도량이니 신기하고도 신기합니다.
입은 옷은 각각 달라 천차만별이지만 변함없는 부처님의 모습은 한결같습니다.

자비의 미소를 항상 머금고 천둥보다 더 큰소리로 끊임없이 설법하시며 우주에 꽉 차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 나날이 좋을시고 당신네의 생신이니 영원에서 영원이 다하도록 서로 존경하며 서로 축하합시다.

1986. 사월초파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죽음으로 저것이 죽는다.

이는 두 막대기가 서로 버티어 섰다가 이쪽이 넘어지면 저쪽이 넘어지는 것과 같다.
일체 만물은 서로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어서 하나도 서로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이 깊은 眞理는 부처님께서 크게 외치는 緣起의 법칙이니 만물은 원래부터 한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쪽을 해치면 저쪽은 따라서 손해를 보고, 저쪽을 도우면 이쪽도 따라서 이익을 받습니다.
남을 해치면 내가 죽고 남을 도우면 내가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우주의 근본진리를 알면 남을 해치려고 해도 해칠 수가 없습니다.
이 진리를 모르고 자기만 살겠다고 남을 헤치며 날뛰는 무리들이여 !
참으로 내가 살고 싶거든 남을 도웁시다. 내가 사는 길은 오직 남을 돕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상반된 처지에 있더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침해와 투쟁을 버리고 서로 도와야 합니다. 물과 불은 상극된 물체이지만 물과 불을 함께 조화롭게 이용하는 데서 우리 생활의 기반이 서게 됩니다.

同生同死, 同苦同樂의 대진리를 하루빨리 깨달아서 모두가 침해의 무기를 버리고 우리의 모든 힘을 상호협조에 경주하여 서로 손을 맞잡고 서로 도우며 힘차게 전진하되 나를 가장 해치는 상대를 제일 먼저 도웁시다. 그러면 평화와 자유로 장엄한 이 낙원에 영원한 행복의 물결이 넘쳐 흐를 것입니다.

화창한 봄날 푸른 잔디에
황금빛 꽃사슴 낮잠을 자네

1984. 사월초파일
 
 
성철스님의 법문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 장삼을 빌려서 입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죄만 짓는가
云何賊人
假我衣服
裨販如來
造種種業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부처님의 의복인 가사 장삼을 빌려서 입고 승려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 아서 먹고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 사 장삼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서 자기의 생활도구로 먹고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오, 승려도 아니오. 전체가 다 도적놈이라고 능엄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함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이는 가봐야 하고 근처에는 가 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 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몸 받기는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人身難得
佛法難逢

다행히 사람 몸 받고 승려 되었으니 여기서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 제도는 못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1.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 참 불공

경經 중에서 부처님 말씀의 근본이며 가장 소중한 경은 화엄경과 법화경으로 이는 경 중에서도 왕이요. 불교의 표준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엄경이 법화경보다 진리 면에서 더 깊고 넓다 합니다. 화엄경도 이것이 팔십 권이나 되는데 어떻게 다 보겠습니까. 더구나 모두가 어려운 한문인데 말입니다. 다행히도 화엄경을 요약한 경이 또 한 권 있습니다. 「보현보살행원품」인데 「약略 화엄경」이라고도 합니다. 보현 보살행원품에 불교의 근본 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불교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가 모두 규정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불공하는 데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보현보살십대원十大願의 광수공양廣修供養편입니다. 물론 다 알겠지만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심을 내어 온 천하의 좋은 물건을 허공계에 가득 차도록 다 모으고, 또 여러 초 등을 켜되 그 촛불 심지는 수미산 같고 기름은 큰 바닷물같이 하여 두고서 수많은 미진수 불 佛에게 한없이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공 중에서 가장 큰 불공으로 그 공덕도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법공양法供養이란 것이 있습니다. 일곱가지의 법공양 중에서도 중생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 그 골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물자를 당신 앞에 갖다 놓고 예불하고 공을 드리고 하는 것보다도 잠시라도 중생을 도와주고 중생에게 이익 되게 하는 것이 몇 천만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낫다고 단 정하셨습니다.

비유하자면, 장사를 할 때 밑천을 많이 들여서 이익이 적은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밑천을 적 게 들여 이익 많은 장사를 할 것이냐 하면 누구든지 이익이 많은 장사를 하려 할 것입니다.

많은 물자를 올려놓고 불공을 드리려면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익중생공양利益衆生供養, 곧 중생을 잠깐 동안이나마 도와주는 것은 큰 힘이 들지 않으므로 밑천이 적게 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의 이익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비용 많이 들여서 하는 그 불공과 중생을 잠깐 도와주는 그 불공을 서로 비교할 것 같으면,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억만분의 일로도 비유할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누구든지 나에게 돈 갖다 놓고 명과 복을 빌려 하지 말고 너희가 참으로 나를 믿고 따른다면 내 가르침을 실천하라"하셨습니다. 중생을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행원품의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또 "길가에 병들어 거의 죽어 가는 강아지가 배가 고파 울어댈 때 식은 밥 한 덩어리를 그 강아지에게 주는 것이 부처님께 만 반진수를 차려 놓고 무수, 수천만번 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이 크다"고도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를 행해 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불공은 남 모르게 하라

나는 요즘 학생들에게 불공하라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은 "우리도 용돈을 타 쓰는 형편인데, 어떻게 불공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공은 반드시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정신으로, 또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모두 불공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면 하면 불공할 것이 세상에 꽉 차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하여야만 마침내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련대회 때 삼천배하고 백련암에 올라와 화두 가르쳐 달라고 하면, "자, 모두 화두 배우기 전에 불공하는 방법 배워 불공부터 시작한 뒤 화두 배우자"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모 두 눈이 둥그래집니다. 우리는 돈도 없는데 부처님 앞에 돈 놓고 절하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그런데 뒤에 그 내용을 듣고 나서는 "모두 불공합시다"하면, 힘차게 "네"하고 대답하는데, 진정으로 그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가지만은 특별히 주의를 시킵니다.
바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자랑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애써 불공하여 남을 도와주고 나서 그것을 자랑하면 자신이 쌓은 불공을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선전을 하기 위해 불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불공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을 할 재료를 만드는 것일 따름입니다. 입으로 부수어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남 모르게 남 돕자는 그 말씀을 평생 지키고 노력하겠습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육이오 사변 이후 마산 근처 성주사라는 절에서 서너 달 머물 때입니 다. 처음 가서 보니 법당 위에 큰 간판이 붙었는데 「법당 중창 시주 윤OO」라고 굉장히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마산에서 한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인데 신심이 있어 법당을 모 두 중수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언제 여기 오느냐?"하고 물으니 "스님께서 오신 줄 알면 내일이라도 곧 올 겁니다"하였다.

그 이튿날 과연 그 분이 인사하러 왔노라기에,
"소문 들으니 당신 신심이 깊다고 다 칭찬하던데, 나도 처음 오자마자 법당 위를 보니 그 표가 얹혀 있어서 당신 신심 있는 것은 증명되었지."
처음에는 칭찬을 많이 하니까 퍽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간판 붙이는 위치가 잘못된 것 같아. 간판이란, 남들 많이 보기 위한 것인데 이 산중에 붙여두어야 몇 사람이나 와서 보겠어? 그러니 저걸 떼어서 마산역앞 광장에 갖다 세우자고. 내일이라도 옮겨 보자고."
"아이구, 스님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겠어? 당신이 참으로 신심에서 돈 낸 것인가? 저 간판 얻으려 돈 낸 것이지." 이 일화는 사실입니다.
"잘못 되었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고? 몰라서 그런 것이야 허물 있나? 고치면 되지. 그러면 이왕 잘못된 것을 어 찌 하려는가? "
그랬더니 자기 손으로 그 간판을 떼어 내려서 탕탕 부수어 부엌 아궁이에 넣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남 모르게 도운다는 이 불공을 비밀히 시작한 지가 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또 단체로, 의무적으로 시켰습니다. 만약 내가 시키는 대로 불공할 수 없는 사람은 내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불공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예를 들었더니 어떤 학생이 이렇게 질문해 왔습니다.
"스님은 불공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우리만 불공하라고 하십니까?"
"나도 지금 불공하고 있지 않은가. 불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이것도 불공 아닌가."

