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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2017.1.16.)
대한민국이 선택한 역사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은 총 2,077책으로 이루어진 기록물이다. 한 책의 두께가 1.7cm인데, 이것을 차례로 쌓아 올리면 무려 아파트 12층 높이가 되는 양이다. 전부 다 읽으려면 하루 100쪽씩 읽어도 4년3개월이란 긴 시간이 흐른다. 조선왕조실록은 만드는 과정에서 굉장한 정확성이 요구된다. 그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종대왕께서 말씀하시길, “그대의 자질은 아름답다. 그런 자질을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해도 내 뭐라 할 수 없지만, 그대가 만약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노력한다면 무슨 일인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知汝質美不爲則已若用心力何事不能也-세종 22년(1440)7월21일
정조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일에 있어서,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를 걱정하지 말고, 다만 내가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할 수 있을지, 그것을 걱정하라.” 做事不患日力不足但患心力不逮耳-홍제전서 175권
프롤로그
한국사는 미래를 대비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본질적으로 한 번에 깨달을 수 없고 날마다 익히고 익혀야 개개인의 마음과 몸에 익숙해질 수 있다. 27명의 조선왕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각 왕의 특징은 무엇이며, 당대 주요한 사건은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조상들의 모습, 역사의 변화를 통해 배신, 감동, 사랑 등 다양한 인생의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2016년 한국사의 대중화를 꿈꾸며-설민석
조선왕조실록이란/임금조차 볼 수 없었던 가장 내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에는 민초들의 다양한 삶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조선시대 때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관청인 춘추관(春秋館)에서는 실록 편찬을 위한 임시 관청인 실록청을 만들고 이곳에서 사초, 승정원일기, 시정기, 상소문, 개인 문집 등과 같은 여러 자료를 모았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 취급한 문서와 왕명의 전달 등을 정리해서 기록한 일기다. 사초는 사관이 임금이 말할 때, 기침하고 화낼 때, 심지어 화내고 눈물 흘리는 것까지 옆에서 속기한 걸 다시 정리한 기록이다. 시정기는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 등을 정리한 것이다.
사관들은 선왕의 모범적인 내용만을 편집해서 왕에게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국조보감이다. 국조보감은 세종 때 편찬: 세종 때 편찬을 시작한 국조보감은 그의 둘째 아들인 세조 때 이르러 완성된다.
조선왕조에 쫓겨난 임금에 대해서는 실록 대신, 일기라고 이름을 붙인다. 일기의 주인공은 쫓겨난 왕이기 때문에 왕자로 강등되어 훗날 군(君)이라 불리게 된다.: 연산군, 광해군, 노산군(단종) 노산군 일기는 숙종 때 단종실록으로 추존된다.
선조의 재위시절을 기록한 선조실록은 선조수정실록이라는 또 다른 실록으로 존재한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당대 집권 세력이 누구냐에 따라 달리 쓰인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전기에는 춘추관(서울, 충주, 전주, 성주)에서 보관했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전주 사고본만 빼고 모조리 불타버린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임진왜란 직후 광해군 때, 다시 실록을 필사한다. 추후 보완하면서 똑같은 것 5개를 만들어 보관하게 했다.
조선후기에는 춘추관(서울),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에 보관한다. 도성인 춘추관을 제외하고 모두 산에 숨겨놓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기본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지만, 동시에 사관의 평 역시 담겨 있다.
권(卷): 책을 세는 단위
책(冊): 옛 서적이나 종이의 묶음 수량을 세는 단위
조선건국 이전/ 새로운 세상으로서의 길
(고려 말, 혼돈의 시대)(동북면 최고의 세력가, 이성계)
전주 이씨. 이성계의 할아버지 이안사가 함경도 동북면에 정착-지역의 토호가 된다. 증손자 이자춘의 아들이 이성계다. 고려말 공민왕 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동북면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들을 토벌하면서 유명한 장수로 승승장구했다.
(말머리를 돌려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최영은 우왕의 곁을 지키고 대신 모든 군대를 이성계에게 넘긴다. 최영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기 때문에 이성계를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끝까지 요동 정벌을 원하지 않았다.
정벌 일행이 압록강의 섬, 하중도인 위화도에서 안 움직인다. 장마가 너무 심해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공격한 것은 1,388년.(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붉은 무덤과 억새 무덤)
최영은 부정축재의 죄목으로 사형을 받게 된다. 최영은 내가 정말 죄가 있다면, 내가 죽고 나서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죄가 없다면, 내 무덤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최영의 무덤은 풀이 나지 않는 빨간 무덤이라고 해서, 적분(赤墳)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멸망)
정도전은 고려를 완전히 엎어버리고 신세계를 만들고, 왕씨에서 이씨로 바꾸는 역성혁명을 하자고 한다.
정몽주는 우리는 사대부이므로 역성혁명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고려에 대한 배신이고, 의리 없는 처사다. 따라서 고려를 유지하는 선에서 개혁을 진행하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사람을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한다.
새 왕조에 대한 반대세력이 제거되면서 이성계의 조선 개국은 시작된다. 이후,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한 자신의지지 세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웠으니, 그게 바로 조선이다.
제1대 태조
이빨 빠진 호랑이, 57세, 최고령의 나이로 왕이 되다
(1392년 조선 최고령의 나이로 즉위한 임금, 태조 이성계(1335-1408)
(1392년 막내아들을 왕세자로 세우다)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총애와 정도전의 지지로 막내아들 방석이 왕세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사실상 정도전이 여러 개혁 정치를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성계의 무한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394년 한양천도)
정도전은 전통 유고의 방식으로 북쪽의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쪽인 관악산을 향하는 오늘날 경복궁의 자리에 궁궐을 놓아야 한다고 주장해 실제 그렇게 했다.
(1392~1398년 조선의 디자이너 정도전)
한양 천도 이후 조선의 도읍은 성리학자 정도전에 의해 모조리 구상되었다. 결국 수도 한양은 철저히 유교적인 사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동대문: 흥인지문 동쪽이 인(仁)을 상징한다.
서대문: 돈의문
남대문: 숭례문
북대문: 홍지문
보신각: 타종식을 하는 곳인 한양의 중앙
정도전은 폭군이 나와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시스템, 매뉴얼을 만들었다.
정도전은 경연을 강화했다. 경연이란 왕이 신하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현실 정치를 의논하는 것인데, 사실상 왕을 공부시키는 것이다.
조강(朝講): 아침공부
주강(晝講): 점심공부
석강(夕講): 저녁공부
이렇게 의무적으로 하루에 2시간씩 총 6시간을 신하들과 공부를 했다.
윤대(輪對): 의무적으로 각 관청의 관리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아래로는 선비부터 위로는 재상까지 그들의 상소문을 받아서 읽어야 한다. 상소문 읽는 시간을 잠자기 직전으로 배치했다. 조선 시대 왕들을 쥐 잡듯이 잡아서 성군으로 만들겠다는 게 바로 정도전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1397년 원만하지 않았던 외교문제)
표전(表箋):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과 황태후, 황태자에게 올리는 전문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사신이 왕래할 때, 중국에 바친 것이다.
명나라가 표전에 트집을 잡자 정도전은 태조의 지원으로 요동정벌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정도전의 야심찬 요동정벌 계획은 이방원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만다.
(1398년 조선 최초의 궁중 비극, 제1차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아내 원경왕후 민씨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구입한 무기를 땅속에 숨겨 두었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무기가 부족해지자 이를 남편에게 전해준다.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명분은 정도전이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방원은 결국 정도전을 죽이고, 이복형제인 방번과 세자 방석가지 죽인다.
(1398~1408년 쓸쓸한 말년-얻는 것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둘째 아들인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왕실의 비극은 또다시 아들 방간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이어졌다.
-개국공신 파트너 정도전, 재상 중심의 세상을 꿈꾸다
-태조는 왜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아버지 이성계 VS 아들 이방원
제2대 정종
무늬만 호랑이, 유약한 왕? NO! 처세의 달인!
-왜, 정종은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을까?
-동생 이방원(태종)을 왕세자로 선언하다
-이방원(태종)도 부러워한 정종의 유유자적한 말년
정종(1357~1419년) 재위기간(1398~1400년) 이방과 왕비 1명, 후궁 9명, 자녀 17남8녀
(1398년 아버지를 따르던 무인, 동생을 대신하여 왕이 되다)
역대 조선 국왕 중 최초로 한양(경복궁)에서 정종이 즉위하게 된다. 지존의 자리에 오른 정종이지만 실상은 실권자가 아니었다.
(1398~1400년 정종, 조선 최고의 폴로 선수가 되다(격구를 즐긴 왕)
그는 무조건 몸을 낮췄다. 그래서 정종은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매일 격구를 하러 다녔다. 말을 타고 공채로 공을 치는 경기다.
정종은 가족간의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주의자로 보는 것이 적절?
