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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돋보기 - 피로사회 탈출, 귀농]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농부이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농부이시니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농부의 자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현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는 말씀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느님 아버지가 농부이신데 교회에서 농부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산업자본주의를 넘어 금융자본주의 시대로 발전하면서 돈이라는 자본은 인류를 위협하는 자충수로 변하고 말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은 돈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의 미래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생명과 안전은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30년 넘은 핵발전소를 자본의 이익을 위해 폐기하지 않고 재가동했다. 핵발전소 1기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1천 개의 위력이다. 핵발전소 4기가 폭발했으니 원자폭탄 4천 개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원자폭탄 1개가 떨어진 히로시마 원폭피해는 지금까지 2-3세를 괴롭히고 있다. 4천 개의 원자폭탄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자본의 이익을 소중하게 여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다.
그 어떤 개발과 발전도 생명존중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생명의 존중 없는 자본의 이익만을 따른 결과 일본 전체 땅의 20%가 방사능 고농도 위험지역이 되고 말았다. 방사능 오염에서 해방되려면 300년의 긴 세월이 필요하다. 10세대를 거쳐야 하는데 10세대가 가기 전에 암이나 각종 희귀병으로 세대가 끊어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진단하고 있다. 생명보다 돈을 택한 결과 일본의 미래는 없다고까지 혹평한다. 왜 이렇게 암담한 현실이 되었을까? 생명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를 선택한 결과다.
우리 사회 역시 일본과 다르지 않다. ‘경제동물’이라는 별칭이 붙은 일본인들보다 한국인들이 생명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에 더 많이 사로잡혀 있다. 돈이 우상이 되어버렸다. 단적인 예가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이다. 자본의 이익에 충실한 나머지 생명의 가치인 농업을 뿌리째 뽑아버릴 태세다. 삼성과 현대로 대변되는 극소수 대기업만을 위한, 상위 10%만을 위한 FTA이다.
가난한 이들은 누구인가?
작년에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농산물이 폭등했다. 올해는 가뭄으로 농산물이 폭등하고 있다. 국제곡물가 역시 이상기온으로 폭등하고 있다. 밀과 쌀의 국제곡물가는 몇 년 새 2-3배가 폭등했다. 지구온난화가 그 원인이다. 앞으로 일어날 크고 작은 전쟁의 원인은 물과 식량이 될 거라고 전문가들이 말한다.
지구온난화로 돈을 주고도 식량을 살 수 없는 시대가 곧 닥칠 것이다. 자동차를 뜯어먹을 수 없고 핸드폰으로 밥을 지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마치 자동차를 빵처럼 뜯어먹고 핸드폰으로 밥을 지어 먹을 것처럼 수출산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앞으로 지구온난화는 식량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식량위기, 농업의 위기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오히려 FTA를 통해 한국농업을 말살하려고 한다.
교회 역시 생명의 가치를 첫자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생명의 가치를 첫자리에 두고 살아가는 농업과 농민에 대한 관심은 코끼리 비스킷 정도다. 한국농업을 초토화시키는 FTA에 대해 적극적인 노력과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생명농업은 농촌사목전담이나 우리농촌살리기 지도신부, 우리농 활동가와 소비자와 가톨릭농민회 등 일부의 관심사에 지나지 않는다.
농촌의 몰락은 심각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어진 지 오래다. 간간히 들려오는 아이 울음소리도 타국에서 시집 온 이주여성들 덕이다. 이러한 농촌의 현실은 소명의식을 자극했다. 사제서품 때 제단 앞에 엎드려 서약한 성경말씀을 되새기게 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공동번역 루카 4,18). 사제서품 당시 성경말씀은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가?’ 끊임없이 자문하게 했다. 나에게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가? 내가 투신해야 할 가난한 곳은 어디인가? 나에게만큼은 우리 시대의 가난한 이들이 농민이었다. 하느님의 창조의 눈으로 볼 때 한국사회의 자연은 가난한 곳이 되어버렸다.
벌이 전멸할 정도의 환경
두 해 전 여름, 비가 지긋지긋하게 내렸다. 한봉이 바이러스 전염병에 의해 멸종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전국 수십 만 통의 한봉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한봉의 죽음과 우리의 삶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몇백조 마리의 벌은 꽃가루를 옮겨서 수정을 도와준다. 곧 자가수정이 불가능한 꽃과 과일과 채소의 열매가 열리도록 협력한다. 한봉이 그렇게 전멸하다시피 했는데 양봉도 전멸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한봉과 양봉이 전멸한다면 인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과일, 채소, 곡식의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 것이다. 90%의 인구가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벌이 전멸할 정도의 환경이라면 다른 동식물들도 전멸할 수 있다. 인류의 멸망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가난한 이들인 자연과 농민에 대한 소명의식을 자극했다. 자연과 농민을 선택하려고 시골로 들어가게 되었다.