불공하던 예를 또 하나 들겠습니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 변두리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 때보다는 나아졌지만, 어떤 분이 그런 동네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고 싶은데 어떤 방법으로 하면 소문도 나지 않고 실천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먼저 두어 사람이 그 동네에 가서 배고픈 사람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하고 명단을 만든 뒤, 또 다른 몇 사람이 그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쌀집에서 쌀을 사서 쌀표를 만들어. 쌀 지고 다니면 소문만 금방 나 버리니 한 말이든 두 말이든 표시한 쌀표만 가져가면 바로 쌀을 주도록 준비해두 지. 또 다른 사람이 명단을 가져가서 그 쌀표를 나누어주면 사람이 자꾸 바뀌니 어떤 사람이 쌀 을 나누어주는지 모르게 되지. 또 누가 물어도 '우리는 심부름하는 사람이다'고만 답변하는 거 야."

처음에는 쌀표를 주며 쌀집에 가보라 하니, 잘 믿지 않더니 쌀집이 별로 멀지 않으니 한 번 가 보기나 하라고 자꾸 권했더니, 가서 쌀을 받아오더라는 겁니다. 그 뒤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하는 말이 "요새 우리 동네에 이상한 일이 생겼어. 어디서 온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이 쌀표를 주어서 곤란을 면했는데, 누군지 알 수가 없어. 아마 그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왔겠지?" 하더랍니다.

또 마산의 어느 신도가 추석이 되어 쌀을 트럭에 싣고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신문에서 그걸 알고 그 사람을 찾아내어 대서 특필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왔기에 "신문에 낼 자료 장만했지? 다시는 오지 말라" 고 했더니 아무리 숨어도 신문에 발목이 잡혔다고 해명하였습니다.

"글세, 아무리 기자가 와서 캐물어도 발목 잡히지 않게 불공해야지. 불공은 남 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느 동네에 부자 노인이 불공을 잘하므로 이웃 청년이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참 거룩하십니다. 재산 많은 것도 복인데, 그토록 남을 잘 도와주시니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 고약한 놈! 내가 언제 남을 도왔어? 남을 돕는 것은 귀울림과 같은 거야. 자기 귀우는 것을 남이 알 수 있어? 네가 알았는데 좋은 일은 무슨 좋은 일인가? 그런 소리 하려거든 다시는 오지 말어."

이것이 실지로 불공하는 정신입니다.
남 돕기로 어렵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남 돕기는 쉬운데 소문 내지 않기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예를 들어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보다 여자는 본디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며 입이 조금 가볍습니다. 그래서 자랑은 여자들이 더 많이 합니다. 왜 여자를 약하고 모자란다로 하느냐고 반문도 받습니다.
"힘 따라 짐을 져야 합니다. 키 따라 옷을 해 입혀야지요. 키 큰 사람은 옷을 크게 입히고, 키 작은 사람은 옷을 짧게 입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등입니다. 약한 걸 말해서 힘을 내도록 해야지 됴. 그래서 여자는 자랑하지 않게 더 주의해야 합니다."

이제 예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미국의 보이스라는 사람이 영국의 런던에 가서 어느 집을 찾는데 안개가 심해 도저히 찾을 수 가 없어서 이곳 저곳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열두어살 되어 보이는 소년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선생님, 누굴 찾으십니까?"
"어느 집을 찾는데 못 찾고 있다."
"저는 이 동네에 사는데 혹시 제가 아는지 주소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신사가 주소를 보여주니
"이 집은 마침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어린이가 인도하여 안내해 준 집에 도착하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하도 고마워 서 사례금을 주었더니 그 소년은 사양하고 결코 받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소년단원 회원인데 우리 회원은 한 가지씩 남을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 드리겠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소년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신사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와 보니 어린이도 남을 돕는 정신이 가득하여 돈도 받지 않고,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남을 도우면서 오히려 일과를 할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하니 이런 정신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에서도 소년단을 시작하였습니다. 온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 정신은 뻗어 나가 우리 나라에서도 보이스카웃, 소년단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 소년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찾지 못하고, 소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이름 모를 소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그 마을에 큰 들소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 에 이렇게 새겼습니다.
"날마다 꼭 착한 일을 함으로써 소년단이라는 것을 미국에 알려 준 이름 모르는 소년에게 이 동상을 바치노라."


3. 일체 중생이 불공의 대상
간디 자서전을 보면, 영국에 유학 가서 예수교를 배웠는데 예수교에서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 뒤 불교에서는 진리에 눈을 떠서 일체 생명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남의 종교를 말하는 것은 안 되었지만, 비유하자면 예수교는 접시물 이라면 불교는 바다와 같다 하였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사람만이 상대가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그 상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미물이고 할 것 없이 일체중생이 모두 다 불공대상입니다.

일체 중생을 돕는 것이 불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또 궁행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놈 소리를 좀 면할지 모르겠습니다.

육이오 사변 전 문경 봉암사에 있을 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향곡스님 청으로 부산사람들 앞에서 법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불공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공이란 남을 도와주는 것이지 절에서 목탁 두드리는 것이 아니며, 결국 절이란 불공 가르치는 곳이라고. 불공은 밖에 나가서 해야 하며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라고. 그리고 행원품 이야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법문을 바치고 봉암사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뒤에 부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 때도 각 도마다 종무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경남 종무원에서 긴급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절에서 하는 것은 불공이 아니고, 절은 불 공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 하고,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이라 했으니 결국 이것은 절에 돈 갖다 주지 말라는 말인데, 그러면 우리 중들은 모두 굶어 죽으라는 소리냐. 그 말을 한 중을 어디로 쫓아버려야 한다고 야단들이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소리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니 서울에서도 누가 내려왔습니다. 서울의 총무원에서 똑같은 내용의 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 당신들 뜻대로 하자면 부처님께서 영험하고 도력 있으니 누구든지 돈 많이 갖다 놓으면 갖다 놓을수록 복 많이 온다고, 절에 돈벌이 많이 되는 말만 해서 자꾸 절 선전할까? 언제 죽어도 죽는건 꼭 같애. 부처님 말씀 전하다 설사 맞아 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원통할 까? 그건 영광이지! 천하의 어떤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전한 것뿐, 딴소리는 할 수 없으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당신이나 잘 하시오!"

우리 대중 가운데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까?
"방장스님은 법문해 달라 했더니 결국 우리 먹고살지도 못하게 만드는 구나. 절에 불공 안 하 면 우리는 뭘 먹고살란 말인가?"
걱정 좀 되지요?
나도 걱정이 조금 됩니다.

물론 우리 해인사 대중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런 생각할 사람이 있겠습니다. 내가 항상 하 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를 믿든지, 예수교를 믿든지 자기의 신념대로 하는데, 예수교를 믿으려면 예수를 믿어야지 신부나 목사 같은 사람을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지 승려를 따라가서는 아니됩니다. 그것은 천당도 극락도 아닌 지옥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서 소개하는 것인지, 내 말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달을 가리키면 저 달을 보아야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의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공 대상입니다. 이것이 불공 방향입니다.

