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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짧은 인연
고 송규호 선생을 추모하며
정승윤
유머는 사람을 감싸안는 능력이다. 사람이 공격해 올 때는 얼마든지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다가설 줄 아는 능력이다. 유머는 뿌리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생명을 키운다.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유머가 아니다. 꽃이 유머가 아니라, 그 꽃을 피워내는 묵묵한 인내의 뿌리가 유머다. 뿌리가 없는 꽃은 진정한 꽃이 아니듯이, 삶에 대한 깊은 천착이 없는 유머는 진정한 유머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유머’의 사람이다. 이 덧없는 세상을 빙그레 웃다 가신 그에게서 오히려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배운다. 어떤 깊은 철학도 가 닿을 수 없는 초탈의 미학을 배운다. 작고하신 후 그의 글을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지나간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본다. 이 글의 두서없음은 오로지 그를 잃은 슬픔과 추억에만 의존해서 그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소아마비를 앓은 Y군은 지금도 심한 절름발이다. 그러나 어느 쪽 다리가 보다 길고 짧은지 모르지만 그는 절룩절룩 잘도 걷는다. 그리하여 한결같은 마음의 리듬 속에 울퉁불퉁한 길도 고르게 밟고 다니며 항상 웃는 얼굴이다.
<해질 무렵, 무등수필6>
그의 낙관주의적 세계관이 잘 드러난 글이다. 그는 절름발이의 걸음마저 리듬으로 파악한다. 한 남성의 치명적 장애가 그의 춤으로 변모한다. 장애를 춤으로 보는 것은 단순한 억지나 수사(修辭)만은 아니다. 그의 웃음이 장애를 춤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웃음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 그의 걸음에서 리듬을 읽는 것이다.
(겹동백)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화분에 옮겨 심기로 한다. … 구석진 곳의 허수룩한 가게에 질그릇이 보인다. … 다시 살펴보니 틀림없이 시루다. 때때로 시루의 몸통을 쓰다듬을 적마다, “시루구멍이나 막아주어라” 하시던 옛 할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 그러면 어머니는 어린 것들을 위해서 흔히 호박 시루떡을 만들어주곤 했다. … 납작납작한 돌조각으로 시루구멍을 덮고 떡가루 대신에 모래와 부엽토를 채워서 동백나무를 옮겨 심는다. … 그리하여 쌓인 눈이 떡가루처럼 허옇게 휘날리는 날, 시루떡보다도 더 많이 뚫린 마음의 구멍은 또다시 괴로움에 시달릴 것이다.
<시루화분과 동백나무, 상동>
그는 동백나무를 더 잘 키워보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화분으로 옮겨 심는다. 그 과정에서 질그릇 화분 대신 시루 하나를 얻는다. 원래는 떡을 쪄내는 시루이나, 시루에 떡을 앉히는 대신에 나무를 심는다. 시루구멍을 막는 삼베포 대신에 납작납작한 돌을 깔고 하얀 떡살 대신 모래와 부엽토를 채운다. 그는 마치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떡시루에 한 해의 소망과 가족의 평온과 넉넉한 인정을 담듯이 떡시루 화분에 식물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담는다. 그러나 그 옛날의 할머니나 어머니는 떡시루의 추억과 함께 사라진지 오래다. 그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은 안타까운 식물을 바라보며 밑이 뚫린 시루와 같이 허전한 마음이 된다. 시루를 사이에 두고 옛날의 추억과 현재의 심정이 씨줄과 날줄처럼 잘 교직되어 한 편의 피륙 같은 글을 빚었다.