농촌에 들어온 지 4년이 되었다. 일도 함께 하고 밥도 함께 먹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혼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혼자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급자족을 희망하는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고 밥 먹고 일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피를 나누고 함께 살아온 가족들도 함께 살기가 쉽지 않다. 할머니, 부모, 손자 3대가 함께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남남이 함께 산다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가족수도회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신부님의 “수녀원이나 수도회를 만들었으면 몇 개를 만들었을 것이다.”라는 고백을 뼛속 깊이 공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풀을 뽑으면서 블루베리를 따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하늘을 보고 농사를 짓기에 하루하루의 삶이 기도의 삶이 될 수밖에 없다. 노동이 기도가 된다는 말을 비지땀을 흘리며 배우게 된다. 또한 영성의 완성은 노동과 말과 행동의 삶 속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셨다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다. 일할 수 있다는 건강,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지 않는가.
“평생 땅이나 파먹고 살아라”
어릴 적 어른들이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평생 땅이나 파먹고 살아라.” 하고 욕을 했다. 그 말이 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농사를 배우면서 그 말이 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해발 450미터의 진안고원에 자리를 잡았다. 포도나무 200주 정도를 심었다. 한겨울을 지내고 나면 100주 정도의 포도나무가 죽었다. 영하 25도의 추위에 얼어죽은 것이다. 포도나무를 뽑아내고 추위에 강한 블루베리를 심었다. 철제 파이프로 비가림 하우스를 만들어놓았기에 굴삭기가 들어갈 수 없었다.
사람의 손으로 포도나무를 뽑고 구덩이를 파야 했다. 삽과 괭이로 5개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나면 등에 뱃가죽이 달라붙는 것 같았다. ‘아, 땅을 파는 것이 이렇게 힘드니까 어른들이 평생 땅이나 파먹고 살라고 했구나.’ 그때서야 그 말이 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농사를 배우면서 ‘그렇구나, 농민이 가장 거룩한 일을 하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 미사가 최고의 기도다. 그 미사의 중심은 성체성혈이다. 밀농사를 짓는 농부가 없으면 밀떡인 성체를 만들 수 있을까?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가 없으면 포도주인 성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렇구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거룩하고 위대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바로 농민이구나.
우리의 생명을 누가 키워줄까. 부모일까? 그렇다면 부모의 생명은 누가 키워줄까? 할아버지 할머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를 키워준 고마운 존재를 밥이라고 말하지 않고 부모와 조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밥없이 살 수 있을까? 밥은 어디에서 왔을까? 농부가 씨를 뿌리고 하늘과 땅이 키워준 노동에서 왔다. 우리는 농부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데 농부의 고마움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불효자식과 같다.
생명을 바쳐 생산한 농산물을 푸대접하는 사회
최근 성인사망자 가운데 남자는 3명 중에 한 명이 암으로 죽고, 여자는 4명 중에 한 명이 암으로 죽는다. 의료기술이 발달해서 평균수명이 높아지고 국민소득이 높아졌는데 왜 암으로 죽는 사람이 늘어만 가는 것일까? 바로 농약이다. 농약으로 땅이 죽어가고 있고 농산물이 오염되고 있다. 우리농 매장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기농산물을 먹는 것은 우리 가족을 지키는 일이고 땅을 살리고 농촌에 희망을 주는 일이고 농약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는 일이다. 농약으로 벌레들의 천적인 제비가 사라졌다. 그러니 벌레가 더 많아졌고 농약을 더 많이 하게 된다.
농약으로 땅이 죽어가고 물이 오염되고 물고기가 죽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은 섭취가 높아지고 있다. 농약의 여러 성분이 잘 섞이도록 수은을 첨가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싱싱한 채소만을 찾기에 농민은 농약을 칠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다.
생명을 바쳐 농사를 짓는 사람들, 자신의 고통을 뿌려 생명을 가꾸는 사람들, 하지만 농민은 우리 사회에서 푸대접을 받는 사람들이다.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 농사. 정부의 농민 홀대로 농산물이 투기가 되어버린, 그래서 농가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만 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마저도 생명을 바쳐 생산한 농산물을 푸대접하고 있다. 우리농 매장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본당의 수에 비하면 5%내외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얼굴이며 세상의 모습이다.