4.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내가 생각할 때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 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명과 복을 빌어주 는 이것이 불공이 아니며, 남을 도와주는 것만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불교에도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남의 종교와 비교,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를 비교해 봅시다. 진리적으로 볼 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 것도 아니고, 불교 측에서 보면 예수교가 별 것 아닐 것입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도 "예수교와 불교가 서로 싸운다 하면 예수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보면 그러하지만 실천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참으로 종교인다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불교인은 예수교인 못 따라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인데, 참으로 자비심으로 승려 노릇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남 돕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승려 가 봉사 정신이 가장 약할 것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진실로 봉사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갈멜 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월 초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 각층이 들어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제비를 뽑으면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자나깨나 양로원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되면 내내 고아원만을, '교도소'면 교도소 사람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 합니다. 조금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먹고사는 것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양계와 과자를 만들어 내다 팔아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먹고사는 것은 자기들 노력으로 처리하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서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어찌 하는가?
불교에서도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스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승은 남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러한데 실천을 그렇지 않습니다. 저 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교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 기준을 남을 돕는 데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백련암에 찾아온 한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절을 했느냐?"
"스님, 저는 저를 위해 절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절했습니다." "왜 빙빙 돌기만 하느냐?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직접 일체 중생 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절해야지.

이것은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오'하는 거와는 다르지."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하지 말고, 절하는 것부터가 남을 위해 절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 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내게 항상 다니는 사람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백팔배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면 날마다 아침에 백팔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도 새벽으로 꼭 백팔배를 합니다.
그 목적은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발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발심 하여 예배 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남을 구함이 아니오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我今發心 不爲自求 人天福報
願與法界衆生 一時同得 阿욕多羅三 三菩提

그리고 끝에 가서는,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
廻向衆生及佛道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했으니 기도한 공덕이 많습니다. 이것이 모두 일체 중생에게 가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원합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없는 진법계에 회향하오며
願將以此勝功德
廻向無上眞法界
그래도 혹 남은 것. 빠진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온갖 것이 무상진법계로,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온 참회법 입니다. 중국도 중 공 적화 이전에는 총림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 해 온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서,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을 근본자세이며, 사명이며 분분 입니다.

우주의 근본 윈리인 인과법칙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내가 배가 고픈데 자꾸 남의 입에만 밥 떠 넣으라니 나는 굶으라는 말인가?"
인과법칙이란 불교뿐만 아니라 우주의 근본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병이 났다든지, 생활이 가난하여 어렵다든지 하는 것이 악한 과보입니다.
선인선과라, 이번에는 착한 일을 자꾸 행합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돕고, 남을 위해 자꾸 기도하면, 결국에는 그 선과가 자기에게로 모두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기도가 되며 남을 해치면 결국 나를 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또 다시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법칙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입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보게 되고, 농사를 짓는 이치도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곡식을 돌보지 않으면 자기부터 배고플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고파 굶어 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같이 불공을 잘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 문 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苦 받는 중생들 모습이 하도 고통스럽게 보여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그 모습을 보면 "아이고,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렇게 될텐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이런 생각이 들텐데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을 고를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줄 수 없을까? 편하게 해줄 수 없을까?'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하고 보니 지옥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그 순간 천상에 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착한 생각을 내면 자기부터 먼저 천상에 가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 스님들은 산중에 살면서 이런 활동에는 많이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오직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 말씀에 따르는 불공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예불하면서 꼭 한 가지 축원을 합니다. 간단합니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세 번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해 보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좋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절을 한 번 하든, 두 번 하든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 중생 을 위해 돕는 사람, 일체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앞머리에서 말한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 속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서로 힘써 불공을 잘해서 도적놈 속에 들 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1981년 3월 1일 주간한국 845호 게재


참선하는 법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一切唯心〕라고 말합니다.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는 말입니다. 또한 卽心卽佛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 만치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봐야 할 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 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心'자 한 자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心자 한 자 위에 서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 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三世諸佛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自初至終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자기의 본성, 즉 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見性 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불교에 관심이 있고 참선 좀 한다는 사람은 참선 시작한 지 한 사 나흘도 안되어 모두 견성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곳에도 견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견성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大乘起信論에 보면,

보살지가 다하여
멀리 미세망상을 떠나면
마음의 성품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을 구경각이라 한다.
菩薩地盡
遠離徵細
得見心性
名究竟覺

보살이 수행을 하여서 마침내 十地와 等覺을 넘어서서 가장 미세한 망상인 제8阿賴耶識의 根本無明까지 완전히 다 떨어져버리면 眞如가 나타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견 성이고 구경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妙覺이라고도 합니다.

또 涅槃經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상정각을 이루면
부처님 성품을 볼 수 있고,
부처님 성품을 보면
무상정각을 이룬다.
成無上正覺
得見佛性
得見佛性
成無上正覺

위없는 바른 깨달음, 즉 성불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보는 것이고, 불성을 보는 견성이 바로 바른 깨달음인 성불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구경각이 견 성'이라는 것과 내용이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열반경에서는 더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의 지위가 십지가 되어도
불성은 아직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菩薩地盡十地
尙未明了知見佛性

결국 보살의 수행단계가 十地가 되어도 견성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불해야만 견성 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견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喩伽師地論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경지보살은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究竟地菩薩
如微闇中見物

어두운 곳에서는 물건의 바른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십지나 등각위의 구경지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국 일체만법의 본 모습인 자성을 보려면,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듯 하는 수행단계를 지나서 밝은 햇빛 속으로 쑥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즉 구경각을 성취해서 성불하는 것이 바로 견성인 것입니다.

그럼 禪宗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선종의 스님들 중에서도 운문종의 宗祖인 雲門스님께 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십지보살이
설법은 구름일고 비오듯하여도
견성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과 같다.
十地菩薩
說法如雲如雨
見性如隔羅穀

십지보살은 法雲地보살이라 하여 법문을 할 때는 온 천지에 구름이 덮이고 비가 쏟아지듯 그렇게 법문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견성 즉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 린 것 같다는 말이니, 비단으로 눈을 가렸는데 어떻게 물체를 바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이 대승불교의 總論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서는 보살지가 다 끝난 구경각 을 견성이라 했고, 부처님 최후의 법문인 열반경에서는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 인데 십지보살도 견성 못했다고 하였고, 唯識宗의 所依經典인 유가사지론에서는 불성을 보 는 것은 구경지보살도 어두운 가운데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하였고, 宗門의 조사인 운문 스님은 십지보살도 견성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禪과 敎를 통해서 어느 점에서 보든 지간에 견성이 바로 성불이며, 그것은 보살수행의 십지와 등각을 넘어서 구경각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지는 고사하고 三賢도 아닌 단계, 비유하자면 층층대의 맨 꼭대기가 견성인데 그 첫째 계단에도 올라가지 못하고서 견성했다고, 道通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견성해서 다시 성불한다고 하니 대체 그 견성은 어떤 것인지 이것이 요새 불교 믿는 사람의 큰 病痛입니 다.
그렇다면 이 병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면 普照스님이 지은 修心訣에서 비롯됩니다. 거기 에 頓悟漸修라 하여 자성을 깨치는 것을 돈오라 하고, 돈오한 후에 오래 익힌 習氣를 없애 는 漸修를 닦아야 한다고 하였고, 그 돈오한 위치가 보살의 수행 次第의 十信初에 들어간다 고 하였습니다.
보조스님은 중국의 圭峯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돈오 점수를 주장했습니다만, 규봉스님 은 십신초인 보살지를 돈오 즉 견성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또 그가 주장한 깨침이란 것은 단지 교학상의 이론을 아는 解悟를 말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돈오를 견성이라 하면서 그 지위가 十信初라고 節要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려시대의 큰 스님인 보조스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잘못 되었겠느냐'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經이나 論에서는 분명히 삼현 십지를 넘어선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을 견성이라 하고 있으니, 결국 보조스님의 수심결이 기신론보다 낫고, 열반경보다 낫고 유가사지론보다 낫다는 말인가? 또 종문의 대표적 스님인 운문스님보다 낫다는 말인 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보조스님이 수심결에서 말씀하신 것, 十地初에서의 돈오가 견성 이라는 그 사상은 근본적으로 시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지보살이나 구경각이니 하는 그 깨달음의 경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 을 표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데 대해서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宗門에 분명한 표준이 있습니다.
화엄경 十地品에 보면
보살지가 7지(地)가 되면 꿈속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여여하다.

