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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리산 힐링 시낭송 원문보기 글쓴이: 연당 김태근
별
강 시 일
누구나 널 우러르지만
저 혼자 높은 고독
무리 지을 수 없는 고고함으로
바람조차 그냥 스치우고
가끔 구름 속으로 외로움 감추다
눈물로 떨어져 내리지
너무나 또렷한 개성으로
모래알처럼 뭉치지 못하고
은하수로 모여 흐르는 듯하나
알고 보면 천만리나 떨어져
독립된 성 하나씩 쌓고 있는 너
아득한 그리움 가슴에 못 박고
밤마다 서성이다
별똥별로 목숨 끊어보지만
사그라들지 않는 정념
새벽이면 젖은 풀잎에 반짝 눈 뜬다
부끄러워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어둠에 고백하고 낮 붉히는
어쩌면 넌 이루지 못한 불같은 사랑이
눈감지 못한 주검의 기다림 되어
달궈진 낙관이다
유년의 강
강 정 화
깃폭마다
눈부신 뜨거움으로 설레던
만국기의 물결
이겨라 외쳐대던 환호성
탕 화약총소리에 놀라
정신없이 내달리다가
넘어진 자리에 선홍빛 어룽
노라내지른 울음보
덧나는 흉터의 아픔이여
우두자리 처럼 선명한 추억
아직도 내차지가 아닌
앞자리의 깃발 찾으러
긴장으로 옥죄는 출발점에서
화약총소리 울리면
꿈길에도 내달릴 자세로
오늘도 버티어 낸다
쑥부쟁이 꽃
권 숙 월
남몰래 오래 전부터 좋아했다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들국화 이름밖에 모른 사춘기에도 쑥부쟁이 본이름 알아버린 청년기에도 자꾸자꾸 눈이 갔다 초가을부터 늦가을까지 하루도 못 보면 허전했다 장년기에도 마찬가지 첫사랑처럼 아릿해서 이름 부르면 가슴이 설렜다 외로움 감당하기 힘든 날 찾아가면 울먹울먹하던 꽃, 서리 아침의 눈물 아롱진 모습 잊을 수 없다
겨울바다
권 희 자
진눈깨비 내리고
방파제가 무너질 듯
시퍼렇게 우는 바다
동백꽃 곱게 피었다
바닷새 서 넛
끼룩거리며 해변을 날아가고
사납게 일어서는 파도
부두는 점점 가라앉는 듯하다
저만치 뱃고동 소리 은은하다
만선인가
젖은 눈 부릅뜬 바다에 놀라
돌아선 내 등 뒤로
폭풍이 내 삶을 떠밀어대고
갈매기 한 마리
새우를 물어 올리며
기슭을 날개짓한다
예술의 향기
김 관 형
사람의 숨결은
드넓은 마음 미로의 우리에서
옹찬 재미 재치의 솜씨를 부리고
번쩍이는 기술로 문명을 지어
즐거운 삶 요요한 누리를 꾸민다
피곤하고 지친 삶에 사로잡혀도
예술의 심장 피돌기 맥박을 열어
옹졸한 두뇌침묵을 슬기롭게 깨어
다양한 취미기호의 곡선을 연출해
참존 바람 흡족한 향기를 풍긴다
직선의 선로만 달리는 외길은
숨 줄의 끄나풀을 겨우 잡고 가는
삶의 나부랭이가 될 뿐이다
외롭게 우울한 사슬에서 벗어나
넉넉하고 따뜻한 정 줄을 이어
진한 삶에 찬란한 무지개가 뜨는
예술의 향기로 빛난 역사 지으란다.
길 위에서
김 년 균
길이 너무 멀어
평생을 쉬지 않고 가노라면,
지쳐서 더는 갈 수 없는 길
어디쯤서 그늘진 언덕을 만나
무거운 짐 내려놓고 잠시 쉰다.
그 사이 어느덧 다른 길이 다가와
정답게 팔짱 끼고 등 떠밀며
보이지 않는 낯선 길로 유혹한다.
그 길이 억만 굽이 세월을 넘어온
귀중한 길이라 장담해도 누가 믿을까.
어느 길을 따를지 모르겠구나.
가는 길은 끝없이 멀고
오는 길은 흔적조차 없지만,
길은 어디서나 멈추지 않는다.
사랑을 위하여
김 년 균
사랑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얼굴도 눈동자도 아무 형체도 없기에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어딘가
숨어 있을 듯싶어 늦도록 기다린다.
눈감으면 떠오르고 눈뜨면 사라진다.
사랑은 나무나 꽃처럼 자라지 않는다.
땅이 아무리 기름지다 해도
사랑은 나무나 꽃처럼 자랄 생각을 못하고
껍질만 만발하여 벌 나비도 날아들지 않는다.
거리엔 시도 없이 찬바람만 몰아친다.
사랑에 깃든 자는 길에 나서지 않는다.
손에 잡힐 것 같고 가슴에 품을 듯해도
돌아보면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고,
빛깔 좋은 이름만이 거리에 둥둥 떠다닌다.
천길 아래 벼랑에 떨어진 막막한 사랑,
그래도 어디가나 허울 좋은 소문은 널려 있어
허기진 사람들은 그 말을 붙들며 위안을 삼는다.
저마다 허망한 꿈을 안고 문밖을 나선다.
사랑은 무지개처럼 덧없지만 믿지 않는다.
아무도 돌아서서 원망하지 않는다.
있는 듯해도 없고 만날 듯해도 만나지 못하고,
그래도 네가 그리워 밤낮없이 눈물을 흘린다.