생명의 가치를 높이고 농민에게 희망을 주는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 빼고는 다 한다. 자식사랑이 유별나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식이 의사와 판사 같은, ‘사’자가 들어가는 출세를 하길 원한다. 그래서 70평 아파트와 외제차를 타고 다니길 희망한다. 그 ‘사’자가 들어가는 출세를 시키고 싶은데 먹는 것은 대충 먹인다. 햄버거 통닭 소시지 등 아무거나 사준다. 암 발병의 가장 큰 원인이 식생활습관에 있다. ‘사’자가 붙은 자식이 아무거나 먹어서 나중에 암이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어떤 출세를 했을지라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아파트 50평에 살면서 농약을 친 농산물을 먹는 것보다 20평에 살면서 친환경농산물을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백화점에 가서 비싼 명품 옷을 사서 입으면서 농약을 친 일반농산물을 먹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농약을 친 농산물을 먹고 암이 걸린다면 그 비싼 명품을 어디에다 쓸 수 있을까?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제초제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짓지만 팔 곳을 찾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돕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길이다. 생명의 가치를 높이고 농민에게 희망을 주는 우리농 매장은 우리 건강과 직결된다. 우리농매장이 우리의 건강인 것이다.
우리 농민들이 생산한 유기농 친환경농산물들이 교회에서만이라도 불티나게 팔릴 수 있도록 도시소비자들의 마음이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우리 농민들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 농사가 잘 되든 못 되든 감사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 농민은 당신의 모상인 인간의 생명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대접 받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사회와 교회와 우리를 이끌어주소서. 아멘!
[경향 돋보기 - 피로사회 탈출, 귀농] ‘보시니 좋았던’ 하느님의 마음을 이제야
가을을 알리는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가득하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고…. 어느새 고추밭 사이로 빠알간 색의 고추들이 눈에 띈다. 밭고랑 사이엔 초록의 풀들이 작물보다는 조금 키가 작아진 듯하다.
마당 한편에 자리한 예취기가 놓인 그대로다. 여름내 풀과 씨름하며 그야말로 풀과의 전쟁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하지만 우리 부부는 풀에게 전쟁이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풀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풀들이 이렇게 예쁠 수가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하찮은 풀들도 농사에 필요한 제 역할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선 우리 두 사람에게 내어놓고 담아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해주셨다.
내어놓으면 채워주시는 귀농생활
우리 가족은 15년 전 이곳 경북 봉화군 춘양으로 우연찮게 내려오게 되었다. 오랫동안 학원을 경영하던 남편은 둘째 아이를 가졌을 무렵부터 서울생활을 벗어버리고 싶어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귀농이라는 말을 알지 못하던 때였다.
서울 토박이였던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시골이 너무나 낯설고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남편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그런데 몇 년을 조르던 남편은 큰아이가 6학년, 작은아이가 3학년 때 기어이 혼자라도 시골로 가겠다고 엄포를 놓는데,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사과 농사를 시작하면서 남이 약을 치는 날이면 우리도 약을 치고, 남이 적과를 시작하면 한발 늦게 아주머니들을 불러 적과하고, 남이 사과를 따면 우리도 따고…. 정말이지 스스로 알아서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나는 과수원에 따라가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구경만 하다시피 했지만, 남편은 나를 타박하거나 보채지 않으면서 묵묵히 이곳에 적응하도록 기다려주었다. 그러는 사이 몸이 유난히도 약했던 나와 두 아이의 건강이 날로 좋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서울에서 감기로 자주 고생하던 아들은 공기 좋고 물 좋은 이곳에 와서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병원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자 또 다른 갈등이 나를 힘들게 했다. 가까운 곳에 학교가 없어, 기숙사 생활을 하는 작은 도시 고등학교로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마냥 어려 보이기만 하는 이 아이들과 떨어져서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그나마 제일 가까운 영주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을 시키고, 며칠을 울면서 지냈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의연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의 기우였나 보다. 아이들은 기숙사에서 잘 참고 견디며,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잘 지내주었다. 고생을 모르고 자라던 우리 아이들이 부모를 걱정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키워가고 있었다.
태풍이 심하게 불어대는 날이면, 철부지로만 여겼던 아이들이 전화를 걸어, 사과는 괜찮냐며 농사일을 걱정해 주었다. 그런 나의 아이들을 보면서 난 진정한 맘으로 삶의 감사함을 느낄 줄 알게 되었다. 내어놓으면 또 다른 것으로 채워주심을….