참선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을 때에도 아무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한결 같으면 7지보살이라고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7지의 보살이 설사 꿈에는 공부가 一如 하더라 해도 깊은 잠에 들면 캄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잠이 깊이 들어도 일여한 경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잠을 자는 것 같지만
실지는 잠을 자지 않는다.
外似現睡
實無睡也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어도 정신 상태는 항상 밝아 있어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밝아 있는 정신 상태가 올 것 같으면 8지 보살 이상 즉 自在位라 합니다. 그런데 자재위에는 두 종류가 있어서 깊은 잠 즉, 숙면에서 일여하여도 아리야식의 미세한 망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8지 이상의 자재 보살이고, 그 미세망상까지 완전히 다 끊어져 없어져 버리면 그 때에는 眞如가 드러나고 그것이 견성이고 부처님입니다. 그때는 如來位라 합니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공부하는 단계를 보면, 첫째 動靜一如 즉 일상 생활에서 가고 오고 할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을 하거나 안 하거나 변함없이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如如不變하 여야 합니다.

동정일여가 되어도 잠이 들어 꿈을 꾸면 공부는 없어지고 꿈속에서 딴 짓하며 놀고 있는 데, 꿈에서도 일여한 것을 夢中一如라 합니다.

몽중일여가 되어도 앞에서 말했듯이 잠이 깊이 들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잠이 꽉 들었을 때에도 여여한 것을 熟眠一如라 합니다.

숙면일여가 되어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百千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 말입니다. 그리하여 깨쳐야만 그것이 실제 견성입니다.

그런데 참선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숙면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도 고사하고 더구나 동정일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견성했다, 깨쳤다고 인정해 달라고 나한테 온 사람만도 수 백명은 보았습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무엇인가가 정신을 확 덮어버립니다. 그 때에는 자기가 깨친 것 같고 자기가 부처님보다 나은 것 같고, 조사스님보다 나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들어놓으면 누구 말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래도 여러 가지로 설명해 주면 어떤 사람은 잘못된 줄 알고 다시 공부하고, 또 어떤 사람 은 이 병을 한동안 앓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젊은 스님 한 사람이 불교를 믿고 참선을 한다는 處士들 모임에 갔더라고 합니다. 약 백 여명 모인 처사들 중에서 90명은 견성 했더라는 것입니다.
'이럴 것이 아니라 해인사 큰스님께 가서 한번 물어보시오'
'뭐, 큰스님이니 작은 스님이니 물어볼 것 있습니까'

큰스님, 작은 스님이 소용없다니, 그렇게 되면 부처님도 소용없습니다. 이리되면 곤란합니다. 좀 오래 전의 일입니다. 70세 남짓 된 노인이 한사람 찾아왔습니다. 그 때에도 3천배 절 하고서 내 방에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안 오려 했는데 옆의 사람들이 하도 가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70이나 되면서 옆의 사람이 가보라 한다고 쫓아와, 이 늙은이야, 자기 오기 싫으 면 안 오면 그만이지 대체 무슨 일로 옆에서는 그렇게 권했오?'

'내가 40여년을 참선을 하는데 벌써 20년 전에 확철히 깨쳤습니다. 그 후 여러 스님들을 찾아다니면서 물어 봐도 별 수 없어 이젠 찾아다니지도 않는데, 그런데 '성철스님께 가 보 라'고 하도 이야기해서 할 수 없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 어쨌든 잘 왔오. 들어보니 노인은 참 좋은 보물을 갖고 있소. 잠깐 앉아 있는데 모 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몇 시간도 금방 지나가 버리니 그런 좋은 보물이 또 어디 있겠오. 내가 한 가지 물어 보겠는데 딱 양심대로 말하시오.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그 보물이 꿈에도 있습니까?'
'(눈이 둥그래지며) 꿈에는 없습니다.'
'뭐, 꿈에는 없다고? 이 늙은놈아! 꿈에도 안되는 그걸 가지고 공부라고 善知識이 있니 없니 하고 있어? 이런 놈은 죽어야 돼. 하루에 만 명을 때려 죽여도 괜찮아, 인과도 없어.'
그리고는 실제 주장자로 두들겨 패주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맞고 있더만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더니 자기 공부가 틀린 줄 알고서 다시 새로 공부를 배우겠다는 것 입니다. 지금도 그 영감이 살아 있습니다. 80세가 넘었는데도.
이런 병폐가 실제 많이 있습니다. 꿈에도 안 되는 이것을 가지고 자기가 천하 제일인 듯 이 하고 다닙니다. 여기 이 대중 가운데에도 나한테 직접 덤빈 사람도 몇 사람 있습니다. 요 새도 보면 그 병을 못 버리고 무슨 큰 보물단지나 되는 것처럼 걸머 쥔 사람도 있습니다. 이상으로 견성이라고 하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 떤 방법에 의하면 견성을 할 수 있는가?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灌法을 한다, 呪力을 한다, 經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우는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신도나 스님네들만 하는 것이 아니 고, 신부나 수녀도 백련암에 와서 3천배 절하고 화두 배워갑니다. 나한테서 화두 배우려면 누구든지 3천배 절 안 하면 안 가르쳐 주니까.

며칠 전에도 예수교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천배 절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 반대하고 예수 가장 많이 욕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고 절해라.'
이렇게 말하면 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 종교 안 믿는 사람은 모두 다 나쁜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면 그는 점잖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욕하고 나를 해치려하면 할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도우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에 앉게 하라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닦아야 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인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 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가톨릭 수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왜관에 있는데 그 수도원의 독일인 원장이 나한테서 화두를 배운지 1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도 종종 왔는데 화 두 공부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와서 화두를 배운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네들 천주교에서는 바이블 이외에는 무엇으로써 교리의 依支로 삼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의 神學大典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아퀴나스는 그 책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자기 마음 가운데 큰 변동이 일어나서 그 책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버렸는데, 처음에는 금덩어리 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썩 은 지푸라기인줄 알고 차버린 그 책에 매달리지 말고, 그토록 심경변화된 그 마음자리, 그것 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익히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도 화두를 배워서 실제로 참선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마음 닦는 근본 공부인 禪이란 것을 알아서 실천해 야 합니다.
그런데 話頭를 말하자면 또 문제가 따릅니다. 화두를 가르쳐 주면서 물어봅니다. 어떤 사람은 화두가 뭣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배우라고 해서 배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은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고는 뭐라 고 뭐라고 아는 체를 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화두 즉 公案이라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을 떠서 확철히 깨쳐야 알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여 비록 몽중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이고 또 숙면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인데, 그런데 망상이 죽끓듯이 끓고 있는데 에서 어떻게 화두를 안다고 하는지, 이것이 조 금 전에 말했듯이 큰 병입니다.

