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취미와 의견조차 관심을 위해, 인증하기 위해 소비되는 시대. 시장질서마저 관심 끌기에 따라 재편된 시대. 관종의 시대. 관종은 운명적으로 타자 혐오와 우울로 귀결되기 마련이며, 존재의 빈곤과 악플에 의한 자살 등의 각종 사회문제 또한 ‘관종’ 키워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관종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종의 시대는 타자 학살의 시대다. 이 책은 이러한 소거의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 쓰였다.
🏫 저자 소개
김곡
본업은 영화감독으로, 공동작업자 김선과 함께 ‘곡사’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시라큐스영화제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고갈」뿐만 아니라, 「방독피」, 「자본당 선언」, 「자살변주」 같은 실험적인 독립영화로 베니스영화제, 베를린영화제, 모스크바영화제, 부산영화제, 로테르담영화제 등에 초청된 바 있으며, 상업영화로는 「화이트」, 「앰뷸런스」, 「보이스」 같은 장르영화들을 연출하고 있다. 정부를 비판하였다가 상영불가 판정을 받았던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김선 감독)로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와 제한상영가 위헌 소송투쟁을 하기도 했다.
현재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대학 시절 전공은 철학이었다. 「투명기계: 화이트헤드와 영화의 소멸」과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을 연달아 출간했다.
📜 목차
서문 6
1장 존재에서 관심으로 13
2장 셀프의 시간 37
3장 골방 스펙터클 53
4장 악플의 로드레이지 69
5장 혐오편집증 83
6장 관심의 정치경제학 109
7장 제국주의와 우울증 123
8장 하이퍼 민주주의 137
9장 관종의 주권 155
10장 관종이성비판 179
📖 책 속으로
'관심’과 ‘종자’가 붙여져 만들어진 뜻 그대로, 관종은 이전 세기의 주체들과는 그 종자부터 다르다. 그는 더 많은 댓글, 더 많은 조회수, 더 많은 관심을 받기 위해서 불안과 죽음, 적과 동지, 이상과 이념 등 그 어떤 대상도 기꺼이 소거해 버린다. 관심의 집중은 모든 두려움을 일소하며 모든 정치학을 대체한다. 사람들은 관종 문화가 사회적ㆍ정치적 퇴행의 결과라고 개탄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관종은 투쟁하고 싶어도 투쟁할 수가 없다. 투쟁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또 존재하고 싶어도 존재할 수가 없다. 쟁취할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싶어도 불안할 수가 없다. 불안해할 무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관종을 불안하게 할 수 없다. 오직 무관심만이 관종을 불안하게 한다. (17~18쪽)
관종에게 타자의 타자성은 더 많은 관심을 끄는 패션이 될 뿐이다. 또한 아무리 악플을 달아도 팔로워는 타자가 될 수 없고, 아무리 서로를 비방하더라도 BJ들은 서로에게 타자가 될 수 없다. 그럴수록 관심만 키울 뿐이니까. 일반적으로 폭력은 타자에게서 타자성을 소거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악플이나 조리돌림 같은 ‘묻지 마’식의 폭력은 타자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인터넷 폭력의 문제는 불필요한 타자를 양산한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타자마저 제거한다는 데에 있다. (22쪽)
‘인증샷’의 유행은 기억과 아무 상관이 없다. 거꾸로 인증샷은 기억과 시간의 부재에 대한 반응이다. 말하자면 지난 세기, 존재는 인증될 필요가 없었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이 충분한 존재 증명이었으니까. 반면 오늘날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업데이트될 뿐. 타자도 없다. ‘좋아요’가 있을 뿐. 불안도 죽음도 없다. 친구 차단과 로그아웃이 있을 뿐. 이번 세기, 존재는 존재할 필요가 없어져서 인증한다. (43쪽)
편집증은 혐오의 디폴트다. 혐오의 배후에는 셀프라는 편집증적 자아가 반드시 있다. 또 원한을 정의로, 혐오를 저항으로 착각케 하는 ‘뇌피셜’ 사례 집착증과 가학적인 ‘행복회로’가 반드시 있다. 여기서 관심과 혐오는 절대적 관계에 있다. 혐오는 관심을 끌고, 관심은 혐오를 가열시킨다. 관심은 혐오의 대전제이자 초목표다. 자신이 박해당했다는 생각부터 자신이 관심 받는다는 착각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혐오의 인간은 관종의 한 유형이다. ‘좋아요’를 클릭이 아니라 상대방의 피눈물로 받아 낸다는 것이 다를 뿐. 그가 늘어놓는 평등, 정의, 안보 같은 공공선도 모두 빌미에 불과하다. (95쪽)
오늘날 인간이 잃어 가는 것은 영원에 대한 예의다. 대상에 대한 예의를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영원을 회의하지도 냉소하지도 않는다. 냉소와 회의엔 최소한의 존중이 남아 있다. 오늘날은 영원까지도 하이퍼링크하고 팔로우하고 다운로드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그래서 자기의 주권과 능력만이 영원한 것이라 자만하며, 진짜 영원을 멸시하고 혐오하고 끝내 유기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기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가능성이다. (194~195쪽)
🖋 출판사 서평
‘관심 종자’에 대한 최초의 철학적 분석!
