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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6 동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 "금강경 사가해" 강설에서~~~
오늘 나눠드린 直指는 제가 2003년도 7월에 심한 병을 앓았는데요. 그 병을 앓기 전에는 주로 경전을 번역을 하고, 해설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한 6개월 남짓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지금도 하반신이 50%이상 마비가 되어있지만, 그런 상태로 퇴원을 해서, 그 다음부터는 선어록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일을 좀 하게 됐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프고 나서 저 나름대로 소견이 좀 달라지고, 불교에 대한 안목이 그 전하고 달라져서 그래 농담 비슷하게 “나는 6개월 입원 생활이 부처님의 6년 고행하고 맞먹는다” 이런 표현도 하고 그렇게 했는데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어록을, 좀 부족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선어록을 감히 번역하고 저 나름대로 또 해설도 하고요. 그렇게 했었습니다. 아프고 나서부터 그랬습니다.
그래서 임제록이 아프고 나서부터 처음으로 강설이 나와서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고, 그 뒤에 이런 저런 “명구 100선” 같은 이런 것 네 권도 전부 선문 게송이고요. 그러다가 4, 5년 전에 “직지”에 손을 대서 직지가 며칠 전에 막 책이 나와서 오늘 비로소 이렇게 배달이 막 되었어. 그래서 오늘 일간지 각 신문에 이 직지가 다 이야기가 됐었습니다.
그 동안 직지의 인쇄문화적인 가치.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것. 뭐... “세계 최초 활자 인쇄본이다” 이런 가치를 가지고 하도 세상이 떠들썩하고, “직지 초등학교” 가 있고, “직지 문화 축제” 도 있고, 또 오늘 발표된 것을 보면 “1377명의 직지 합창단” 이 생겼고, 충주에는 야단법석입니다. 그런 정도인데
모두 그 그릇만 가지고 이야길 하지, 사실은 그 그릇에 담긴 내용물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세계문화유산” 이라고 하는 사실은, 사실은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니고........ 그것이 1000년이 됐든 ‧ 2000년이 됐든 ‧ 세계보물이 됐든 그것은 사실은 별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 ‧ 조사 스님들이 깨달으신 진리의 가르침... 이것이 “세계문화유산” 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사실은 백 배 ‧ 천 배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관심이 없어가지고 모두 도외시 하고 있었습니다. 뭐 뜻을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마는... 그래서 제가 부족한 실력을 가지고라도 제가 ‘이것을 내가 한번 해석을 해서 그 안에 있는 진짜 소중한 가치를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겠다’ 해서 4, 5년 전에 작업을 시작해서 이제 막 이렇게 책이 도착을 했습니다.
또 여러분하고 공부하는 인연이 됐을 때 책이 나왔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법공양 올리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따로 책 들고 가서 준다는 것도 모양도 그렇고. 여러 가지가 아주 시기적절하고 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오늘 마침 책이 나오자 법공양을 올리게 됐습니다. 내용은 그렇고... 오늘도 한국일보에 난 기사도 복사를 해서 그 내용을 알도록 했습니다.
고려 말 백운스님께서 아주 주옥같은 내용을 집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렇게 전해져서, 근세에 인쇄문화로서의 가치 때문에 크게 빛을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내용 때문에 세상에 크게 빛을 봤으면 하는 그런 기대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가 정말 불교를 이해하고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큰 보탬이 됐으면 하는 그런 욕심도 가져 보면서 이런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마침 법공양을 하게 됐습니다.
지난 시간에 누가 질문지를 하나 올렸어요. 지난 시간에 미처 대답을 못 해드리고, 가창사문이라고 하는 스님이 질문을 했는데요. 이것은 사실 절을 운영하는 스님들이나 누구나 다 해당되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
약 3년 전에 49재를 여법하게 행해 마쳤는데, 스님의 법문에 “이젠 영가님은 좋은 몸을 받아 왕생극락 하셨을 것이다” 라고... 그런데 우란분절에는 우리가 사실 불과 몇 년 전부터 우리가 영가천도를 한다고 이절 ‧ 저절 ‧ 어느 절 없이 다 49일 동안 우란분절에 맞춰서 천도기도를 합니다. 후손이 물어온다고 그랬어요. 후손이 물어오는데 모두 돌아가시고 49재 지내면 다 천도가 됐는데, 왜 해마다 칠칠재를 해야 되는가? 이것이 궁금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그 전에 우리 어릴 때는, 돌아가시면 49재는 있었지만 이런 행사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년 ‧ 년이 수십 번 칠칠재를, 절마다 행사를 하니까 동참해서 지내는데, 이것이 어떻게 되는가? 이런 문제도 사실 아주 중요한 겁니다. 왜냐? 지금 전국에서 다 하고 있고 알 것은 알고 넘어가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의 소신은 그래요. 음력 7월은 옛날부터 불교에서 효도의 달이라 그래요. 왜냐? 우란분절 백중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최소한도 백중날만은 그렇게 영가 천도 재를 하루만이라도 지내는데 ... 거기서 좀 더 확대되고 확대 돼가지고 7일만 하다가, 또는 49일만 하다가 어떤 절은 100일도 해요. 어떤 데는 천 몇 100일도 하고, 불교 TV보면 계속 그런 광고도 하고 그러는데.....