그럼, 어째서 화두를 안다고 하는가? 껍데기만 보고 아는 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만 보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말밖에 뜻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예전 宗門의 스님네들은 暗號密令이라고 하였습니다. 암호라는 것이 본래 말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릅니다. 하늘 '天'할 때 '天'한다고 그냥 '하늘'인 줄 알다가는 그 암호 뜻은 영원히 모르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안은 모두 다 암호밀령입니다. 겉으로 말하는 그것이 속내용이 아닙니다. 속내용은 따로 암호로 되어 있어서 숙면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큰 병통을 가진 이는 일본 사람들입니다.

일본 駒澤大學에서 '禪學大辭典'이라는 책을 약 30여년 걸려서 만들었다고 하기에 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니 중요한 공안은 전부 해설해 놓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 참선할 필요없습니다. 공안이 전부 해설 다 되어 있으니까 내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가장 나쁜 책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선학대사전이야. 화두를 해설하는 법이 어디있어.'

그런데 구택대학은 曹洞宗 계통인데 조동종의 宗祖되는 洞山良价화상이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스님의 불법과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를 위해 설파해 주지 않았음을 귀히 여긴다.
不重先師佛法道德
只貴不爲我說破

화두의 생명이란 설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또 설명될 수도 없고, 설명하면 하는 사람이 나 듣는 사람이나 다 죽어버립니다. 봉사에게 아무리 丹靑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습니다. 자기가 눈을 떠서 실제로 보게 해 줄 따름입니다.

이처럼 조동종의 개조되는 동산양개화상은 화두란 설명하면 다 죽는다고, 설명은 절대 안 한다고 평생 그렇게 말했는데 후세에 그 종파의 승려들은 떼를 지어서 수 십년을 연구하여 화두를 설명한 책을 내놓았으니, 이것은 자기네 조동종이나 선종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조 동종 양개화상에 대해서도 반역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동종은 宗名을 바꾸어야 될 것입니다. 反逆宗이라고.

일본에 이런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일본 불교학자로 세계적 권위자인 中村元이라는 학자가 있는데, 언젠가 해인사에도 왔더라고 전해만 들었습니다. 그의 저서로 「東洋人의 思惟方法」이라는 책이 있는데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번역되었습니다. 그 책 속에 보면 선종의 화두인 '삼서근'(麻三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부처님이냐고 물었는데 대해서 어째서 '삼서근'(麻三斤)이라고 대답했느냐 하면 자연현상은 모든 것이 절대이어서 부처님도 절대이고, 삼서근도 절대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물었는데 대해 삼서근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딱 잘라서 단안을 해버렸습니다. 큰일 아닙니까. 혼자만 망하든지 말든지 하지 온 불교를 망치려고 하니.

그러나 그의 스승인 宇井伯壽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禪에 대해서는 門外漢이다' 이렇게 아주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학자적인 양심입니다. 자기는 안 깨쳤으니까, 자기는 文字僧이니까 선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만 기록했지 선 법문, 禪理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도 하지 않고 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학자의 참 양심입니다. 그런데 中村元은 화두에 대 해 딱 단안을 내리고 있으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화두를 설명하려 고 하면 불교는 영원히 망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화두의 하나인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에 대해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선종에서 유명한 책인 碧巖錄에 頌을 붙인 운문종의 설두 스님이 공부하러 다닐 때 어느 절에서 한 道伴과 정전백수자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문득 보니 심부름하는 行者가 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간 후에 불렀습니다.
'이놈아, 스님네들 법담 하는데 왜 웃어?'
'허허, 눈멀었습니다. 정전백수자는 그런 것이 아니니,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흰토끼가 몸을 비켜 옛 길을 가니
눈 푸른 매가 언 듯 보고 토끼를 낚아가네
뒤쫓아온 사냥개는 이것을 모르고
공연히 나무만 안고 빙빙 도는도다.
白 橫身當古路
蒼鷹一見便生擒
後來獵犬無靈性
空向古椿下處尋

뜰앞의 '잣나무'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지 잣나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 눈 뜬 매는 토끼를 잡아가 버리고 멍텅구리 개는 '잣나무'라고 하니 나무만 안 고 빙빙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전백수자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는 것이니 나무 밑에 가서 천년 만년 돌아봐야 그 뜻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금 전에 말했듯이 '화두는 암호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생각나는 대로 이리저리 해석할 수 없는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두에 대해 또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佛鑑懃선사라는 스님의 법문입니다.

오색비단 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彩雲影裏神仙現
手把紅羅扇遮面
急須著眼看仙人
莫看仙人手中扇

생각해 보십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었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가리는 부채를 봤다고 신선 봤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화두에 있어서는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수자'니 '삼서근'이니 '조주무자(趙州無子)'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 본 사람이 아닙니다.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 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화두는 암호인데 이 암호 내용은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느냐 하면 잠이 꽉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데에서 깨쳐야만 풀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못 푼다는 것, 이 근 본자세가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견성인 것입니다. 동시 에 '뜰앞의 잣나무'라는 뜻도 알 수 잇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날 스님들은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가?


임제종 중흥조로서, 五祖法演禪師, 悟克勤禪師, 大慧宗 禪師 이렇게 세 분이 삼대에서 임제종을 크게 진흥시켜 임제종이 천하에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대혜스님이 공부한 것은 좋은 참고가 됩니다.

대혜스님이 공부하다가 스무 살 남짓 됐을 때 깨쳤습니다. '한소식'해 놓고 보니 석가보다 낫고, 달마보다도 나아 천하에 자기가 제일인 것 같았습니다. '어디 한번 나서 보자. 어디 누 가 있는가.'하고 큰스님들을 찾아가 보니 모두 별 것 아닙니다. 자기가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가 제일이라고 쫓아다니는 판입니다. 당시 임제종 黃龍派에 湛堂無準선사가 계셨습니다. 대혜스님이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병의 물을 쏟듯, 폭포수가 쏟아지듯 아는 체 하는 말을 막 쏟아 부었습니다. 담당스님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네 좋은 것 얻었네. 그런데 그 좋은 보물 잠들어서도 있던 가?'하고 물어왔습니다.

자신만만하여 橫行天下하여 석가보다도, 달마보다도 낫다하던 그 공부가 잠들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스님, 다른 것은 전부 다 자신 있습니다. 그런데 잠들어서는 그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잠들어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석가, 달마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것은 병이야 병, 고 쳐야 돼.'
이렇게 자기 병통을 꽉 찌르니 항복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죽자고 공부하다가 나중에 무준선사가 병이 들어 죽은 후에는 그 유언을 따라 원오극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무슨 말을 걸어 보려고 하니 무슨 절벽같고 자기 공부는 거미줄 정도도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원오극근선사가 자기의 공부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기색이면 그를 땅 속에 파묻어 버리리라, 는 굳은 결심으로 찾아갔는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하, 내가 천하가 넓고 큰 사람있는 줄 몰랐구나.'

크게 참회하고
'스님, 제가 공연히 병을 가지고 공부인 줄 잘못 알고 우쭐했는데, 담당무준선사의 법문을 듣고 공부를 하는데 아무리해도 잠들면 공부가 안되니 어찌 해야 됩니까?' '이놈아, 쓸데없는 망상 하지 말고 공부 부지런히 해. 그 많은 망상 전체가 다 사라지고 난 뒤에, 그때 비로소 공부에 가까이 갈지 몰라.'