오늘도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열쇠를 돌리세요
김 문 자
하염없이 눈물 흐르고
잠 못 이룬다는 당신
어찌하여 당신은
스스로 문을 닫은 체
껍질 속에 숨어 있나요
세상 밖 나오는 열쇠
잃어 버렸나요
꽁 꽁 닫힌 당신 마음 열
꼭 맞는 열쇠 있을 겁니다
이런 희망은
부질없는 일이라며
마음과 몸 더
움추릴가 두렵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얼른 열쇠를 돌리세요
우리가 지금 문 밖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맑음
김 예 태
햇빛이 노란 알곡들 위에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알곡들의 이마가 반짝거린다 이삭들 쌓이는 빛살의 무게로 등이 굽는다 통통해진 빛방울이 알곡의 정수리에서 솔솔 미끄러져 내린다 깻단을 털고 있는 아낙의 남빛 두건 위에도 햇살들 내려 앉아 그의 정수리 말갛다
햇살이 머무는 하얀 잎일수록 뒷면이 검다 덤불숲 뒷면에 무더기 무더기 모여든 검댕의 두께 깊다 검댕도 쌓이면 몸에 겨운지 몽글몽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하얀 길이 제 몸에 어둠의 검댕을 무늬 놓는다
아낙이 두건을 풀고 검뎅속에 들어앉아 가만한 정물이 된다
아낙이 두건을 쓰고 빛속으로 걸어나가 투명한 풍경이 된다
시집詩集
김 완 용
하루의 권태기를 지우며
서녘으로 침몰하는 빛살처럼
우체통에 배달된 언어의 연금술
음흉스레
이랑처럼 파인 여자의 가슴팍을 훔쳐보며
그의 심장에 정을 대고 망치질한
시인의 섬세한 손길 따라
뚝뚝 핏방울로 얼룩진 갈피마다
바람의 꼬리가 산탄처럼 박힌
한 권의
전이轉移된 뜨거운 심장을 끌어안고
서서히사랑에 빠져들 때
시인은 꽃이 되었고
나는 나비 되어
시들지 않는 봄날을 만들었다.
의자를 지키는 이유
김 용 언
막차가 떠나고
버스 정유장의 외등도 꺼졌다
나는 어둠과 눈을 마주한 채 체온이 사라진 의자에 앉아 있다
내일 아침 첫차로 올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사실, 올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기다려 볼 참이다
기다람이 없는 삶은 얼마나 메말랐던가
그래서, 차를 타지도 않을 나
그래서 오지도 않을 나를 마중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의 의자를 지키는 중이다
체온이 식어버린 빈 의자
누군가 버리고 간 차표와
헛탈감 몇 조각만이 어둠속에 잠기고 있다.
밤 바다와 적막의 싸움터에서
김 용 재
그렇게 소리쳐도
듣는 이 없는 적막을
밤 바다는 안다
그 적막에 기대어
나는 무서운 추위를 견디며
어둠의 냉정을 익힌다
잠자듯 마취된 세상을
운명으로 꼭 껴안고
침묵의 목을 치는
부리부리한 파도의 눈빛이
내 얼굴을 스친다
추위는 추위대로 기승을 부리고
밤바다와 적막의 싸움터에서
남이냐 북이냐
핵核이냐 사드THAAD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미국이냐 중국이냐
참 허술한 의식의 남루襤褸
무겁게 어깨에 걸친다
텔레파시
김 운 향
마음의 안테나를 통해
흘러드는 고감도 주파수
그대 나를 부르는구나
언젠가는 우리도 사라지겠지만,
지금은 다가온 그 마음을 보듬어주라
서로 오랫동안 방황하다
비로소 찾았다
지난 것은 모두가 애틋한 추억일 뿐
세계의 조화는 무르익고
이제는 꽃을 피워야 할 때
인생의 황금기에 만난 우리,
서로에게 꿈을 안겨주어라
두 손을 맞잡으면 힘은 배가 되리니
크나큰 세계의 에너지를 모아
우주의 둥지를 짓자
우리의 생명을 잇자
천년화가 활짝 피고
불사조가 춤추는 이 시공에서
환희의 불꽃을 힘껏 몰아보자.
하동河東에 가서
김 종
Ⅰ
신부의 면사포로 몸을 가린 섬진강과
물개처럼 깔깔거리며 물장구치며
멱을 감는 지리산을
모여든 구름들은 차일치고 굿 보는데
높은 연대蓮臺에 앉아 단전호흡 중인 천황봉은
느린 몸짓의 어깨선에
열두 폭 비단 같은 소리 장단을 걸치고
주름주름 물길마다 무지개를 띄운다네
Ⅱ
물비늘 같은 사투리끼리 반짝 반짝 어울려서
오늘 하루도 대낮처럼 저물지 않는 화개장터
이날 평생 대봉감 닮은 태양을 띄워주신 하늘님을
최참판댁 잔치마당에 정중히 초대하여
불로장생의 갖가지 산채를 올리나니
참게장에 밥 비벼서 맛있게 젓수신 다음
쌍계사 녹차꺼정 곁들여 대접하면
보름달처럼 넉넉한 등 다순 세월에다
이 들녘 저 들녘 풍년은 따 논 당상이겠다
Ⅲ
은어 떼 같은 바람을 데리고
하늘 멀리 마중 나간 섬진강이
달빛 별빛 맑게 내린
지리산의 저 준수한 자존심을 은근 슬쩍 젠 체하고는
등대불빛처럼 퍼져가던 마을 안마당에서
하늘땅이 휘둥그레질 혼례를 치르나니
이만하면 풍류 넘치는 산천경개에다
이야기가 주렁주렁한
천하제일 하동이란 말은 빈 말이 아니로세.
나목(裸木)에 기대어
김 종 섭
눈부신 겨울나무여
바람은 잠시 가지를 흔들고
찬 눈발은 일순 너의 몸을 적시지만
깊은 뿌리에서 지켜온
튼튼한 줄기 속 젖지 않고
하늘로 하늘로 팔을 뻗는다.