그런 현상이 사실은 냉정하게 생각할 때, 불교에서 바람직한 현상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를 위해서 그 못 다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좋은 날, 또 효도의 달이라고 하는 불교의 7월의 백중이 돌아오면 선망부모를 기억하게 되고, 한번 뭔가 빌어드리고 싶고 하는 그런 순수한 마음은 참 좋은 겁니다. 좋은데 지나치면 보기가 좀 그렇고,
지장경에도 있듯이 재를 지내면 7분으로 나눠서 6분은 지내주는 사람에게 돌아가고, 1분이 돌아가신 분에게 간다는 겁니다. 7분의 1이 돌아가신 분에게 그 공이 간다는 겁니다. 6분은 지내주는 사람일입니다. 사실은 따지고 보면 전부 남아있는 사람의 일입니다. 남아있는 사람의 감정이고요. 몇 년 전에 돌아가서 사실 이미 다 태어났는데, 여태 안 태어났으면 그것 어떻게 됩니까? 사실은 다 태어났습니다. 인연 따라서 다 갈 데로 갔는데, 구천에 떠돌고 있으니까 태어나도록 하기 위한 그런 의미는 아닐 겁니다. 그냥 복을 빌어드리는 것이지요. 복을 빌어드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결코 헛것은 아닙니다.
1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라도 지금 우리가 작년에도 지내고 ‧ 금년에도 지내고 ‧ 내년에 또 지내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시 태어나도 후손이 자꾸 빌어주는 겁니다. 자꾸 빌어 줌으로 해서, 나는 태어나서 이미 사회의 일원으로 30대가 되고 ‧ 40대가 되고 ‧ 50대가 돼가지고 사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뭔가 잘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힘보다도, 자기 노력보다도 잘 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은 후손이 자꾸 칠칠재라든지, 아니면 삼칠재라든지, 후손이 자꾸 축원해주고 ‧ 빌어주고 ‧ 기도해주는 그 힘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그 힘은 태어난 사람에게 까지도 영향이 간다. 그렇습니다. 태어나는 사람에게 까지도... 이미 태어났지만, 그 사람은 계속 현실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살아가고 있는데 힘이 되게 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헛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교는 사실은 수행이 우선이고, 수행을 위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종교하고 비교했을 때 아주 특색이 있고, 사실은 우수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들의 수행. 그것이 있어서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아주 우수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그것은 이렇게 별로 드러나지를 않고, 천도만 막 선전을 하고 하니까 한국불교는 마치 천도불교 인냥 비쳐지는 것은, 그것은 또 사실은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문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다”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창사문 오셨지요? 잘 들으셨을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계시는 스님이나 신도님이나 다 한 번쯤은 고민해보셨을 그런 내용이기도합니다. 그래서 좋은 질문인 것 같아서 준비해서 오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 유명한 금강경의 사구게 중에서도 육조스님의 깨달음의 機緣이 있는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라.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지니라. 그 마음이 나느니라.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나느니라. 누구보고 명령조로 “내라 ‧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사용하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많이 해석을 합니다만, 저는 절대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나고 있다” 우리 마음은 대체적으로 그래요. 그런데 그것이 원리입니다. 그것이 순리고요. 그것이 마음의 본색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인연에 딱 걸리면, 인연에 코가 꿰면 머물게 됩니다. 거기에 머물게 된다고요. 그 때부터는 문제가 생기지요.
육조스님께서 이 한 마디에 큰 깨달음을 이뤄서, 그 동안 육조스님이 생각하기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쩌다가 관리가 되면 나라에 충성하고 하는 것. 忠 ‧ 孝. 이것 하나뿐입니다. 충과 효. 뿐입니다. 특히 중국 사회에선 더 그래요.
