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결핵의 날필리핀 최대 슬럼가에서 ‘결핵 환자 탐색 프로젝트’를 전개 중인 국경없는의사회 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공기 감염(airborne disease)’ 위험에 대한 인식은 제고됐을지 몰라도, 필리핀 도심 저소득 인구 등 취약 인구는 결핵 감염의 위험에 더욱 노출됐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장기화되면서 결핵 치료 서비스가 중단되어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의 주민이 결핵에 감염될 확률이 높아졌다. 이에 국경없는의사회는 결핵 검사 트럭을 운영하며 동남아시아에서 인구가 가장 과밀한 국가 중 하나인 필리핀에서 결핵 확산 경로를 추적, 차단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할머니와 손자가 필리핀 슬럼가의 국경없는의사회 결핵 검사 현장에 방문했다. ©Ezra Acayan
필리핀 마닐라의 슬럼가 톤도(Tondo)에서 자그마한 야채 가게를 운영하는 아말리아(Amalia)는 작년 5월 결핵에 걸렸다. 하지만 사생활이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비좁은 이곳에서 혹여나 이웃들이 두려워할까 ‘결핵’이란 말을 일부러 꺼내지 않는다. 아말리아가 지내는 곳은 스모키 마운틴(Smokey Mountain)이라 불리는 동네인데, 지금은 폐쇄됐지만 1960~90년대까지 독성 가스가 유출되던 쓰레기 매립지의 이름을 본떠 생긴 지명이다.
2022년 5월 초, 아말리아는 국경없는의사회의 결핵 검사 트럭을 찾아 매일 오후만 되면 열이 나는데 해열 진통제를 먹으면 낫는다고 전했다. 곧 방사선사가 아말리아의 폐를 촬영했고, 의료팀은 가래를 채취해 결핵 감염 검사를 진행했다. 연구실 검사 결과 아말리아는 결핵 양성이었고, 간호사와 상담사로 이뤄진 환자 지원팀이 아말리아에게 연락을 취한 후 집을 방문해 검사 결과를 설명했다. 또한 집 근처 보건센터에서 6개월간 무상으로 치료를 받으면 회복할 것이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아말리아는 이 때를 회상하며 “결과를 듣자마자 엄마 생각이 났다”고 전하며, “엄마가 결핵으로 돌아가셔서, 나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마닐라 톤도 지역내 결핵 환자의 집을 방문한 국경없는의사회 직원 ©Ezra Acayan
매년 전 세계에서 최소 150만 명이 결핵으로 사망한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 결핵은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이었는데, 현재도 여전히 심각한 감염병으로 남아 있다. 코로나19 대유행 동안 결핵 관련 사망자수가 증가했으며, 신규 결핵 환자 수 또한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증가했다.
결핵균은 감염자가 기침, 대화, 재채기를 할 때 공기 중에서 전파된다. 밀폐된 공간에서 더욱 쉽게 전파되며, 잠복기는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다양하다.
항구와 마닐라 상업 지구 사이 면적이 9제곱킬로미터 남짓한 톤도에서 65만 명 이상이 생활하고 있다. 톤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슬럼가 중 하나인데, 필리핀에서 근 2년째 시행된 엄격한 코로나19 관련 조치가 인구 과밀 현상을 악화시켰다. 심지어 한 구역 전체가 며칠씩 격리되어 외출이 불가할 때도 있다. 톤도에서는 환기가 어려운 좁은 공간에 몇 대가 모여 산다. 전국적으로 학교가 폐쇄돼 아이들은 2년 반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가장들은 생계 유지를 위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동 제한 조치, 의료시설 방문 시 감수해야 하는 위험, 의료진 부족, 의료시설 폐쇄 등의 요인으로 결핵 환자 발견, 진단 및 치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_트리샤 타다니(Trisha Thadhani) / 국경없는의사회 결핵 프로젝트의 결핵 전문의
이러한 이유로 인해 결핵 환자를 발견해 치료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알아차리기도 전에 감염된 사람도 많다. 따라서 국경없는의사회는 마닐라 보건부와 협력해 톤도에서 ‘결핵 환자 탐색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이 프로젝트는 현지주민을 검사하고, 접촉자를 추적하고, 결핵 환자를 현지 보건센터로 인계 후 치료를 받게 해 궁극적으로는 전파의 고리를 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결핵환자 접촉자 추적 활동중인 국경없는의사회 직원들 ©Ezra Acayan
2022년 5월, 지역사회 및 현지 당국의 지원으로 국경없는의사회 이동진료팀은 톤도 곳곳에서 진단용 방사선 장치가 마련된 트럭을 운영하는 활동을 개시했다. 현지 주민의 결핵 검사 접근성을 확대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현지 주민이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게 하려면 이 활동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 결핵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검사받길 원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어요. 지금 저희의 당면 과제는 자신이 건강한 것 같아도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게끔 장려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고령자나 이미 면역력이 약한 환자만 결핵에 걸린다는 인식이 팽배해요.”_루스 로하스(Ruth Roxas) / 국경없는의사회 결핵 환자 탐색 프로젝트 책임자
현지 주민이 검사를 꺼려하는 현상에는 결핵 감염 시 감염을 우려하는 가족이나 이웃에게 배척당하고 일자리를 잃을 것이란 두려움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완치되려면 6개월 동안 정기적으로 보건소를 방문해 약을 받아야 하며, 교통비 또한 만만치 않다.