젖은 눈 감고서 과즙 같은 수액을 다오
잦아드는 입술에 갈증을 채워다오
금단의 열매 떨어져
혼돈 속으로 곤두박힐지라도
너 가슴 할킬
불같은 뱀의 혓바닥을 다오.
어디에나 마구 버려진 탐욕의 열매
허망의 껍질만 남긴 채
우리 젊은 날들은 어딜 가나
이대로 쓰러져 나무나 되었으면
이대로 눈감고 바위나 되었으면.
먼지 같은 말 몇 마디 귀에 쌓이는 날은
눈부신 겨울나무를
미친듯 미친듯 흔들어 보지만
눈 덮힌 겨울 바위를
깨져라 깨져라 내리쳐 보지만.
모래시계
김 진 돈
흔들리는 것은 거꾸로 걷는 시간이다
누군가 제 발자국을 뒤집어 울음을 달랬다
누수의 족장으로 모래언덕을 옮기는 사막
수렁에 묻혔던 밤이 대상隊商의 뼈를 추린다
이슬이 허공에 심은 모래뿌리를 복각한 밤
매장된 뼈들의 비명이 찍혀 나오며
사구에 남은 바람은
탁본 되지 못한 낙타의 울음을 찾아 떠돈다
낙타 풀은 더 붉게 물들고
노인이 쥔 고삐가 낙타 등처럼 휘어진다
전갈자리가 꼬리를 흔들어 별빛을 떨어뜨리면
갈증을 비트는 실크로드 따라 사람의 풍경이 옮겨간다
양가죽 물병이 말라붙은 문장
자명금처럼 길이가 변하지 않는 흰 노래
꽃잎이 놓친 악력握力 씨방으로 옮겨가고 있다
아무르
김 현 신
비 인 듯, 비릿한, 유빙 인 듯, 흐릿한
Amur Amur
노을은 떠나갑니다
물의 심장, 물의 입술, 풀잎의 풀잎, 그리고
내가 있는 저 너머, 검은 강물 흘러들어요
아무르 찻잔 머무는, 멋진 다리를 걸어봐요 그리고
껴안아 보세요 발목이 젖어들어요
그리 검지는 않습니다 꽃 피우려 하지 마세요
노을은, 그냥 노을이면 됩니다
안개비 쓸어내리는 그냥, 검은 강물이면 됩니다
엽서를 띄울까요 아득타,
Amur, Amur
돌아가는 너를 던지고, 건너편에 남아있지 않을,
하얀 섬 인 듯, 백발은 울다가는가
나의 아무르여!
노을은 깊어집니다 차 한 잔 머무는 객실에서
노래를 부를까요
Amur, Amur
벚 꽃 난
박 건 웅
방울방울 이슬 맺힌 잎 발판으로
자줏빛 꽃이 피네
키 큰 나무 아닌 작은 덩굴에
환한 벚꽃이
잎은 밝은 녹색 꽃은 자줏빛
벚꽃인지 난인지 분명
꽃은 벚꽃 잎은 난
하지만 모여 핀 꽃
둥근 공처럼 보이고
덩굴에 달린 잎이
벚꽃도 난도 아니라고
말을 하네
이 꽃이
벚꽃이면 어떻고 난이면 어떠냐
꽃 이름 생김새대로 벚꽃난이니
우리도 셍긴 모습 그대로
그 때 그 때 형편 따라 살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날아라 빛
문 효 치
날아라 빛
먼지처럼 묻어 있는
상한 색깔을 모두 털어버리고
파랗게, 빨갛게
하여튼 태양의 몸뚱이로부터
떼어내어진 찬란한 빛깔로
온통 채색을 하며
날아라 빛
눈감으면
떠오르는 아득한 세상을
곤두선 시선으로
유리속처럼 바라보며
완벽한 자유, 그 막힘없는 천지를 향해
날아라 빛
네가 갈 곳
그 끝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사랑을 위해
어둠의 휘장을 꿰뚫어
깜깜한 바윗속을 깨뜨려버리고
힘으로 파도를 몰아가며
날아라 빛
날개에 달려있는
수많은 깃털로부터, 다시
또 수많은 날개를 달아내어
바람을 휘저으며
하늘, 하늘의 슬픈 사연을 휘저으며
멍멍히 메아리지는 한 마디 환호를 울부짖고
날아라 빛
생각만 깊어지는 밤
배 영 순
고요한 어둠의 길 따라
찌르르 구슬피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흩어져가는 생각들을 잡으려다
지쳐 잠 못 드는 밤
내 마음을 끌어 당겨 슬프게 한다
하루를 녹인 땀방울로
사랑의 품안에 붉게 물든 장미빛 노을
꽃향기 피워 낼 내일을 꿈꾸며
평온한 어둠속으로 곤히 잠든 시각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의 행렬
어둠이 드리워진 창에 살며시 내려앉아
바람에 나부끼던 빈 가슴
토닥토닥 사랑의 눈빛으로 달래주고
따뜻한 손길로 감싸 안으며
포근히 잠재우던 별빛들도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일렁이며 파도치는 생각들을
고요히 잠재우려 성큼성큼 다가오는
내일을 향해 주파수를 맞추어 본다.
무제(無題) 2
변 영 로
머리에 하늘 이고 발은 땅을 디뎠건만
아득코 허전할사 가는 곳 어디멘지
발부리 내치는대로 나가볼까 하노라.
가다 해 저물고 산궁수진 길 막히며
길가에 쓰러진 채 찬이슬에 얼지언정
그러나 한번 떠난 길 돌아섬이 있으랴.
가엾고 하염없다 포풍촉영이 한평생
찾는 것 간곳 없고 처지는 것 슬픔뿐을
울부져 무엇할거나 이 악물고 살리라.