욕심을 버리게 한 유기농법
7-8년이 지나도록 농사일엔 젬병이었던 나를 남편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처음 시도하는 농사를 혼자 해내는 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것도 유기농이라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몇 년 전에는 고추 농사를 시작했는데 고추밭이 온통 진딧물로 가득했다. 유기농법은 벌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천적을 이용해 스스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만들어야 한다는데, 남편이 이래저래 노력해 봤지만 모두 헛일이었다.
‘아! 올 고추 농사는 포기해야겠구나.’ 실망의 맘으로 가득 차 고추밭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고추밭을 갈아엎을 맘으로 들렀는데, 고춧잎 뒤에 노란 알들이 가득하고, 한두 마리의 무당벌레가 밭 위를 날고 있었다. 그 노란 알들은 바로 무당벌레의 알이었다. 평소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무당벌레가 진딧물을 잡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 무당벌레 한 마리가 진딧물을 잡아먹는 양은 하루에 오백 마리가량이라고 한다.
희망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 죽어가던 고추나무에 가득했던 진딧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다시 새잎이 돋더니 싱싱한 고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비록 적은 양이었지만 그해 우리 가족이 먹기에는 충분했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어느 날 남편을 따라 밭에 갔는데, 파랗게 움트는 어린 싹들이 눈에 들어왔다. 흙 속에서 움직이는 작은 벌레들이 새로워 보였다. 파란 하늘이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하늘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듯했다. 어느새 내 손에 작은 호미가 들리고 내 발길은 밭고랑을 향하고 있었다. 나도 놀랐다.
진정으로 자연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이 내게도 움튼 것이다. 농약을 안 치고 어떻게 농사를 짓냐며 비웃던 이웃도 우리의 유기농법에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어설퍼 보였던 우리 밭이 이젠 그럴 듯하게 정돈되어 가고 제법 수확도 늘어가고 있다. 물론 관행농사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양이다.
몇 년 동안 고생했던 마늘과 양파 농사도 올해는 제법 성공적이었다. 겨우내 비닐 멀칭 속에서 곱게 숨어있다가 봄이 되어 뾰족뾰족 싹을 내밀면, 멀칭을 벗기고 농업기술센터에서 주는 미생물과 액비에 현미식초를 섞어 수확기가 될 때까지 4-5회 쳐준다. 그러면 동글동글하고 단단한 마늘과 양파가 되는 것이다.
살충제를 뿌리고 비료를 친 관행농사에 비하면 크기는 작지만, 단단하여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맛도 달콤 매콤한 것이 어느 것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다. 욕심은 욕심을 부른다고 한다. 욕심을 내면 마음까지도 황폐해지기에 우리 부부는 욕심을 내려놓는 쪽을 선택했다.
도시와 농촌이 하나 되어
요즘 시골은 도시인들의 귀농으로 그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때로는 귀농인들이 도시생활을 그대로 옮겨와 시골의 멋을 떨어뜨리는 때가 있다. 그러면 주민들과 부딪히기 마련이다. 도시의 생활만이 옳다고 여기는 귀농인들의 주장이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이 살아온 관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귀농생활이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면 차라리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하지 않을까? 조금은 불편해도 조금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나의수고로 땅이 살아나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간직해 가는 것, 그 또한 우리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젠 잘 갖추어지고 멋지게 지어진 집들이 부럽지 않고, 예쁘고 화려한 것들이 내게서 멀어져 가도 마음이 서글퍼지지 않는 건, 한껏 묶어놓았던 내 안의 욕심을 서서히 덜어낼 줄 알게 되어서일 게다.
주님께서 이런 우리를 기특하게 보셨는지, 우리 유기농 농산물이 의정부교구 후곡본당 신자들에게 갈 수 있도록 연결해 주셨다. 뿌리 역할을 하는 농민이 농약과 제초제를 쓰지 않고 힘들게 지어내는 농산물을, 도시의 꽃님들이 소비해 주는 방법으로, 도시와 농촌이 하나 되어 자연의 생명과 환경을 지키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제 10월이면 27세 우리 딸아이는 혼인을 한다. 군복무를 마친 아들은 대학생활을 몇 년 더 할 테고, 우리 남편은 지금처럼 소박한 자세로 유기농 농사일에 열심일 것이다. 이렇게 고맙고 사랑스러운 우리 가족과 함께 ‘보시니 좋았던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있음이 자부심으로 느껴진다.