그런데 이는 관리도 아닙니다. 무식해. 오로지 효도 하나 보고 살았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그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이고, 그것 밖에 달리 다른 것은 없는 것으로 그렇게 알았는데... 과감하게 홀어머니를 놔두고 출가를 할 수 있었잖아요.
無所住입니다. 그 동안 머물고 있었어요. ‘아~ 인간의 가치는 이것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 말 한 마디 딱 듣고는 그만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고 그야말로 해탈감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어머니를 두고 출가할 때, 마음이 아주 가벼웠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인연 따라 사시고, 나는 내 인연 따라서, 보다 더 큰 효를 하기 위해서, 보다 더 많은 중생들을 위해서 나는 출가를 하노라 하는 그런 어떤 소신을 가지고 출가를 했던 그런 구절 아닙니까? 아~ 대단한 대목이지요.
그야말로 참 저~ 뒤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도 있지만, 금강경에서 가장 아주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할 수 있는 것이 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함허스님의 설의 속에서 자세히 나오지요.
(說誼 : 不須空然逐風波하고 常在滅定應諸根이니
是可謂暗中有明이로다 又無所住者는 了無內外하고 中虛無物이
如鑑空衡平하야 而不以善惡是非로 介於胸中也요
生其心者는 以無住之心으로 應之於事호대 而不爲物累也니라
孔夫子가 云君子之於天下也에 無適也하며 無莫也하야
義之與比라하시니 此는 言心無所倚하야 而當事以義也니
當事以義 則必不爲物累矣며 不爲物累則必不失其宜矣니라
聖人이 時異而道同하고 語異而相須를 於斯에 可見也已로다
謝氏가 於無適莫註中에 引經此句하야 以爲猖狂自恣하야
而卒得罪於聖人이라하니 何其言之不審이 至於如是之甚耶아
昔者에 盧能이 於五祖忍大師處에 聞說此經하고 到此하야
心花頓發하사 得傳衣盂하야 爲第六祖하사 自爾로 五葉이
結果하야 芬芳天下하시니 故知只此一句가
出生無盡人天師也로다 鳴呼라 謝氏여 何將管見하야
擬謗蒼蒼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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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須空然逐風波하고, 모름지기 공연히 風波. 바람과 물결을 쫓아가지 말고
常在滅定應諸根이니, 항상 滅定하면 滅盡定. 모든 망상이 다 끊어진, 다 사라진 禪定. 그것을 滅定그래요. 滅盡定이라고도 하고... 滅定에 있어서 應諸根. 제근에 응한다. 모든 根. 이것은 안이비설신의. 6근을 말하는 것입니다.
是可謂暗中有明이로다. 이것은 가위 캄캄한 것 가운데 밝음이 있는 도리라.
又無所住者는, 應無所住했으니까요. 應자는 빼버려도 됩니다. “꼭” 이라고 하는 뜻이니까요. 또 無所住. “머무는 바 없다” 라고 하는 말은
了無內外하고, 마침내 안팎이 없고
中虛無物이, 중간도 텅 비어서 사물이 없는 것이
如鑑空衡平하야, 마치 거울이 텅 비어 있고. “거울에 아무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 衡은 저울대지요. 저울대가 평평해요. “기울어 있지 않고” 이런 말입니다. 저울대가 기울어져 있지 않고, 저울대가 평평해서
而不以善惡是非로, 善惡是非로써 介於胸中也요. 胸中에, 우리가슴 속에다 개입 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無所住의 의미다. 이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生其心者는, 生其心. 그 마음이 난다. “그 마음을 낸다” 라고 표현하는데, 그 마음이 난다. 라고 하는 것은 以無住之心으로, 머묾이 없는 마음으로써, 머물지 않는 마음, 우리마음은 사실은 한시도 머물지 않습니다. ‘머물 때부터 문제가 생긴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지요? 머묾이 없는 마음으로써
應之於事호대, 어떤 사물과 사건에 응하되
而不爲物累也니라. 物累가 되지 않는다. 物累. 여기 물누라는 낱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몸을 얽어매는 세상의 온갖 괴로운 일. 만물 物자 ‧ 사물 物자하고 얽힐 累자입니다. 사물에 얽힘이 되지 않는다. 글자대로 새기면 그렇게 되지요.
우리 자신을 얽어매는 세상의 온갖 일들을 物累라 그렇게 합니다. 그런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얽는 것이니 孔夫子가, 공자를 말하는 것이지요.
