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완의 시작품 중 내 기억의 창고 속에 가장 오래 저장되어 있는 작품은 「재봉질 하는 봄」이고 가장 최근작은 「여물을 쑤다」이다. 두 작품의 간극이 십여 년은 족히 넘게 긴 시간의 여울목을 에돌아왔다. "염소를 매어놓은 줄에서 음메에 소리로 박혀 있는 재봉선"을 발견해내고 "쇠똥에서 참으로 육화된 절창을 읽어내는 데까지, 시인으로서 오롯이 바친 높고 쓸쓸한 고독의 산물이 바로 이 시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와 내가 200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같은 해에 등단하고 형님, 동생하며 맺고 나눈 인년의 끈은 길고 질기고 정겹다. 구봉완의 시가 지면에 발표될 때마다 내 詩眼으로 주의 깊게 들여다본 그의 작품은 오랜 교사생활에서 묻어나온 성품처럼 흠잡을 곳 없이 깊고 반듯하다. 그러나 그가 쓰는 언어의 칼은 예리하고 서늘하다. 문맥의 급소를 내리칠 때는 눈이 번쩍하게 행과 연을 휘어잡는 진검숭부사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무수한 아해들이 봄 소풍 가는 날" 나는 구봉완의 첫 시집을 보며 축복할 것이다. ―이영식(시인)
지난한 삶의 과정을 잇몸 지그시 누르고 있는 시인의 성정은 밖으로 내보이는 염결성보다 더 순하다. 그 순한 맛은 즉석에서 나지 않고 오래 씹고 있을 때 언어가 풀어지며 "빛을 흔들다 놓아 둔 만큼의 사과 한 알의 크기"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사물의 겉면을 보여준 것 같아도 시어들이 대상 깊숙이 파고들어 시인이 펼쳐놓은 의미망을 끌어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사물을 통하여 "눈물 가득한 생을 촉촉 꺼내 놓"기도 한다. "한 편의 시가 나를 견인하"고 "연잎에 밥을 아치는/어머니의 모습"으로 연상되는 시집이다. "꿈이란 흰 눈 속을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일"이며 "석탄처럼 환멸의 언어들이/사북, 사북 부려지고 있다"고 잔잔하게 말하는 시집이다. 한 편 한 편 가벼이 읽지 않고 입속으로 "봄, 봄"하며 읽었을 때 맛이 환하게 나는 시집이다. ―문정영(시인)
■ 차례
1부 파지를 위하여/그늘 아래 머물다 잠이 든 오후/오후에게/화분/설날과 소나무/시인日誌/겨울로 가는 나무의 하루는/풀빛/항아리/한낮/오후의 사과밭 그늘 아래/단풍나무 한 그루/가을 연못에서/봄날
2부 할머니와 화분/겨울 탁본/내려놓다/중년/노을이 옷을 벗는 저녁/염전이 보이는 풍경/깊고 푸른 밤/가을 휴게소/도봉을 보며/달밤 2/밤의 야전병원/뒷산에 눈 녹는 겨울/어둠에 관한 명상/인도교
3부 문의 마을을 생각하며/사북의 겨울/눈이 내리는 협곡/길 또는 발에대하여/실업을 위하여/황혼 무렵/눈을 쥐고 있는 풀잎의 겨울/겨울 크로키/봄, 봄/겨울 목련/솥/유모차/수저/안개의 기억
4부 당신의 뒤란에 내리는 눈/재봉질 하는 봄/나비의 시간/혀/물속의 방에 눕다/황사의 봄날/목련 하숙집 /오늘/명창/달밤/노인 9/봄이 오는 강/조팝나무 아래/그리운 뒷간/여물을 쑤다
■ 해설│유정이(시인, 문학박사)
■ 시집 속의 시 한 편
재봉질 하는 봄
염소를 매어놓은 줄을 보다가 땅의 이면에
음메에 소리로 박혀 있는 재봉선을 따라가면
염소 매어놓은 자리처럼 허름한 시절
작업복 교련복 누비며 연습하던 가사실습이
꾸리 속에서 들들들 나오고 있네
비에 젖어 뜯어지던 옷처럼, 산과 들
그 허문 곳을 풀과 꽃들이 색실로 곱게
꿰매는 봄날, 상처 하나 없는 예쁜 염소 한 마리
말뚝에 매여 있었네, 검은색 재봉틀 아래
깡총거리며 뛰놀던 새끼 염소가, 한 조각 천
해진 곳을 들어 미싱 속으로 봄을 박음질 하네
구멍 난 속주머니 꺼내 보이던 언덕길 너머
보리 이랑을 따라 흔드는 아지랑이 너머
예쁜 허리 잡고 돌리던 봄날이었네
쑥 내음처럼 머뭇머뭇 언니들은
거친 들판을 바라보던 어미를 두고
브라더미싱을 돌리고 있었네, 밤이 늦도록
염소 한 마리 공장 뒤에서 숨어 울고 있었네
부르르 떨리는 염소 소리로, 가슴도 시치며
희망의 땅에, 가느단 햇살로 박아 놓은 옷이
이제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기염소 뛰어노는 여기저기
소매깃에 숨어 있다 돋아나는 봄날
언니의 속눈썹 같은 실밥을 나는 뜨고 있었네.
■ 시인의 말
누군가는 꿈길을 찾아 헤매고
누군가는 현실의 길을 달려간다
그러나 길은 죽은 듯이 있고
묵묵부답이다
2014년 봄
구봉완
구봉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200년 『문학사상』신인상으로 등단하였다. 서울강동고교에서 수학교사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