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watch?v=Hl-ZArYqvoQ
2024.6.9(주일) 야고보서 4:11~17 ‘안개 같은 인생을 잘 사는 법’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고,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인생은 의미 없는 반복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시편기자는 시 90:10에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성경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선포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은 안개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안개란 지표부근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나타나는 기상현상을 말합니다. 주로 야간에 해가 지고 땅이 차가워지면서, 안개가 생깁니다. 이 안개는 바람이 없고 습도가 높은 맑은 날 야간에 잘 생기고, 비가 온 후 맑은 밤에도 잘 생깁니다. 그리고 이 안개는 특히 일출 후 1시간 사이에 많이 생기고, 보통 생긴 뒤 1-2시간 이내에 사라집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안개와 같다고 비유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안개가 생긴 지 한 두 시간 내에 금방 사라지는 것처럼 '인생이 짧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이 마치 안개와 같이 짧고 덧없으며,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인생은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지만, 곧 시들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시 103:15). 그러므로 성도는 우리 인생이 짧고 덧없는 안개와 같음을 인정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때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안개와 같은 인생을 잘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1-12절).
안개와 같은 인생을 잘 살려면, 형제를 비방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비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서 큰 적대심과 악의를 가지고 심하게 말하는 것이 비방이라고 생각합니다. 험담, 뒷담화, 뒷공론, 명예훼손, 모독, 중상모략 등 상대를 공격하고 해를 끼치기 위해 하는 말들만이 비방일까요? ‘비방’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 대항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악의와 적대심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 속에 악의가 분명히 있는데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인격과 평판에 해를 끼칠 목적을 가지고 말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 추측해서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정작 그 사람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습니다. 또는 사실을 과장하거나 불필요하게 반복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하거나 실수한 것에 대해 쓸데없이 반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과장해서 몇 번 그런 것을 항상 그렇다고 정의내립니다. 그것도 비방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할 때, 비방이라는 것은 당사자가 내 앞에 있다면 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 당사자가 내 앞에 있으면 왜 말하지 못할까요? 분명 그 형제가 기분 나빠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악의와 적대심이 크지 않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비방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무책임하고 악의적인 뒷공론의 죄만큼 성경에서 용서 없이 비난하고 있는 죄는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 그러한 비방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비방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어떤 여지도 주지 않았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다 해도, 그것이 사실에 입각해서 말한 것이라 해도, 나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라고 여겨져도, 야고보는 예외 없이 비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11절). 형제를 비방함이 왜 하나님의 율법을 비방함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칼빈은 말하기를 “비방자가 비방할 때에 율법대로 남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악심과 편견의 폭발로 남을 훼손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의 악한 판단으로서 율법을 대신하는 셈이 되므로 자기의 판단을 율법 이상으로 두는 것이 되고 그것은 율법을 비방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비방함은 율법이 금하는 것인데(레 19:16-18) 누구든지 그것을 어기고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율법까지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참람한 행동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관이십니다. 따라서 내 기준에 따라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주제를 넘는 것이며, 교만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제를 비방하는 자기 죄를 말씀으로 깨달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안개와 같은 인생을 잘 살려면 형제 비방을 뛰어넘어,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요일4:16)이시며, 우리들에게 ‘형제를 사랑하라’(레 19:18; 요15:12~17)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판단하실 수 있으며(12절), 우리는 서로를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만 우리를 공정하고 정당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인식할 때 형제를 비방하지 않고 사랑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형제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방하지 않을 뿐더러 남의 비방에도 쉽게 상처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개와 같은 인생을 잘 살려면 서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내가 용서받은 것같이 피차 용서하며 하나님의 판단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적용) 내 기준과 잣대로 판단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11절)
2.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를 인지해야 합니다(13-14절).
안개와 같은 인생을 잘 살려면 우리 인생이 안개와 같이 허무하고 덧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13-14절).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생 가운데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실수는 미래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예수님께서도 이런 우리들의 인생을 깨우쳐 주시려고 하루 밤 사이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을 거두어 가신다는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눅 12:16-21).
야고보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도 없이 그저 자기 계획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들으라”(13절)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헬라 지역을 다니며 장사를 해서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물론 계획을 세워 이윤을 남기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돈과 성공에만 집착하여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삶은 짧고 한정되어 있으므로, 현명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안개와 같은 인생을 잘 살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14절).
아랍인은 ‘인샬라’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많이 쓰는 정도가 아니라 입에 붙었습니다. “올 수 있니”라고 물으면 “인샬라”라고 대답합니다. “이 계약이 확실하니?”라고 물어도 “인샬라”라고 답합니다. ‘예’라는 대답 대신에 ‘인샬라’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인샬라’는 ‘신의 뜻이라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살아 본 사람들은 무슬림이 말하는 인샬라가 매우 모호해서 ‘예’인지 ‘아니오’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고 불평합니다. 무슬림과 사업을 하는 한 상사 직원이은 “이들이 말하는 인샬라가 예에 가까운지, 아니오에 가까운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사업에 성공하는 비결이다.”라고 말합니다. 무슬림은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니오’라는 부정적인 말보다는 ‘인샬라’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슬림과 어떤 약속을 할 때 그가 ‘인샬라’라고 말하면, 그 말이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판단하여 인샬라가 긍정인지 부정인지 정확한 해석을 해야 한다. ‘인샬라’라고 말하는 무슬림에게 예/아니오 또는 분명한 결정을 촉구하는 것은 결례가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인샬라’ 대신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뜻이라면’이라는 말을 우리 일상에서 사용하며,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런 주님의 뜻을 말씀안에서 찾고 구하여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인생에는 이런 도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계획은 사실 ‘0’입니다. 이 0에다 아무리 많이 곱해도 0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앞에다 ‘1’자를 하나 갖다 붙이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0이 하나면 10이 되고, 0이 두 개이면 100이 되고, 0이 셋이면 1,000이 됩니다. 그 ‘1’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의 계획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10이 되고, 100이 되고, 1,000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어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는 없지만, 말씀의 인도와 공동체의 권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참된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마 6:33,34).
