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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73)
한신의 탈출.
영포와 오예는 의제를 죽인 뒤에, 그 사실을 범증에게 알려주기 위해 팽성으로 달려왔다.
범증은 의제가 시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까무러칠듯이 놀라며 탄식했다.
"의제는 그 옛날 무신공(武信公: 항우의 숙부인 항량)이 임금님으로 받들어 모셨던 신망이 두터운 어른이었다. 그런 분을 시해했다니, 그것은 신도(臣道)에 어긋나는 일이다. 만약 항왕이 함양을 버리고 팽성으로 천도해 오면, 여러 날이 못되어 유방이 함양으로 진출할 것인데,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다는 말인가 ? 안되겠다, 내가 어서 침주로 돌아가, 함양으로 천도하도록 다시 간언을 올려야만 하겠다."
그러자 계포가 말한다.
"지난번에 한생(韓生)이 항왕께 함양으로 천도하라는 간언을 올렸다가 팽살(烹殺)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어쩌려고 그런 간언을 올리겠다는 말씀입니까 ?"
범증이 다시 말한다.
"만약 함양을 버리고 팽성으로 천도했다가는, 우리 모두가 유방의 손에 포로가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오. 그러하니 모두가 힘을 합하여 함양으로 천도하도록 말씀을 드려야 하오. 이것은 우리들 전체의 생사가 걸린 문제요."
범증은 계포에게 팽성을 지키게 하고, 영포, 오예 등과 함께 침주로 급히 돌아와 보니, 항우는 팽성으로 천도하려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항우는 의제를 죽여 버렸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아아, 나는 이제야 심복지환(心腹之患)을 제거해 버렸구나 ! "
그러나 범증은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대왕 전하 ! 전하의 심복지환은 의제가 아니옵고 패공 유방이옵니다. 만약 우리가 함양을 비워 둔 채로 팽성으로 천도를 하고나면, 유방 몇 달 안에,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으로 쳐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는다.
"아부는 웬 걱정이 그리도 많으시오. 유방이 그렇게도 무서우시오 ? 그자는 파촉으로 들어갈 때, 잔도(棧道)를 자기 손으로 모조리 불태워 버렸소. 그것은 다시는 함양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게다가 파촉에서 나오는 길목은 우리의 삼진왕(三秦王)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유방이 날짐승이 아닌 바에야 어찌 함양으로 나올 수가 있단 말이오 ?"
장량이 일찍이 파촉으로 통하는 잔도를 모조리 불태워 버린 것은, 항우의 경계심을 없애려는 술책이었는데, 항우는 그 술책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범증은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말한다.
"대왕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크게 잘못된 판단이시옵니다. 대왕께서 팽성으로 옮겨가시면, 삼진왕들의 경계도 절로 소홀해 질 터이니, 어떻게 그들만을 믿고 안심할 수 있을 것이옵니까 ?"
항우는 범증의 말을 비웃으면서 다시 말한다.
"유방이 함양으로 쳐 나올 야심이 있다면, 어째서 길을 제 손으로 끊어 버렸겠냐는 말이오. 그 한가지 사실만 보아도, 유방은 모든 야심을 포기해 버렸음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오 ?"
그러나 범증은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유방은 결코 야심을 포기해 버릴 사람이 아니옵니다. 더구나 그의 휘하에는 장량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옵니다."
"하하하, 이제 와서는 장량이 아니라, 장량의 할애비가 와도 나를 어쩔 수가 없을 것이오. 나는 이미 팽성으로 옮겨 갈 것을 만 천하에 공포했으니, 빨리 이삿짐이나 쌉시다."
항우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영포가 옆에서 듣다 못해,
"대왕 전하 ! 승상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니, 만전을 기하기 위해 , 팽성보다는 함양으로 천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한마디 거들고 나왔다.
그러나 항우는 즉석에서,
"그대가 무얼 안다고 잔소리를 해대나 ?"하고 즉석에서 윽박질러 버렸다.
그러자 범증은 더 이상 할말이 없어 한숨을 쉬며, 그 자리를 물러 나오고 말았다.