이 시대의 우울과 혐오, 그 저변에 깔린 ‘관심 충동’을 파헤치다
관종은 운명적으로 우울하다. 존재와 관심을 맞바꾸는 데 어떤 저항감도 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과거를 지배했던 질환인 강박증과 히스테리가 관심의 시대에 와서 편집증과 우울증으로 대체된 것은, 편집증과 우울증이 모두 존재의 폐기에 입각하는 질환이기 때문이다.
‘종자’부터 우울한 관종에 대하여
물론 관종이나 강박, 히스테리와 우울증 같은 것들이 이번 세기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히틀러도 관종이었다. 그러나 선동가와 라디오, 선전 영화보다 진보한 인터넷과 SNS가 오늘날 있다. 모두가 자기 모습과 삶을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는 21세기의 제일도덕은 저항 아닌 ‘증명’이, 수치심 아닌 ‘노출’이 되었다. 일상에서 우리가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과잉 가능성을 주입하는 자기계발 사회 속에 있는 것처럼, 온라인에서 우린 ‘나는 누구에게도 관심받을 수 있다’라는 과잉 가능성을 주입하는 자기홍보 사회 속에 있다. 대기업조차 SNS로 자사를 셀프 홍보하는 사회, 이러한 자기홍보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고 노출하여 관심을 축적하기를 스스로(셀프) 명령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관심받을 만한 사람이란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지 않으면 세계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울증은 그 어느 시대보다 강렬히 태동한다. 증명해야 할 존재가 노출되고 노출되다가, 그 존재의 가치라곤 ‘관심’ 외에는 텅 비어 사라지고, 다시 그 자리를 관심으로 채우려는 악순환이 그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관종의 시대』는 피해자이자 그 자신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관종을 파헤친다.
자기만의 왕국을 꿈꾸는 제국주의자, ‘관종’
『관종의 시대』는 먼저 관종의 본질이 ‘셀프’와 ‘나르시시즘’이라고 규정하면서, 관종이 가지는 내외재적 폭력성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고 선언한다. 과잉 자기홍보 사회는 끊임없이 우수한 셀프가 되기를 명령하기에, 그는 ‘관심’에 매몰되어 그의 외부에 타자가 있음을 점점 더 알지 못한다. 급기야 관종은 ‘셀프’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는 대상이나 타자의 소거를 통해 자신이 더욱 공고해짐을 느끼며, ‘셀프’라는 고립된 왕국에 스스로를 옹립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다. 존재는 타자를 전제해서만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관종은 어떤 형태로든 타자혐오증자로 귀결되며, 심한 경우 혐오 표현과 악플이 ‘관심’ 축적을 위한 하나의 아이템으로 소비되기에 이른다.
“혐오는 타자의 소거를 통한 관심의 전유다. 혐오 범죄는 스토킹과 그루밍처럼 나르시시즘 범죄다. ‘그것은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세계를 실현하려고 기도하는 일과 대등하다.’” - 본문 중에서
‘좋아요’는 일종의 자본이자 명령으로서, 셀프의 공고화를 넘어 확장화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관종이 관심의 축적을 위해 @ㆍ#ㆍ♥ 등 온갖 기표들을 동원해서 반드시 지시해야 할, 점령해야 할 토지는 ‘셀프’ 자체로, 인터넷에서 셀프가 스스로를 확장한다는 것은 하이퍼링크를 통해 네트워크를 점령해 나간다는 뜻이고, 네트워크를 점령한다는 것은 하이퍼링크의 통행세를 더 많은 관심으로 거둔다는 뜻이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가 “나도 ‘좋아요’ 해줘”라는 강요로 사용되는 것을 깨닫고 나면, 결국엔 관종이 일종의 제국주의자적 면모마저 가질 운명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수긍하게 된다.
‘관심’에 종속된 주권과 민주주의,
잃어버린 타자를 찾아서
나아가 『관종의 시대』는 관종의 민주주의, 나아가 주권이란 무엇인지를 살핀다. ‘하이퍼 민주주의’와 ‘정치 관종’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우리 존재 자체를 지탱해 주었던 주권 개념이 관종의 시대에 이르러 어떻게 변질되고 방기되었는지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심지어 저자는 최악의 경우 ‘민주주의 자체’가 하나의 관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선거날 투표 인증샷으로 단결하는 SNS, 서명을 독려하는 해시태그로 똘똘 뭉친 링크 공동체가 그 자체로 메가 셀프를 지어, 타자에 비판에 아랑곳없이 ‘민주주의는 그래도 잘 돌아가고 있다’는 집단 행복-폐쇄회로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종의 시대』 결론 장에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비추어 관종의 이성을 비판하며, 관종의 시대에서 추방되어 버린 타자성과 분별력의 회복을 위해 다시 한번 이성의 복권을 촉구한다. 아울러 니체와 화이트헤드의 개념을 통해 이성의 복권은 육체의 복권과 같은 것임을 보여 주며, 관종의 시대에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타자성을 감각해 내는 육체성임을 주장한다. ‘좋아요’를 눌러 주는 이들과 ‘팔로워’들은 타자가 아니다. 소거, 차단 가능한 타자가 타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대의 폭력은, 자기만의 공간에서 댓글을 지우듯 너무 쉽게 타자를 지울 수도 있고 언제든 다시 ‘좋아요’ 할 수 있다는, 관심만 주고받으면 그래도 괜찮다는 가정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소거의 문화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관심 대 관심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 타자로서 ‘존재’하고자 한다면, 『관종의 시대』가 그 전환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