[경향 돋보기 - 피로사회 탈출, 귀농] 귀농을 생각하는 당신에게
저는 올해로 14년째 시골생활을 하고 있어요. 귀농에 대해 구체적이거나 체계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무작정 덤벼 시작한 생활이 어느새 10년하고도 3년이 더 지났네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저는 시골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잠시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제 마음속에 남아 시골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누군가 제게 ‘커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일단은 도시에서 돈을 좀 벌고, 그러고 나서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 거라고 대답했지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년 뒤 저는 부산 아미본당에서 저와 뜻을 같이하는 배우자를 만났고 결혼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귀농생활은 이미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도시에서는 딱 3년만 살고 농촌으로 들어가기로 약속을 했거든요. 남편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가 자식한테 물려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집도 없고 돈도 없고…. 푸른 하늘과 깨끗한 땅과 맑은 물을 물려줄 수밖에 없으니 농촌에서 살아야지요. 농촌도 비닐하우스 농사나 농약 뿌리는 들판이 아니라 몇 가구밖에 살지 않는 산골 마을로 들어가서 그분들과 함께 삽시다.”
대책 없는 귀농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을 때, 남편이 직장생활을 해서 모은 전세금 1,500만 원을 들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찾아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대책 없는 행동이었지요. 어디에 정착해서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아무런 계획도 없었지만, 성당 가까이에서 살겠다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소 주소록을 보며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고, 두 아이를 데리고 무주, 함양, 산청, 의령으로 두루두루 다녀보고는 여기 함양 우전마을에 자리를 잡았답니다.
그리고 셋째를 낳았을 때, 아기 울음소리를 10여 년 만에 들어본다는 동네 어르신들은 경사가 났다며 매우 기뻐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14년이 지난 지금은, 3명의 자녀가 더 늘었고, 농사 규모도 커졌습니다.
한때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수입은 늘 부족하고, 자녀들은 늘어나고….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농촌살리기운동 마산교구 본부에서 사무국장을 하시던 서정홍 선생님의 권유로 칡을 채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생활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날씨가 좋을 때는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지요. 아무도 돌보지 않은 탓에 무성한 칡넝쿨이 나무 주위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삽질을 몇 번 하면 어느새 칡줄기가 모습을 드러냈지요.
이렇게 캐어온 칡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칼로 얇게 잘라서 양지바른 곳에 말렸습니다. 그랬더니 상품이 되더군요. 우리에게는 칡이 효자노릇을 해주었답니다.
농촌생활이 주는 교훈
도시생활과 농촌생활을 비교해 볼 때, 농촌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과 함께라서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불편한 점도 많습니다. 아이가 아플 때는 교통편이 안 좋고 병원이 멀어서 애태운 적도 많고,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도시를 동경할 때는 해줄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도시에서의 경험이 전혀 없으니 그럴 수밖에요. 제가 만일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면 커서는 절대로 시골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골은 고단함과 가난이 함께 있는 곳이라는 사실도 귀농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이 고단함은 저를 성실하게 만들었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난한 이웃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우리 아이들은 제게 인내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은 여유를 줍니다. 거북이보다 느린 것 같지만 토끼보다 빠른 것이 계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시기를 놓치면 수확할 때 결과물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성실함은 큰 복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저는 그런 성실함이 부족해 늘 뒤처져 있답니다.
또래가 그리운 아이들
네살, 다섯 살,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여섯 아이가 모두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학교로 가고 나면 저는 잠시 휴식도 취합니다. 그런데 마을에는 우리 아이들 또래가 없어서 우리 아이들이 참 안돼 보일 때가 많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작은 시골학교에 그나마 몇 안 되는 동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할 일입니다.
농촌 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며 실감하게 됩니다. 요즘에는 우리 마을에서도 교육문제 때문에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는 젊은 엄마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면 소재지보다는 읍내 학교로, 내가 사는 지역보다는 다른 지역의 좋은 학교로 자녀들을 보내고 있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걱정되기보다, 친구들이 없어 외롭게 학교생활을 할까 봐 걱정입니다.
그나마 우리 아이들이 여섯이라 자기들끼리 놀면서 사회성도 키우고, 어려운 문제는 서로 물어보며 공부도 하고, 이제는 제법 농사일도 도울 줄 알게 되어 참 고마울 따름입니다.
세상 어떤 일보다 가치 있는 유기농법
사람 사는 건 시골이나 도시나 별다른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도 그랬듯이 처음 이곳에 와서 지내는 일은 서먹서먹하고 어렵지요. 지금처럼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들 편안히 잘 지내기까지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답니다.
