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자
제설함 외
사거리 횡단보도 옆이다 하필 노랑이다 노랑은 노랑이어서 숨을 데가 없다 숨지 않았는데 숨은 것 같다 숨죽였는데 들킨 기분이다 공포된 약속 같은 거다
약속을 기다리는 일은 무겁다 시간의 무게를 측정하는 밤마다 모래는 하구를 생각한다 물살에 쓸려온 무수한 사건들이 잘게 부서졌다 부디 무마되기를 잊혀지기를
모래는 어떤 바람들의 산물이다 모래시계와 모래성 같은 사건은 예고가 없고 예보는 확률의 문제여서 겨우내 눈이 내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눈물이 말랐다는 말로 번역했다
모래가 들어간 것 같아요 안구건조증입니다 인공눈물을 넣으면 슬픔이 올라왔다 슬픔의 빛깔은 파랑이어서 노랑과 조금 더 멀어졌다 노랑은 노랑이어서 봄 쪽에 가까웠다 폭설 같은 극적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봄이 노랗게 꽃을 피우면 숨지 않아도 된다 숨지 않았는데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다 끝내 울음을 쏟아내지 못했다 모래는 봉오리째 떨어진 꽃처럼 노랑을 잃은 노랑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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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역
갈아타야 할 버스를 놓쳤다
이건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지만
남겨진 건지 버려진 건지
당신의 정류장은 모호함이 미덕이었지
고장 난 모니터 밖 먼 데서
유예된 시간들이 서성거리는 동안
접속을 끊은 게 당신인지 저 세상인지
사각의 침대가 당신의 입을 막았으므로
죽은 척하는 건지 이미 죽은 건지
오래된 저수지 검은 물살의 지느러미 같은
망각의 수면에 부려진 삭은 목선 같은
역시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지만
다음 버스는 어디쯤 오고 있을지
기다리지 않아야 기다릴 수 있다는 듯
당신은 당신을 하나씩 놓아버렸지
당신을 빠져나간 당신은
장미향 방향제와 소독약 냄새에 취해
밤마다 요양원 긴 복도를 떠돌았지
여긴 아직 온기가 남은 별
흔하디흔한 어느 정류장의 이야기지만
끊임없이 피고 지는 꽃처럼
하차와 승차의 발길에 날은 쉬이 저물고
멀리 버스 하나 다가온다
이번엔 놓치지 말라는 듯
바로 앞 유리창이 붉디붉다
홍미자|201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으며 시집 『혼잣말이 저 혼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