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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6일 월요일 [(녹)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주님께서 욥을 칭찬하시자 사탄은 욥의 소유를 쳐 보시면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제1독서).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논쟁이 일어나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세우시고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 중에 버릴 수 없는 것, 모든 사람이 내면에서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권력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고 다투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재수 좋은 날>
오늘 하루는 제게 참으로 신명나는 하루였습니다. 아이들과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부르르"하는 진동이 왔습니다. "혹시 지난번처럼 어디 미사 깜박하고 안 왔다고 전화 온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으로 잔뜩 긴장을 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기쁜 일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받고 싶은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10여 년 전쯤에 이곳에서 살았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 이름을 듣자마자 즉시 얼굴이 떠오른 것은 그 친구가 당시 온 집안을 뒤흔들던 유명했던 장난꾸러기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사고 안치고 잘 지내냐?"는 제 농담 섞인 물음에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따, 신부님도. 이제 저도 벌써 나이 삼십이여. 온양에서 조립식 주택 짓는 일 하고 있는데, 이제야 조금 자리 잡았슈. 이제 장가가는 일만 남았슈. 한번 놀러갈께유." 그렇게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10시 미사 때는 또 다른 한 친구가 미사 시간 맞춰오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왔습니다. 물론 그 친구 역시 이곳 출신으로 8년 동안이나 저희와 함께 살았던 친구였습니다. 미사 후에 그 친구와 차 한잔하고 있는데, 또 다른 두 명의 출신자가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점심이라도 한끼 하려고 나가는 순간, 또 다른 친구를 만났고, 또 그 친구가 전화를 해서 또 다른 친구를 데려오고...그래서 정말 너무도 기쁜 하루였습니다. 다들 홀로 바둥바둥 세상을 헤쳐가느라 얼굴들이 많이 삭았지만 제 눈에는 아직도 사고뭉치들, 안쓰러운 아이들로만 보였습니다. 용돈 때문에 저하고 티격태격하고 싸웠던 철부지 시절의 아이들 모습,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삐쳐서 말도 안하고 밥도 안 먹어 속을 태우던 말썽꾸러기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렇게나마 아이들을 성장케 하신 하느님의 손길에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제가 늘 고민하는 한가지 숙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따끔한 매일까? 아니면 제대로 된 엄격한 규칙일까? 보다 완벽한 교육시스템일까?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겸손이란 옷을 입은 교육자의 헌신과 봉사" 그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교육자가 지녀야할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겸손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자가 아이들 수준으로 낮아지는 것,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아이들 사이에 현존하는 것, 아이들을 위해 한번 인내하고 좀더 희생하는 것, 그것처럼 바람직한 교육적 봉사는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교육자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교육자가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모습으로 접근하는 순간입니다. 부모나 교육자들은 보다 자주 아이들을 향해 고개 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솔직하게 사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애야, 미안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부족했다", "미안해! 내가 좀더 너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되는데..." 우리가 참 부모 참 교육자로 거듭 나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권위를 버리는 순간, 겸손하게 밑으로 내려가는 순간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
제가 주님의 가르침에 확신을 가지고 있고 그 가르침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많은 성경말씀을 쏟아내고 있을 때 이런 충고를 들었습니다.
“넌 너무 맞는 말만 해.”
맞는 말을 하는데 왜 충고를 받았을까요? 그건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둘 깨져가면서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확신하고 있을 때가 가장 불안한 상태인 것을.
그래서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혹은 아직도 제가 그런 확신 속에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무서운 생각까지 듭니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전부일까요?
자신이 옳다고 느낄 때가 가장 위험할 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지금의 모습이 참으로 옳은 모습일지라도 주님은 어떤 의도로 그 옳은 모습을 완전히 깨버리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에 참으로 옳은 모습으로 살았지만 항상 죄를 지을 불안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탕자처럼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다면 전과 같은 모습이 되기는 하였지만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를 죄에 떨어지게도 하시고 견디기 힘든 고통도 주시는 것입니다. 금도 단련을 받듯이 성인도 단련을 받습니다.