불씨를 얻기 위해서는 부시와 부싯돌과 부싯깃이 서로 힘을 모아 협동의 미덕을 베풀어야 한다. 자그마한 쇳조각인 부시로 단단한 부싯돌을 치면 붙여댄 부싯깃에 불똥이 튀어 불붙게 마련이다. … 부싯깃으로 주로 쑥잎이나 수리취 잎사귀를 말려서 비벼 쓰기가 예사였으니, 수리취를 불씨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성 싶다. … 부시 쌈지에 얽힌 구수한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풀럭산의 불씨꽃, 무등수필6>
필리핀 ‘풀럭산’에 올라가 자줏빛 꽃을 피우는 수리취를 발견한다. 그 수리취에서 부싯깃의 불씨를 떠올린다. 그의 여행은 언제나 시간여행을 동반한다. 그는 그 고산족의 눈빛에서 아직은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시대를 회상한다. 현재 한국의 노인들은 유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접어들면서 문명의 극심한 변화를 겪었던 세대들이다. 그들의 유년에 대한 회상은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춘 전통에 대한 회상이기도 하다. 그의 유다른 여행에 대한 집착은 시간에 대한 집착이기도 하며 그의 기억의 뒤편에 자리잡고 있을 전통 문화에 대한 애착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태반이 여행기이며, 그의 여행기 곳곳에는 시간의 물결무늬가 스며있고 전통의 문양이 얼비친다. 캄보디아는 ‘1달러’의 나라다. 모든 가난한 아이들이 관광객에게 몰려와 1달러를 애걸한다. 우리는 그들의 애절한 눈빛에서 우리의 가난했던 유년기를 읽는다. ‘똔래샵’ 호수의 긴 둑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던 한 소년의 마른 다리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는 눈물을 짓게 된다. 문명에서 소외된 그 아이들이 없었다면 캄보디아는 그저 기이한 풍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따라 긴 여행을 떠난다. 어쩌면 길고도 먼 시간여행을 떠나는 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꽃 중에서 어느 꽃이 가장 예뻐요?” 라고 물을 적마다 항상 똑같은 대답이었다. “그야 명꽃(木花)이 제일이제. 너 입고 있는 옷이 그 꽃이야.” 볼품이야 어쨌든 볼수록 정답고 따스하며 믿음직스런 것이 손수 땀흘려 가꾼 목화였던 모양이었다.
<꽃과 사람, 무등수필11>
목화는 우리 지방말로 ‘미엉’이라고 불리운다. 미엉은 두 차례 꽃을 피운다고 한다. 희거나 자줏빛의 꽃이 지고 나서 그 자리에 하얀 목화솜이 터지는 것을 일컷는 것이다. 이 목화솜으로 이불도 만들고 실을 자아 옷도 만드니 얼마나 귀한 꽃이겠는가. 그는 이 목화꽃에서 따스한 할머니의 음성을 듣는다. 두 번 꽃피는 목화의 생리에서 소박한 시골 처녀로 한 번 피었다가 따뜻한 어머니로 거듭 피어나는 우리네 여인네의 일생도 읽는다.
한 여름의 샘터에서 소리 없는 소리로 조용히 아침을 일깨우는 나팔꽃은 호들갑스럽지 않아서 좋다. 밤새 두레박줄을 친친 감아버린 나팔꽃에게 두레박을 빼앗기고 이웃으로 물을 얻으러 갔다는 옛사람 생각이 난다. 그 정감어린 자연과의 일체감이 어렴풋이나마 느껴 닿는 듯한 아침이다.
<가는 골의 아침, 무등수필12>
옛사람 한 분이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다가 밤새 두레박줄을 친친 감고 올라온 나팔꽃 덩굴을 발견한다. 무심코 보아온 식물이건만, 그 어린 순의 생명력에 새삼 가슴 저린다. 못 먹이고 못 입혀도 어느 결에 자라나는 자식새끼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차마 그 나팔꽃 넌출을 건드릴 수가 없다. 그래서 이웃집으로 물 얻으러 간다. 나팔꽃 덩굴과 두레박줄이 얽혀있는, 얽혀서 한 송이 연분홍빛 나팔꽃을 피워내는 시골 우물가의 정경이 그림보다 아름답다. 이 작은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예찬과 자연에 대한 겸허함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두루 읽는다. 그의 자연에 대한 사랑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조롱박에서 ‘반으로 쪼개어 서로 나누어 살자’는 속뜻을 읽는다. 때로는 졸졸대다가 때로는 쫄쫄 소리내며 흐르는 시냇물에서 ‘아이가 글을 읽는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몸과 마음을 곱게 다듬이질하는 여인의 다듬잇소리’를 함께 듣는다. ‘지렁이의 꿈틀거림’에서 물욕에 얽매이지 말라는 준열한 가르침을 얻고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가는’ 달팽이의 느린 걸음에서, 결국 “거기가 여기 아닌가”라는 궁극적인 깨우침을 얻는다.
