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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제주시 아라1동 375-4번지
유형 ; 제단
시대 ; 탐라국시대
제주시에서 5.16도로를 따라 8Km 지점에 산천단이 있다. 이곳 산천단(山川壇)은 예부터 산천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사를 봉행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성종1년(1470) 목사 이약동(李約東)이 세운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를 비롯하여 농사의 재해예방을 기원하는 포신묘(酺神廟)가 있었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올리던 터이기도 했다. 이처럼 산천신에게 제를 드리는 단이라 하여 이곳을 산천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라산 산신제는 구전으로는 탐라시대부터 지내왔다고 하나 기록으로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사에 보면 고종40년(1253년) 겨울 10월 무신에 국내 명산과 탐라의 신에게 각각 제민(濟民)의 호를 내리고 춘추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성종1년(1470)에 목사 이약동의 비석이 있었고, 선조34년(1601) 제주를 찾았던 김상헌어사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한라산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봉행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한라산신제의 내력을 살펴보면, 옛날에는 명산대천에 제 드리는 일을 아주 중요한 국사로 삼아 모든 산천을 하나하나 등재하고, 격식을 갖추어 오례의(五禮儀)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한라산은 제외되어 있었다. 이에 숙종29년(1703) 당시 제주목사 이형상이 조정에 ‘명산대천의 소사(小祀)까지도 게재되었는데, 한라산만 유독 누락되었으니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이형상 목사의 장계를 놓고 어전회의를 열고 여러 대신의 의견을 물었으나 왈가불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이에 영의정 윤지완(尹趾完)이 ‘국전(國典)에 등재되지 않은 제례를 이제와 강행하기는 곤란하며, 그렇다고 명산에 제례를 지내지 않은 것도 잘못된 일이다. 제주는 내륙지방과 다른 위치에 있는 점을 고려하여 조정에서는 향축(香祝)만 보내고, 목사로 하여금 제를 봉행하도록 아뢰었다. 이에 숙종이 이를 윤허함에 따라 예조는 치악산 및 계룡산의 산신제규(山神祭規)에 의해 제일을 2월 7일로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정조17년(1793) 11월 심낙수(沈樂洙)가 제주에 어사로 내려오게 되자 향축을 마련하여 주고 한라산신제를 봉행하게 하였다.
원래의 한라산신제는 한라산 백록담 북단의 제단에서 봉행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2월에 지내기 때문에 길이 험하고 얼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등 도민들의 피해가 심했다.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행사가 오히려 백성의 목숨을 앗아가는 흉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종1년(1470) 당시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약동(李約東·1416∼1493)이 도민들의 고생을 덜기 위해 이곳 소산오름 기슭에 한라산신제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매해 2월 첫 정일(丁日)에는 이곳에서 산신제가 봉행됐다. 산천단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며 제주도민들에게 있어서는 성스러운 장소이다.
산천단 남쪽에 있는 오름이 소산오름(413m)이다. 한라산신제를 이 오름 밑에서 지내게 된 것은 그 오름이 작은 한라산으로서 본래의 한라산을 대신한다는 상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오름은 송나라 호종단이 제주도 명산의 혈을 모두 끊어버리고 가던 날 밤 갑자기 솟았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소산’‘솟(出)+안’으로 분석되니, ‘갑자기 솟아오른’오름이라는 뜻이다. 《제주삼읍도총지도》의 所山岳, 《제주지도》의 小山峰, 《제주삼읍전도》의 ‘소山岳’은 모두‘소산오름’의 한자 표기이다. 호종단의 단혈 후 솟아난 산이기 때문에 산의 정기가 온전하다는 믿음이 이곳을 산신제단의 장소로 선택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소림천’이라는 샘도 있었으나 요즘은 메워져 버린 것 같다.
원래 이 곳에는 이약동 목사가 세운 묘단(廟壇)과 함께 「한라산신선」 비(碑)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비들은 모두 소멸되고 지금 묘단 옆에 세워진 「한라산신고선」비와 동강난 기적비(紀蹟碑)들은 조선시대 말 이후에 지방 유지들에 의해서 세워졌던 것이다. 이 비석들도 중간에 없어졌던 것을 다시 찾아 세운 것이다.(제민일보 2002년 3월 21일) 이 비는 이약동 목사가 세웠던 것이다. 그것을 찾은 건 1977년 홍정표였다.