한편, 한신은 장량과 작별하고 유방을 찾아 떠나려다가 우선 도위(都衛 : 수도경비 사령관) 진평(陳平)의 집에 들러 보았다. 진평은 평소부터 유방에게 호의를 품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신은 진평의 마음을 떠보려고, 우선 이렇게 물어 보았다.
"항왕이 함양을 비워 두고 팽성으로 천도하고 나면, 한왕 유방이 반드시 함양으로 쳐나올 것 같은데, 장군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진평은 오랫동안 심사 숙고를 하더니, 한숨을 쉬면서 대답한다.
"항왕은 팽성으로 천도하고 싶어서 의제를 죽이기까지 하였소. 게다가 간의 대부(諫議大夫) 한생이 천도를 반대한다고 그를 팽살해 버렸소. 그래 가지고 민심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려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구려. 그에 비하면 한왕 유방은 덕이 많은데다가 포부도 웅대한 사람이어서, 후일에 대성할 사람은 반드시 유방일 것이오. 그러니 한공은 여기서 썩어나지 말고, 한왕 유방을 찾아가 포부를 마음껏 펴보도록 하시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용기가 솟아올라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밝혔다.
"실상인 즉, 저는 지금 파촉으로 한왕을 찾아가려고 떠나는 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파촉으로 가려면 수많은 관문을 거쳐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관문들을 무사히 통과할 수가 있겠는지 그 일이 걱정스러워 장군을 찾아왔습니다."
"그 문제라면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모든 관문을 총관(總管)하고 있는 책임자가 바로 내가 아니오. <통과패(通過牌)>를 내줄테니, 얼마든지 가지고 가시오."
그러면서 진평은 즉석에서 <관문 통과패> 를 내주었다.
관문 통과패는, 지나가는 지역의 위수(衛戍) 사령부에서 물과 식량, 그리고 타고온 말(馬) 조차 바꿔 탈 수 있는 효력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한 <관문 통과패>를 손에 넣은 한신은 뛸 듯이 기뻤다.
그러기에 진평에게 두 손 모아 감사하며 말했다.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후일에 제가 대성하게 되면 오늘에 장군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진평도 한신의 손을 뜻있게 움켜잡으며 말한다.
"한왕을 뵙거든 부디 충성을 다해 성공하도록 하시오. 나도 언젠가는 한왕을 찾아가게 될지 모르오."
한신은 진평과 작별하고, 그 길로 파촉을 향하여 말을 달려나갔다.
그런데 범증은 평소에도 유방을 경계하느라고 관문을 철저하게 지키라는 엄명을 내려 두었기 때문에, 비록 통과패가 있어도 관문을 한가롭게 통과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신이 처음으로 당도한 관문은 안평관(安平關)이었다.
안평관 수문장은 한신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신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묻는다.
"한 장군께서는 무슨 일로 어디를 가시기에, 혼자 오셨사옵니까 ?"
"나는 왕명을 받들고, 삼진왕(三秦王)을 만나러 가는 길이오."
"그러시다면 언제쯤 돌아오실 예정입니까 ?"
"아무리 늦어도 모레까지는 돌아오게 될 것이오."
수문장은 그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어서, 한신을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신은 사흘이 지나, 나흘이 되어도 다시 돌아오지 않자, 수문장은 크게 걱정스러워, 마침내 범증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긴급 보고를 올렸다.
범증은 그 보고를 받아 보고 대경 실색하며 말한다.
"나는 한신이라는 자가 마음에 걸려서, 그 자를 대장으로 발탁하든가 아니면 죽여 없애자고 했는데, 항왕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기어코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한신은 유방을 찾아 갔음이 분명하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자를 도중에 체포해야 한다."
범증은 모든 관문에 <한신 체포령>을 내렸다.
항우는 한신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노한다.
"한신이라는 겁쟁이가 나를 배반하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 "
범증은 겁쟁이라는 말을 듣고, 항우를 나무라듯 말한다.
"한신은 겁쟁이가 아니옵고, 희대(稀代)의 용장(勇將)이옵니다. 한신이 유방을 돕게 되면 우리에게는 다시 없는 우환이 될 것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그자가 파촉에 가지 못하도록 도중에서 체포해 버려야 합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대장 종이매를 불러 군령을 내린다.