(1399년 다시 개경으로 환도를 하다)
수도를 개경으로 옮겼다. 한양으로 새 도읍을 옮긴 지 불과 5년 만에 환도? 개경에서 제2차 왕자의 난 발발
(1400년 제2차 왕자의 반 발발)
제1차 왕자의 난이 이복형제끼리 일어난 변란이었다면, 제2차 왕자의 난은 동복형제 사이에서 일어난 변란이다. 이방원이 형 이방간을 진압하고 승리한다. 형 이방간을 살려두고 대신 변란의 책임을 묻기 위해 박포를 참수한다.
(1400년 왕위를 본래의 주인에게 넘기다)
정종은 왕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는 상태라 자연히 당시 실권자였던 이방원의 이름이 거론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1400~1419년 상왕이 된 이후, 유유자적한 삶)
제3대 태종
진짜 호랑이. 조선 유일! 과거에 합격한 임금? 왕권을 강화하다!
-피로 잡은 왕좌, 참된 왕권을 선보이다
-자발적인 의지로 왕위에서 내려온 유일한 임금
태종(1367~1422년) 재위기간(1400~1418년) 휘 이방원 묘호 태종
왕비 1명, 후궁 9명, 자녀 12남17녀
(조선건국이후 아버지의 자랑이었던 아들-조선 유일의 과거 급제자)
조선시대에는 출세하려면 누구라도 공평하게 과거시험을 봐야 했다.
(1402년 조사의의 난-아들을 몰아내기 위해 모반에 가담한 아버지)
(1400~1418년 태종의 업적)
첫째, 6조직계제 실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왕-의정부(영의정 좌의정 우의정)-6조 의 관계에서 왕이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이 직접 6조에게 명령하고 보고 받는 것이 바로 6조직계제다.
둘째, 사병혁파: 왕위에 오른 후 사병을 다른 사람이 쥐고 있으면, 반란이나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사병을 없앤다.
셋째, 외척탄압: 즉위 2년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을 별궁으로 맞아들인다. 민씨는 화병과 우울증으로 자리에 눕는다. 부인의 남매인 민무구, 민무질을 제주도로 보낸 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다.
넷째, 사간원의 독립: 무시무시한 절대권력 앞에서 직언을 서슴지 않는 관리들을 주변에 포진시키누 왕이 바로 태종이다.
다섯째, 거북선 제작: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의 거북선은 달라
여섯째, 선위 파동: 살아있는 왕이 후계자에게 양위하는 것이다. 선위 파동은 이른바 왕이 신하들을 간 보는 것과 같다. 결국 태종은 충녕대군에게 즉위식 옷을 입혀 억지로 양위를 한다. 이로써 제4대 임금 세종이 탄생한다.
(1417~1418년 천하의 태종도 풀지 못한 숙제-골칫덩이 맏아들)
태종의 첫째 아들이 양녕대군, 둘째가 효령대군, 셋째가 충녕대군, 넷째가 성녕대군이다. 충녕대군은 한 권을 무려 100번씩 반복해서 본다. 그리고 중요한 책은 100번을 더 읽어서 200번을 읽는다. 특히 구소수간(歐蘇手簡)이라는 책은 무려 1100번을 읽었다.
충녕은 세자가 된지 불과 2개월 만에 왕(세종)이 된다. 그의 나이 22세의 일이다.
(1418년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다)
조선왕조 27명 임금 중에서 자발적으로 양위한 이는 태종이 유일하다.
오늘날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을 탄생시킨 일등공신이다. 아버지 태종이 잘 닦아놓은 기반 덕분에 세종이 위대한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제4대 세종
위대한 호랑이. 백성의, 백성에 의한, 백성을 위한 임금
-노력하는 천재, 세종!
-행복한 백성들 뒤에는 뼈 빠지게 고생하는 신하들이 있었다?!
-세종의 며느리가 동성애자였다니...
세종(1397~1450년) 재위기간(1418~1450년) 휘 이도 묘호 세종
왕비 1명, 후궁 5명, 자녀 18남4녀
(1418~1450년 세종이 위대한 이유?!)
세종, 조선후기의 정조, 이순신 장군 이들을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애민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419년 대마도 정벌-왜구를 소탕한 태종?!)
태종이 셋째 아들인 충녕에게 왕위를 넘길 때, 세종에게 모든 걸 다 주지만 딱 하나 주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군사권이었다. 1443년(세종25년)에 대마도주와 세견선 등 무역에 관한 조약을 맺고, 삼포(부산, 마산, 진해)에 일본인이 체류하는 것을 허락했다.
(1430년 소통의 왕-조선 최초의 여론조사 시행)
세종은 전세에 공법이라는 제도를 시행한다. 풍년과 흉년, 그리고 토양의 질을 고려해 차등적인 공법을 시행했다. 세종은 공법을 시행하기 전에 1430년3월5일부터 8월10일까지 5개월 동안 공법 시행 여부에 대한 여론 조사를 실시한다. 당시 이 조사에 무려 17만3천여명이 참여한다. 가하다는 자는 9만8천657명, 불가하다는 자는 7만4천149명이다.
(1430년 약자의 편-노비에게 100일의 출산 휴가를 주다)
출산 전 30일부터 일손을 놓도록 했다.
(1434년 남자 노비에게도 출산 휴가를 주다)
사역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의 휴가를 주라
(1418~1450년 악덕 사장 세종?!)
피해사례 1. 나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
영의정 이직, 우의정 권진이란 신하는 세종 13년(1431년)에 제 나이가 이미 75세라, 둔하고 사리가 어두워서 하는 일마다 실수가 있으니, 그만 사직하겠노라. 하지만 세종은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우의정의 자리에 앉힌다.
피해사례 2. 부모 삼년상? 그까짓 것 100일만 해!
윤회라는 신하가 모친상을 당한다. 조선시대에는 부모상을 당하면 벼슬을 그만두고 삼년상을 지내야 한다. 주요 관직의 공무원들은 딱 100일간만 상을 지내고 바로 복직하라고 명한다.
피해사례 3. 황희의 웬수=세종
황희는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이에 책임감을 느끼고 87세의 나이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세종은 그의 사직서를 수락하지 않는다. 세종의 재임기간 32년 중 18년을 영의정으로 재직한다.
(1436년 의정부서사제 실시)
의정부의 황희와 맹사성과 상의해, 그런 다음 의정부는 이를 간결히 압축해서 나한테 보고하라고. 단 사형문제, 군사 문제, 인사 문제 등 이 셋은 민감하니까 나한테 직접 보고해. 그 외의 수천가지 잡다한 일은 이제 의정부가 알아서 해, 알았지?
왕권과 신권의 조화. 이것이 이상적인 유교사회가 꿈꾸던 방식이었다.
(1441년 시각장애인 세종)
40대에 건강이 안좋아진다. 특히 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1443년 한글의 창조자 세종)
세종은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글을 창조했다.
세종은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의 책을 출판하였고, 유학자인 정인지 등을 통해 훈민정음 해설서를 만들어 보급하도록 했다.
능력있는 사람이라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등용하는 합리적인 왕이 바로 세종이었다.(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 귀화인, 어머니는 관기)
(1443년 자주적인 시간 계산을 하다-칠정산)
세종은 칠정산을 편찬한다. 최초의 역법서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달력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만든 달력이 바로 칠정산이다. 칠정이란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일곱 개의 별을 말한다. 이처럼 별의 위치를 계산한 완벽하고 자주적인 역법서, 이게 바로 칠정산이다.
(예악으로 백성을 교화하다 1434년 삼강행실도 편찬 1433년 음악 정리)
윤리와 음악교육을 위해 세종은 삼강행실도라는 책을 만들었다. 삼강행실도는 3강인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에게 귀감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의 이야기를 뽑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이다.
(인간 세종-육식남 세종)
내가 죽어도 세종은 고기반찬을 꼭 먹도록 해라.
(1418년 세종의 비극적인 가족사 1-장인의 죽음)
아무것도 모르던 심온은 중국에서 돌아오는 중에 압록강에서 체포되었고 죽임을 당한다. 세종은 왕이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심온은 사위가 왕이기 때문에 죽게 된 거나 마찬가지다.
(1436년 세종의 비극저긴 가족사 2-동성애를 한 며느리)
조선시대에 궁녀들의 동성애를 은어로 대식이라고 한다. 원래 대식이란 궁녀의 가족들이 궁궐 밖을 자유롭게 출입하지 못하는 그녀들을 찾아가, 궁녀의 처소에 모여 함께 밥을 먹는 걸 뜻하는 말이다. 임금의 승은을 입지 못하는 궁녀들이 외부인을 데리고 와 동성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원래의 의미가 변색된 것이다. 특히 혼자 방을 쓰는 상궁들을 중심으로 대식이 이루어지곤 했다.
제5대 문종
피곤한 호랑이. 세자만 30년, 아버지 세종을 쏙 닮은 임금
-문종(文宗)은 사실 무종(武宗)이어야 했다?!