욥기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욥은 나무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데도 사탄의 말을 듣고는 욥을 사탄의 손에 넘겨버리십니다. 사탄에게 욥의 의로움을 증명한다고 사탄이 돌아오겠습니까? 아닙니다. 욥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고통이 아니면 단련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시련을 위해 마련되어야 할 세력이 사탄입니다. 사탄은 죄에 떨어뜨리고 고통을 주기 위해 안달이 난 세력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그 사탄의 손에 넘기셔서 그를 단련시키십니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좀비 재난 영화 ‘월드워 Z(World War Z)’에는 위기관리에 대한 여러 가지 국가 모델이 등장합니다. 그중 이스라엘은 ‘고문 10명 중 9명이 같은 주장을 펼쳐도 나머지 1명은 어떠한 이유를 찾아서라도 그 의견이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는 시스템을 도입한 국가로 묘사됐습니다.
전 세계가 좀비의 공격을 당할 때 고문 9명은 좀비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나 ‘10번째 남자’ 1명만은 좀비에 대한 방어를 주장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좀비로부터 안전한 독보적인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건강한 나라는 모두가 나라 편을 드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단련시켜 줄 반대 세력도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반드시 반대하고 어려움을 주는 사탄의 역할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가톨릭교회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톨릭 시성 조사 과정은 매우 엄격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칩니다. 그 과정 안에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 즉 악마의 변호사라는 역할을 두는데, 그는 사사건건 시성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데블스 애드버킷은 의무적으로 '악마'의 관점에서 사사건건 의혹을 제기하고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자칫 조사위원들이 성인 후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로 기울 수 있는 위험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성인으로 공식적으로 추대되는 것처럼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세력에 맡겨져 자녀, 재산, 건강, 명예 등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잃고 나서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올릴 수 있어야 참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지금 잘 살고 있다고 하고 하늘나라 갈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도 아직 욥과 같은 시련을 겪어보지는 않았으니 너무 자신하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은 연옥과 같은 시련을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를 단련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시민 중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완전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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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6일(월) 음8/26 聖女 김효임 골롬바님등 9위 순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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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태어난 허계임님은
시누이 이매임(李梅任)님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어
이정희(李貞喜)와 영희(英喜)님 두 딸과 함께 입교하였다.
1839년 3월, 남명혁(南明赫), 이광헌(李光獻) 님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金成任), 김 루치아님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님의 집을 지키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허계임님은 포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여러 차례의 형문을 당하였으나
다 이겨 내고, 9월 26일 67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시누이 이매임 님을 통해 전 가족이 순교할 것을 결심하고 같은 해에 모두 순교하셨으니
님을 기억하는 오늘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할 수 있는 영성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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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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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남이관님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趙曾伊)와 혼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그는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귀양갔다가
30년 만인 1832년에 풀려 나와 이천(利川)에 있는 처가에서 살았다.
그 뒤 상경하여 처가의 인척인 정하상(丁夏祥)님의 신부 영입 운동을 도와
1833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입국시키고,
그에게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뒤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처가가 있는 이천으로 내려가 숨었으나
9월 16일에 체포되었다.
김제준님(김대건신부의 아버지)과 함께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여기에서 유진길(劉進吉), 정하상님과 함께 신문을 받고,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6일 남이관님은 8명의 교우와 함께 6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서울의 양반가 출신으로 박해에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단양에서 30년간 귀양살이 머슴살이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 남은 살마저 다시 사제 영입 등에 최선을 다하다가 부인과 함깨 참수 순교의 가정을 이루신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님이시여
저희도 모든 삶을 그리고 남은 자투리 삶마저 주님 영광을 끝까지 봉헌할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들 가정을 축복해 주옵소서!...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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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순교자인 김 율리에타님은 시골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다 잘라 버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모는 냉담하여 낙향하였으나,
김 율리에타는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혀 10년 동안 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궁에서는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어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서 일을 해 주며 품삯을 모아 집을 마련하고,
혼자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또 늘 언행에 조심하였으며 그래서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 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불렸다.