"그대에게 2백 기(驥)를 줄테니, 한신을 추격하여 그자를 체포하는 동시에 즉석에서 베어 버려라."
종이매는 2백 기 군사를 거느리고 안평관으로 급히 달려와, 수문장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어 보았다.
수문장은 사실대로 알리고 나서,
"이곳을 통과한 지 이미 닷새가 지났으므로 지금 쯤은 국경 가까이 갔을 것이옵니다. 장군께서 직접 추격하시기에는 너무도 늦었으니, 차라리 삼진왕들에게 비각(飛脚)을 보내 그들로 하여금 쫒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도 그럴 성 싶어, 종이매는 삼진왕들에게 한신을 쫒게 하고 자기 자신은 침주로 돌아와, 항우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항우는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신을 비웃었다.
"멀리 가 버렸다면 그냥 내버려두오. 남의 사타구니 아래를 기어나온 겁쟁이가 어디를 간들 무슨 큰일을 해낼 수 있겠소, 파촉으로 가는 길이 모두 끊겨 버렸다니까, 한신은 유방을 찾아가고 싶어도 길이 없어 못 갈 것이오. 그러나 만일을 위해서, 여신(呂臣)과 종공(從公)등 두 장수로 하여금 함양을 지키게 하고, 우리는 예정대로 팽성으로 옮겨 가기로 합시다."
이렇게 항우는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도읍을 팽성으로 옮기고야 말았다.
한편, 한신은 안평관을 무사히 통과하고 나서, 다음 관문인 대산관(大散關)도 무사히 통과하였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길이 너무도 험악하였다. 그리하여 장량에게서 받은 지도를 펴놓고 간도(間道)를 찾아 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저 멀리서부터 십여 명의 군사들이 말을 달려 오고 있었다.
한신은 아무것도 못 본 척하고 말을 천천히 몰아갔다.
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며 소리를 질러 물었다.
"그대는 성명이 무엇인가 ?"
한신은 말을 멈추며 대답했다.
"나는 이진(李珍)이란 사람이오."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가 ?"
"포증에 친척이 있어서, 친척을 만나러 가는 중이오."
"관문 통과패가 없을 터인데, 무슨 재주로 관문을 통과했는가 ?"
"통과패가 없다면 관문을 어떻게 통과했겠소. 통과패가 여기 있으니 잘 보시오."
군사들이 통과패를 돌려 보느라고 방심하는 순간, 한신은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寶劒)>을 뽑기가 무섭게 십여 명의 병사들을 눈깜짝할 사이에 모조리 베어 버렸다.
그리고 난 뒤 말을 달려 나가려니까, 반대편에서 다섯 명의 군사들이 또다시 달려 오고 있었다.
한신은 불문 곡직하고 그들도 한칼에 베어 버린 뒤에 산속으로 말을 달려 들어갔다.
얼마를 달려가다 보니, 길은 끊기고 눈앞에는 천길 낭떠러지 절벽이 나타났다.
(길이 끊겨 버렸으니,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
눈앞이 막막하여 망연 자실하게 서 있노라니까, 문득 장량이 일러주던 말이 떠올랐다.
"포증으로 가려면 진창(陳倉)이란 곳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오."
한신은 장량의 말을 기억하고 진창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어느 방향으로 가야 진창으로 가게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잠시 머뭇거리고 있노라니까, 때마침 나무꾼 하나가 짐을 지고 걸어오고 있었다.
"여보시오. 길 좀 물어 봅시다. 진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
나무꾼은 짐을 내려놓더니, 먼산을 가리키며 대답한다.
"저기 보이는 산을 넘어가면 잔솔밭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면 난석탄(亂石灘)이라는 여울이 나오오. 그 여울에 놓여 있는 돌다리를 건너가면 아미령(娥眉嶺)이라는 고개가 보이는데, 그 고개는 길이 워낙 험하여 말을 타지 못하고 걸어서 넘어야 할 것이오."
"그 고개를 넘어서 얼마나 더 가면 진창이라는 곳이 있소 ?"
"진창까지는 태백령(太白嶺)이라는 고개를 또 하나 넘어야 하는데, 오늘중으로 거기까지는 도저히 못 가오. 그러니 도중에서 하룻밤 자고 갈 요량으로 떠나야 하오."