한라산신제의 봉행에 대해서는 이원조의 『耽羅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辛丑年(헌종7, 1841) 7월 초4일에 한라산제를 봉행하였다. 祝冊(축책, 축문)이 서울에서 내려왔으므로 먼저 좌수와 유생들로 하여금 모셔서 따라가게 하고 (나는) 나중에 길을 떠났다. 신단은 州에서 20리쯤 되는 거리에 있었는데, 돌담으로 두른 廟가 있고 (여기에) 신패(神牌)를 봉안하였다. 곁에는 포신사(酺神祠)가 있고 좌우에는 오래된 소나무 3~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우거져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오던 비가 갑자기 개이어서 날씨가 맑고 상쾌하였다. 제사를 지내고 관아로 돌아오는데 멀리서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제주시비석일람 186쪽)
1908년 제주구재판소 판사에 임명된 일본인 다하곡웅쌍(多賀谷熊雙)은 제주의 재정·치안·재판권을 사실상 강탈하였으며 이 때 산천단에서 해마다 거행되던 한라산신제를 혁파해 버렸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그러나 산천단 인근 주민들이 일제 감시의 눈을 피해 산신제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후 1958년 제주시가 주관한 기우제를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제주도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산신제가 봉행되고 있다.(제주일보 151015)
다음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설명이다.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산천단에서 한라산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
역사
탐라국에서 비롯된 한라산신제는 탐라국이 해체되는 고려 숙종10년(1105)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라산신제 장소는 제사를 지내는 데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라산 정상 북벽이었다. 고려 고종40년(1253) 10월 무신(戊申)에 국내 명산과 탐라의 신(神)에게 각각 제민(濟民)의 호를 내리고 춘추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라산신제는 일 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18년(1418) 4월 11일 신묘(辛卯)에 예조에서 제주의 문선왕(孔子) 석전제 의식과 함께 한라산제를 지냈다. 한라산제는 전라도 나주 금성산의 예에 따라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성종 원년(1470)에는 이약동(李約東) 제주목사(濟州牧使)가 한라산신제 장소를 한라산 정상에서 산천단(山川壇)으로 옮겨와서 거행하였다. 봄과 가을로 한라산 정상에서 제사를 거행할 때마다 제사를 올리러 간 제주도민들 가운데 얼어 죽는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선조34년(1601)에는 청음 김상헌(金尙憲)이 선조의 명을 받아 한라산신제를 거행하였다. 1601년에 제주도 지역에서 소덕유․길운절의 역모사건으로 인심이 매우 동요하고 있었다. 당시 역모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도에 온 김상헌은 제주도 민심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정성으로 한라산신제를 지냈다.
숙종29년(1703)에는 이형상(李衡祥) 제주목사의 치계를 바탕으로 한라산신제를 의논하였는데, 치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례의』를 살펴보니 주현(州縣)에서는 사직, 문선왕, 포제(酺祭), 여제(厲祭), 영제(禜祭)만 제사한다 했습니다. 주현에서 풍운뇌우의 제사를 하지 않는 것은 장계에 얘기한 대로입니다”
성종5년(1474)에는 『오례의(五禮儀)』를 찬성(纂成)하며 한라산신제가 사전에 기록도 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며, 더욱이 명산대천에 제사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니 지금이라도 사전에 등록하고 치악산․계룡산의 제례와 축문식에 따라 정월·이월·칠월에 제사토록 하였다. 그러나 한라산신제는 사전에 등록되지 않았지만 계속 거행되고 있었다.
정조17년(1793) 11월 24일 계축(癸丑)에는 제주어사 심낙수(沈樂洙)에게 향과 축문을 주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주현 명산대천의(州縣 名山大川儀)’에 의거하여 한라산신제를 거행하게 하였다.