이렇게 꾸중듣고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원오스님 법문 도중에 확철히 깨달았습니다. 기록에 보면 '神悟'라 하였습니다. 신비롭게 깨쳤다는 말입니다. 그때 보니 오매일여입니다. 비로소 꿈에도 경계가 일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원오스님에게 갔습니다. 원오스님은 말조차 들어보지 않고 쫓아냅니다. 말을 하려고 하면 '아니야, 아니야 (不是 不是)' 말을 하기도 전에 不是 不是라고만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화두를 묻습니다.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有句無句 如藤倚樹」는 화두를 묻는 것입니 다. 자기가 생각할 때는 환하게 알 것 같아 대답을 했습니다.
'이놈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것 아니야. 공부 더 부지런히 해!'
대혜스님이 그 말을 믿고 不借身命, 생명을 다 바쳐 더욱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참으로 확철히 깨쳤습니다.

이렇듯 대혜스님은 원옹스님에게 와서야 잠들어도 공부가 되는 데까지 성취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확철히 깨쳤습니다.

잠이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경계에서 원오스님은
'애석하다. 죽기는 죽었는데 살아나지 못했구나(可借死了不得活)'

일체망상이 다 끊어지고 잠이 들어서도 공부가 여여한 그 때는 완전히 죽은 때입니다. 죽 기는 죽었는데 거기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아나느냐?


화두를 참구 안 하는
이것이 큰 병이다.
不疑言句
是爲大病
공부란 것이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거기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견성이 아니고 눈을 바로 뜬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만 그것이 바로 깨친 것이고, 화두를 바로 안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마음의 눈을 바로 뜬것입니다.

지금까지 중국의 스님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나라 선문 중에 太古스님이 계십니다.

태고스님이 공부를 하여 20여년만인 40여세에 오매일여가 되고 그 후 확철히 깨쳤습니다. 깨치고 보니 당시 고려의 큰스님네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印可해 줄 스님도 없고, 자기 공부를 알 스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임제종 맥을 바로 이어 가지고 돌아온 스님입니다. 태고스님 같은 분, 이 동쪽 변방에 나신 스님이 지만 그 분은 바로 깨치고,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스님은 항시 하시는 말씀이

점점 오매일여한 때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
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

이 한마디에 스님의 공부가 들어있습니다. 공부를 하여 오매일여한 경계, 잠이 아무리 들어도 일여하며 8지이상 보살경계, 거기에서도 화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몽중일여도 안된 거기에서 화두 다 알았다고 하고 내말 한번 들어 보라 하는데 이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다 죽어 가는 사람보고 아무리 좋은 약을 가지고 와서 '이 약만 먹으면 산다'하며 아무리 먹으라 해도 안 먹고 죽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먹여서 살려낼 재주 없습니다.


배가 고파 다 죽어 가는 사람보고 滿盤珍羞를 차려와서 '이것만 잡수시면 삽니다'해도 안 먹고 죽으니 부처님도 해 볼 재주 없습니다. 아난이 30여년을 부처님 모셨지만 아난이 자기 공부 안 하는 것은 부처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오늘 법문을 요약하면,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마음 心자 한자에 있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만법을 다 알 수 있는 것이고, 삼세제불을 다 볼 수 있는 것이고, 일체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바로 자성을 보는 것이고 견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든지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바로 떠 야 되는데 그 가장 빠른 길이 화두입니다.

이 화두란 것은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경계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거기에서 크게 깨쳐 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무슨 경계가 나서 크게 깨친 것 같아도 실제 동정에 일여 하지 못하고 몽중에 일여하지 못하고 숙면에 일여하지 못하면 화두를 바로 안 것도 아니고 견성도 아니고 마음의 눈을 뜬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근본표준이 어디 있느냐 하면 잠들어서도 일여 하느냐 않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부지런히 화두를 하여 잠이 꽉 들어서도 크게 살아나고 크게 깨쳐서 화두 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를 가만 히 생각해서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니 실지로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생겨서 부처님 慧命을 바로 잇도록 노력합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가야산의 가을은 조락하는 잎새처럼 저물어가고 떨어진 잎새들은 가을비에 젖어 더욱 춥다.
계절은 엄정한 우주의 질서 속에서 순환하고 잎새들은 계절을 따라 떨어질 뿐인데 저 길 섶에 나뒹구는 젖은 낙엽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은 왜 이렇게도 춥고 서글퍼지는 것일 까?
"법성은 원융해서 두 모습이 없고(法性圓融無二相), 모든 법은 움직임이 없어서 본래부터 고요하다(諸法不動本來寂)"고 의상대사는 노래했거늘 어찌 감히 있고 옴이 있으며 떨어지고 서글퍼짐이 있겠는가!

그러나 진여(眞如)의 세계는 불변(不變)하는 성품도 있지만 수연(隨緣)하는 성품도 있으니, 가고 옴이 없는 가운데 가고 옴이 있고, 나고 죽음이 없는 가운데에 또한 나고 죽음이 있는 이 오묘하고 현현한 이법(理法).
이 대자연의 크나큰 이법을 큰스님은 몸소 시현하시고 이제 적멸도량에 드셨으니 스님의 평소 말씀처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다.

큰스님의 출생과 출가

큰스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82년 전인 서기 1912년 임자년 4월 10일에 경남 산청군 단성 면 묵곡리의 합천 이씨 가문에서 탄생하였다. 부친의 이름은 이상언이고 모친은 진주 강씨 였으며 아명은 영주(英柱)라 하였다.
스님의 집안은 대대로 부농이었다. 비록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한 이후라 시절인연이 암울했다고는 하지만 스님은 어린 시절을 비교적 유족 하게 보낼 수 있었으며, 장남으로서 부모님은 물론이요 집안의 기대와 귀염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났다.
게다가 스님은 천성이 명민하고 상호가 수특(秀特)하여 더욱 총애를 받으셨다. 3세에 글자를 알고 읽기 시작했고, 5세에는 김시습처럼 글을 짓고 시를 지을 만큼 자질이 뛰어났으며, 이미 열살 무렵에 사서삼경 등 유서를 읽고 모든 경서를 독파하였으니 인근에서는 신동이 났다 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는가 하면 더 가르칠 선생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청소년기에 이르자 그 명민한 두뇌는 더 이상 고리타분하고 낡은 세계에 머물지 않고 좀 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당시 물밀 듯이 들어오던 신학문과 철학과 종교 등 여러 학문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열정을 가지고 독서와 관심을 쏟았으나 그 모두가 참다운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 님을 자각하고 그중 「장자」를 읽고 소요유(逍遙遊)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지나가던 노승으로부터 영가(永嘉)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받아 읽고 이제까지 찾아 헤매던 구도의 길이 거기에 있음을 발견하니, 홀연히 심안이 밝아짐 을 느껴 거듭 읽고 그 깊은 뜻을 밝히게 되었다. 그 한 권의 책이 불교의 전적을 대하게 되 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후 스님은 책만 읽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참 구도의 길은 수행정진에 있음을 알고 거사 (居士)의 몸으로 양식을 짊어지고 덕산 대원사 탑전에 들어가 불철주야 용맹정진을 하였고, 그후 제방선원에서 안거하는 등 그 수도 정진의 구도열이 이미 승려 이상의 진척을 보였다. 이에 주위의 많은 스님들이 출가를 권고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스스로 출가를 결심하고 모 든 세속적인 인연을 끊고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출가시(出家詩)를 짓고 승문(僧門)에 들었다.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彌天大業紅爐雪
跨海雄基赫日露
誰人甘死片時夢
超然獨步萬古眞

行雲流水 그리고 용맹정진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해인사에서 수계 득도하였다. 이로부터 10년간 천하제방(諸方)선원에 안거하면서 용맹정진을 단행하였는데, 음식은 언제나 생식(生食)과 현미밥과 담식(淡食)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의복은 24세에 만든 누더기를 일 생 깁고 또 기워 입으셨다.