"도중에 자고 갈 만한 인가(人家)는 있는가요 ?"
"아미령 고개 밑에 술집이 하나 있소. 그 집에서 자고 가도록 하시오."
한신이 장량에게서 받은 지도를 살펴 보니, 나무꾼의 말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길을 잘 알려 주어 고맙소이다."
한신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막 떠나려는데, 나무꾼이 묻는다.
"도대체 당신은 어디를 가려고 호랑이가 우글거리는 이 산속을 혼자 가려하오 ?"
한신은 어떨결에,
"나는 포증으로 한왕을 찾아가는 길이오." 하고 대답을 해버렸다.
그리고 나서 말을 몰아 나가다가 별안간 <아차 ! >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얼마전에 군사 열 다섯을 죽이고 도망쳐 오던 길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관문 병사들이 추격해 올 것이 분명한데, 만약 나무꾼이 그들에게 나의 행방을 알려 주면 내 신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
한신은 그러한 생각이 들자 얼른 뒤로 돌아가, 나무꾼을 한칼에 베어 죽여 버렸다. 마음은 괴로웠지만, 그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신은 괴로운 마음으로 나무꾼을 고이 묻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명복을 빌며 안타까운 말을 하였다.
"오늘은 기구한 만남으로 내가 죄를 지었으니, 부디 헤아려 주소서. 후일 그대를 후히 장사지내 드리리다. 저승에서는 안락하게 지내소서 ...."
이렇게 하고 아미령 고개를 넘어오니, 과연 나무꾼의 말대로 산 밑에는 술집이 한 채 있었다.
한신은 그 집에 여장을 풀고,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자 인상이 우악스럽게 생긴 장사 하나가 허락도 없이 한신 앞에 덥석 마주앉더니,
"나는 이 집 주인이오. 당신은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을 찾아가는 길에, 나무꾼은 왜 죽였소 ?" 하고 시비를 걸고 나오는 것이었다.
한신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한신은 그렇지 않아도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을 죽인 것이 양심에 무척 괴롭던 형편이었다. 그러기에 지금이나마 속죄하는 뜻에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할 요량으로,
"내가 나무꾼을 죽인 것은 커다란 죄를 범한 셈이오. 주인장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소 ?" 하고 물어 보았다.
주인은 술을 한잔 들이키고 나더니, 웃으면서 대답한다.
"당신이 죽인 나무꾼은 바로 나의 이웃의 동생이오. 내가 만약 당신을 붙잡아 항우에게 넘겨 주면, 나는 항우에게서 큰 상(賞)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돈이 탐나서 고자질이나 하는 어리석은 인간은 아니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시오.'
한신은 주인의 말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생면부지의 나를 이처럼 관대하게 대해 주시니 고맙소이다 ... 그런데 보아하니 주인장은 이런 산중에서 술장사나 하실 분은 아니 것 같은데, 무슨 연유로 이런 산중에 사시오 ?"
주인은 허허허 너털웃음을 웃고 나더니,
"형공이 그렇게 물어 보시니, 우리 가문의 내력을 말씀하지요. 나는 주(周)나라 때의 충신이셨던 신뢰(辛雷) 장군의 후예(後裔)요. 내 이름은 신기(辛奇)라고 하는데, 선친인 신금(辛金) 어른께서 진시황때 그의 학정을 싫어하여 이 산중으로 피신을 오셨던 관계로, 나도 오늘날 여기서 이렇게 술이나 팔아먹고 산다오."
한신은 신기가 명문가의 후예임을 알고 나자 새삼스레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처럼 유서 깊은 가문의 후예라면, 어찌하여 이런 산중에서 술이나 팔고 계시느냐 말이오 ?"
그러자 신기는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형공이 그렇게 물어 보시니,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소. 나는 호구지책으로 술을 팔고 있기도 하지만, 지금도 밤낮으로 무예를 연마하면서 명주(明主)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오. 그런데 어젯밤에 희안한 꿈을 꾸고 나서 오늘은 형공을 만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오."
"어젯밤에 어떤 꿈을 꾸셨기에 그러시오 ?"