고모역에서
손 수 여
언젠가를 돌아보는 버릇처럼
잃어버린 무엇이 있다
분명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아닌 것이 달아나다
시간도 멈춘 녹슨 철길을
따라 와서 그냥 주저 앉아본다
바람은 설중매를 불러 저만큼 앞서오는데
강물은 잔잔한 봄바람 저어 돌아가는데
가버린 것은 오지 않는다
간이역에서 기다리는 것이
기차뿐이던가
기적 같은 오포 울림만 남겼던
전설 되어 버린 이 길을,
홀연히 그냥 말없이
취한 채 떠나가고 싶다
가슴에 출렁이는 그 추억이
더 아련해지기 전에.
청보리밭에 오는 봄
손 해 일
진눈깨비 날리던 겨울엔
생솔가지 군불 지핀
아랫목 뜨신 맛에 살았다
이불 홑청을 벗기듯
청보리밭 살얼음 녹이는
돌개울 물소리
비늘 돋친 바람에 실리는
씀바귀의 봄 몸살
은쟁기 보습에
뭉툭뭉툭
겨울이 잘려 나간다
젖은 나목의 가지마다
불을 켜는 눈망울들
오요요 기지개 켜는 버들개지
몽정夢精하는 들녘
내 이제 들로 나가
더운 피 흐르는 흙살을 보듬고
꽃씨를 뿌리리라.
그냥 당신이어서 좋아합니다
안 상 민
그냥
당신이 좋습니다
이런저런 좋은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당신이 좋습니다
아니 이런 저런 좋은 점이 꽤나 많지만
그냥 당신이 좋습니다
이런저런 좋은 이유로 당신을 좋아한다면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이유로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그냥 당신이 좋습니다
그냥
당신이어서 좋아합니다
이런저런 좋지 않은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당신이어서 좋아합니다
아니 이런저런 좋지 않은 점도 꽤나 많지만
그냥 당신이어서 좋아합니다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이유로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런저런 좋은 이유로 당신 아닌 또 다른 당신을
만들 수도 있기에
그냥 당신이어서 좋아합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유일한 이유
그냥
당신이어서 좋아합니다
게다파와 회개
오 동 춘
같은 핏줄 괴롭히고
게다 개로 잘 산 네들
짚신 조국 깔뭉기고
섬오랭캐 충견이던 죄
그 죄값 회개 했던가
거짓 변명 많았다
악질 조선 손에 귀 찢기고
뼈가 부러져서 병신 돼도
짚신혼 지킨 선혈들
그 모진 독사들 어찌 잊으랴
할애비 애비 모진 짓에
잘 산 후예 회개 없다
몇 사람 뉘우쳐 살다 가고
정권 쥔 손아귀에
게다파 출신 부려 써서
민족정기 죽인 죄도
우리겐 오욕 한 역사
부끄럼도 너무 크다
붉은 이리 일으킨 전쟁
자유 지킨 공은 높다
회개한 반공투사로
힘센 나라 방패되라
용서와 화해의 나라
자유통일 속히 이루자
강건너 눈발 속에 사공 부르는 소리
오 정 수
산 높고 물길 깊은 강마을
어쩌다 지나는 나그네 강건네 주며
대대로 살아온 박노인
오늘밤도 서산마루에 해지자
떠오른 달 오동나무에 걸리고
집 나간 자식 그리며 달 바라보네.
시집간 제 누이가 세상을 뜨기 전만 해도
밭 일구며 사공질도 곧잘 하던 아들
언제부턴지 먼 하늘만 바라보더니
강 건너 떠나고 말았네.
강바람 차갑고
갈대밭에 겨울철새 날아들어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나루터엔 빈 배만 매어있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동짓날 밤
동네 개 짓는 소리 들리더니
박노인집 싸리울에 조등이 걸리고
강건너 나루터 눈발 속에 사공 부르는 소린지,
바람소린지.
푸른 지우개
위 상 진
녹아버린 선인장 꽃을 뽑아냈다
내안에 은닉되어 있는 불온한 꿈이 메워진다
바람결에 넘겨진 책갈피에 숨어들 듯
그의 죽음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그의 손목시계는 손목보다 오래 살아남았지
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있지 않은
야수파의 얼굴, 우린 자주 떠났던가?
너의 말 냄새는 싱크대에서
산책길에서 튀어나오고
헹궈내도 남아있는 물의 얼룩
우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약속을 깨는데 익숙해져야 했는지?
모래가 흘러내리는 시계 뒤에서
선인장 가시는 계속 자라고 있었을까?