순조 원년(1801) 8월 1일 을사(乙巳)에는 한라산신제와 풍운뇌우제의 향과 축문을 실은 배가 풍랑으로 난파해 향과 축문 모두 바다에서 유실되었으므로 다시 급히 내려주도록 건의하고 있다. 이들 사료를 통해 한라산신제가 지속적으로 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헌종7년(1841) 7월 초나흗날에 한라산신제를 거행했다. 제주목사는 향과 축문이 중앙에서 내려오자 좌수․유생들과 함께 치제하였으며, 돌담을 두른 묘(廟)가 있어 그곳에 신패(神牌)를 봉안하고 옆에는 소나무 30∼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08년 한라산신제는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광복 이후 산천단 마을 주민에 의해 부활돼 유지돼 오다 2009년부터 아라동 차원에서 한라산신제를 계승해 봉행하고 있다.
내용
제주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한라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지내 왔다. 그러나 그 시기가 2월이어서 기상이 악화되면 도민들의 고통이 매우 컸으며, 심할 때는 얼어 죽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성종1년(1470) 당시 제주목사 이약동은 도민들의 노고를 덜기 위하여 이곳 산천단에 제단을 마련하여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 이때부터 매해 2월 첫정일[上丁日]에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되었다.
제주시 아라동 375-1번지 외 5필지 안에는 1964년 1월 31일에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된 곰솔[黑松]나무와 함께 그 부근의 지명이 되어 불리는 산천단이 있다. 이곳에는 한라산신제의 제단이 있다. 산천단은 한라산신제 외에도 산천제, 포신제(酺神祭), 기우제 등 오랜 시대에 걸친 제사 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소림천(小林泉), 소림과원(小林果園), 소림사(小林寺) 고송(古松)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명소였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곰솔만 일부 남아 있다.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墠碑), 이약동 목사 한라산신단 기적비(紀蹟碑) 등이 서 있다.
원래 이곳에는 이약동 목사가 세운 묘단(廟壇)과 함께 한라산신선비(漢拏山神墠碑)가 있었으나 당시의 비들은 모두 소멸되고 없다. 지금 묘단 옆에 세워진 한라산신고선비와 동강난 기적비들은 조선 말기 이후 지역 유지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지만 이 비들도 중간에 없어진 것을 다시 찾아 세운 것이다. 그 뒤 1989년에는 지역의 유지들과 이약동 목사의 후손들인 벽진 이씨(碧珍 李氏) 문중회가 공동으로 제휘하여 추진한 목사 이약동 선생 한라산신단 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漢拏山神壇紀蹟碑)와 묘단이 새로 건립되었다.
산천단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에서 한라산제를 지냈다는 사실은 『제주읍지(濟州邑誌)』,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탐라록(耽羅錄)』, 『제주대정정의읍지(濟州大靜旌義邑誌)』, 『탐라기년(耽羅紀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사묘조(祠廟條)에 “산천단은 남문 밖 15리쯤 아라리(我羅里) 지경에 있으니 담당관원은 4인이다. 한라산 산신제(山神祭)를 봉행하는 장소이다. 1470년 목사 이약동(李約東)이 재임시 이곳에 창건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山川壇 我羅里境 直四人 漢拏山神祭 舊時 山頂致祭 人多凍死 成宗元年 牧師 李約東 創建 今廢)”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라산신제의 제관(祭官)은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집례(執禮), 대축(大祝), 찬자(贊者), 알자(謁者), 봉향(奉香), 봉로(奉爐), 사준(司樽), 봉작(奉爵), 전작(奠爵), 전사관(典司官)으로 구성된다.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正月朔日 獻官○○○
敢昭告于
漢拏山神 惟此山川 有神靈明
自古設壇 歲祀已久 今擇吉日
依舊明煙 惟
舊
神監顧
大韓民國奠我地 安玆居民 辟邪進慶 三災八難
官災口舌
疾病盜賊 永爲消滅
大韓民國 國泰民安 各自所願
意得成功 謹以淸酌 牲幣
祗薦于神 尙饗
제례(祭禮) 절차는 다음과 같다. 초헌관이 신위전에 폐백을 올리고(전폐례), 첫 잔을 올리고 축문을 받아드린 후 꿇어앉는다(초헌례). 대축이 초헌관을 대신해 축을 고한다(독축). 이때 제관 모두 굴복한다. 아헌례와 종헌례가 끝나면 초헌관이 신위전에 꿇어앉아 집사가 내려주는 술과 안주를 받아 마신다(음복례). 대축에 들어가 변과두를 거둔다(철변두). 다음에는 헌관을 비롯한 참여자 전원이 사배한다. 대축은 폐백과 축 등을 거두어 망료위에 나가 불사른다(망료). 이때 초헌관도 함께 배석한다.