"어젯밤 꿈에, 아미령 고개 너머로부터 난데없는 호랑이 한 마리가 마치 날아오는 듯이 달려 넘어오더란 말이오. 그래서 오늘은 대단한 손님이 오시려는가 싶어, 나는 아침부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너털 웃음을 웃었다.
"대단한 손님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같이 변변치 못한 인물이 나타나서 미안합니다."
그러자 신기는 손을 절래절래 내저으며,
"형공이 누구신지는 모르나,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되실 것만은 틀림이 없소." 하고 장담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더니, 한신은 신기의 말에 감격을 금할 길이 없었다.
피차간에 대화가 솔직하다 보니, 한신은 자신의 정체를 솔직하게 말해 주고 나서,
"항우는 사람을 몰라 보는 우장(愚將)이었소. 그러나 한왕 유방은 지인지감(知人之鑑)하고, 성품 또한 관인 대도(寬仁大度)한 명주(明主)라고 하오. 그러니까 형공도 나와 함께 한왕을 찾아가, 공명(功名)을 천하에 떨져 봅시다. 형공 같은 분이 어찌 이런 산속에서만 썩어 날 것이오." 하고 설득 하였다.
"......"
신기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이곳을 떠날 형편이 안되오이다. 그런데 내가 살펴보니, 장군은 한왕을 찾아가면, 중용(重用)하실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만약 후일에 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치게 되시거든 반드시 이 길로 오시도록 하시오. 초나라를 치는 데는 이 길이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이 길은 아무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지름길이기도 하지요."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신기의 손을 힘차게 움켜잡았다.
"좋은 것을 알려 주어서 고맙소이다. 내가 만약 후일에 초나라를 치게 되면 이 길로 올테니, 그대에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시오. 형공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
이날 밤 한신은 신기와 함게 이야기로 밤을 새웠는데, 신기의 대접이 너무도 융숭한 데 감격하여, 마침내 두 사람은 결의 형제(結義兄弟)까지 맺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한신이 길을 떠나려 하자, 신기는 등에 활과 화살을 메고 따라 나서면서 말한다.
"저기 보이는 저 산을 양각산(兩脚山) 이라고 합니다. 길이 험할 뿐만 아니라 숲속에는 호랑이가 득실거려서, 장군께서 혼자 가시다가는 반드시 호환(虎患)을 당하시게 됩니다. 고개 너머까지는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고개를 넘어가고 있노라니까, 호랑이들이 여기저기에 득실거렸다.
그러나 호랑이들은 웬일인지 신기를 보기만 하면 슬금슬금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들이 형공을 보기만 하면 꽁무니를 빼고 도망을 치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오 ?"
신기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제가 워낙 이 놈들을 많이 쏘아 잡았기 때문에, 호랑이는 역시 영물(靈物)인지라 저만 보면 도망을 쳐 버린답니다."
바로 그때, 우거진 숲속에서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두 사람을 향하여 벼락같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이렇듯 질풍같이 덤벼오는 꼴을 보는 순간, 한신은 본능적으로 말에서 뛰어내려 눈을 질끈 감은채, 풀밭에 납작 엎드려 버렸다.
평소에는 용장(勇將)으로 자부해 오던 한신도, 질풍처럼 습격해 오는 호랑이만은 당해 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신기는 이처럼 위급한 순간에도 무슨 재주를 어떻게 부리는지, 별안간 허공 중에,
"쌔액 ! 쌔액 ! " 하는 날카로운 화살 소리가 연거푸 들려오더니, 커다란 호랑이가 <우어엉! >하고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한신이 그제야 눈을 떠 보니, 호랑이는 땅바닥에 나가 떨어져 네 다리를 버둥거리며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한신은 너무도 놀라워, 벌떡 일어나 호랑이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아니, 어느 순간에 무슨 재주로 호랑이를 이렇게...."
한신이 죽어가는 호랑이를 살펴보니, 호랑이 이마빼기에는 두 대의 화살이 깊숙히 박혀 있었다.
얼마나 힘차게 활을 쏘아 갈겼던지, 화살이 너무도 깊이 박혀 있어서 화살의 꼬리만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그 조차도 얼마나 정확히 쏘았는지, 두대의 화살이 마치 하나로 보일 지경이었다.