금강산의 마하연선원, 수덕사의 정혜선원, 천성산의 내원선원, 통도사 백련선원 등 모든 선원에서 안거를 할 때마다 스님의 철저한 정진력에 누구나 감복하였고, 그밖에 고성 안정 토굴의 정진이나 파계사 성전암에서의 용맹정진은 승가 내에서 그 본보기가 되었다. 세속적 인 모든 것을 끊기 위해 토굴 주위에 가시철망을 쳤던 이야기며, 신도들이나 친지가 찾아와 수행을 방해할까봐 사람들이 오는 길목 쪽으로 돌을 굴렸다는 극단적인 이야기 등에서 스님 의 수행 정진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부단한 수행중, 29세가 되던 해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정진을 하던 때였다. 스님은 확연하게 일대사(一大事)인연을 了達하시고는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셨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黃河西流崑崙頂
日月無光大地沈
遽然一笑回首立
靑山依舊白雲中

오도를 하신 후에도 스님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수행자의 삶 그대로 견지하셨다. 스님의 삶의 태도는 너무나 엄격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나이 일흔이 되실 때까지도 손수 양말을 기워 신었으며 한 겨울이라도 땔감의 양을 결코 지나치게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으셨다. 평생을 바루 하나 옷 한벌의 전형적인 수도자의 삶을 보이셨다.
이러한 삶은 이미 봉암사 시절의 공주규약(共住規約)에 잘 나타나 있는데, 조선시대의 억 불정책과 일본 불교의 영향 아래 허물어진 한국 불교의 전통과 수행 가풍에 지대한 영향을 훗날 교단 정화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唯識등 불교 이론에 해박

현대 불교사에서 스님처럼 많은 책을 읽은 조계종 승려는 아마 없을 것이라고 일전에 법 정 스님이 회고하신 적이 있다.

지금도 백련암에 현존하는 스님의 개인 장서각에는 한국,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은 물론 영어, 불어, 독일어로 쓰인 수많은 불교 서적과 종교, 철학, 물리학, 심리학 등 방대한 양의 서적이 수집되어 있으니, 스님은 이 동서양의 고전과 방대한 자료를 오로지 독학으로 공부한 학승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특히 불교 내에서도 어렵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중도(中道)사상이나 유식(唯識)사상 등 소 위 불교권의 논리학이나 인식론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음은 물론이요, 이미 발간된「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의 목록에 오르내리는 방대한 양의 선어록과 전적에도 이미 달통해 있었다.
그 방대하고 체계적인 논리와 사고 위에, 10년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보통 사람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의 정진력,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항상 청중을 압도하는 설법, 그리고 법왕다운 면모와 집념, 청정한 율행(律行), 그야말로 스님은 이 시대의 부처님이요 성자와 다름없는 면모를 지니셨던 것이다.
중도적 근거로 설법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은 그 나름대로 설법을 할 때 형식과 내용에서 이른바 가풍을 가진 다. 특히 상단법문에 있어 그것은 전혀 논리가 없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논리를 뛰어넘는 정연한 이론적 조리와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특히 불교철학의 이론적 극점인 쌍차(雙遮) 쌍조(雙照)의 논리를 구사하면서 스님은 중도 적 논거를 원용(遠用)하여 고도의 논리적 바탕에서 항상 말씀하셨는데 이런 이론적 근거와 논리 바탕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스님의 법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도대체 무 슨 말인지 몰라 어렵다고 아우성이었다.

그 상단법문의 언어가 설사 일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지고 우리가 그 논리와 이론적 근거에 달통해 있다고 하더라도 상단법문의 언어는 말의 논리를 뛰어넘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흔히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수행자가 일생동안 뼈를 깎는 수행 정진과 죽음을 초극하고 얻어낸 언어의 영골(靈骨)인 법어가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쉽게 납득될 수 있겠는가.

스님의 생애 가운데 1940년대와 50년대, 60년대는 각각 봉암사 시절, 안정 토굴시절, 파계 사 성전암 시절, 김룡사 시절로 구분지어 이야기되는데, 그때 이미 이런 이론적 바탕, 수행 적 바탕의 일가를 이루고 계셨던 것이다.


수도 정진에만 전념

스님은 일생을 통하여 수도 정진만 했지 사무적이고 행정적인 이른바 절집의 사판(事判) 으로 나서본 적은 한번도 없다. 승려의 삶이란 철저한 수행 정진과 교화에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스님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스님은 1955년 정화(淨化)직후 해인사 주지직에 피선되었지만 주지직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파계사 성전암으로 들어가 더욱 수도정진에만 전념했다.

조계종단의 종정이 되고도 그 추대식에 참석하지 않거나 국정자문회의 자리에 한번도 나가지 않았던 사례를 통하여 그 위상에 넘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고 수행자는 다만 푸른 청산에 머물 뿐이라는 올곧은 생각으로 일관하신 스님의 삶을 알 수 있다.
자리를 다투는 조계종의 젯밥 싸움에 여론이 비등하던 풍토에 청산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스님의 자세, 그 의미는 실로 수도자의 참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준엄한 법문이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스님은 세수 54세이던 김룡사 시절부터 스님의 진면목인 법어와 교화의 모습을 점차 보이셨으니, 해인사 방장으로 시작되는 그 뒤의 시기는 스님에게는 중생 교화의 시기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겠다.

특이한 교화 방법

스님의 교화 방편은 특이해서 철저한 참선 수행과 삼천배로 일컬어지는 참회 정진, 화엄 경의 정화(精華)인「보현행원품」에 들어있는 보현행자의 삶을 신도 교화의 중심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한동한 백련암에 가면 그 외우기 어려운 능엄신주다라니 소리가 언제나 도량 에 찰랑찰랑 넘쳤다.

1968년에 필자는 가출 바람이 들어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느닷없이 출가하고 싶어 백련암으로 달려가 스님을 뵈었는데 번쩍이는 안광 때문에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 쩌렁쩌렁한 몇 마디 말씀에 압도되어 쫓겨났다. 그때가 해인사 방장으로 추대되어 온 지 얼마 안 된 시절이었다.

방장으로 오신 스님께서는 선원 수좌들에게 철저한 수도 정신과 용맹정진, 그리고 오계의 실천, 즉 잠을 많이 자지 말 것, 책을 보지 말 것, 간식을 먹지 말 것, 말을 하지 말 것, 돌아다니지 말 것을 강조하셨다. 또 신도들에게는 신심을 장양시키는 삼천배와 함께 1967년에 는 이른바 백일법문(百日法門)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과론(因果論)과 연기(緣起)사상에 기초한 윤회전생(輪廻轉生)의 법문을 설시(說示)하시니 일반 신도들에게 절대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 불교 법맥 밝혀

스님은 조계종의 종조(宗祖) 문제를 둘러싸고 일단의 의견을 피력하시기 위해「한국 불교 의 법맥」이라는 저술을 남기셨는데, 이는 조계종이 그 법맥으로 보나 선사상적 내용으로 보나 보조지눌(普照知訥)국사가 아니고 태고보우(太古普愚)스님의 법맥임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그 이론적 근거로 한동안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돈오돈수(頓悟頓修)사상을 천명하였다.