취기처럼 비틀거리며
사랑 할 때와 사랑 받을 때의 파일은
서로 다르게 고쳐 쓰는 중이어서
더 길어지거나
더 짧아지거나
누군가 나를 점수 매기고 있다
누군가가 지워지고 있어
금욕의 냄새 물씬한 푸른 별에서
몰인정한 시계바늘 끝에서
말하는 돌
위 상 진
-안녕! 오늘은 어디부터 읽을 거야
로제타석 모양의 문진(文鎭)
내 손안에 들어온
나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눈
몽상으로 가득 찬 아기 고양이처럼
이상한 것을 찾고 있는, 그는
둔색 이끼가 돋아난
쐐기풀이 꿈틀거리는 상형문자
돌의 심장이 견뎌낸 숨결이었지
범람하는 글줄위로 흐르는 유빙들
스핑크스처럼 침묵에 빠져들다
가끔 달그락거리기도 했을까
대지의 배꼽에서 어느 병사가
그의 시간을 건져 올렸을 때
어둠에 물들어있던 눈은
잠시 머뭇거렸을까
몇 세기를 돌아 와
제 몸의 문신을 반복 해독하며
무심한 듯, 아닌 듯 나를 바라보는,
검은 Stone
왕조의 송덕(頌德)을 품은 그는
내 글을 미세하게 짚어내는 전문가
이제 그는 내가 써두었던 서약과
쓰다 만 글들을 또 읽을 것이다
불멸을 감아 넣으며
-안녕! 오늘은 무얼 쓸 거야
모종 컵
유 민 정
독방을 임대한 새싹 한 잎
아직 이름도 밝히지 못한 채
연초록 얼굴을 내밀었다
검붉은 흙 속을 밀치고 올라 온
저 목이 아직 여리다
한 잎 모종순이 몸 담은 집
꽃삽 한 번의 흙에
아침이면 구석구석 물을 먹는다
임대한 저 집은 일회용 컵
지금 의지할 곳은 모종 컵이 전부다
어디로 옮겨갈지 몰라 불안한 모종순은
차근차근 여정을 챙긴다
땅을 딛고 일어설 때
모종 컵은 밭고랑에 널브러질 것이다
저 녁 놀
유 치 환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밤 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 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가시나무 새
윤 희 선
삶의 가시가 어찌 그리도 끼어드는가
살 속을 비집고 끼어든 가시
가시나무로 자라네
공작새처럼 화려한
칠보로 치장한 관을 흔들며
태극무늬 알알 박힌 청자색 날개
청록의 기인 꼬리 파닥이며
가슴에서 날아오른 새 한 마리
가시나무 꼭대기에 앉다
어디멘가 그윽히 바라보네
어느 하늘나라를 눈에 담는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로
향수를 달래며
고은 진주 한 알 토해 내는
가시나무 새.
향수
이 경 주
새싹이 돋아나면 소꼴을 베어놓고
낫치기 하던 어린시절 기억하니, 친구야.
그 때의 그 냇가는 어디로 갔니?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채
물장구 치던 어린시절 기억하니, 친구야.
그 때의 그 바닷가는 어디로 갔니?
수수깡으로 화살을 만들어
소나무에 과녁을 맞추던 어린시절 기억하니, 친구야.
그 때의 그 뒷동산은 어디로 갔니?
논두렁 밭두렁에 쌓인 하얀 눈 밟으며
십 오리 길 학교 다니던 어린시절 기억하니, 친구야.
그 때의 그 오솔길은 어디로 갔니?
보고 싶은 친구야,
지금 너는
어디서 무얼 하니?
한글날
이 광 석
가을비더러 제 이름을 묻자
‘쓸쓸’이라고 답했다
사춘기 단풍은 ‘불꽃’이라고 했던가
첫눈 내리면 저 겨울산은 뭐라고 할까
어릴 적 엄마 등잔불 밑에서 배운 한글
그 철부지 같은 우리글이 내겐 옛날 외할머니 같다
내일은 한글날
세종대왕께서는 아직도 훈민정음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고 하실까
뿌리 깊은 나무 그 착한 한글이
알아보기도 힘든 낯선 글이 되었다고
고개를 돌리시지는 않을까
한글날은 한글로 손편지 쓰는 날
한글 앞에 머리 숙여 속죄하는 날이다
한로 무렵
이 무 권
새끼손가락 길이의 여뀌 군락
양귀비꽃 씨알 같은 꽃망울들이
마당가 한 자락을 발갛게 점령하고 있다.
그 언저리 군데군데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쥐손이풀
무당벌레 등짝 같은 꽃을 피우고,
꽃피울 대로 꽃피우고
씨 맺을 만큼 씨 맺은, 이만치서
미안한 마음 품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풀숲이던 정원을 말끔히 정리한 게 며칠 되지 않았는데
그 짬에도 꽃들을 밀어 올리는 걸 보면
여뀌도 쥐손이풀도 계절을 빌미로
손 놓고 지낼 생각은 아예 없었던 모양이다.
가능하면, 서로 일상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선에서
잡초든 벌레든, 개구리나 뱀까지 자유롭게
함께 살기로 내심 다짐해 놓고, 또
지례 짐작으로 그들의 영토를 유린한 셈이 되었다.
불필요의 필요
혼자 짓는 웃음으로 비껴가고자 하는
이 면구스러움, 아무래도
나는 염치없이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인사동 연가
이 삼 헌
북악이 큰물 내려 중학천 이루고
노를 저어 또 천년은 청계천으로
아직도 조선을 개국한 삼봉 선생이 나귀를 타고
한양 설계로 잠 못 드는 밤
천년의 바람이 별을 내리면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들 구름처럼 모여
인사동 강물 길 텄다
순풍에 돛을 달고 이 강물 건너자
물길마다 열리는 길을 따라
노래와 그림으로 나무에 걸고
무너미골에서는 황도와 딸기로 배를 채우자
우리 모두 손을 잡고 조금씩은 연인이 되네
삼봉 선생과 종각 포구에선 인경을 치며 새날을 맞자
*한양 설계의 밑그림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 주도하였다.
창호지문
이 선
어머니 하얀 버선코가 안방 문을 사르르, 연다
국화꽃 무늬가 환히 창호지에 드러난다
향기는 온 몸을 한지에 파묻고, 국화꽃을 말리는 중이다
아버지의 겨울은 길고
어머니의 밤잠은 짧아서
순록의 콧등 위에서 잘 자란, 툰드라 햇빛 한 줌
눈꽃향기를 묻혀와,
서늘한 바람을 안방에다 밀어넣는다
격자무늬 창살에는, 짐승 몇 마리 숨어서 산다
계절의 갈피마다, 과즙 향기가 흘러내리는 밤
삽짝 밖으로만 떠도는, 아버지
― 작은댁서 자고 온, 아버지 헛기침 소리
어머니는, 쪽머리에 동백기름을 정갈하게 바르고
호롱불 아래, 핏기 없는 입술로 바느질을 한다
신호등이 바뀐, 애락의 틈바구니에 낀
한숨 한 스푼, 그을음을 향기로 채색하는 어머니
국화문양, 얇은 창호지 몇 겹으로
아버지의 시린 겨울을 녹일 수 있을까?