기해박해가 있던 1839년 7월에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끝에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5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동정녀 되기가 소원이었기에 17세 때에는 혼담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삭발했었으며 박해에 부모는 시골로 낙향하고 10년간의 궁녀 생활 등 혼자 서을서 살다가 신앙을 위해 출궁하였고
'나쁜 짓은 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주위의 평을 받다가 56세에 기해박해에 참수 순교하신 성녀 김 율리에타 님이시여,
매사에 조신하며 살으신 님의 고결한 삶을 기억하는 오늘 저희에게 천상의 향기를 뿌려 주옵소서!...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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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순교자인 전경협님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대궐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그 뒤 평소 친교가 있던 궁녀 박희순(朴喜順)님을 따라 입교하였으며,
박희순님이 신앙 생활을 위하여 궁을 나오게 되자
그도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 머물면서 신앙 생활에 전념하였다.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의 습격으로 숨어 있던 박희순, 박 큰아기님 등과 함께
체포된 전경협은 궁녀였다는 이유로
포청과 형조에서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참아 냈다.
이 때 조그만 관직을 잃을까 두려워한 오빠는 관리를 매수하여
누이를 독살시키려 하였으나 전경협은 독이 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5개월의 옥살이를 한 뒤,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외교인 가정에 태어나 부모를 여의고 궁녀가 된 후 순교 성녀 박희순님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이고 함께 출궁하여 교우집에 머물다가 체포되어 궁녀였기에 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작은 관직에 있던 오빠가 자리 보전을 위해 독살하려는 흉계까지 겪으며
53세에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하신 성녀 전경협 아가타 님이시여
갖은 풍파를 모두 이겨내고 빛나는 승리를 거두신 영광의 천상에서 오늘 하루의 저희를 축북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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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철’(德喆)로도 불리던 조신철님은 강원도 회양(淮陽)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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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한 때 스님이었다가 동지사 행렬의 마부가 되어 정하상, 유진길님 등을 알게 되면서 입교하였고 함께 사제 영입 활동을 펼쳤으며
기해 박해에 두 살배기 아기를 친척 집에 맡기고 22세의 아내와 장인 장모 모두 참수 순교하신 성 조신철 가를로 님이시여
처해진 곳곳에서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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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아버지로 충청도 면천(沔川)땅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4년에 순교한 할아버지 김진후(金震厚)와 큰아버지의 권면으로 입교한 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하여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무렵 나 베드로(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836년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로 유학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순성(金順性) 일당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고 한때 배교하였으나,
형조로 이송된 후 배교를 취소하고
9월 26일 44세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셨다.
순교자 할아버지와 백부의 권유로 입교하여 아들 김대건 신부가 귀국하기 7년 전에
혹독한 고문에 따른 한때의 배교를 뉘우치고 순교하신 성 김제준 이나시오 님이시여
저희가 수많은 잘 못을 저질러 왔지만 더 큰 회개로 다시는 주님의 품을 벗어나지 않도록 찬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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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난 박봉손님은 15세쯤에 시골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남편과 시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계모 김 체칠리아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친정에는 여러 교우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어 늘 번잡하였으나
박봉손님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궂은 일과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초 외삼촌과 함께 체포되었다.
박봉손은 형관에게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침내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4세의 나이로 참수 순교하시었다.
과부가 되어 친정살이를 하는 동안 입교하여 여러 교우 가정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온갖 궂은 일에 솔선하였으며 외삼촌과 함께 체포되어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 ..,,,.이 한 마디 말만을 남기고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하신 성녀 박봉손 막달레나 님이시여 저희에게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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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홍금주님은 10세 때 입교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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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외교인과 결혼하여 냉담하였으나 남편이 죽은 후 교우 댁에서 천한 일을 도맡아 하며 신앙을 회복하였고 기해 박해에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옥중에서 염병으로 고생하면서도 틈틈이 다른 환자들을 간호하는 등 사랑이 가득했던
님을 기억하는 오늘 저희가 주위의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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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순교자 김효임님은 서울 근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뒤 전 가족이 입교하고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김효임님은 두 여동생과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던 중,
1839년 4월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님과 함께 체포되었다.
두 자매는 포청에서 이른바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 벗긴 채 남자 죄수 방에 넣어졌으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남자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김효임님은 형조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님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박해에 체포된 후 혹독하고 온갖 비열한 고문까지 의연히 이겨내고 천상 영원한 복락 가운데 저희에게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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