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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는 영화속 이야기보다 이 영화의 원작인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신기한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피츠제럴드의 원작은 데이빗 핀처의 영화와 소재만 같을 뿐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뭐랄까. 인간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라면 영화는 한 남자의 기이한 삶을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 인간의 기이한 삶, 있을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은 영화 도입부에서 미리 복선으로 깔아두고 있다. 눈먼 시계공이 거꾸로 가는 시계를 만든다는 이야기. 시계만들기는 극히 정밀한 작업이다. 그 시계를 눈이 보이지 않는 시계공이 만든다는 설정도 황당하거니와 그가 만든 시계가 거꾸로 가는 시계라는 설정도 황당하며 그 시계의 힘으로 인해 팔십먹은 노년의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 역시 황당한 설정이다.
해서 마음껏 상상력을 활용한 감독은 이 황당한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는데. 노인의 외모라서 놀란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관대한 흑인 여인이 그를 키운다. 그 외모를 이용해 사실은 십대인 벤자민이 또래 십대들이 갈 수 없는 곳에 가고 또래 아이들이 하지 않는 모험을 하는 등, 거꾸로 가는 삶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아니 사실은 거꾸로 가는 삶은 아니다. 외모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 그는 제대로의 여정을 걷는다. 선원으로 떠돌다가 추운 나라에서 한 여인(틸다 스윈튼)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데 밤에 만나 밤에 사라져버린 이 풋사랑의 모습은 성장기에 이른 청년과 하등 다를바 없다. 선원은 모험의 상징, 소년기와 청년기에 꿈꾸는 생활이 아니던가.
그리고는 사랑. 어릴 때부터 아니 벤자민이 칠십 혹은 육십 몇세인 외모의 노인일 적부터 그 사랑은 자라난다. 영화의 주요 부분은 여기에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이지를 만나고 성장하고(외모는 거꾸로다. 점점 더 젊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고 이윽고 아이를 갖게 되고. 그리고는 점점 젊어지는 자신의 외모 덕분에 데이지가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떠난다. 모든 재산을 물려준 채로.
젊음에 대해서 혹은 젊어진다는데 대해서 인간은 변치 않는 꿈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젊어지고 싶은 마음을 좀더 확장한 것일 수도 있다. 단 우리가 원하는 젊음은 정지한 젊음이다. 젊은 상태에서 정지하거나 계속해서 젊어지거나 결과는 동일하다. 나 혼자만 젊어지고 나 혼자만 젊은 상태로 머물러 있다면 그는 공동체에서 외면당하고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감독은 세월을 거꾸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말하려 했을까? 장면 하나하나는 놀랍도록 섬세하고 아름답다. 벤자민의 딸이 노란 풍선을 놓치는 장면은 마치 희망을 놓치는 것처럼 안타깝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쩐지 갈팡질팡하고 있다. 거꾸로 살기 때문에, 아니 보통사람과는 달리 외모가 점점 젊어지므로, 혹은 어려지므로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없다는 것만 이야기하고 끝나버리고 만다.
물론 벤자민은 가족을 사랑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고 그 떠남은 자신의 외모가 원인이다. 떠난 이후 사랑한다는 엽서를 계속 보내지만 그 울림은 옆에서 같이 울고 웃고 화내지 않는 그 사랑의 실체가 없는 허상과도 같다. 물론 딸과 아내를 떠난 벤자민이 온갖 고생을 혹은 모험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것은 듣기 좋고 보기 좋은 이야기지만 근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원작은 명쾌하다. 사람들은 오십세 외모의 벤자민과 이십세 외모의 힐데가르드의 결혼을 보고서 벤자민을 부러워하지만 정반대의 경우가 되자 힐데가르드를 부러워한다. 외모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외모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속물성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아름답고 보기 좋은 영화. 노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죽은 기묘한 남자의 이야기. 그것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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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 취향은 아니지만 홍보로만 본다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은 영화입니다. 벌써 보셨나요?
ㅎㅎ. 아름다운 영화였지요. 이게 뭐람 하고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어도....어둠의 경로로...보았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도 얼마전에 보았는데요.. 젊어지면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순리대로 나이듦이 그렇게 행복한 것인줄 알게 되었답니다..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와 딸에게도 아빠라고 나서지 못하고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는 벤자민의 모습이나 아이가 되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벤자민을 지켜 보는 힐데가르드 모두 불쌍하더군요.. 아기가 되어 사랑하는 부인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은 너무 슬펐답니다..
영화속에선 데이지..^^ 모든 사람의 삶과 동일하지 않나요. 원작에서는 70세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아기가 '당신이 내 아빠인가요.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세요'하고 말을 건답니다.
이 영화를 보고 희야님을 영화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여운이 있는 영화였지요~~~특히 죽음을 기다리며 긴하루 하루를 보내는 노인들 곁에서 많은 죽음을 받아드리며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책도 꼭 읽어 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캐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도 아무도 그녀를 꼬집어 이야기하지 않더군요.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살아온 덕분에 벤자민을 그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보아지거든요. 그런 면에서 감독의 세심함에 박수.
저도 캐시가 참 휼륭한 인물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노인과 함께 살아가는 직업을 가졌다 하더라도 처녀가 받아드리긴 힘들었을텐데....
일단 영화를 봐야겠습니다. 전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영화 있었죠. 그것도 참 충격이었는데... 지금 김천에선 상영 않고, 안동에선 하는군요. 일욜에 가든지 해야겠습니다.
도리언 그레이는 못봤습니다. 감독이 나름대로 아주 세심하게 결을 살리긴 했는데 그럼에도 글쎄요. 기이한 이야기로만 끝나버린 것 같아서 아쉬웠어요.
어떤 여배우가 이상한 초상화를 그렸는데, 자긴 늙지 않고, 초상화만 늙어가는 겁니다. 연예계에선 상종가를 치죠. 20대 젊음이 삼사십년이 지나도록 멀쩡하니까요. 그런데, 뭐엔가 심장 상해, 초상화를 찌르는 순간, 초상화는 젊은 시절 그대로이고, 자기가 팍 늙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칼에 찔려 죽죠. 참 섬찟했습니다.
아.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가 아니었던가요? 소설에선 여배우 시빌이 도리언 그레이의 연인으로 나오지요. 초상화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구요. 도리언 그레이는 영원한 젊음을 마음껏 향락하다가 시빌도 버리고(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도리어 연기를 못하게되었는데) 말씀하신대로 초상화를 찔러 죽지요. 극단의 유미주의로 오스카 와일드는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색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것도 유미주의 탓이기도 합니다.
영화 보고 희야님 글을 꼼꼼하게 읽어 보니 또다른 재미가 있네요. 바쁘시겠지만 영화평 많이 올려 주세요. 고맙습니다.
저도 봤는데요 구성면에서 좀 짜임새가 어색하긴 했지만 신선했어요. 이 영화는 인간은 역시 자연의 일부일뿐이고.. 그 사실 잘 받아들여 아웅다웅 할 것 없이 착하게 자연스럽게 살다가 가자는 것...자식에 대한 애착에 상처받곤하는 제게 빨간약 한번 발라졌다고 할까요? 벤자민의 삶이 기형이여서 은근히 슬프게 하는 영화였어요.
어제 영화를 봤습니다. 아내랑 함께 봤는데, 여운이 조금 남았습니다. 오늘 희야님 글을 보니, 영화가 더 잘 이해되네요. 그래요, 희야님. 영화는 뭔가 큰 주제를 보여주려다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쇼생크 탈출보다 수준이 영 아래라는 느낌입니다. 원작 소설을 봐야 흡족해질 것 같습니다. 해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