아랫목 놋그릇에 담긴, 쌀밥 한 그릇
나는 호롱불빛에 지치도록 손그림자놀이를 한다
저 작은 이파리 하나의 기도소리
이 양 우
저 작은 이파리 하나...
그 누가 건드릴 소냐
바람에 요트를 타듯이
위태로운 순간의 마지막 생명
간헐적인 할레를 목격하고/ 기도할 자들아
그 앞에 고개 숙여 묵념을 보내라
삶이 가파른 시대의 곡절처럼
가냘픈 언덕에 윤기 나는 가을도
순간의 의식으로 사라지면
초라한 움막집에 연기처럼
타오르다가 꺼지는 생명의 운명들
고요할 나날들의 사연위에
다시 또 태양이 떠오르고
지구 한 복판 참회의 구름들이 모여들지라
그 신기루의 향연을 축복하려거든
오솔길 나무처럼 잎을 흔들고
농부의 마음 하나 가난을 쫓으려는 새의 노래
아, 그것은 은은한 파도소리 귀에 머물고
지금은 사랑의 시간이 쉬어 휴식할 찰나
미끄러지듯 대 제단에 웃음의 기도를 던지며
평화의 침묵으로부터 호흡하며 깨어날지라
저 초라한 잎사귀 하나에 기구한 기도소리
사르르 흩날리다가 지상위에 다시 또 내려질 때까지는
아무 말도 말라 조용히 고개 숙이고 구원의 기도만하라
겨울 편지
이 영 춘
흔들리는 바람의 가지 끝에서
셀로판지처럼 팔딱이는 가슴으로 편지를 쓴다
만국기 같은 수만 장의 편지를 쓰던 그 거리에서
다시 편지를 쓴다
그대와 나 골목 어귀에서 돌아서기 아쉬워
손가락 끝 온기가 다 식을 때까지
한 쪽으로 한 쪽으로만 기울던 어깨와 어깨 사이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
그림자처럼 길게 구부러지던 길모퉁이에서
뜨겁고 긴 겨울 편지를 쓴다
오늘은 폭설이 내리고 대문 밖에서 누군가 비질하는 소리
그 소리에 묻혀 아득히 멀어지다가 다가오는 소리
그대, 눈雪이 되어 눈발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는 소리
이 겨울밤 내 창 문풍지 뜨겁게 흔들리는데
나는 그대의 언 땅에 편지를 쓴다
달빛 휘어진 어느 길모퉁이에서 헤어진
꽃잎 같은 사랑으로 꽃잎처럼 사라져간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목련화
이 우 룡
봄날의 목련을 보셨나요
아침 햇살 속에 눈부시게 빛나는
희디흰 목련꽃을 보셨나요
어린 자식들 앞에서 그윽이 미소 지으시던
젊은 날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릅니다
따사로운 한낮, 미풍에 살랑거리며 속살대는
자줏빛 목련꽃을 보셨나요
세월에 떠밀려 어느새 늙은이가 되어 버린
한창때의 누이 모습이 되살아납니다
해 질 무렵 바람도 없는데
뚝 떨어지는 목련꽃을 보셨나요
가족 부양하느라 당신 한 몸 살피지 못하셨던
생전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여보게나
이 원 우
여보게나
내 주위를 떠돌던 그림자
정겨운 목소리 귓가에 스치고
봄 가을이 가고 오면
손마디는 굵어가고
굽어지는 등허리는
자꾸만 중심을 잃어가네.
주위를 둘러보니
아는 이는 하나 둘 사라지고
바람소림나 드세게 잦아드네.
여보게
만상(萬像)을 뒤로하고 눈감으면
언제쯤 모두가 꽃으로 보일려나
한 나절 머언 산을 바라보다가
발걸음 훠이훠이 돌아서네.
사모곡
-덕산* 오일 장날
이 원 우
덕산 오일 장날입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맞잡고
시장 바닥에 지내온 일들
자식 자랑, 건강 걱정,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사람들은 빈 바구니 하나씩 손에 들고
어디선가 싸게 판다는 소리따라
앞 다투어 모여들었다가 흩어지는 오일 장날
이제 한나절 웅성거리던 시장도 파장에 이르고
돌아서는 발길이 땅거미로 묻힙니다.
80되신 어머니의 지난 이야기는
오일 장날 장바구니 가득 채우시고
어머니는 마저 못한 말 묻어두고
엷은 미소를 지으십니다.
지금은 암으로 투병 중인 어머니
굽어진 허리로 땅을 더듬는 지팡이
멀어져가는 어머니 뒷모습 바라봅니다.
3남매 키우신 우리 어머니
주름진 손마디에
이날까지 골 깊은 이야기가 새겨집니다.