한라산신제 봉행 과정에 대해서는 이원조의 『탐라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축년(1841) 7월 초4일에 한라산신제를 봉행하였다. 축책(祝冊)이 서울에서 내려왔으므로 먼저 좌수와 유생들로 하여금 모셔서 따라가게 하고 나는 나중에 길을 떠났다. 신단은 주(州)에서 20리 되는 거리에 있었다. 돌담으로 두른 묘(廟)가 있고 여기에 신패(神牌)를 봉안하였다. 곁에는 포신사(酺神祠)가 있고 좌우에는 오래된 소나무 30~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우거져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갑자기 개어 날씨는 맑고 상쾌했다. 제사를 지내고 관아로 돌아오는데 멀리서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포신묘(酺神廟)에 대해서는 이원진의 『탐라지』「제주」 사묘조(四廟條)에 “포신묘는 소림과원 안에 있다(酺神廟在小林果園中)”고 하였고, 조선 정조대에 발행된 『제주읍지』에는 “포신단은 산천단 아래에 있다(酺神段在山川壇下)”고 하였으며, 19세기 중반에 나온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 “포신묘는 옛날 소림과원 안에 있었으나 이제는 한라산신묘 옆으로 옮겨 세웠다(酺神廟 舊在小林果園中 今移建于漢拏山神廟傍)”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포신묘는 사람과 사물에게 닥친 재해(災害)를 신에게 빌어 액을 막고 복을 빌던 제단으로, 오늘날의 포제단과 같음을 알 수 있다.
한라산은 남쪽 끝에 있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이며, 진산(鎭山)이요, 신령한 산이다. 운공(雲空)에 맞닿아 백령(百靈)이 머무는 곳으로 모든 산악의 으뜸이다. 그러므로 한라산에 제사하는 산천제(山川祭)는 산의 백령을 위하는 산신제이자 하늘을 여는 천신제의 의미를 지닌다. 한라산신은 천신의 권능을 빌려 탐라 백성들을 지켜 주는 산신이자 천기(天氣)를 관장하고 하늘의 기운과 풍운뇌우를 조절하는 천신(天神), 탐라 백성을 지켜 주는 한라산신으로서는 전염병의 재앙을 막아주는 신, 탐라 백성의 건강을 지켜주는 신, 곡식의 풍요와 가축의 번성을 지켜 주는 이사지신(里社之神)이자 포신(酺神)이다.
즉 한라산신은 탐라국과 탐라 백성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시켜 주고, 전염병에서 건강을 지켜 주는 치병의 신이며, 3재인 풍재(風災)·수재(水災)·한재(旱災)를 막아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지켜 주는 신이다. 한라산신은 풍우를 조절하여 태풍과 장마를 막아 주며, 축산 번성과 농사의 풍요를 가져오는 산천신·풍운뇌우신·포신의 기능을 하는 신(神)이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곰솔(천연기념물 제160호)과 벚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그늘에는 제단이 남아 있고, 새로운 제단도 마련되었다. 1989년에는 제주지방의 문화예술인들과 이 목사의 후손들인 벽진이씨문중회(碧珍李氏門中會)가 공동으로「목사이약동선생한라산신단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漢拏山神壇紀蹟碑)」와 묘단을 새로 건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에 마을 주민들이 포제 양식으로 한라산신제를 봉행하는 것을 비롯하여 10월 3일 개천절에 민족혼대제봉행위원회의 산신제가 봉행되다가 중단되었으며, 한라문화제에 산신제가 봉행된다.
《작성 060306, 보완 151015, 22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