적용)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확신으로 계획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말씀의 인도와 공동체의 권면을 잘 받고 있습니까?(13절)
3. 자랑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15-17절).
안개와 같은 인생을 잘 살려면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자기 능력을 믿는 자입니다. 이렇게 자신만 믿고 자만에 빠져 자랑을 일삼는 자를 허탄하고 악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16절). 쓸데없는 자랑, 사실과 다른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업가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어찌 보면 이 사람은 유능한 사람입니다. 자기 사업에 대해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업을 시작할 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해야 할 지역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사업 기간까지 정해 놓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사업을 통해 얻게 될 이윤까지 이미 다 계산해 놓았습니다.
사실 이 사람은 세상적으로 볼 때 대단한 사업가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이런 식으로 사업을 성공해 본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주저함이 없이 과감하게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업 설명회를 하듯이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런 태도를 '허탄한 자랑'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유능한 사업가를 비판하고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의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가 계획하면 다 될 줄 압니다. 자기가 추진하면 그렇게 될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사업에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사업이 자기 뜻대로 됐을 때, 그 모든 영광은 자기가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랑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시127:1절에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그리고 잠16:9절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렇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 계획대로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하고 완벽하게 추진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그대로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획대로 되었다고 해도, 자기가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수고를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 자랑을 '허탄한 자랑'이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랑은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우리의 삶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인생이 나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특히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롬12:2)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17절에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습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을 잘 사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세상과 구별된 가치관을 갖고 그 뜻대로 선을 행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라고 합니다.
“기회있는 대로 선을 행합시다.”
“기회를 만들어서 선을 행합시다.”
“사명을 느끼며 선을 행합시다.”
처음에 우리는 기회가 있는 대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내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선을 행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고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두가지 계명은 하나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우리의 이웃을 사랑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와 섭리의 도구가 되어서 주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기회있는 대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 내 능력과 실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의 선을 이루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기회를 피해가고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인가 비껴가고 싶은 때가 있지 않습니까. 생각이 남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을 비껴가고 싶고, 하지 않아도 되는데 괜한 생각하는 게 아닌가 피해가고 싶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기회를 만들어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는 없는 기회도 만들어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적용) 교만한 마음에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자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선은 무엇입니까?(16,17절)
[큐티인간증, 허탄한 입시, 김지용]
저는 학벌 욕심과 인정욕구가 강하여 대학입시에 4수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사를 고민하지 않고 내 욕심으로 준비한 입시였기에 계속된 실패로 자존감만 떨어졌습니다. 저는 누구나 인정하는 명문대학에 들어가면 세상 성공이 보장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인생임을 깨닫지 못한채 내 욕심으로 가득찬 입시 계획을 세우며 말씀을 보지 않고 교회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입시의 거듭된 실패를 말씀으로 해석하지 못하지 주님이 원망스럽기만 하고 제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입시에서 추가 합격으로 지원한 대학에 간신히 붙는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목표한 대학보다 낮은 곳이라며 불평불만만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이 대학생활에서 저를 낮아지게 하는 사건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랜 기간 입시 생활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졌던 저는 학교 동기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혼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저는 힘든 마음을 교회 공동체에 나누었는데, 지체들이 방학 때 교회에서 하는 국내 아웃리치에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 권면을 듣고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봉사도 하고 말씀도 들으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제가 입시에 성공하여 명문대에 진학하고 교우관계도 원만했다면 세상에서 방황하며 허탄한 자랑을 하고 다녔을 것입니다(16절). 하지만 하나님이 이를 미리 아시고 계획하셔서 제가 교회 공동체에 잘 속해 갈 수 있게 인도해주셨습니다. 육적으로 편안하면 하나님을 떠나 있다가 고난이 올 때야 비로소 주님을 찾는 제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이제는 믿음의 공동체에 잘 속해 가며 힘든 학교 생활도 오직 주께 맡기고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적용하기) 어색하더라도 학교 동기들을 피하지 않고 같이 밥먹자고 하며 다가가겠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제가 다니는 학교의 단점을 그만 말하겠습니다.
결 론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은 ‘안개와 같은 인생을 잘 사는 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솔로몬의 전도서에서는 ‘헛되다’는 말이 40번 이상 나옵니다. 전도서는 해 아래 살아가는 인생이 헛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이 헛된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헛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인생 자체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기에 허무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개와 같은 인생, 허무한 인생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믿음을 갖고 살고,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둔 절제된 삶을 살아간다면 결코 우리의 인생은 헛된 삶이 되지 않을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 입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은 짧고 한정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현명하게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 그러므로 세세토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특히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사랑하며, 자기 욕심, 자기 계획대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선을 행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안개와 같은 인생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