孔夫子가 云君子之於天下也에, 君子는 우리로 말하면 보살정도 되는 그런 상당히 수행이 잘 된 사람을 君子. 이렇게 표현합니다.
君子之於天下也에, 이것이 벌써 글이 다르지요? 유교 글하고 불교 글하고 벌써 글 냄새가 다릅니다. 君子之於天下也에, 이렇게 하면 君子가 이 세상에 삶에, 이런 뜻입니다. 天下에 삶에, 이 세상에 사는데 있어서
無適也하며 無莫也하야 義之與比라하시니, 그랬습니다. 無適也. 꼭 맞는 것도 없다. 그래야 하는 것도 없다. 適也. 맞을 適자거든요. 꼭 이래야 하는 것도 없다. 또 그래선 안 되는 것도 없다 = 無莫也. 이래야 되는 것도 없고 ‧ 저래야 되는 것도 없고요.
그야말로 無有定法이지요. 군자는 세상에 처해 사는데 있어서 無有定法으로 산다. 꼭 이래야 된다는 것도 아니고 ‧ 꼭 이렇게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없다. 그 말입니다.
義之與比라. 이것은 義와 짝한다. 오직 義. 義를 중요시 여기잖아요. 의리 ‧ 도의. 또는 옳은. 義자를 참~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義之與比라. 義를 짝한다. 義와 짝할 뿐이다. 比 = 짝한다. 이 말입니다. 義와 짝한다. 이렇게 말했는데,
此는 言心無所倚하야, 이것은 말하기를 마음에 의지하는 바가 없어서
而當事 以義也니, 일에 당해서 義로써한다.
어떤 일을 당하든지 사물과 사건. 이런 것을 당해서 義로써한다. 이것이 의에 맞는가? 안 맞는가? 이것이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 의롭지 아니한 것은 정말 만복이 나에게 돌아온다 하더라도 갖지 않고, 의로운 것이라야 한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이익이 돌아왔을 때, 내 눈 앞에 이익이 생겼을 때 이것이 의로운 것인가? 의롭지 않은 것인가? 군자의 기준은 그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것인가? 의롭지 않은 것인가? 를 딱 판단해 가지고 이것은 의롭지 않다하면 이것은 만복이 있다 하더라도 절대 그것 취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이 군자들의, 또는 유교에서의 어떤 선비들의 원칙으로 되어있습니다.
當事以義則, 일에 당해서 義로써 한즉은, 의로운 것으로써 한즉은
必不爲物累矣며, 반드시 物累가 되지 않는다.
사물에 얽히는 바, 사물에 얽히는 바가 되지 않는다.
不爲物累則, 사물에 얽히는 바가 되지 아니한다면
必不失其宜矣니라. 반드시 그 옳은 것을 宜 = 옳을 의자지요. 위에 義자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그 옳은 것을 잃지 않는다.
聖人이 時異而道同하고, 聖人들은, 진짜 聖人이라면 그 때는 달라도, 부처님이나 공자나 그 때는 달라도 道는 같다.
語異而相須를, 말은 다르지요. 말은 경전에서 표현한 것이나, 조사 스님이 표현한 것이나, 공자님이 표현한 것이나 그런 말은 다르지만 서로 “수고 한다” 이런 말은 서로 마땅함. 須 =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서로 마땅한 것을 於斯에 可見也已로다. 여기에서 가히 볼 수가 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應無所住而生其心은 君子之於天下也에 無適也며 無莫也라 義之與比. 라고 하는 그런 말과 같은 뜻으로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謝氏가, 謝氏 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於無適莫註中에, 무적야무막야 라고 하는 글의 註 가운데, 그것을 해석을 하면서, 註를 내면서 引經此句하야, 경의 이 구절을 이끌어,
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하는 이 구절을 이끌어가지고서
以爲猖狂自恣하야, 猖狂自恣라고 이것은 “미친 소리다 ‧ 미쳐서 마음대로 하는 짓” 이라고 설명을 했다는 것입니다. 謝氏 라고 하는 사람이 무적야무막야 라고 하는 글을 해석을 하면서, 강설을 하면서 應無所住而生其心을 이끌어다가 괜히 “아 그것 불교의 應無所住而生其心인데 이것은 “미친 소리다”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그래 而卒得罪於聖人이라하니, 마침내 죄를 聖人에게서 얻었다. 聖人의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석해가지고는 정말 그것은 큰 죄가 된다는 것이지요. 마침내 죄를 聖人에게서 얻은 것이니,
何其言之不審이, 어찌 그 말이 살피지 못한 것.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이
至於如是之甚耶아? 이와 같은 아주 심한 데까지 이르렀는가? 너무 심한 표현이다. 어찌 聖人의 경전의 말씀을, 육조스님은 거기서 정말 깨닫기도 했는데, 금강경에서 정말 제일 보석. 제일 보석을 친다면 應無所住而生其心인데 이 말을 갖다가 뜻도 제대로 모르고서
狂猖自恣라. “미쳐서 마음대로 떠드는 소리다” 라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謝氏 라는 선비가 아주 유명한 선비입니다.