마침내 ‘오마’댐이 마치 숲속에서 반짝이는 고양이의 눈망울처럼 짙푸르게 빛나 보인다. 그리고 물낯에 떠있는 듯한 긴 ‘꿈의 조교(弔橋)’가 아스라하다.
출렁이는 요람이다
할머니의 무릎에서
흔들흔들 꿈을 꾸던
까마득한 그리움이다
<꿈의 출렁다리, 무등수필18>
그는 산문에서 시의 세계로, 시에서 산문의 세계로 가뭇없이 넘나든다. 그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데도 차려야 할 최소한의 격식도 없이 넘나들 듯 하다. 그저 무심히 넘는다. 신발을 신은 채로 시내를 건너기도 하고 맨발로 돌밭을 건너기도 한다. 출렁다리를 건너면서도 흔들흔들 꿈을 꾼다. 시가 아니어도 좋고 산문이 아니어도 좋다. 굳이 시의 은유를 산문의 준열함으로 따지지 않는다. 그 솔기의 가뭇없음이 노선사의 누더기처럼 자유롭다.
옛날 시골의 새색시들에게는 친정 나들이가 그토록 소원이었나 보다. 그런데 평소에 시어머니로부터 차분히 말미를 얻기란 이만저만 망설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손쉬운 방법으로, 중간 지점에서 서로 만나보고 되돌아가는 것이 ‘반보기’였다. … 김 선생은 세월이 흐를수록 계절이 바뀔 적마다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고 한다. 그럴 때에는 실향민끼리 만나서 고향 사투리를 주고받으며 잠시나마 설레는 마음을 달래곤 한다. 사투리가 그리던 고향에의 반보기 구실을 하는 셈이다.
<반보기, 무등수필9>
사람의 애절하고도 간절한 감정 중의 하나가 그리움이다. 보고싶다는 그리움 하나 만으로 가슴이 충일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그리움이 없어졌다.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어 발길 닿는 데로 걷던, 그 간절한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러한 그리움을 ‘반보기’라고 표현하였다. 네가 ‘반’이고 내가 ‘반’이며 내가 ‘반’을 허락하고 네가 ‘반’을 허락했다. 그것은 상대를 종속시키는 ‘갑을’도 아니었고 상대를 길들이고자 하는 ‘밀땅’도 아니었다. 그것은 절반의 채움이었고 절반의 목마름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었고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들은 이제껏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먹고 남은 찌꺼기나마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조용히 기다린 보람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하여 좁쌀 한 줌이라도 일부러 가져다주지는 못할망정 밥 한 술 덜어주기가 그토록 어렵느냐고 입을 모아 야단법석이다. … 나는 머리 위를 맴도는 까마귀 떼가 마치 법복을 입은 법관들처럼 여겨져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저 날카로운 외침은 ‘까옥 까옥’이 아니라, 혹독스런 인정(人情)을 넘어선 ‘가혹(苛酷) 가혹’으로 들리기도 한다.