-준비된 임금 문종,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
문종(1414~1452년) 재위기간 1450~1452년 휘 이향 묘호 문종
왕비 1명, 후궁 2명, 자녀 1남 2녀
(1421~1450년 약 30년 동안의 세자 활동)
1422년부터 세종이 승하한 1450년까지 대리청정
신기전:조선시대에 사용된 화살무기로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 제작된 것을 세종 시절 발전시켜 완성
(1441년 측우기는 장영실이 만들지 않았다!)
측우기는 세종 때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기구
세종 때 일정 기간 동안 구리 통에 빗물을 모아 그 깊이를 측정하는 측우기 발명
문종이 만들었다.
(1450~1452년 군사에 힘쓴 명군(名君)
문종은 신하들에게 병서를 논의하자고 할 만큼 군사 전반에 관심이 많았던 임금이다.
(조선 최고의 미남, 문종)
문종은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흡사 삼국지의 관우를 닮은 모습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홀아비 문종)
삼수 끝에 어렵게 맞이한 아내, 그가 바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다. 문종이 세자였던 1441년 당시 세자빈이었던 권씨는 아들을 낳고 시름시름 않다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불과 24세였다. 권씨의 죽음 이후 문종은 다른 정실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다.
(문종의 죽음)
성군 아버지 세종 만큼 명군이던 문종은 홀로 남겨진 아들을 신하들에게 부탁한 뒤 2년이 조금 넘는 재위 끝에 승하한다.
제6대 단종
어린 호랑이. 15세에 상왕이 된 외로운 소년 군주
-단종이 고명대신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수양대군, 조카인 어린 왕에게 칼을 겨누다!
단종(1441~1457년) 재위기간(1452~1455년) 휘 이홍위 묘호 단종
왕비 1명, 후궁 없음, 자녀 없음
(혈혈단신 소년 군주)
단종이 6세(1446)가 되는 해에 할머니 소현왕후가 돌아가셨고, 10세가 되었을 땐 할아버지 세종이 승하한다. 임금의 유언을 받든 대신들을 고명대신이라고 한다.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가 바로 고명대신으로 임금의 유언을 받은 것이다. 결국 단종을 보필한 것은 왕실의 어른이 아닌, 아버지 문종의 유언을 받든 고명대신들이었다.
(야심가 숙부, 수양대군)
세조(수양대군)가 말하기를 나는 국정에 참여하지 아니할뿐더러 또한 여러 재상이 있으니, 비록 두어달 원행을 하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단종실록 3권 즉위년(1452)9월10일
(1541년 황표정사)
김종서가 추천하는 사람의 명단 위에 노란색 표시점을 찍어 왕이 그 사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황표정사라고 한다. 이는 당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서 측에서 시행한 변칙적인 인사행정이었다.
(1453년 癸酉靖難 계유정난)
1453년10월10일 김종서의 집에 복면을 쓴 검은자들이 떼거리로 들이닥쳐 김종서를 죽이고, 황보인 등을 모두 제거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김종서가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김종서 세력을 숙청했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절대적 권력을 갖게 되었다. 계유정난은 계유년에 발생한 어지러운 난을 바로잡았다는 뜻이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으로 조선의 핵심 관직인 의정부영사·이조판서·병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를 겸직했다.
(1453~1455년 15세에 상왕이 된 임금, 단종)
계유정난 당시 안평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고(1453년10월18일), 이후 단종을 지지하던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도 유배되자(1455년6월), 단종은 결국 왕위를 숙부 수양대군에게 양위한다. 1455년 윤6월11일, 재위기간 3년여 만에 일어난 일이다.
제7대 세조
무서운 호랑이. 피로써 이룬 세조의 왕권강화
-모사꾼 한명회,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살생부를 만들다
-형제와 조카를 죽이고 이룩한 왕권 강화
-세조의 아내와 술! 그리고 불교 사랑
세조(1417~1468년) 재위기간 1455~1468년 휘 이유 묘호 세조
왕비 1명, 후궁 1명, 자녀 4남1녀
(1455년 인정받지 못한 임금)
당시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넘긴 사람은 조선 최고의 충신, 성삼문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성삼문이 옥새를 건네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우리는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오!)
세조시절에는 여러 가지 거사와 난이 일어난다.
세종은 손자인 단종을 세손으로 책봉하고 나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집현전 학자들에게 세손을 부탁했다. 단종이 상왕이 된 지 1년만에 성삼문, 박팽년 등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운동(1456년)이 일어난다. 그러나 거사는 이루어지기도 전에 발각된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했던 김질이 이를 누설한 것이다.
6명의 충신-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생육신(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삼족(친가 처가 외가)
(1457년 끝나지 않는 비극)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낸다. 스스로 쓸쓸히 떠난 왕, 그가 바로 단종이다.
총 27명의 임금중에서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총 7명뿐이다.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을 이어 아버지인 문종이 대리청정하고 있을 때 태어났다.
(세조가 받은 저주)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에 의해 끔찍한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의 모사꾼-한명회)
칠삭둥이 한명회: 태조가 살던 개경의 집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된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참모 역할을 하게 된다. 계유정난 당시 한명회는 궁궐 앞에 무사와 대기한다. 그리고 궁궐로 들어오는 대신 중에서 자기와 반대파인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인다. 가장 단순하게 세조의 반대파들을 제거함으로써 세조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한명회는 말년에 쉬고 싶어서 정자를 만든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압구정이다.
(인간 세조)
-소문난 효자, 애처가: 세조는 어머니 소헌왕후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세조는 아내였던 정희왕후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애주가 세조: 신숙주는 원래 집현전 학자였지만 세조 쪽으로 돌아선 변절의 아이콘이다.
(불교에 심취한 임금)
불경을 번역하고 간행하는 기관인 간경도감을 만들고 원각사라는 절과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세운다. 이들은 오늘날 종로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는데, 원각사는 터만 남아 있고, 석탑은 국보 제2호의 유형문화재이다.
(1455~1468년 세조의 업적)
-6조직계제 시행: 태종 이방원이 했던 것처럼
-왕권 강화: 유향소, 집현전, 경연 폐지
-경국대전 편찬 작업 착수
제8대 예종
단명한 호랑이. 12세에 아들을 낳은 임금
-아버지 세조처럼 왕권강화를 꿈꿨던 임금
-재외 1년 만에 갑작스러운 죽음, 예종을 죽게 한 병은?
예종(1450~1469년) 재위기간 1468~1469년 휘 이황 묘호 예종
왕비 2명, 후궁 없음, 자녀 2남 1녀
(1460년 조선왕조 최연소 아버지-12세에 아들을 낳다)
예종은 1468년 19세에 왕이 된다. 그런데 이미 그때 8세인 아들이 있었다. 예종은 세자였던 1460년에 11세의 나이로 한명회의 딸인 정순왕후 한씨(16세)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혼인한 다음 해(1461년)에 아들 인성대군을 낳는다. 아들을 낳은 정순왕후 한씨는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아들인 인성대군 역시 3세의 어린 나이에 풍질을 앓다 죽게 된다.
(1468년 아버지를 닮고자했던 징검다리 임금)
이시애의 난(세조 말년인 세조13년 1467년에 일어난 대규모의 반란)
구공신들이 올린 신종을 거부하고 세조라 결정한 것은 더는 임금이 구공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걸 의미한다.
(1468년 말조심의 교훈-남이의 옥)남이는 세조가 집권하던 시기에 무인으로 활약하며 세조13년에 발발한 이시애의 난을 진압했다. 거열형(팔과 다리를 각각 소나 말, 수레 등에 묶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당겨 온몸을 찍어 죽이는 형벌)
(1469년 갑작스러운 죽음)
예종에게는 고질병이 있었다. 발에 생기는 족질이다.
제9대 성종
모범생 호랑이. 조선 최고의 모범 임금
-왕위 계승 서열 3위, 장인 한명회의 힘으로 왕이 되다
-조선 고유의 법전, 경국대전을 완성하다
-왕으로서는 100점! 남편으로서는 0점!이었던 성종
성종(1457~1494년) 재위기간 1469~1494년 왕비 3명(폐비포함) 후궁 9명, 자녀 16남12녀
(1469년 왕위 계승 서열 3위, 왕이 되다)
예종의 조카이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데는 그의 장인어른이 한명회라는 점도 크게 작용
자율산군은 예종이 승하한 바로 그날 왕으로 즉위한다.
(1469~1476년 7년 동안의 수렴청정)
성종이 왕위에 오른 나이는 13세.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 성종의 작은어머니 안순왕후,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
이 세 여인을 모시기 위해 창경궁이 만들어졌다.
성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경연에 많이 참석한 왕이다. 25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무려 9229회의 경연에 참석했다.
(1469~1494년 성종의 업적: 조선 정치제도의 기틀을 완성하다)
경연제도의 부활과 홍문관 설치 : 조선 최고의 석학들과 토론하고 학문을 논하는 건 조금 부담스러웠다 보다. 그래서 오늘로 치면 대통령 자문기구이자 조교집단인 연구실 홍문관을 설치한다.