바나나가 익어가는 시간
이 정 화
구름의 뿌리를 찾아 헤매네
리모콘으로 아침을 열고
당신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푸틴이 크림을 먹어버렸네
석방을 선망으로 잘못 읽은 나는
푸른 양철 대문을 열고
하숙집 할머니가 걸어 나오네
두부의 밑면이 까맣게 타버리고
데리다를 읽다가 그만 둔
갈색 테이블 위에서
둥글게 웅크리고 있는
사유의 시간들이 점점이 박혀있네
장미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지
비밀의 문이 열리고, 닫히고
이제는 열쇠가 필요없는
당신의 정원은 너무 아늑해
부드러운 껍질을 벗기면
속 깊은 고요가 한가득
플라스틱 바구니 속에서
하루는 노랗게 익어갈 것이고
비비추꽃
이 태 수
비비추꽃들이 핀다
연한 자주색 꽃잎들,
어미새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러
주둥이 다투어 내미는 아기새 같다
한껏 벌린 새부리 모양의 꽃잎들이
여름 낮꿈 꾸듯 해바라기를 한다
작은 새들도 날아든다
비비추꽃들이 핀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
유별나게 까탈을 부리던 내 모습,
아주 오랜 기억들도 데려오며 핀다
자줏빛 안으로 끌어안은 흰 꽃들은
수술들 사이에 유난히 앙증맞게
암술을 내밀면서 핀다
햇살에 몸 비비듯이
서로에게 마음 포개어 비비듯이
또는 나처럼
바람과 뜬구름에 마음 비비듯이
반그늘 뜰에서 핀다
문향 산방에서
이 효 애
고요를 방목한 하동의 형제봉 아래
심신을 덖어 말린 산방 들어서면 속 깊은 사내
제 몸 대패질해 지은 한옥 떠받들고 있다
지붕위로 가부좌 튼 멧새는 언제부터
옹기종기 자리 틀고 앉은 관상수의
포근한 여유로 파고들어 하 시간 보내고 있다
숲 향으로 들러 싼 하늘가
자연 닮은 사슴 한 쌍 무등타고 거니는 뜨란
춥고 어설픈 산중 외로움을 청정한 불꽃으로 피워
미처 손보지 못한 유년의 그늘까지 환하게 비춘다
달달한 바람의 혀가 내장까지 헹궈내는 대청마루
무한 사랑 빚어 만든 사내의 정념이
질박한 차향으로 번진다
오랜 잠의 여유를 미련 없이 사르는 사슴 한 쌍
여여한 하늘아래 못 다한 사랑
사라지지 않는 별똥별로 반짝인다
고해성사告解聖事
전 민
설레임으로 아침을 새각시처럼 맞이해
하루해를 아쉽게 보내면서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까지 흩어짐 없이 꼿꼿하게
소나무처럼 살아왔다고 말하고싶네
남들보다 한 발 앞서 가려,
한 점 더 챙겨,
뱃살 돋구려 마음먹으며 살지 않았네
아부와 질서, 교만, 비굴한 마음으로
앞서가는 사람 뒤꽁무니 잡고 발걸지 않았네
산보하다 만나는 사람들은 걸음이 훨씬 빨랐어.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젊은이도
내가 걷고 있는 앞으로 KTX처럼
바람만 휙휙 내면서 스쳐 지나가버리고 있었어
40년을 넘게 직장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헤어져 낙엽처럼 떨어져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날,
나는 큰소리로 외치리라 과거는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고마웠다고
살면서 쓰려던 남은 체력 다 소진하여
피붙이들과도 인연을 처음으로 돌려
놓아야되는 최후의 날,
인생은 아름답고 행복했다고
미소 지은 채 흙으로 돌아가리라.
여름축제
정 대 구
여름은 작년에 죽은 것까지도
다시 돌아와 벌이는 한바탕 시퍼런 생명의 축제
모기 하루살이 깍따귀 물방개 사마귀 왕벌 일개미 풍뎅이
자벌레 푸렁이 노른진이 황충이 혹벌레
땅을 기고 물에서 놀고 공중을 나는 갖은 벌레와 물것들
바랭이 개씨바리 도투마리 명아주 비름 쪽 마름
논과 밭에 나서 자라는 온갖 이름 가진 풀 풀 풀
이름 모를 잡풀들까지
잡고 잡고 또 잡고
베고 베고 또 베고 뽑고 뽑고 또 뽑아도
다시 돋아나고 자라나는 무서운 생명력
아침 산책길에 함초롬히 내 발등 적시고
밤새 내 살갗에 붉은 조팝꽃 피우는
한바탕 잔치 벌렸네 여름 내내
푸른 영혼들 무섭게 부활하는 왕성한 생명의 축제
전쟁의 굴레를 벗는 가을이 오면
정 득 복
가을이 오면
산과 들은 형형색색으로 온통 물들지만
봄, 여름, 가을 내내 땀 흘리며 일구어 온
오곡백과가 주렁주렁 매달리어 무르익어서
풍요한 가을의 결실을 거두어 들이세나.
가을이 오면
깊은 산에 온갖 약초들이 숨어서 자라고
계곡에는 회귀성回歸性 물고기들이 알을 낳고
나무에는 윤기 주르르한 밤송이가 매달리고
도토리가 가을바람에 우수수 땅으로 떨어지네.
가을이 오면
여름 내내 천둥과 번개 소리로 심산深山을 울리더니만
아직도 우리의 땅에는 한국전쟁으로 골육상쟁의 상흔傷痕이
산비탈의 한 포기 풀, 한 그루 나무에 이슬로 맺혀 있어서
우리의 쓰라린 역사를 애잔하게 울리고 있네.
가을이 오면
포진布陣과 자연紫煙이 덮인 전쟁의 굴레를
동해 푸른 파도에 저 멀리 벗어던져 버리고
폐허에서 일어나 꿈과 희망이 넘치면서
민족이 함께 잘 살아가는 하나의 나라를 세우세.
바람 부는 날
정 명 숙
바람을 앞선 한줄기 파장은
수백 킬로미터를 내달려와
기상레이더에 점점이 전파의 선을 긋고
흔들리고 뒤엉켜 떠밀려오며
무엇 제대로 하나 풀지 못하는 손
파란 핏줄기 돋아 휘젓고 있다.
구름은 하얀 달빛 가르다가
바다의 풍랑으로 휘돌다가
사막 가운데 선인장 꽃으로 피어나다가
푸른 하늘 치달아 오르다가
한 줄기 바람으로 울부짖는다.