함허스님께서 이런 글을 아시니까 분노해가지고 울분이 나서 여기서 아주 謝氏를, 후배지만, 謝氏를 사정없이 여기서 꼬집고, 또 바로잡아 놓습니다. 이런 것을 뒷사람들이 봄으로 해서 ‘아 謝氏의 그 해석은 틀린 것이구나’ 이렇게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거든요.
자 이제 혜능스님 나옵니다.
昔者에 盧能이, 혜능이 노씨지요. 노씨 혜능이
於五祖忍大師處에 聞說此經하고, 오조 홍인대사의 처소에서 이 경 설함을 듣고,
到此하야, 여기에 이르러서, 금강경을 쭉~~ 이렇게 설하다가
應無所住而生其心하는데 이르러서 心花頓發하사, 마음의 꽃이 몰록 피어나고 있어요.
순식간에 마음의 꽃이 홀로 몰록 피어났다.
이것은 나무 팔러 갔다가 여관에다 나무를 내려주고 돌아서 나오는데, 여관방 안에서 어떤 스님이 경을 읽고 있는데 바로 이 대목을 읽고 있더라 라고 하는 그런 기록도 있고, 또 여기 함허스님은, (사실은 그 인연으로 출가를 했는데, 다시 5조 스님에게 금강경을 한번 더 배우게 되지요? 더 배우게 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깨달았다” 이렇게 여기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대목에서 心花가 頓發. 참~ 좋은 표현이지요?
“마음 꽃이 활짝 피어났다” 그래서 得傳衣盂하야, 의발이라고 하는데요. 옷과 발우를 전해 얻어서 爲第六祖하사, 제 6조가 되어서
自爾, 이로부터 五葉이 結果하야, 열매를 맺게 됐다. 五葉 = 5종 가풍, 소위 五宗, 선가귀감에서 다 배우셨지요? 임제종 ‧ 조동종 ‧ 위앙종 ‧ 법안종 ‧ 운문종. 이렇게 5종. 그 5종이 육조스님 제자에부터 퍼져 나왔습니다.
남악 회양 쪽하고 청원 행사 쪽하고 이렇게 두 가닥이 나눠지기 시작하지요. 육조스님 제자 중에서 두 가닥이 나눠져서 남악 회양스님 쪽으로 두 개의 종파, 일종의 세 개의 종파. 이렇게 벌어지는 그런 것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다섯 잎이 열매를 맺어서. 芬芳天下하시니, 그 향기가 천하에 가득했으니,
故知只此一句가, 그러므로 알라. 다만 이 한 구절이
出生無盡人天師也로다. 다함이 없는 人天의 스승들을 出生시켰다.
육조스님이 이 한 구절에서 깨달았고. 또 육조스님을 통해서 그 기라성 같은 많고 많은 도인들이 정말 깨 쏟아지듯이, “깨가 쏟아지듯이” 이렇게 표현 합니다. 그 후로 도인들이 깨가 쏟아지듯이 쏟아졌다. 그래서 無盡人天師. 다함이 없는 人天師를, 인천의 스승들을 출생시켰다.
鳴呼라, 오호라 슬프다.
謝氏여, 何將管見하야, 어찌 管見. 대[竹]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하늘이 왜 저렇게 좁은가?’ 이렇게 좁은 소견을 管見. 그래요. 우리가 흔히 “대쪽 같은 소견” 이런 말을 하지요? 대로 보는 하늘, 대쪽 같은 소견을 가져서
擬謗蒼蒼乎아? 蒼蒼하게 비방하려고 하는가?
蒼蒼 = 비방하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입니다. 蒼蒼히 비방하려고 하는가? 아주 심하게 비방하는 말을 蒼蒼이라고 그럽니다. 글자 여덟 자인데 설명이 이렇게 많지요. 이것도 사실 부족하지요.