유향소의 부활: 지방에서의 주도권 장악 위해
사람의 등용: 성종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지방에서 새로운 세력을 기용한다. 신진세력, 사림파다.
지방에서 온건파 사대부들은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성종이 이들을 중앙으로 대거 등용해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대간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성종은 이들을 통해 훈구파를 견제할 참이었다.
세종과 닮은 성종의 업적: 성종은 악학궤범이라는 음악 백과사전을 만든다.
성종은 국조오례의를 완성한다.
경국대전-조선의 기본법전을 완성하다.
태조는 조선이라는 토지를 확보하고, 태종은 그 땅의 잡초를 뽑고 자갈을 골라 땅을 일구고, 세종은 조선이라는 멋진 집을 완성하였다면, 성종은 경국대전이라는 그 집의 사용설명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476~1482년 바람의 아들 VS 질투의 화신)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였던 윤씨는 성종의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며 비행을 저지르다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았다. 당시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의 나이가 6세였다.
제10대 연산군
미친 호랑이, 조선 최고의 폭군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고도 복수의 칼날을 숨기다
-신하들의 입을 막고, 자신의 귀를 닫은 연산군
-천 명의 기생과 흥정망청했던 임금
연산군(1476~1506년) 재위기간 1494~1506년 왕비 1명, 후궁 3명, 자녀 4남2녀
(1483~1494년 존재감이 없던 고독한 세자)
조선왕조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인물 /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자식이었지만 성종의 적장자이었기 때문에 7세에 세자가 되었고 12년 동안 왕세자 수업을 받는다. 그리고 19세에 아버지 성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10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1495년 친어머니의 존재를 알았지만 복수의 칼날을 숨기다)
(1494~1498년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던 연산군)
(1498년 첫 번째 피바람이 불다, 무오사화)
조의제문(김종직이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문제는 항우는 수양대군을, 의제는 단종에 비유했던 것이다. 연산군은 조의제문을 읽으며 부들부들 떤다. 연산군은 수양대군의 증손자이기 때문에, 증조 할아버지를 비방한 건 곧 왕인 자신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한다. 관을 절단하고, 시신을 다시 벤다는 뜻이다.
(1500~1504년 폭군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신언패(말을 삼가라)
(1502년 연산군의 눈은 낮았다? 연산군의 장녹수에 대한 사랑)
장녹수에 대한 연산군의 사랑은 맹목적
(1504년 갑자사화-어머니를 향한 피의 전상서)
어머니의 죽음을 주관한 그룹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한 그룹
어머니의 죽음을 끝까지 말린 그룹
연산군은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어머니를 제안왕후로 추승(후대에 이름이나 관직을 올림)한다.
(1505~1506년 천명의 기생과 향락을 즐긴 폭군)
학문을 연구하는 성균관의 대성전을 동물원으로 만든다.
(1506년 연산군의 최후)
더는 연산군의 폭정을 참을 수 없는 신하들은 반정을 일으켰고, 결국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된다. 그리고 2개월 뒤에 병으로 숨을 거둔다.
제11대 중종
변덕쟁이 호랑이. 조광조를 등용하고 버린 임금
-임금도 읽어야 했던 초등 교과서(소학)
-중종의 남자, 조광조! 중종에게 버림을 받다
중종(1488~1544년) 재위기간 1506~1544년 왕비 3명, 후궁 9명, 자녀 9남 11녀
(1488~1506년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
진성대군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된다.
(1506년 바지임금의 치마이야기)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세운 3인방이다. 반정 후 이들은 좌의정 우의정 형조판서에 오르게 된다.
쫓겨난 단경왕후는 중종을 그리워하여 경회루와 마주한 인왕산 바위에 자신의 치마를 펼쳐 놓았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온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이다.
(1515~1519년 중종의 남자, 조광조)
조광조는 급진적인 개혁가였다.
소격서 폐지: 도교와 관련된 제사와 의식을 행하던 곳
향약의 보급과 현량과 실시: 향약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을 말한다.
과거는 주로 중앙의 훈구대신들의 자녀들이 합격을 많이 한다. 현량과(추천을 통해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른 후 관리로 등용하자는 것이다)
(1510~1519년 조선 최고의 승진 속도)
조선시대 초고속 승진을 한 사람은 바로 이순신과 조광조다.
(1519년 버림받은 조광조와 기묘사화)
중종은 조광조가 반역을 꾀했다는 훈구파의 말을 믿고 그에게 사약을 내렸다. -기묘사화
개혁을 꿈꿨던 젊은 학자 조광조는 왕의 신임을 잃으면서 목숨까지 잃었다.
제12대 인종
9개월만 호랑이. 1년도 채우지 못한 조선 최단기 임금
-3세 때부터 책을 줄줄 읽었던 신동
-거식증에 걸린 인종이 단식을 한 이유는?
인종(1515~1545년) 재위기간 1544~1545년 왕비 1명, 후궁 2명 자녀 없음
(1515~1520년 왕세자의 이름 바꾸기)
인종은 제11대 임금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27년 세자를 저주한 세력들-작서의 변)
작서의 변(쥐를 불태운 변)
(1534~1544년 2인자에게 위협받는 1인자)
(1544~1545년 인종을 둘러싼 독살설과 거식증)
몸이 허약했던 인종은 금식으로 몸이 허약해져 재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종은 아버지 중종의 상례 중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금식을 했다.
제13대 명종
엄마가 호랑이. 어머니의 그늘에 가린 존재감 없는 임금
-임금 위의 여왕, 문정왕후! 대규모 숙청을 일으키다
-이제 도저히 못 참겠다, 임꺽정의 난!
명종(1534~1567년) 재위기간 1545~1567년 왕비 1명, 후궁 6명, 자녀 1남
(1545년 문정왕후와 수렴청정과 을사사화)
인종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이 조선의 제13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니 바로 명종이다. 명종은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해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어머니 문정왕후가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한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소윤세력이 대윤파를 모두 숙청한 사건,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1545~1565년 임금 위의 여왕)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수렴청정 동안 외척의 횡포를 방치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1545~1565년 문정왕후의 불교 사랑)
승려 보우를 봉은사 주지스님으로 임명했다. 문정왕후는 또한 불교를 장려하기 위해 도첩제를 시행한다. 전국 300여개 절을 공인한다. 도첩제란 출가한 승려에게 국가가 발급해주는 일종의 허가증이다. 그들의 지위를 법적으로 보장한 것이다. 이를 안 유생들이 조선 팔도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다.
(1555, 1562년 을묘왜변과 임꺽정의 난)
명종10년(1555)에 왜구가 전라남도의 강진, 영암, 장흥, 진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다. 을묘왜변 당시 비변사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했다. 임꺽정의 난은 조선에서 일어난 반란 중에서도 꽤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 임꺽정의 활동은 명종14년(1559년)부터 시작되는데, 특히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다. 임꺽정은 1562년1월 체포된다.
(1562년 후사가 없는 죽음)
후사가 없어 다음 왕은 중종의 손자 중에서 선택되어야 했다. 이때 선택된 사람이 바로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다. 인종과 명종에게는 조카벌이다. 16세의 하성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제14대 임금 선조이다.
제14대 선조
도망간 고양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 임금, 선조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조선은 무엇을 했는가?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질 수밖에 없었던 3가지 이유
선조(1552~1608년) 재위기간(1567~1608년) 왕비 2명, 후궁 6명, 자녀 14남 11녀
(1567년 최초의 방계 출신 임금, 선조)
조선왕조 최초로 후궁의 자녀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다. 선조 이전에는 모두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들이 왕위에 올랐다.
자신을 낮춘 창빈 안씨의 겸양 덕분에 명종은 배다른 동생이었던 덕흥대원군과 그의 아들들을 아꼈다고 한다.
(1575년 사림의 시대와 붕당 발생)
붕당(조선 중기 학문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형성된 집단)
사림(지방에서 중앙으로 등용된 원리원칙주의자 성리학자들이다. 제9대 성종때부터 중앙에 등용되었지만 제10대 연산군부터 제13대 명종 대까지 총 4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수많은 사림학자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명종 말년부터 사림들은 다시 중앙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황 조식 성혼 이이를 중심으로 학파가 결성되어 학문이 더욱 발전하게 된다. 서원과 향약을 통해 다시 모았다. 서원에서는 유학자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했다. 사림은 이를 통해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같은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사림이 주도하여 보급한 향촌 자치규약인 향약은 지방에서 사림의 입지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었다.
