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부엉이도 안 우는 성북동 골~ 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이 순 15.08.14 )
거기에 소개된 가족도를 수장하고 있는 현 대전 프랑스 문화원 전창곤 원장의
이종사촌인 최규홍 교수(현 군장대학 명예교수, 현 군산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장)께서
연락을 해 왔다
전창곤 문화원장님은 프랑스에 박사과정차 유학했을 때
고 배운성화가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그때만 해도 해금되지 않은 상태의 월북화가인데
그 가치와 존엄성을 알고서 민족의식으로써 한점 두 점 모은 것이 48여점이라고 한다
이 가족도는 홍라희 삼성 리움미술관장이 팔기를 권해도
아끼고 있는 작품들이라면서 보내왔다.
현 군산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장인 최규홍님(전 충남대 교수님)과 이종 사촌인
현 대전 프랑스 문화원 전창곤 원장님(작품들 소장자)이 보내주신 것으로써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립니다.
<배운성 작가에 대한 소개 글>
산 새 도. 06:11 소개한 배운성 화백은 1900년에 태어나 한국유화역사에 제1세대 작가로 지금에 잘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당시 일정때는 신문화라는 피치아래 주로 양반집 자녀들이 해외<특히,일본>유학하고 돌아와 새로운 문화를 보급, 소개했던 시기로 전통 수묵화에 젖어있던 때에 아주 획기적, 유화<일명, 서양화>라는 장르를 처음 열었던 선구자들중 한분입니다.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 독일에 건너가 본격적인 그림수업을 밭은것으로 알려져있고 ,당시 1930년대 아주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지금에 남겨진 그림이 근대화전 전시를 통해 소개되고 있읍니다.
유학하고 돌아와 홍익대에 재직하고 6,25 전쟁과 더불어 월북, 이후 평양에서 미술교수로 남아 미술지도를 했지만 북한 이데오르기 특수한 환경체제에 적응, 민중,정치선동적 작업을 하고 본래의 순수미술을 포기할 수 밖에 없던 불행한 화가로 월북작가라는 굴래속에 잋혀졌던 작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지용시인의 향수 라는 유명한 문인처럼 배운성 화백도 한국유화근대작가로 다시 어필되어 알려지니 불행중 다행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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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이 작품은 포스팅 사진 올리기 용량 초과로 댓글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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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에 대한 기록물1
* 여기에 소개된 사진은 배운성 화가 자신의 초상화로 올려졌는데 정박사의 초상화로 정정되었음 정박사는 가족도에 나오는 집안의 사위로써 당시에 그 집의 큰 아들 백명곤과 함께 또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의 일장기를 태극기를 고친 동아일보 기자 김준연씨 등등 그 집안의 도움으로
다 함께 베를린 유학을 한분이다 가족도에서 저 뒤 마루에 앉아 있는 분이고 그의 부인은 이 집의 큰딸로서 앞줄 맨 오른쪽에 서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