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1년부터 1295년까지 동방 각지를 여행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체험담을 기록한 <동방견문록>은 내용이 다소 허구이거나 과장된 것이 많긴 하지만, 당시 동방에 대해 어두웠던 중세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 견문록의 내용이 유럽인들의 지리 지식과 세계관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극명하게 보여 주는 지도가 바로 14세기 후반에 제작된 카탈루냐 지도첩이다.
이 지도는 학예를 숭상하고 수많은 서적을 수집했던 프랑스 국왕 샤를 5세(Charles Ⅴ, 재위 1364~1380년)가 아라곤(Aragon)왕국의 페드로 4세(Pedro Ⅳ, 재위 1336~1387년)에게 의뢰해, 당시 아라곤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마요르카(Majorca)섬의 지도제작자인 아브라함 크레스케스(Abraham Cresques)가 제작했다. 지도첩에 수록된 만년력(萬年曆)에 드러난 연대를 참조해 지도제작 연도를 1375년으로 보고 있으나, 자료에 따라서는 1380년경 또는 1385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숙련된 지도제작자이며 시계, 나침반, 항해기구까지 제작했던 아브라함은 마요르카 지도제작 학교의 중요한 멤버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325년경 마요르카섬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부인 세타다르(Setaddar) 사이에 예후다(Jehuda)와 아스트루가(Astruga) 두 자녀를 두었고, 1387년경 마요르카섬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예후다 크레스케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름난 지도제작자가 되었다.
마요르카 지도제작 학교(Majorcan Cartographic School)는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사이에 주로 유대인 지도제작자와 지리학자, 역사학자, 항법기기 제작자들이 모여 세운 학교로, 이탈리아 지도제작 학교와 쌍벽을 이룬다. 그러나 카탈루냐의 지도제작자들이 이탈리아의 제노바나 베네치아에 건너가 지도제작을 했고. 이탈리아인들도 마요르카에 와서 지도제작 기술을 배우는 등, 교류가 빈번했다.
이탈리아의 포르톨라노 해도와 달리 카탈루냐 지도는 해도의 역할을 하면서도 내륙의 지리정보가 풍부하고 화려한 채색으로 그려졌다. 이 지도는 처음에 여섯 장의 양피지에 그려 얇은 판재에 한 장씩 붙여 첩(帖)으로 만들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접혔던 가운데 부분이 갈라져 떨어지면서 12쪽이 되었다. 양피지 한 장의 크기는 가로 50cm, 세로 64cm로 여섯 장을 다 붙이면 그 길이가 3m에 달한다.
맨 앞의 두 쪽에는 지리학, 천문학 및 카탈루냐어로 번역된 점성술에 관한 글과 함께 만년력 등 여러 가지 삽화가 그려져 있다. 그 다음 두 쪽에는 황도대의 별자리, 조석표(潮汐表), 달의 위상과 위치 등을 나타내는 커다란 원형 차트가 그려져 있다. 세계지도는 나머지 여덟 쪽에는 그려져 있는데, 앞부분 네 쪽에는 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소아시아에 이르는 서방지역이고, 뒷부분 네 쪽에는 중동에서 인도, 중국에 이르는 동방지역이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