사림파들은 처음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다. 그 이유는 바로 이조전랑 이라는 관직 때문이다. 이조전랑이란 조선시대 6조 중 하나인 이조의 관직 이름으로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높은 관직은 아니었지만 인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탐내는 관직이었다. 김효원과 심의겸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귀게 된 것이다. 김효원이 사는 곳이 서울의 동쪽인 건청동, 심의겸이 사는 곳이 서울의 서쪽인 정동이었기 때문이다.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과 동인의 분열)
그런데 동인은 한 번 더 갈라서게 된다.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한 것이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 때문이다. 선조는 정여립에게 조금이라도 동조했거나 관련된 인물들을 다 죽인다. 특히 남명 조식의 문하생 중에 정여립과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퇴계 이황의 문하생들은 그나마 피해가 덜했다. 그 결과 이황과 조식의 문하생들이었던 동인세력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학맥에 따라 남과 북으로 분열하게 된다.
(1590~1591년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의 조선과 일본)
우리나라가 힘이 약해질 때마다, 일본은 항상 우리를 넘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일본의 무장이자 정치가, 일본의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대륙침공 전략을 펼쳤다.
일본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조선에 간첩을 보내 조선의 정황을 살펴보도록 하고, 한양으로 가기 위한 도로를 조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에서 유일하게 전쟁 준비를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1592년 16세기 동아시아 최대 전쟁, 임진왜란의 발발)
1592년4월13일 일본은 부산을 공격한다. 4월24일 충주에서 신립의 군대와 만났다. 신립은 군대가 섬멸되자 남한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이후 왜군은 큰 저항없이 한양으로 달려들었다.
이때 선조는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해 한양을 떠나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옮기며 점점 북쪽으로 몸을 피신했다.
백성들의 분노는 경복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경복궁의 노비 문서들을 불태우고 궁궐도 함께 불태웠다.
(1592~1598년 전쟁의 신, 이순신의 활약)
이순신의 물자 보급로 차단으로 전세는 역전된다. 1592년4월에 시작한 전쟁한 다음해 봄까지 이어진다. 1597년 다시 전쟁이 발발했으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이순신은 1592년5월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눈부신 23전23승의 승리를 이끈 장군이다.
(1598~1608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비겁함과 친명정책)
7년간의 전쟁이 끝났다. 명나라를 높이고 찬양하는 일은 조선을 지켜내지 못한 기득권 세력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는 이후 다시금 큰 전쟁을 초래하는 결과가 된다.
선조는 국가의 리더로서 책임감이 부족했다. 선조는 조선왕조 최악의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제15대 광해군
억울한 호랑이. 백성을 사랑한 전쟁의 영웅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이유 있는 양다리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광해군의 최후
광해군(1575~1641년) 재위기간(1608~1623년) 왕비 1명, 후궁 9명, 자녀 1남1녀
(1592~1608년 전쟁이 만든 왕세자)
광해군은 18세가 되고 나서야 왕세자의 자리를 받는다. 그리고 그는 피난 가는 아버지를 대신해 의병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역할을 충실해 해낸다.
(1602~1608년 위협받는 후계자의 자리)
51세의 선조가 19세의 어린 왕비를 맞이하니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다. 새어머니의 나이가 광해군보다 9세나 어렸다. 이후, 인목왕후는 1606년 아들을 낳았다. 선조가 그렇게 바라던 적장자를 55세가 되어서야 얻은 것이다. 아이의 이름을 영창대군이라고 불렀다.
(1603~1623년 광해군의 즉위와 개혁)
양전사업 실시: 전면적인 토지 재조사로 안정된 세금 확보
동의보감 완성: 동의보감은 선조 당시 시작, 광해군 1610년 수백 권의 의서를 종합한 최고의 동의보감이 탄생하게 된다.
조선 최고의 세금 개혁: 대동법 시행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세,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 각 지역의 특산물을 내는 공납
조광조는 지역의 특산물 대신 쌀을 내도록 하는 수미법을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드디어 광해군 때 지역의 특산물 대신 쌀을 내게 하는 대동법을 실시하게 된다. 대동법은 세금의 기준을 집집마다에서 토지로 전환했다.
(1618~1619년 백성을 위한 실리외교, 중립외교)
광해군이 즉위했을 당시, 중국의 국제정세는 기존의 지배자인 명나라와 북방의 새로운 세력인 후금이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안으로는 피폐해진 나라를 복구하였고 밖으로는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쳤다. 서인세력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광해군을 더 이상 왕으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 광해군의 과거행동인 폐모살제를 주목한다.
(1623년 폐모살제와 인조반정)
폐모살제(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다)
1613년 경상북도 문경 새재 강도사건-주요 관리들의 서자(첩의 소생) 7명이 범인-이 시건을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에 의해 정치적 사건으로 변질되었다. 당시의 훔친 돈이 광해군을 모함하고 제거한 후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고 몰아간 것이다. 이로 인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재남이 목숨을 잃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작은 골방에 불을 때서 증살시킨다. 인목왕후는 오늘날의 덕수궁에 가두어 창덕궁 출입을 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를 가두고 동생을 죽이는 폐모살제의 행동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지만 대의와 명분, 효를 강조하는 서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이 동조하여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광해군과 인조(당시, 능양군)는 서로 삼촌과 조카사이다. 종친 견재로 인한 한 왕족의 반발과 폐모살제 및 중립외교에 대한 신하들의 반발이 서로 일치하면서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광해군은 1623년 49세의 나이에 폐위되었으나 18년의 유배생활 끝에 1641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제16대 인조
무릎꿇은 호랑이. 오랑캐에게 사죄한 임금
-친명배금이 일으킨 2차례의 전쟁
-인조 맏아들 소현세자, 의문의 죽음 속 진실은?
인조(1595~1649년) 재위기간 1623~1649년 왕비 2명, 후궁 3명, 자녀 6남1녀
(1623년 인조와 서인정권의 친명배금 정책)
인조는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의 아들이었다. 광해군의 견제 때문에 능양군(인조)은 아버지도 잃고, 동생도 잃은 것이다. 능양군은 복수하기 위해 이를 갈았다. 결국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은 서인들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1624년, 1627년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이괄은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쌓은 인물이다. 원래 그는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떠날 채비를 하던 중 반정에 참여해 반정군을 통솔했다. 인조반정 이후 공을 치하하는 논공행상에서 이괄은 김유보다 낮은 2등급에 봉해진다.
1627년1월, 3만의 후금 군대가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한다.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 피난을 떠난다. 후금과 화친을 맺고 후금은 군대를 철수한다. 정묘호란이다.
(1636년 인조의 굴욕, 병자호란)
후금은 점점 세력을 키웠고, 1632년 조선에게 양국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명한다. 그리고 힘을 키워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더니 조선을 더 압박한다.
1636년 청나라가 쳐들어왔다.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1624년(인조2년)에 축성했다. 인조는 항복하고 청나라 황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한다. 즉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에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3번 숙인다. 그렇게 3번, 총 9번을 청나라 황제에게 절한 것이다.
이게 바로 삼전도의 굴욕사건이다. 임금의 이마가 피나도록 깨졌다. 인조의 장남과 차남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끌려갔다.
(1646년 아들에게 욕설을 한 비정한 아버지)
선조가 전쟁의 모든 공을 명나라에게 돌림으로써 자신의 부끄러움을 외면하고자 했다면 인조는 전쟁으로 인해 드러난 자신의 무능을 질투로 표출한다.
1645년 인질에서 풀려나 귀환한 소현세자 부부를 반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귀국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는다. 실록에서도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현세자가 죽고 나서 소현세자의 남은 가족들, 세자빈 강씨와 세 아들은 인조의 냉대를 받는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개새기라는 욕이 총 5번 나온다. 1번은 이인좌의 난 무리를 향한 욕이고 3번은 정말 강아지의 새끼를 의미하고 마지막 1번은 인조가 아들 소현세자를 향해 입에 담은 욕이다.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내, 세자빈 강 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자신의 손자였던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유배 보낸다. 그리고 차남이었던 봉림대군을 세자로 앉히니, 그가 바로 조선의 17대 임금 효종이다.
제17대 효종
와신상담 호랑이. 북벌로 아버지의 치욕을 씻으려 했던 임금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북벌을 꿈꾸다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을 붙잡은 조선의 사정
효종(1619~1659년) 재위기간(1649~1659년) 왕비 1명, 후궁 3명, 자녀 1남7녀
(1649~1659년 효종의 북벌운동-아버지의 치욕을 씻고자 하다)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즉위하자 어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북벌운동을 시행한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과 함께. 북벌정책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송시열과 송준길을 북벌의 인재로 등용한다.
(효종을 따르지 않는 신하들)
효종에게 북벌이란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었을지 몰라도,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봤을 때 결국 꿈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60년간 전쟁으로 지친 나라 살림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여론이었다.
(1653년 이방인 하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는 당시 최고 부대였던 훈련도감에서 일하게 된다. 조선 여자와 결혼도 시킨다. 아이까지 생겼다. 결국 이름을 박연으로 바꾸고 조선땅에서 눌러 산다. 하멜은 1653년부터 1666년까지 14년동안 조선에서 억류생활을 했는데, 그때가 바로 효종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하멜 표류기는 한국의 지리와 풍속, 정치, 군사, 교역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유명하다.