바람은 빛으로 다가와
쓰러지고 되짚어 일어나는 일상으로
소리 내어 흩날리다
밤하늘 별이 되어 깜빡인다.
바람은 바람따라
너울너울 허공을 휩쓸어간다.
그림자와 동행
정 명 숙
언제부터 따라 나선 걸음인지
길었다
짧았다
숨었다
이젠 뭐라고 한 마디 건낼 때도 됐는데
아무런 대꾸가 없다.
계절이 바뀔 때면
내 몸안 뼈마디도
가끔은 말을 건내기도 하고
얇아져가는 손등과 손바닥엔
골깊이 주름 겹친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들어
돋아나는 새싹이나 떨어지는 낙엽
해와 달 바람소리 구름 안개비 천둥
한 줄기 별빛에도 눈과 귀가 트인다.
회한(悔恨)의 자국은
새삼 뭐라고 짚을 수도 없고
자꾸만 숙여지는 고개 무겁기만 하다.
이쯤에서
그대와 마주한 시간에
작은 촛불 하나 밝히고 싶다.
시인 김삿갓
정 민 호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세상 일 가릴 수 있었으랴
전라도 땅 화순 동복까지
시를 뿌리고 삶을 뿌리고 다닌
그 먼날의 하늘 위에는
지금도 비가 오고 눈이 내린다
한 번 찾아오기도 힘든 세상에
지금 삿갓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먼 길 따라 그대 다시 찾아오라
세상도 변하고 시도 변하고
사람까지 변해 버린 지금,
당신이 뿌린 그 시는 어디에서
움 터서 싹이 돋고 있는지
당신이 다시 이땅에 온다 해도
그대, 그때 삶의 시는
어디로 가서 다시 방황 하고 있을까
가난한 연인들
정 성 수(전주)
다행이다 너를 만나서
참
다행이다
여자와 여자 속에 네가 있었다
울고 있는 네가 있었다
남자와 남자 속에 내가 있었다
길을 잃은 내가 있었다
눈물 많은 너와 방황하던 내가
방 한 칸을 만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밥을 먹고
가슴을 맞댈 수 있는 방 한 칸이면 충분했다
가난이 가난을 위로하는 동안
우리는
가난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참으로
다행이다 너를 만나서
다음 생엔
정 성 태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간결한 시를 쓰는
도예공으로 살고 싶어.
번잡하지 않은 곳에
검소한 터를 잡고
불꽃의 세기를 맞출 거야.
욕망의 승강기로부터
인류는 얼마나 위태롭게
죽음의 가속 페달인가?
거기 낡은 성서 한 권과
피로 얻은 십자가 한 개
삶의 구속 삼을지도 몰라.
또한 정갈한 시를 쓰고
정성스레 토기를 빚으며
온전한 평화를 기도할 거야.
꽃잎 떨구어도 그 꽃 지지는 않으리오.
조 대 연
고운 물들이고
화려한 색조 빗어
아름다이 피어나
여기 머믈다
꽃잎 지는 날
봄 끝 말미
내리는 빗빙울 눈물이 되어
꽃볼에 흐를 때
아름다움 영원히 부여 잡아
슬픔 더 짙었나요?
하오나 놓으리오.
이파리 젖은 채로
한잎 두잎 마지막 꽃잎까지 떨 구고
가벼운 꽃나비로 훨훨 날라 갈 때는
영원의 날개 짓 있으리오.
아.
님께서도
바람 따라 꽃잎 따라 가시었어도
법계의 누리
날라 간 데로의 연으로
화한 꽃 만수라로
피어서 아니 지리오.
독도 그리기
조 병 무
동쪽 한 바다 하늘 닿는 곳
갈매기 한 마리 그림을 그리고 있다.
수평선 끝에서
일렁이는 파도 한입 물고와
한 획 놓고
또 한 획 넣고
흔들리는 바람
날개 깃에 담아
골짝 깊은 구릉 만들고
날카로운 능선을 긋고 있다.
솟아오른
태양 열기
이글거리듯
용솟음쳐 닿으니
바람소리 물소리 어울려
진한물감
뿌리고 흩트리는 갈매기여.
활활 펼쳐진
깃따라
한 점
한 점
그려지는
섬
독도.
침묵의 하혈
한 명 수
사는 일은
구름처럼 바람을 피해가지는 않는다.
다시 하혈을 보는 순간 힘들었던 시간들이
허리등뼈를 속속들이 흘러
통고의 원한 덩어리로 세상을 빠져나가니
마냥 하늘에 높이 머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어 있는 시간의 멍멍한 의식 속에서
구름처럼 피어나온다,
즉시로 지워버릴 바람을 등지고.
잠시 사색의 시간을 허락한 바람도
어느 새 허리를 가로질러 지나갈지 모르고
그 알지 못하는 초조함의 긴긴 사이들을
말없이 걸어 내리는 혈서들의 침묵은 비장도 하다.
구름처럼 바람을 피하지 않는 정직함으로
한 땀씩 걸어가며 사는 일이란
참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 언제나 고통 끝에 얻게 되는 피의 향연
그 말없는 잔치 소리가 온 하늘을 덮는다.
비를 기다리는 나무
황 금 찬
비를 기다리며
사는 나무는
언제나 외롭고 목마르다.
말없이 하늘을 받들고 있는
그 머리 위에
천리에서 옛사람을 만나듯
비는 언제나 내리려는가.
나무가 가지를 사방으로 뻗고
날마다 손짓하는 것은
어느 구름 가에 피어있을
사람같은 꽃을 기다려서이다.
살결같은 바람의
조용한 대화는
진정 언제쯤 있을까.
목마르다.
나는 나무와 같이
|
출처: 지리산 힐링 시낭송 원문보기 글쓴이: 연당 김태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