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그 행한대로 - 심판의 기준이 되는 '행함'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바까지도 포함한다. 본절에서의 '행함'은 특히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선을 베풀었을지라도 그의 선행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었으나 그 믿음에 따른 행위가 없으면 그는 구원을 얻을지라도 상급은 없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행위에 그 보응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응하시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도세이'는 '아포디도미' 의 미래 직설법으로 좋거나 나쁜 의미의 모든 보상을 뜻한다. 따라서 본 구절에 의하면 믿는 자에게는 선한 상급이 주어지겠지만, 불신자는 그 형편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심판은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공정한 것이다.
[롬 2: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참고 선을 행하여 - 본문을 보면 바울이 6절에서 언급했던 '행위'가 단순히 율법적인 차원의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성도가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 끊임없이 달음박질 해나가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이신 칭의의 가르침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이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 그 믿음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포도나무 비유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도의 선행이란 예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와 연합된 가운데서 비롯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선이 나온다.그리고 이 열매는 낙심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행할 때 거두게 된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 이것들의 본질은 영생이며, 그것들이 나타나는 장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이 세 가지로 표현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영광'과는 다른 것으로서(1:23 주석 참조)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게 될 때에 나타나게 될 변화를 가리킨다.그리고 성도가 얻게 될 그 '영광'은 '존귀한 것'이며 결코 '썩지 아니하는 것'이다. 영생으로 하시고 - 영생(조엔 아이오니온)은 항상 궁극적인 구원으로 표현되었다.
유대교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준다는 것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생명얻기를 원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면서 썩어질 육체의 증표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허락되지 않았다(8:6). 영생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편 본절에서 영생은 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보응'의 목적격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8절의 '노와 분'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심판이라는 개념보다 생명이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후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며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롬 2: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당을 지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여스 에리데이아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에리데이아'가 '보수에 얽매인 고용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에리도스'에서 파생되었다면, 본절은 '이기적인 욕망이나 야망을 가진 자들에게'라고 번역될 수 있고, '다툼'이나 '논쟁'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에리스'에서 나왔다면, '논쟁하는 자들에게'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1:16에서의 '에리데이아'는 분명히 '에리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빌 2:3에서는 '다툼'이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외 갈 5:20이나 약 3:14 등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본절은 단순히 '당을 지어'로 번역되면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합쳐서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논쟁에 가담하는 자들'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즉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어 어떤 분쟁이 일어나면 항상 쉽게 발뺌할 수 있거나 이익이 되는 편에서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 민중들 사이에서 나타나던 공통된 특징이었다.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 - 진리와 의는 상호 보충적인 관계로 쓰여진 반면 진리와 불의는 상반적인 관계로 쓰여졌다.
진리로 자기들의 생활을 다스리지 않고 강퍅하게 회개치 않는 마음으로 자기의 의를 좇는 자는 결국 불의에 순종하는 자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리와 불의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불순종은 불의에 순종하는 것이며 또한 붕의에 순종하는 것은 궁극적인 영원한 의를 포기하는 행위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분노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분노는 불신앙에 따른 적극적인 불순종에 대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려는 궁극적인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보응은 더욱 가증될 것이다. 바울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라고 같은 말을 반복한 것도 그들에게 임할 진노의 강도를 보다 명백하게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 '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모스'는 보통 '분노'로 번역되지만 '진노와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될 수 있다. 바울이 유사한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같이 사용한 것은 일종의 중복어법으로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무시무시한 진노로 보응하시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롬 2: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 '각 사람의 영'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 중 '영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를 '사람'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후 문맥상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고데)의 견해에 따르면 9절과 10절의 구성은 7절과 8절의 대조적 구성을 거꾸로 재배열 시킨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각 사람'이라는 말과 '각 사람의 영'이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이라는 표현 역시 악의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보응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 8절에 언급된 '노와 분'이 심판자이신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라면 본절의 '환난과 곤고'는 하나님이 발하신 '노와 분'으로 인하여 약한 자에게 내려지는 결과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환난'은 외적인 것으로 '곤고'는 내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 본 구절은 다음 10절에서도 반복된다.
구원이나 은혜와 마찬가지로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유대인이 우선적이다. 언약과 약속에 따른 복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듯이 그 복을 거절한 데에 대한 형벌도 유대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된다..왜냐하면 우선적인 특권을 부여한 자에게 거기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헬라인'은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롬 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영광과 존귀와 평강 - 7절에서도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나왔으나 본절에서는 '썩지 아니함' 대신 '평강'이 언급되었다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이해하기도 하며, 또다른 학자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축복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혼과 육체로 영원히 즐거워하며 충만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의미이든 바울은 악한 자에게 형벌로 내리시는 '환난과 곤고'에 대조를 이루는 용어로서 '평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결과가 상반되는 것을 보여준다.
[롬 2: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 본절은 앞 부분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데,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불공평도 없으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편애도 없으시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편파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의로우신 판단'이라는 구절이 이미 증명한 바 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특권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들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냐의 문제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개념을 히브리적 사고에서 온 것으로서 재판관의 편견이나 편애를 지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 하나님은 편견이나 편애가 없어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외형상 유대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한 사실과 모순을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인 역시 그의 행한대로 판단받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선권이 부여된만큼 악행에 대하여 더 큰 환난과 곤고를 당해야 한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편견과 편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라도 그분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오직 공의로우신 그분만이 판단받는 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