(1654년, 1658년 끝내 이루지 못한 효종의 꿈과 나선정벌)
조선이 청나를 공격하기 위해 몰래 군사력을 키우고 있는데, 청나라가 군대 요청을 해온 것이다. 오히려 청을 도와 러시아를 정벌한다.
(1659년 어깨깡패 효종의 죽음)
청룡언월도는 긴 손잡이가 있는 대도. 체구가 좋은 효종이었지만, 몸에 난 작은 종기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효종암살설-서인에 의해
그의 죽음으로 조선 최고의 논쟁인 예송논쟁이 발발했다.
제18대 현종
힘없는 호랑이. 조선 최고의 논쟁, 예송논쟁의 중심에 선 임금
-의복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의 휘말린 현종
-시대의 로맨티시스트? 부인이 단 한명뿐인 조선의 왕
현종(1641~1674년) 재위기간(1659~1674년) 왕비 1명, 후궁 없음, 자녀 1남3녀
(1641년 족선 유일의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
아버지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1659년, 1674년 조선 최고의 논쟁, 예송논쟁)
예송논쟁은 효종이 승하하고 나서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2차례 논쟁한 사건을 말한다. 상복 입는 기간을 갖고 다투다 여당과 야당이 바뀌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양반들은 그들의 약해진 권한을 회복하기 위해 예학을 보급하고 족보학을 강조하는 분위기 형성에 여념이 없었다.
1차 때 일어난 논쟁을 기해예송이라고 한다.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에 대해 서인들은 1년만 입을 것을 주장한다. 사대부들은 장남 이하의 아들에 대한 상복은 1년을 입었는데,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사대부의 법도대로 1년짜리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남인들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엄연히 왕이었으므로 왕과 사대부를 같이 볼 수 없다며 3년을 입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후, 효종의 아내이자 현종의 친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승하한다. 이로서 2차 논쟁, 갑인예송이 일어난다. 서인과 남은 또다시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두고 대립한 것이다. 서인은 인선왕후가 차남의 아내란 이유로 9개월을 주장하고, 남인은 왕의 아내라는 이유로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자가 아닌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을 신하들이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대립한 문제였다.
(조선 유일, 단 한명의 아내를 맞이한 임금)
조선의 27명 중에서 유일하게 후궁도 없고, 게다가 왕비도 단 한명만 둔 왕이 있으니, 그가 바로 현종이다. 현종은 영의정을 지낸 김육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후, 둘 사이에서 1남3녀를 둔다.
제19대 숙종
금수저 호랑이. 장자 프리미엄의 끝판왕
-소년 군주 숙종, 정치 9단 송시열을 누르다
-3차례의 환국으로 숙종이 얻은 왕권강화
-실록이 인정한 조선 최고의 미녀, 장희빈
숙종(1661~1720년) 재위기간(1674~1720년) 왕비 3명, 후궁 6명 자녀 6남2녀
(1661~1674년 장자 프리미엄의 끝판왕, 순금수저 임금)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아내가 한 명뿐인 임금. 1남3녀 중 외아들 1661년에 출생한 숙종은 6세에 세자에 책봉되고 14세의 나이로 아버지 현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적장자로 왕위로 오른 임금은 단 7명뿐이다(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숙종처럼 3대에 걸쳐 외아들인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약 46년동안 재위한 숙종의 입지는 어머어마하다. 숙종은 수렴청정을 하지 않고 바로 직접 정치를 한다. 그리고 잔뼈가 굵은 고단수의 신하들을 자기 뜻대로 주무르기 시작한다. 정치 9단이자 원로인 송시열에게 사약을 낸 것만 봐도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불같은 성격의 숙종-아버지와는 다르게!)
나는 아버지처럼 신하들한테도, 집사람한테도 휘둘리지 않을 테다!?
(1674~1675년 정치 고수 송시열을 누른 젊은 임금)
송시열이 예를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하며 귀양을 보낸다. 송시열은 인조-효종-현종-숙종까지 4대에 걸친 서인의 영수이자 원로이다. 그런데 왕이 된 지 1년도 안된 소년 군주가 이런 정치 원로를 귀양 보낸 것이다.
(1680~1694년 숙종의 탕평책)
탕평책은 정치를 탕탕하고 평평하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이 분화되어 있었다.
너희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매일 싸우니, 내가 저울처럼 균형을 바로 잡아주겠더ㅏ.
(1680년 환국의 시대1-경신환국)
허적의 아들이 역모를 꾀했다! 허견의 역모죄로 남인들이 줄줄이 의금부로 끌려온다. 그리고 남인의 핵심인물이던 허적과 윤휴가 몰락하게 된다. 이로써 6년 동안 집권했던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다시 서인의 시대가 왼, 이 사건이 바로 1680년 경신환국이다.
(1689년 환국의 시대2-조선 최고의 스캔들과 기사환국)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20세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서인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가 궁에 들어온다. 그리고 오랫동안 인현왕후와 숙종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조선 최고의 미녀인 장희빈(장옥정)이다. 장희빈은 숙종보다 2살 많은 연상녀였다. 그녀는 조선왕조실록마저 인정한 절세미녀였다. 장희빈은 역관 집안의 딸로서 신분은 중인이었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장희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들이 최후로 다시 권력을 잡았던 사건,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어 궁궐 밖으로 쫓겨나고, 이를 대신해 후궁이던 장희빈이 중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장희빈의 아들 윤은 세자가 된다.
(1694~1701년 환국의 시대 3-갑술환국과 장희빈의 최후)
숙종은 조강지처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숙종의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니, 그녀가 바로 무수리 최씨였다.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이 되는 영조를 낳았다. 이러한 숙종의 마음을 눈치챈 서인들은 재빨리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했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제20대 경종
병약한 호랑이.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비운의 임금
-힘이 없는 임금의 험난한 왕위 지키기
-동생 연잉군(영조)이 올린 게장과 감, 그리고 경종의 죽음
경종(1688~1724년) 재위기간 1720~1724년 왕비 2명, 후궁 없음 자녀 없음
(1688년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나다)
경종은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 유명한 장희빈 장옥정이다. 경종은 새어머니인 인현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1701년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
한창 예민한 시기에 어머니의 죽음을 목전에서 바라봐야 했다. 수문록이란 야사집에는 친모 장희빈이 아버지 숙종이 내리는 사약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발악하다가, 경종의 아랫도리를 잡아당겨서 경종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701~1720년 엄마 없는 하늘 아래)
경종은 무려 31년 동안 세자 생활을 마치고 결국 아버지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0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1720~1724년 불안한 왕의 자리)
경종을 가장 위협하는 사람은 이복동생 연잉군이었다. 연잉군은 무수리 최씨(숙빈 최씨)의 소생이었는데, 그의 존재는 경종의 세자 시절부터 위협적이었다.
(1724년 게장과 감을 먹고 죽은 임금?)
연잉군이 경종에게 형님의 쾌차를 기원하며 게장과 감을 올린다. 평소 몸이 아파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경종이 그날만큼은 게장과 감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경종은 극심한 설사에 시달리게 되면서 더욱 건강이 약화된다. 왕의 병세가 악화되자 연잉군은 인삼과 부자를 처방한다. 어의들은 당시 처방의 재료들이 상극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결국 인삼과 부자를 마신 경종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제21대 영조
최장수 호랑이. 조선 최초의 천민 출신 임금
-영조 曰,“나는 형님을 독살하지 않았다! 이것들아!”
-탕평비를 세우며 조선의 중흥을 이끈 정책들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여 버린 비운의 부정(父情)
영조(1694~1776년) 재위기간(1724~1776년) 약 52년간 재위 최장수 기록 왕비2명, 후궁4명, 자녀 2남7녀
(1720~1724년 왕의 동생으로 산다는 것)
소론들은 노론의 명문가 자제들이 경종을 죽이려는 역모를 꾀했다고 보고했고, 그 결과 노론의 4대신 목숨을 잃은 신임옥사가 벌어진다.
(1724년 천민의 아들 왕이 되다)
영조는 출신 때문에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하들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더욱 모범적인 행동을 한다. 왕답지 않게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방석을 치우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바닥에 몇 시간이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724~1776년 조선 최고의 세프?-영조의 탕평책과 탕평채)
탕평채에는 여러 당을 골고루 등용하겠다는 영조의 의지가 담겨 있다.
탕평비는 성균관대학교(혜화동) 정문 왼편에 있다. 영조는 1724년 미래의 관료 양성소인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우고, 당파와 관계없이 관리를 등용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유교 경전인 서경의 홍범 편에 나오는 구절
무편무당 왕도탕탕(치우침과 무리가 없어야 왕도가 탕탕하고)
무당무편 왕도평평(무리와 치우침이 없어야 왕도가 평평하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중에서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만 등용한다.