법맥의 문제는 불교의 정신과 자존심이 걸린 중대한 일로서 관련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스님은 깨달음의 내용적 문제까지를 극명하게 제기해서 돈오점수(頓悟漸修)사상, 즉 먼저 깨닫고 다시 그 깨달음에 의지하여 평생 동안 꾸준히 닦아야 한다는 보조국사의 말씀을 이 단사설(異端邪說)로 배격하면서, 그 것은 실참실구(實參實究)한 적이 없는, 참선이 무엇인지 도 모르는 화엄종 계통의 학자들이나 하는 소리라고 일축하시고 確徹大悟한 경지만을 인정 하셨다.

이러한 이론적 바탕을 밝히기 위하여 「선문정로(禪門正路)」를 저술했는데 그 이후「선림고경총서」속의 여러 어록들은 스님의 이러한 이론을 뒷받침 해주는 이론적 근거이다.


확철대오는 부처님 경험

「한국불교의 법맥」이란 저술은 단순히 한국불교의 宗祖와 범맥이 보조국사에서 太古선 사로 바뀌어야 한다는 역사적 사실의 근거에 의지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후에 큰스님께서 천명하고 전개할 돈오돈수사상의 전주곡에 불과했으니, 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돈오돈수와 확철대오만을 주창했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이란 말과 確徹大悟라는 말을 큰스님은 구분해서 깨달음이란 말이 보편 적 認識의 체험이라면 확철대오는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禪客들이 갖는 마지막의 궁극적인 체험을 일컫는 말로 구분 사용하였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말은 知解로 언제라도 후퇴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 알음알이여서 힘이 없는 것에 비해 확철대오는 전적인 체험으로 얻는 것이며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 치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한편 禪家에서 見性했느니 悟得했느니 하는 것은 모두 확철대오 했다는 말이지 결코 인식 정도의 깨달음이란 말이 아님을 구분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중생 의 경험이라면 확철대오는 부처님의 경험임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돈오점수라는 말은 知解從徒의 소행으로 분류했으며 오직 돈오돈수와 확철대오만이 活句참선 즉 看話禪의 본령임을 천명했다.
스님은 돈오돈수論을 전개할 때마다 특히 六祖 혜능의 법보단경과 임제대혜와 같은 中國禪의 大宗丈들의 어록을 인용하시고 한동안 大學강단에서 연구가 활발했던 보조사상인 돈도 점수에 일침을 가하였다.

특히 81년에「禪門正路」를 出刊하여 보조국사 이래 8백년간 점수사상에 물들어 있는 禪門의 병폐를 지적하고 7세기 中國의 화엄학자 淸凉澄觀이 그의 스승 혜원을 이단으로 몰면 서 "몹쓸 나무가 뜰 안에 돋아났으니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보조국사의 점수설 을 통렬히 비판했다.
언제나 스님의 소신은 眞理를 위해 출가한 출가자는 무엇이 진리인가를 규명하는 일이 목 숨과 같이 소중한 일이어서 설사 앞서간 선배, 스승과 부모라 하더라도 잘못된 가르침을 設 했으면 그냥 수긍하고 따를 것이 아니라 政法을 선양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力說하면서 보조국사가 韓國佛敎史에어 빼놓을 수 없이 소중한 어른이기는 하지만 진리 즉 法은 더욱 소중하다고 피력하였다.
또한 큰 스님은 돈오돈수를 설득하다 대중들이 잘못 이해할까봐 그 특유의 사투리로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구름 걷히면 햇볕 나제. 구름 걷히는 것 따로 있고 햇빛 나는 것 따로 있던가. 부처가 되 고 싶제. 그러려면 망상 미세망상까지 쉬어야 돼. 망상 쉬는 데에는 話頭가 근본약이제. 그 것밖에 딴 길은 없다. 적당히 슬슬 해서는 안 된다. 서울 대학 들어가는 데도 3시간 이상 자 면 안 된다고 하는데 잘 것 다 자고 할 것 다하고 언제 부처되노. 오매일여가 되도록 해야 한다. 자나깨나 話頭 드는 것을 한결같이 해야지. 꿈속에서도 화두를 들고 꿈조차 없는 깊은 잠 속에서도 화두를 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夢中一如 오매일여의 경지에 드는데 能히 십 지보살이라도 미세 망상이 있으면 견성이 아니야. 等覺, 妙覺이라도 확철대오가 아니면 견성 이 아니야"라고 힘주어 말씀하시곤 했다.


진리의 축제 頓.漸논쟁

필자가 70년대 중반에 해인사 선원에 살 때 스님의 法門은 언제나 「돈오입도요문론」이었으니, 이 말씀과 혜능, 대혜, 임제와 같은 禪宗史의 대표격인 스님들의 어록을 귀동냥할 수 있었다. 그 말씀이 너무나 혁신적이라 보조국사에 대해 말씀하시면 사실이 그런가 하는 의심을 잔뜩 품고 방황한 적도 있었다.

물론 頓漸의 문제는 O×문제 풀 듯 어떤 것이 옳고 그르고를 가릴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허구한날 종단의 이권 싸움이나 젯밥 싸움에 골몰하는 소식만을 듣던 것보다 이 논쟁은 얼마나 신선하고 차원 높은 것이었던가. 참으로 논쟁다운 논쟁이었기에 또 얼마나 숨죽여 바라보았는가.
돈.점의 논쟁은 침체될 대로 침체된 한국불교 知性史에 길이 남을 쾌거이며 새로운 한국 불교의 이데올로기를 세우려는 진지한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지적한 대로 20세기의 反佛敎的 도전인 物質主義와 唯物論的 사상, 불 교내의 祈福的요소, 知識主義, 라즈니쉬류의 反참선적 명상이 범람하는 現今의 風潮 앞에 불어온 돈.점논쟁은 그 자체로서 한줄기 맑은 바람이며 찬연한 진리의 축제였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큰스님같이 사상적 제동을 제대로 걸어준 선지식은 그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큰스님 같은 큰스승을 만나 그 법석에 잠시라도 앉아 그 法을 듣고 活潑한 禪機 를 닦은 인연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큰스님은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노구에도 불구 하시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점심 공양 이 후 한참 졸리는 시간이면 큰 장군 죽비를 들고 백련암에서 퇴설당까지 한걸음에 내려오셔서 禪房 門을 확 열어 젖히시고는 졸고 있는 禪僧들의 등줄기를 사정없이 내리치면서 "이 도둑놈아, 밥값 내놓아라"는 벽력같은 고함소리를 쳐서 혼침과 산란을 제거해 주었던 자비와 은혜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아득하기만 하다.

스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상좌들에게 "참선 잘해라"하고 당부했다 하니 스님이야말로 看話禪의 순교자이시다.
이제 스님은 가셨다. 어느 한편의 공간에서 한오리 향연으로 구름이 되고 연꽃으로 피어오르고 계시리라.

아직도 산 저편 다비장에서는 독경소리가 들린다. 道人은 꼭 舍利가 나와야 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 可視的이고 物量的인 잣대에 사로잡혀 근본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에만 局執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스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투실까?

큰스님의 거룩하고 청정한 생애와 가르침보다 더 큰 舍利가 어디에 있다고 그들은 한낱 물질에 집착하고 있는지.
어제도 오늘도 스님의 入寂울 애도하는 듯 눈물같은 비가 내렸다. 放光울 했느니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느니 떠들지만 그보다 몇 배나 중요한 것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남아있는 교훈의 말씀과 그 실천일 것이다.

주인을 잃은 가야산은 이제 적막에 잠긴 채 말이 없다. 영결식에 참석했던 그 은성했던 언어의 유희도 사람들도 잠시 타오르던 불꽃도 이제 다 사라졌다. 그런데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억!


이 글은 해인사 시명스님의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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