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숙제라고 정의하고 싶다.
누구와 약속을 해서 만나는 것도, 농사지은 먹거리를 나눠주는 것도,
그리고 축복 속에 태어난 손녀를 보러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하나 끝냈을 때, 숙제를 완성했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축복 속에서 태어난 손녀를 보러 가는 일.
너무나도 기대되고 즐거운 숙제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어찌나 그 숙제하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은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아직 코로나19의 여파로 병원과 조리원 모두 면회가 되지 않아서 미룰 수밖에 없었고,
퇴원해서는 신생아에게 위험하다는 백일해가 유행했다.
보고픈 마음에 남편과 백일해 예방 주사까지 맞으며 손녀를 보러 갈 준비를 하고 나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지독한 여름 감기에 걸려 또 발목이 잡혔다.
그렇게 약 20여 일을 앓고 나니, 어느새 손녀딸 백일이 가까워졌다. 감기 후유증은 있지 않을까...
혹시나 손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 걱정됐지만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남편과 큰 결심을 하고 드디어 손녀를 만나러 가기로 날을 잡았다.
이제부터 또 숙제의 시작이다. 손녀 백일인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어떤 선물을 사주면 좋을지...
우리는 구세대라 요즘 어떤 선물이 좋은지 잘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막내딸네를 보니
별로 필요할 게 없을 만큼 사들이는 것 같았다.
고민 끝에 그냥 백일 반지를 선물하자 해서 금방에 갔다.
요즘 금값이 천정부지로 올라서 웬만한 촌수로는 금반지 하나 해주는 것도 힘들 것 같다.
예쁜 반지를 고른 뒤 손녀 이름을 새겼다.
선물을 준비했으니 첫 번째 숙제는 마친 기분이었다.
이제는 두 번째 숙제. 오랜만에 가는 막내딸 집인데 그동안 농사지은 농산물이라도 가져가야지 싶어
이것저것 챙겼다. 대중교통 대신 차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거의 백일을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손녀를 보는 날.
오랜만에 딸네 집에 가는 것만으로도 설레는데, 늘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던 손녀를
실물로 볼 생각을 하니, 가는 길이 너무 신났다.
그렇게 두 시간 반 정도를 달려서 딸네 집에 도착했다.
손녀를 실제로 보니 콩알만한 게 너무 귀엽고,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습이 어찌나 신기한 지...
막내딸은 마흔이 넘었지만, 아직 내 눈에는 애기 같은데, 애기가 애기를 낳은 거 같아서 너무 신기했다.
처음에는 살짝 낯을 가리는지, 겁에 질린 듯 입을 삐죽거리더니 울음을 터뜨린다.
싱싱한 엄마 아빠의 모습만 보다가 아무래도 연륜으로 찌그러진 얼굴에 놀란 모양이다.
그래도 피는 당기는지 잠시 후 할매가 까꿍 하면서 어르니 까르르 함박웃음을 웃는다.
그렇게 큰소리로 연속 웃는 것은 처음인가 보다.
할매는 신바람이 나서 손녀 앞에서 있는 재롱 없는 재롱을 다 떠니 손녀는 연발로 큰소리를 내며 큰 아이처럼 웃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할배는 손녀 웃느라 힘들다고 그만 좀 하란다.
하지만 꺄르르 소리내 웃는 모습이 어찌나 이쁜지, 남편 눈치를 보면서 몇 번이나
더 웃겨서 웃는 손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손녀는 피곤했던지 금세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자는 모습도 천사 같다.
손녀가 자고, 장거리 운전한 남편도 좀 쉬라고 하고 딸이랑 같이 막간을 이용해 아파트 주변 공원으로 나섰다.
모처럼 막내딸과 산책을 나오니 행복했다.
주변에 호수에, 분수도 있고, 도서관과 체육관 등 위락시설이 편리하게 있어 살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다.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물회에, 남편이 좋아하는 초밥 그리고 매운탕과 메밀소바 등으로 다양하게 시켰다.
라떼~는 상상도 못할 배달 음식으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훌륭한 상차림이다.
큰딸도 퇴근 후에 조카의 백일 선물과 이벤트 풍선을 잔뜩 준비해서 들렀다.
저녁 먹기 직전에 도착해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일하고 피곤해도 시간 쪼개서 엄마 아빠 보고, 조카 축하해주겠다고 달려오는 걸 보니, 이게 가족 사랑인가 보다.
저녁을 거하게 먹고, 큰딸이 사온 빵으로 디저트까지 챙기니, 하루가 저물어 간다.
나는 손녀가 태어나면 무조건 육아에 협조해야되는 줄만 알았다.
큰딸은 손자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우리집으로 데리고 와서 거의 1년을 함께 키웠다.
그런데 막내딸네를 보니, 손녀는 벌써부터 긴 잠을 잘 정도로 순하고 착한 데다가,
사위의 육아 기술도 뛰어나 내가 도울 게 없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유아 용품들...
기저귀 갈이대, 수유 쿠션, 젖병 소독기, 분유 포트 까지...
아 우리 때도 이런 게 있었으면 아이를 세 명은 더 낳을 수 있었을 텐데 ㅎㅎ
참 좋은 세상이다.
나의 도움이 없어도 둘이서 잘 키울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사위는 하룻밤 자고, 아파트 단지에 있는 골프 연습장도 가보고, 인근 파크 골프장도 가자고 다음 날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딸도 아빠 엄마 온다고 다음 날 점심에 먹을 고기랑 내가 좋아하는 떡이랑, 아빠가 좋아하는 과일까지
잔뜩 장을 봐놨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마음도 모르고 남편은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일찍 출발하자고 서두른다.
다급해진 막내딸은 사진이라도 같이 찍자고, 급하게 백일상을 세팅하고, 손녀에게 한복을 입혔다.
그나마 백일 축하 가족 사진은 함께 찍을 수 있었다.
손녀가 어찌나 순한지, 사진 찍을 때 까지 울지도 않고 잘 앉아 있다.
사진도 더 찍고, 손녀도 더 보고싶었지만, 누가 우리 시어머니 아들 아니랄까봐 남편은 빨리 집에 가자고 한다.
어찌나 서두르는지 속이 상했다.
이렇게나 힘들게 온 건데, 서둘러 가야 한다니. 아쉬운 작별에 눈물이 찔끔 났다.
남편은 손님은 뒷모습이 더 보기 좋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어쩌면 그 말이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ㅎ
남편과 집으로 돌아오는데 벌써 손녀 얼굴이 아른아른 거리는 게 자꾸만 보고 싶다.
딸네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그렇게 가장 즐거운 숙제를 끝내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에 오니...
또 숙제가 하고 싶어진다. ㅎㅎ “여보 우리 언제 또 손녀 보러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