(1728년, 1755년 영조를 거부한 사람들-이인좌의 난, 나주괘서사건)
1728년 이인좌의 난: 영조 4년(1728년)에 소론의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선왕(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개입되었다고 보았다. 이인좌는 삼남지방인 충청도, 호남, 영남에서 군사를 일으킨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세우고자 한다.
영조는 대구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를 세워 영남을 반역의 고향으로 삼는다. 이후 영남지역 사람들은 영조 재위동안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게 되었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나주벽서사건): 영조가 왕이 된지 31년이 되던 어느 날 전남 나주에 이상한 벽서가 붙는다. 벽서 작성자는 소론인 윤지였다. 윤지는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쓴다.
(영조의 업적-백성을 위한 애민 정치)
1750년 균역법 실시: 조선시대 백성들은 국가에 기본적으로 내야 하는 세금 3가지가 있었다. 전세(토지), 공납(특산물), 역(노동력)이다. 역은 군복무의 의무를 지닌 군역과 일반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으로 구분되었다. 군역은 16세이상 60세 이하의 양인에 부과하는 것인데, 임진왜란 이후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했고, 이는 국가 재정에 큰 힘이 되었다.
영조는 베2필을 1필로 내게 해 세금의 양을 반으로 줄였다. 이것을 균역법이라고 한다.
1756년 가발과의 전쟁: 영조는 재위 32년(1756)에 양반가 부녀자들의 가체(어여머리)를 금지하고 족두리로 대신하도록 명한다.
(1724~1776년 술과의 전쟁, 조선 최장기간 금주령!)
영조는 재위기간 내내 금주령을 내렸다.
(가혹한 형벌을 금하다)
압슬형(도자기 파현이 있는 사금파리에 죄인을 무릎꿇게 하고 그 무릎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형벌로 돌이 하나, 둘 올라가면서 사기 조각들이 살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위로는 돌의 무게가 짓누르고, 아래로는 사기 조각들이 계속 찌르니 제정신을 차릴수가 없다)
낙형(맨살에 뜨겁게 달군 쇳덩이를 올려 죄인의 몸을 지지는 것이다. 그럼 살을 태우는 누린내와 함께 죄인의 참혹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게다가 죄인의 얼굴에 죄목을 글자로 새겨 평생 수치스럽게 살도록 했다)
(1735~1762년 금지옥엽 늦둥이 탄생)
영조는 후궁인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영빈 이씨가 낳은 왕자가 바로 이선, 사도세자이다. (영조가 41세어 얻은 아들이다) 영조는 이선이 태어난 다음 해, 한 돌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세자로 책봉한다. 조선시대 최연소 세자 책봉이다.
(1762년 역적이 된 아들-사도세자의 죽음)
아들 이선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영조와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아무도 들지 못했던 고조할아버지 효종의 청룡언월도를 휘두를 정도로 힘이 세졌다. 이선은 무예신보라는 책을 썼다. 오늘로 치면 특공무술 교본을 쓴 것이다.
아버지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지만, 사실상 노론의 추대로 왕이 된 인물이라 아무래도 노론에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세자 이선의 추종세력은 노론과 대립하고 있는 소론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선이 15세에 대리청정을 하게 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대리청정이란 왕을 대신해 세자가 국가의 일을 돌보는 것이다. 세자는 1749년 15세부터 14년 동안 대리청정을 한다.
의대증(衣帶症): 옷을 입는 것을 두려워하는 증상 아마도 이 옷을 입으면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것 같다.
한중록: 이선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환갑의 나이에 쓴 회고록
아버지는 아들을 역적으로 만들어 뒤주에 가두게 했다. 이로써 아버지가 아들을 왕이 세자를 죽인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임오화변이다. 사도세자가 죽은 해가 1762년 임오년이기 때문이다.
제22대 정조
완벽한 호랑이.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힘쓴 임금
-역적의 아들, 애민군주가 되다
-지덕체를 모두 갖춘 임금,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수원 화성을 축성하다
정조(1752~1800년) 재위기간(1776~1800년) 왕비 1명, 후궁 4명, 자녀 2남2녀
(역적의 아들)
정조 이산은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산은 역적의 아들이니 당연히 왕이 될 자격도 박탈되어 궁궐밖으로 내쫓긴다. 그러나 영조는 손자 이산을 쫓아낸 지 2개월 만에 다시 궁궐도 불어들인다. 후사가 없던 영조는 왕위게승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적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요절한 효장세자(이산의 큰아버지) 양아들로 입적시킨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이산은 왕세손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만들어진 천재)
영조는 세조 이산을 무척 예뻐했다. 이산은 그저 묵묵히 학문에만 열중하고 열심히 제왕학을 공부한다.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
이산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야심한 시각까지 깨어 있으면서 그 위기를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한 밑거름으로 삼은 것이다. 이산은 논어, 대학, 중용과 같은 유교 경전을 좋아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헌신)
홍씨는 자신을 낮추어 시아버지의 신임을 얻었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할아버지와 손자는 유대감을 쌓아갈 수 있었다.
(1776년 과인은 세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사도세자를 위해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사당인 경모궁을 조성했다.
(1776~1800년 조선의 중흥을 꽃피우다)
정조의 탕평책:
규장각 설치: 정조가 세운 왕립도서관 창덕궁 후원에 세워졌다. 당파와 관계없이 유능한 청년 학자들을 모아 규장각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이때 규장각에서 공부한 인물입 바로 실학자 정약용이었다.
초계문신제 실시: 초계문신이란 규장각에 소속되어 재교육을 밟은 나이 어린 문신들을 말한다. 정조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정치 뜻을 함께할 수 있는 후학을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서얼도 등용한다. 아버지는 양반이지만 어머니는 평민이거나 천민인 첩의 자식들이다. 서얼들을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과감히 등용한다. 당시 유명한 서얼 출신 검서관들은 실학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이다.
(뛰어난 무예 실력과 장용영 설치)
장용영은 정조가 왕의 신변 보호를 위해 설치한 국왕 친위대다. 장용영을 설치함으로써 붕당 세력의 기반이었던 기존의 군사체제인 5군영에 대항한 자신만의 군사적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규장각을 통해 문을 다잡고, 장용영을 통해 무를 구축해 격식과 품위를 갖추어 왕권을 강화한 왕이 바로 정조 이산이다. 하지만 아쉽게 장용영은 정조 사후 1802년(순조 2년)에 폐지된다.
(글쓰기와 소통)
정조는 일성록(日省錄)(나는 매일 반성한다)을 만들었다. 정조는 논어에 나온 나는 매일 세 가지 일을 반성한다에 감명 받아서 일성록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조는 말과 글을 통해 백성들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정조는 1777년2월부터 1800년 3월까지 66번의 행차를 했다. 연평균 3회 행차한 것이다.
(1791년 신해통공-백성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다)
시전상인의 품목 중에 6가지(비단 면포 명주 종이 모시 어물)를 파는 육의전만 제외하고 모든 금난전권을 폐지했다. 이것이 바로 신해통공이다.
(정조의 담배 사랑)
이렇게 좋은 담배를 온 백성들이 널리 이용할 방안을 최종 논술 문제로 출제한 것이다.
(1795년 정조의 꿈, 수원 화성)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
정조는 묘를 이장하면서 화성을 쌓기 시작한다. 조선의 왕 중에서 최초로 임금노동자를 고용한 고용주가 정조이다. 화성 안에는 논 , 밭, 뽕나무, 과일나무, 시장, 행궁, 장용영이 머물 공간 등이 있었다.
(1800년 정조는 독살당했는가?)
제23대 순조
무능한 호랑이, 수렴청정에 휘둘린 허수아비 임금
-순조의 증조할머니 정순왕후,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다
-정약용이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까닭
-세도정치의 시작은 정조 때문이었다?!순조(1790~1834년) 재위기간 1800~1834년 왕비 1명, 후궁 1명 자녀1남 5녀
(1800~1803년 왕 위의 여왕,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순조는 1790년6월18일 창경궁에서 정조와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규장각의 권한을 축소하고 장용영은 폐지한다. 사도세자의 신원 회복도 없던 일로 만든다. 수렴청정 3년동안 24년동안 노력한 정조의 꿈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1801년 신유박해-천주교를 박해하다)
정조때부터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가 시작한다. 그러나 정조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탄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자마자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된다. 1801년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박해가 바로 신유박해다. 당시 박해를 주도했던 세력이 바로 정순왕후 측근인 노론 강경세력이었다. 정약용은 신유박해 이후로 무려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하게 된다.
(1802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시작)
순조~철종 3명의 임금을 거치면서 무려 약 60년동안 세도정치가 전개된다. 왕권은 약해지고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와 같은 가문들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1811년 홍경래의 난)
홍경래의 난은 1811년(순조11년)에 평안도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이다. 바로 지역차별 때문이다.