이곳에서는 건강을 지키는 것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생활비를 버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에 현지당국과 공조해 보건증진팀을 꾸려 확성기로 무료 엑스레이 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공지하는 등 검사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건증진팀원은 대부분 톤도 출신인데, 비좁은 골목 사이의 집들을 방문해 검사를 장려한다. 또한 인식제고 캠페인을 통해 결핵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핵은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며, 치료를 통해 가정 내 감염 확률을 낮출 수 있다고 알리고 있다. 그 결과 현재 매주 400~450명이 국경없는의사회 결핵 검사 트럭을 찾는다.
방사선사 한 명이 한 대의 엑스레이 기기로 대규모 인원을 검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검사 트럭에 컴퓨터 보조 진단(computer-aided diagnosis) 기능을 제공하는 혁신적 인공지능 소프트웨어가 탑재된 작은 상자를 설치했다. 이 상자를 통해 흉부 엑스레이에서 결핵을 빠르게 잡아내 검사에 속도를 낼 수 있다. 엑스레이 분석 결과 결핵이 의심되는 환자의 담(가래)을 채취해 보건부가 운영하는 연구소로 보낸다. 그 후 진단장비 ‘진엑스퍼트(GeneXpert)’ 시스템을 통해 며칠 안으로 결과를 받아볼 수 있다.
2023년 3월 마닐라 톤도 지역내 국경없는의사회 이동 결핵진단 차량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주민들 ©Ria Kristina Torrente
검사한 환자가 결핵 양성으로 판명된 경우, 국경없는의사회 환자지원팀이 환자 및 환자의 가족 등 접촉자를 찾아 간다. 톤도의 좁은 골목 사이 사이를 지나 환자를 찾는 것은 인내심을 요하는 고된 일이다. 집집마다 방문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도 하고, 심지어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다음날 다시 와야 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힘든 작업이다. 환자 지원팀은 이런 과정을 거쳐 아말리아를 설득해 보건소에서 치료를 받게 했다. 더 나아가 아말리아의 가족 또한 검사를 받게 설득해 아말리아의 손주들이 3개월 동안 결핵 예방치료를 받았다.
국경없는의사회 의료팀은 결핵 환자와 접촉한 5세 미만 아동의 경우 임상적 진단을, 5~15세 아이들의 경우 피부반응검사를 진행한 후, 예방치료를 권한다.
신생아나 아동이 결핵에 걸리면 매우 심각하고 치명적인 증상이 발현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동의 경우 연구실 분석을 위한 담의 양이 적기 때문에 성인보다 진단이 훨씬 어렵습니다. 톤도 전역에서 영양부족 현상이 만연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특히나 결핵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인 결핵 환자 또는 의심환자가 발생했을 때 이들을 위한 치료뿐 아니라 아동을 위한 예방치료도 함께 제공하여 최대한 아동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_트리샤 타다니 / 국경없는의사회 결핵 프로젝트 결핵 전문의
현재 아말리아는 결핵 완치 판정을 받은 후 작은 야채 가게를 열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10개월 동안 국경없는의사회가 검사한 인구 중 결핵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는 6,400명 이상으로, 평균 약 5%다. 이는 높은 수치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 결핵 환자가 증가할 것이란 초기 가설과 일치한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지금도 매일 현지 주민을 방문하여 결핵 환자 및 의심 환자, 접촉자 등을 추적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미미해 보일 수 있지만 모두가 결핵을 통제하고자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곧 코로나19로 생긴 공백이 메워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_트리샤 타다니 / 국경없는의사회 결핵 프로젝트 결핵 전문의
첫댓글 결핵은 치료가 가능한 질병임을 알리는 일을 통해 많은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