【冶父】
退後退後어다 看看하라 頑石이 動也로다
(說誼 : 明中에 莫留蹤하고 卻向暗中歸어다 看看하라
可不動底가 如今動也니 動還無動하야사 始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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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後退後어다, 뒤로 물러서고 뒤로 물러설지어다.
看看하라. 잘 보아라.
頑石이 動也로다. 頑石 = 박힌 돌입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박힌 돌이 움직여요.
應無所住而生其心에 대해서 着語를 이렇게 아주 그럴 듯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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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誼
明中에 莫留蹤하고, 환하게 밝은 데는 그 자취를 머물지 말고
卻向暗中歸어다. 도리어 暗中을 향해서, 어두운 곳을 향해서 돌아갈지어다. 밝은 빛이 있는데 가면 다 드러나니까요. 어두운 데를 향해서 돌아갈지어다.
看看하라. 잘 보아라.
可不動底가, 가히 動하지 않는 것이
如今에 動也니, (움직이지 않던 것이) 지금에 움직였다.
動還無動하야사, 움직이지는 것이 도리어 움직임이 없어야
始得다. 비로소 된다. 이런 표현을 했는데, 말하자면 而生其心의 그런 내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잘 아는 게송을 여기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冶父】
山堂靜夜坐無言하니
寂寂寥寥本自然이라
何事西風動林野하야
一聲寒鴈이 唳長天고
(說誼 : 本自無動이어니 何須動也리오 須信道어다
四海에 浪靜龍穩睡하고 九天에 雲淨鶴飛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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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堂靜夜坐無言하니,
山堂. 고요한 밤 앉아서 말이 없다. 그런 글인데, 이것을 시적으로 아주 멋지게 번역을 하면 좋겠지요. “앉아서 말이 없다” 보다도 “말없이 앉았으니” 靜夜 = 고요한 밤. 山堂 했으니까 “아주 깊은 산속” 해도 좋고요. “산속 암자” 라고 해도 좋고요.
▲寂寂寥寥本自然이라.
고요하고 ‧ 고요하고 ‧ 또 고요한데 본래 저절로 그러함이라. 이것 눈에 보이는 그런 자연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저절로 그러함이라. 그렇게 표현하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이 動하지만, 그 근본자리. 동하지 아니한 근본자리. 물은 바람에 사정없이 물결치지만, 그 물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조금도 동요가 없지요. 변함이 없습니다. 금 가지고 별별 모양을 만들어도 금의 성질은 그대로 하나도 변함이 없다고 하는 그런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
▲何事西風動林野하야,
어찌하여 무슨 일로 西風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林野를 움직여서
▲一聲寒鴈이 唳長天고.
한소리 차가운 기러기가 저~ 長天에, 먼 하늘에 울고 가는가?
이것은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서 움직임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靜中動입니다. 뒤에 두 구절은 전부 동적인 것을 표현했고, 앞의 두 구절은 정적인 것 靜中動. 마음을 아무리 써도, 또 그 마음의 본체는 변함없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요.
사실은 우리가 별별, 하루 가운데 사용하는 마음 작용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그 량으로 치자면 무수히 많은 양이지만, 우리마음은 늘 그 마음입니다. 항상 그 마음입니다. 하나도 변함없습니다. 그것이 靜입니다. 정 가운데 동이 있고, 동 가운데 정이 있는 그것이 마음의 본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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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誼
本自無動이어니, 본래 저절로 동함이 없거니
何須動也리오. 어찌 모름지기 움직이리오. 우리 본래의 心은 동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마음은 無去無來亦無住. 그런 표현이 있잖아요. 無去無來亦無住
須信道어다. 모름지기 믿을지어다. 道자는 그냥 따라가요.
四海에 浪靜하니, 사방 바다에 물결이 고요하니
龍穩睡하고, 용이 숨어서 잠들고
九天에 雲淨하니, 저~ 九天에, 높은 하늘에 구름이 맑으니, “구름이 걷히니” 이런 말입니다. 구름이 맑으니
鶴飛高로다. 학이 높이 날더라.
이것 역시 四海에 浪靜하니 龍穩睡라고 하는 말은 ●靜을 말한 것이고, 九天에 雲淨하니 鶴飛高로다. 라고 하는 말은 ●動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마음의 靜과 動. 동과 정을 선사들은 이렇게 아주 멋지게 표현합니다. 제14강 2부 (2011.07.19)
첫댓글 나무 금강반야 바라밀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