(1827~1830년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과 죽음)
효명세자는 세도정치 때문에 왕권이 약화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세도정치로 무너져가는 조선을 다시 한번 일으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 바로 효명세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에 갑자기 병에 걸렸고 불과 22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제24대 헌종
최연소 호랑이. 8세에 즉위한 어린 임금
-위기와 혼란의 시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옆집감시제도
헌종(1827~1849년) 재위기간 1834~1849년 왕비 2명, 후궁 2명 자녀 1녀
(1834년 어린임금과 풍양 조씨)
조선의 제24대 임금인 헌종은 요절한 효명세자의 외아들이다. 8세의 나이로 즉위
헌종의 어머니는 조대비로 유명한 신정왕후로 풍양 조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1839년 오가작통법의 실시-서로를 감시하는 사회)
오가작통은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통으로 보았고, 이 다섯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한 명이라고 나타나면 나머지 네 집도 엄하게 벌한 것이다. 1839년 기해박해다.
제25대 철종
신데렐라 호랑이. 조선의 꼭두각시 임금
-촌수까지 고쳐가며 강화도 도령을 왕으로 만들다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걷었던 부패한 시대
철종(1831~1863년) 재위기간 1849~1863년 왕비 1명, 후궁 7명, 자녀 5남1녀
(1849년 왕이 된 강화도령?!)
조선의 24대 임금 헌종이 후사 없이 일찍 사망했다. 순조-효명세자-헌종에 이르기까지 아들은 오직 한 명씩 밖에 없었다. 조선의 제25대 임금으로 즉위한 사람은 강화도령이던 이원범이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손자였다. 조선 14대 왕인 선조보다도 더 심한 방계중의 방rPn 출신 왕이다. 순조의 왕비이자 왕실 최고 어른인 순원왕후는 이원범을 법적으로 효명세자의 형제로 만든다. 즉 철종을 헌종의 작은 아버지로 만들어 항렬문제를 해결한다.
(1849~1863년 조선판 신데랄라 임금! 그는 행복했을까?)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했지만 힘이 없는 철종은 안동 김씨의 권력 밑에서 자리만 겨우 보전하는 사이에 애꿎은 백성들만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1862년 임술농민봉기-민중은 울부짖는다)
농민들 사이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된다.
(1863년 철종의 죽음)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왕이 된 철종은 꼭두각시 임금이었다.
제26대 고종 대한제국 제1대 황제
비운의 호랑이. 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 있던 임금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10년간 섭정
-개항 이후, 근대 변화의 바람이 불다
-흔들리는 조선, 국호를 고쳐 새로운 변화를 꾀하지만...
고종(1852~1919년) 재위기간(1863~1907년) 왕비 1명, 후궁 6명 자녀 6남1녀
(1863년 왕이 된 소년)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조선후기에는 왕손이 매우 부족했다. 대원군이란 왕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에는 총 3명의 대원군이 있었다. 조선14대 임금인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 제25대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 그리고 제26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어린 아들을 대신해 10년동안 섭정을 한다. 흥선대원군과 철종은 같은 항렬이다. 후대 왕의 항렬은 선대왕보다 낮아야 한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차남이던 이명복을 왕으로 앉힌 것이다. 그가 바로 고종이다.
(1863~1873년 흥선대원군의 10년 정치)
전국서원 47개만 남기고 다 혁파 경복궁 중건 시작 (당백전 발행)
(1873~1907년 망국으로의 길)
1905년 을사늑약체결 조선의 외교권 박탈 1907년 일본에 의해 고종은 강제퇴위 당한다.
(1919년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왕위에서 물러난 고종은 덕수궁에 머물며 살았다.
제27대 순종 대한제국 제2대 황제
나라 뺏긴 고양이. 병약했던 마지막 임금
-독차(毒茶)를 마신 조선의 마지막 왕자
-주인공이 참석하지 않은 황제 즉위식
순종(1874~1926년) 재위기간 1907~1910년 왕비 2명 후궁 없음 자녀 없음
(1874~1907년 병약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순종은 명성황후가 낳은 아들이다.
(1907~1910년 비운의 마지막 군주)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500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조선왕조는 1910년8월29일 경술국치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에필로그/역사를 아는 당신, 현재가 다르게 보인다
518년(1392~1910)동안 조선을 이끈 27명의 임금들을 만나보았다.
1 태조 개국군주
2 정종 허수아비
3 태종 왕권강화
4 세종 애민군주
5 문종 미인박명
6 단종 소년군주
7 세조 독재군주
8 예종 요절군주
9 성종 경국대전
10 연산군 흥청망청
11 중종 기묘사화
12 인종 단명군주
13 명종 을사사화
14 선조 임진왜란
15 광해군 중립외교
16 인조 병자호란
17 효종 북벌정책
18 현종 예송논쟁
19 숙종 환국군주
20 경종 유약군주
21 영조 탕평군주
22 정조 애민군주
23 순조 세도정치
24 헌종 세도정치
25 철종 세도정치
26 고종 망국군주
27 순종 조선멸망
부록1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 목록
순수의 시대(태조)
신기전(세종)
나는 왕이로소이다(태종~세종)
관상(문종~세조)
왕의 남자(연산군)
간신(연산군)
구르믈버서난달처럼(선조)
광해, 왕이 된 남자(광해군)
사도(영조, 사도세자)
역린(정조)
가비(고종)
부록2 /조선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목록
정도전(태조)육룡이나르샤(태조~태종)
대왕세종(세종)
뿌리깊은나무(세종)
공주의 남자(단종, 세조)
인수대비(단종, 세조, 성종)
왕과 나(성종, 연산군)
여인천하(중종, 인종)
불의 여신 정이(선조, 광해군)
왕의 얼굴(선조,광해군)
징비록(선조, 광해군)
화정(광해군, 인조)
장희빈(숙종)
동이(숙종)
장옥정, 사랑에 살다(숙종)
비밀의 문(영조, 사도세자)
이산(정조)
정조암살 미스터리(정조)
바람의 화원(정조)
성균관스캔들(정조)
명성황후(고종)
부록3 /한눈으로 보는 인포그래픽(호랑이로 표현한 조선의 임금들)
1 태조 이빨빠진 호랑이
2 정종 무늬만 호랑이
3 태종 진짜 호랑이
4 세종 위대한 호랑이
5 문종 피곤한 호랑이
6 단종 어린 호랑이
7 세조 무서운 호랑이
8 예종 단명한 호랑이
9 성종 모범생 호랑이
10 연산군 미친 호랑이
11 중종 변덕쟁이 호랑이
12 인종 9개월만 호랑이
13 명종 엄마가 호랑이
14 선조 도망간 호랑이
15 광해군 억울한 호랑이
16 인조 무릎꿇은 호랑이
17 효종 와신상담 호랑이
18 현종 힘없는 호랑이
19 숙종 금수저 호랑이
20 경종 병약한 호랑이
21 영조 최장수 호랑이
22 정조 완벽한 호랑이
23 순조 무능한 호랑이
24 헌종 최연소 호랑이
25 철종 신데렐라 호랑이
26 고종 비운의 호랑이
27 순종 나라뺏긴 고양이
조선왕조 최대 최소
왕의 재위기간 (누가 가장 길고 짧을까?)
1위 영조(약 52년)
2위 숙종(약 46년)
3위 고종(약 44년)
26위 예종(약 1년)
27위 인종(9개월)
왕의 아내(누가 가장 많고 적을까?)
성종(12명/왕비3명 폐비포함, 후궁 9명)
중종(12명/왕비 3명 후궁 12명)
단종(1명/16세의 나이로 왕위에서 쫓겨남)
현종(1명/명성왕후 김씨가 무서워)
나이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왕과 세자
영조(41세에 사도세자 얻다)
나이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왕과 왕비
영조 66세에 정순왕후 15세 (무려 46살 차이!)
조선최고의 백성사랑꾼
세종-백성을 위해 한글 창제
광해군-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방납 폐단을 막기 위해 대동법 시행
영조-백성들을 생각하며 검소한 삶을 강조
정조-격쟁을 열어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 듣고 해결
왕의 뒤엔 그가 있어다?!-왕의 2인자
태조-조선의 디자이너 정도전
세종-일 중독 임금의 파트너 황희 외 집현전 학자들
단종-든든한 고명대신 김종서
세조-킹메이커 한명회
중종-급진적 개혁가 조광조
고종-왕 위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조선왕들이 격하게 애정하는 것들
격구(정종)
고기(세종)
술(세조)
춤(연산군)
담배(정조)
커피(고종)
장희빈 -실록에 언급된 절세미녀
장녹수- 천하의 폭군도 취락려락한 여인
문정왕후- 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
신정왕후- 세도정치의 폐단을 일으킨 여인
대한민국이 선택한 역사 이야기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초판1쇄 발행 2016년7월20일
초판21쇄 발행 2017년1월6일
지은이 설민석
펴낸이 최윤혁 외 1인
펴낸곳 (주)도서출판 세계사
값 2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