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따돌림 때문에
堂井 김장수
어떤 아이가 엄마한테,
“엄마, 친구들이 자꾸 때려요.”
따돌림에 아픈 아이가 있었다. 그 이름은 정경수.(2006년생)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하지만 또래보다 발달이 늦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학교폭력을 당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은 경수를 멍들도록 이빨로 물고, 선명하게 손톱자국이 나도록 할퀴고, 넘어져 쓸린 자국이 있는데다,
집단 구타는 예사였다. 심지어 따귀까지 때렸다. 심지어 선생조차도 구타에 가세했다. 교장한테는 주먹으로 머리를 세게 맞았다.
어머니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당한 따돌림의 흉터를 발견한 건 경수가 초등학교 2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조금 느릴 뿐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된 것을 안 경수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파
가난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하고, 한스러워요.”
학교 얘기만 나와도 두통과 구토를 병행할 만큼 몸과 마음에 심한 상처를 받은 경수.
9살(2015년) 때 스트레스성 통증이라는 결과와 함께 지적장애 3급을 진단받았다. 그 어린 나이에 학교폭력을 말도 못하고 견뎌,
지금은 또래보다 2살 어린 경수였지만, 꾸준한 치료가 없다면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기본적인 생활비도 모자란 경수네 형편에 치료비는커녕 생활비도 모자랐다.
“경수한테 죄가 있다면 가난한 엄마를 둔 죄 아닐까요?”
이런 식의 절규이건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학교폭력을 학교에 알려도
학교는 마이동풍에다 철저히 무사안일주의, 철저히 천하태평이었다. 그 학교 교장선생님이 한 말,
“아직 어린 아이들끼리 단순히 장난을 쳤을 뿐이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라는 안일한 대응은 경수 어머니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장난이라고요? 우리 경수가 장애인이 되었다고요!”
“분명히 말합니다. 그냥 넘어갑시다. 예? 아이들끼리 그럴 수도 있지…….”
완전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다른 기관이나 학교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선생들은 경수한테,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학교폭력은 더 심해져. 그러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자, 응?”
“이겨내는 거야. 너라면 잘 할 수 있어.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간다고 생각하자, 파이팅!”
“지금까지 잘 해 왔잖아.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견뎌내자, 응?”
“다른 아이들은 다 장난으로 여기는데 왜 너만 과민반응이니?”
이러면서 수습과 학교 이미지 관리에 급급했다. 경수를 위할 마음은 아예 버린 상태였다.
경수가 2살 때 남편을 잃고 병마와 싸우며 경수를 끝까지 지켜온 어머니였지만,
이 모든 일이 가난 때문에 일어난 일 같아서 어머니는 미안하기만 할 뿐이었다.
경수가 당한 따돌림은 경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로 남아 밤낮으로 경수를 괴롭혀 왔다.
“갑자기 토를 막 하면서, 머리가 아프다고 울고불고…. 큰 병원에 가보니깐,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지속적인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상태가 악화될 수밖에 없지만,
유일한 가족이던 엄마조차 오랜 암 투병과 가난 때문에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미안한 마음 어떻게 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도 경수는, ‘다른 친구를 위하는 예쁜 마음을 갖자’라고 말하곤 했다.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어려운 형편인데도, 마음의 상처 속에서도 경수는 착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집안의 불행은 계속되었다.
믿을 만한 단체에서 치료비와 생계비 지원을 해도 학교에서 터무니없는 이유를 대며 가져가려 하자, 어머니가 소리쳤다.
“너희가 해준 게 뭐야! 우리 경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비켜요! 빨리!”
“경수 책임져!”
그랬더니, 담임선생의 한 마디,
“꺼져, 이 병신 개썅년앗! 우리 학교 이미지 나빠지면 네가 책임질 거얏!”
그 말에 경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이 끊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도 잔악한 선생들은 경수 어머니의 시신을 무차별적으로 짓밟고 구타했다. 그것도 경수가 보는 데서.
그것을 보다 못한 이웃들이 경찰에 신고하자, 이 뻔뻔한 선생들은,
“혼자 그런 거니까 그러려니 합시다. 제 친척이 국회의원이거든요.”
“왜 왔어요? 어린애들끼리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과민반응을 해!”
며칠 후를 지나고 보니, 경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이웃들은 온 집안을 뒤져서 장롱 속을 보니, 경수는 이미 숨진 뒤였다. 사인은 두통에 심장마비였다.
경수 모자의 장례는 간단하게 치러졌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도 따돌림을 받은 것이다.
연고자를 아무리 찾아봐도 친척들조차 그들을 외면했다. 시신은 화장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너무 비참했다.
선생들은 그 뼛가루 – 경수 모자의 뼛가루를 하수구에 버렸다. 이제 후련하다는 식이었다.
피해자 모자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함으로써 선생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셈이었다.
얼마 후 선생들은 술집에 모여 술판을 벌였다. 왕따가 죽었으니 속 시원하다는 식이었고, 경수 모자의 죽음은 철저히 잊혀졌다.
하지만 완전히 잊혀진 건 아니었고, 그 꼴을 본 이웃들은 언젠가 경수 모자의 원수를 꼭 갚겠다고 벼르고 이를 갈고 있었다.
3년 후, 경수 모자의 원혼이 하수구 주변을 떠돈다는 괴담이 들려왔다. 자신들은 억울하다고, 이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또 하수구에 고인들의 뼛가루가 묻어 있었다는 하수구 정비공들의 증언, 경수 어머니를 죽인 것을 본 이웃들에 대한 증언,
그 동안 선생들 몰래 감춰왔던 기록들, 증거들….
그 일 때문에 정부 주도하에 재조사가 벌어져 결국 경수 모자를 괴롭혔던 교장, 교감, 선생들, 학부모들,
학생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그들은 모두 최소 징역 17년에서 최대 사형이 선고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재판정에서도 변명과 악담으로 일관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매스컴에서도 알려져 한국이 학교폭력에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나라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얼마 후에는 학교마저 폐교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아쉬워했지만, 경수 모자를 죽인 대가가 너무 컸기에 어쩔 수 없었다. -
당시 경수가 다녔던 학교는 시골 학교였다. 학생 수가 적어서 언제 문을 닫아도 위태로운 상황에 경수 모자 사망 사건이 터지자,
학교 문을 닫게 하려고 벼르던 근처 교육청이 결국에는 그 학교의 문을 영원히 닫게 한 것이다.
재판 3년 후, 주민들은 경수 모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수가 다녔던 학교에 위령비를 세우고,
위령비 밑에 경수 모자의 유품들을 묻었다. 그리고 학교 자체를 아예 철거해 버렸다. 철거된 학교 터에는 공원이 들어섰다.
경수 모자는 하늘나라에서 웃으며 지켜볼 것이다. 따돌림이 얼마나 잔악한 범죄인지를,
학교폭력을 방관한 대가가 이렇게 큰 죄인지를, 학교폭력은 범죄라는 것을 일깨우면서. 위령비에 쓰인 글은 다음과 같다.
‘차별은 죄악이다. 다 함께 사이좋게 지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