"화살을 이렇게도 정확하게 ...."
한신은 감탄해 마지않다가,
"형공은 이광(李廣) 장군보다 더 훌륭한 명궁수(明弓手)이구려 ! " 하고 말했다.
"이광 장군이오? 이광 장군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
"이광 장군이라고 얼마 전까지 우북평 태수(右北平太守)로 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은 궁술로는 천하의 명인이었소. 화살의 힘이 얼마나 세었던지, 호랑이를 쏜다는 것이 그만 바위를 쏘아서 화살이 바위속에 깊이 박혔다는 일화도 있다오."
"하하하, 화살이 바위에 박혔다고요 ? 그게 사실입니까 ?"
"사실이구말구요. 내가 왜 형공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겠소.'
"그거 참 흥미로운 얘기로군요. 기왕이면, 그 얘기를 좀더 자세히 들려주시죠."
"형공이 원하시니 들려 드리죠."
그리고 한신은 이광 장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광은 대대로 내려오는 궁술(弓術)로 유명한 가문의 태생이었다. 이광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숲속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고 화살을 쏘아 맞혔다. 그런데 정작 가까이 가 보니, 호랑이라고 보았던 것은 호랑이가 아니고 바위였는데, 화살은 그 바위에 깊숙히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광 자신도 놀라워서, 바위를 향해 화살을 다시 쏘아 보았지만, 그때에는 아무리 쏘아도 화살이 바위에 박히지는 않았다.
신기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화살을 쏘게되면, 바위도 뚫을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실상은 이 호랑이가 나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덤벼 왔기 때문에 저 역시 생사를 걸고 쏘아서 명중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한신은 <호랑이가 원수를 갚으려고 덤벼 왔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며 물었다.
"호랑이가 원수를 갚으러 오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
신기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장군께서 이미 보셨지만, 이 산중에 있는 호랑이들은 저만 보면 슬슬 꽁무니를 빼기가 보통입니다. 그러나 오늘 덤벼 온 이 호랑이만은 죽음을 각오하고, 저에게 원수를 갚으러 온 것입니다."
"원수를 갚으러 오다니, 형공에게 무슨 원수를 갚으러 왔다는 말씀이오 ?"
"실상인 즉 수일 전에 제가 암 호랑이 한 마리를 쏘아 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잡고 보니, 그놈의 뱃속에는 새끼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저런 ! "
"새끼 밴 놈을 쏘아 잡아서 안됐다 싶었지만, 이미 쏘아 죽인 것을 어떡합니까. 죄책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지요."
"아, 알겠소이다. 그러니까 마누라와 새끼의 원수를 갚으러 온 숫 호랑이가, 바로 이 호랑이였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마누라와 새끼의 원수를 갚으려고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 온 모양이지만, 제까짓 게 그래 보았자 저를 당할 수가 있나요 ? 허허허."
한신은 신기의 초인적인 담력과 궁술에 거듭 감탄하면서,
"형공과 동행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저승에 갔을 것이오."
"장군께서는 무슨 말씀을 ! 하늘이 아시는 어른을 호랑이가 감히 해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시 말을 달려 한계령(寒溪嶺)에 이르자, 신기는 말을 멈추고 한신에게 말한다.
"저기 보이는 곳이 남정관(南鄭關) 입니다. 거기서부터는 한나라 땅이니까, 안심하고 가십시오. 저는 여기서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한신은 작별이 아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형공도 나와 같이 한왕을 찾아 가기로 합시다."
그러자 신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저도 장군과 함께 한왕을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80 넘은 노모(老母)가 계셔서, 집을 떠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못 가겠다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약속이라도 해둡시다. 후일에 내가 초나라로 쳐들어가게 되면, 형공은 나를 찾아와 도와 주시오."
"그런 일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초나라로 쳐들어 가신다는 소식만 들려 오면, 저는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겠습니다."
"고맙소 그러면 그때 다시 만나 봅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굳게 다잡고 다짐을 해 두었다.
이렇게 한신은 많은 난관을 지나서, 드디어 한나라 땅에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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