<축령산의 까마귀>
세상 만물과 소통이 필요한 이유가 단지 그들을 인간 위주로 해석하고 이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깃들어있는 생명을 인식하고, 그 생명을 통하여 보다 큰 우주론적 세계 인식에 이르고자 함이다. 그는 동물(까마귀)을 통하여 뭍 생명의 배고픔과 고통을 인식하고 동정하며 급기야 ‘프랜치스코’ 성인처럼 동물의 말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그는 눈 내린 삼나무 숲 속에서 까마귀의 음성을 빌어 가혹한 인생사의 슬픔을 전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좀머씨’는 오늘도 걷는다. 좀머씨는 쉬지 않는다. 가끔 길에서 걷고 있는 좀머씨를 만나게 된다. 그는 누구에게도 인사하지 않는다. 말을 건네지도 심지어 눈을 마주치지도 않는다. 그는 좀체 멈추지 않는다. 길가나 벤치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끊임없이 걷고 걸으며, 돌고 또 돈다. 가끔은 걷고 있는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좀머씨, 왜 걷는거죠?” 좀머씨는 아마 아무 대답도 없이 바람처럼 스쳐갈 것이다. 아무도 좀머씨가 왜 걷는지를 모른다. 누구는 그가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고 할 것이다. 누구는 그가 아내가 두려워 끊임없이 도망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기 내면으로 긴 여행을 떠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잊혀진 과거를 찾아 헤매는 시간 여행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처음 대면한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서 ‘좀머씨’를 읽었다. 그에게는 좀머씨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복합적인 면이 있었다. 나는 그의 삶과 생애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여행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남극 대륙을 제외하고는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호사가이며, 여행가이며, 모험가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의 여행지도는 대개 험준한 산악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는 봉급쟁이 시절부터 월급의 일부분을 적립하여 여행 경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어쩌면 일부가 아니라 그가 가용(可用)할 수 있는 돈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신념에 가까울 정도로 여행에 집착했다. 그의 수필의 태반도 여행에 바쳐졌다. 건강이나 시간이 먼 원행을 허락하지 않을 때는, 가까운 국내 산을 줄기차게 올랐다. 국내의 거의 모든 산들 중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우문이겠지만 나는 선생께 묻고 싶어진다. “왜 그렇게 집착하셨느냐”고. 모든 우문의 대답은 자문자답일 수밖에 없다. “집착을 벗어나기 위하여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구촌 어디를 가나/ 사랑과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산과 내 그리고 사람들/ 오르고 건너도/ 만날수록/ 새삼 쓸쓸해// 오늘도 끝없는 나그네길을/ 가는가 보다/ 임자없는/ 나그네골.
<나그네골>
쓸쓸함이란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감정이다. 쓸쓸함이란 잎이 진 나무 같아서, 물이 마른 빈 잔 같아서 굳이 채워지길 원치 않는다. 쓸쓸함이란 먼 기다림이기도 하고, 닿는 순간 다시 떠나야 하는 긴 회귀의 반복이기도 하다. 그의 쓸쓸함은 머물지 못하는 자의 쓸쓸함이기도 하고, 머물고 싶은 자의 쓸쓸함이기도 하다.
후지산에는 우리의 지리산처럼 흥겨운 유머의 능선도 없거니와, 설악산과 같이 아기자기하게 계곡을 휘감아도는 위트도 없다. … 눈을 들면 학처럼 두둥실 떠서 곧 날아올 것 같은 후지, 굽어보면 해발 831m의 수면에 거꾸로 비치는 저 후지의 모습, 백두루미의 부드러운 날갯짓에 솔바람이 일고 비단결 물무늬가 번져간다.
<후지산의 백두루미>
산이 주는 느낌이라는 게 있다. 여러 차례 그 산을 접하다 보면 저절로 형성되는 중첩된 인상이 있고, 어느 날 뻗어내린 산의 능선을 보고 활연히 깨우치게 되는 인상도 있다. 그는 넉넉하게 어깨춤을 추는 지리산에서 유머를, 깎아지른 절벽과 깊은 계곡물에서 반짝이는 설악산의 위트를 발견한다. 그리고 바다 위에 솟은 후지의 만년설에서 아름다운 학의 자태를 본다. 맑고 투명한 심성이 아니면 결코 투영될 수 없는 산의 인상들이다. 산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드러내 보이지 않는 산의 속내들이다.
그와의 만남은 너무 짧았다. 그러나 짧은 인연일망정 그를 뵐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큰 산을 보았다. 그 산 위에 더 장엄한, 그러나 스러지고야 말 구름산을 보았다. 그 산 너머에 끝없이 펼쳐진 산의 연봉들을 보았다. 그는 나에게 활연한 깨달음이기도 했고, 두고 두고 깨우쳐야 할 깊은 산이 주는 법어(法語)이기도 했다.
첫댓글 지난 8월 3일 별세하셨고, 광주고교, 전남중고교, 담양중 등 교가를 작사하기도 하신 수필가이며 시인이셨습니다. 유고집으로 수필선집 < 93 고갯 마루에서 > 시선집으로 < 철새의 날갯짓 >이 발간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