가끔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고마운 일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올해는 집 앞에 8마지기가 도지로 들어왔습니다. 물대기도 좋고 일하기도 가까워서 아주 좋습니다. 지금은 여기에 벼가 자라고 있습니다. 벼 추수가 끝나면 양파를 심을 것입니다. 양파 농사를 지은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유기농법은 어렵습니다.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도 그럴 만한 여유가 없네요.
경제적인 보탬이 될 듯하여 양파즙 가공도 고려하고 있지만 생각처럼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주님의 도움으로 잘 지내왔으니 앞으로도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귀농하고 나서 얼마 동안은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들에게, 시골 와서 같이 살자고 많이 권유하였습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귀농을 말립니다. 농사를 업으로, 생계 수단으로 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지만 구조적인 여러 가지 문제도 참 많거든요. 유기농이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저도 모르게 지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떤 직업보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해가 거듭 될수록 더욱더 확고해집니다. 저 자신도 이 일을 선택한 것이 자랑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무모했지만 이 길을 선택한 것에 감사드리며, 저 개인의 성숙한 삶을 위해서라도 이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점점 재미가 붙어갑니다.
얼마 전에는 평화신문에서 기획하는 ‘나눔의 기적’에서 마산교구장이신 안명옥 주교님이 자선경매 물품으로 백자를 내놓으셨는데, 그 낙찰대금 일부를 저희에게 주셨어요. 이렇게 늘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저희도 이웃을 생각하며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답니다.
우리 곁에서 커가는 벼를 비롯하여 모든 작물이 다 우리 가족 같습니다. 모든 산과 들판과 언덕과 개울과 맑은 공기와 나무들과 꽃들이 늘 우리 곁에 있으니, 마음 하나만은 넉넉하고 든든합니다.
하느님 만나러 성당으로 가는 길이 늘 즐겁습니다.
[경향 돋보기 - 피로사회 탈출, 귀농] 도시와 농촌의 상생
“우리 마을은 … 약 20가구밖에 살지 않는 아주 아담하고 조그마한 가난한 시골마을이다. … 마을사람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밤에는 서로 모여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도 하고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나누는 한집안같이 정답게 살아가고 있다. 봄이 되면 마을은 온통 진달래꽃으로 빨갛게 된다. 어머니들은 뒷산에 올라가 산나물을 뜯어오기도 하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따다가 도토리묵을 만들어서 먹기도 하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1982년에 나온 「서울로 가는 길」이란 책 속에서 묘사된 송효순 씨의 고향 풍경이다.
이농향도와 도농격차
스웨덴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우연히 방문했다가 인간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에 감탄하며 눌러앉은 인도 북부의 라다크 마을이 곧 우리의 전통 시골 마을이다. 그러나 잘못된 개발정책이나 돈벌이 중심의 경제정책, 농업과 여성에 대한 멸시 풍토 등으로 말미암아 농어촌의 젊은이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향한다.
“1973년 봄이었다. 서울로 이사를 하신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을 다니러 오셨다. 외할머니는 내게 새 일자리를 내놓으셨다. 서울 사는 이모가 잘 아는 목욕탕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송 씨는 서울에서 돈을 벌어 동생 학비에 보태려고 취업을 한다. 처음엔 목욕탕에, 나중엔 공장에 취업한다. 이런 식으로 새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 도시 또는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이 1960-70년대에 이농향도(離農向都)물결을 이루었다. 많을 때는 해마다 1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도시로 향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약 5천만 명이 사는 대한민국엔 서울과 수도권에 무려 그 절반인 2천 5백만이 몰려 살고, 그나마 나머지 50%도 그 외의 도시에 많이 몰려 산다. 1960년대 초에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던 농어촌 인구는 오늘날 5% 정도밖에 안 된다. 게다가 아직도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60-70세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농어촌 인구는 더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우리 모두가 ‘발전’이라 부르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내면의 고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농상생의 필요성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 곧 도농격차는 한편으로 도시의 과밀화, 다른 편으로 농촌의 공동화라는 양극화의 모순을 낳았다. 그러나 이 양극화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내부 식민화’라는 고리이다. 도시가 농어촌을 식민지처럼 이용하는 것이다.
농어촌은 처음엔 도시의 공업단지 또는 수출산업기지를 위한 노동력의 공급원이자 각종 공업 원료나 도시 노동자를 위한 식량의 공급처였고, 다음엔 저가의 공산품이나 농약, 비료 등을 파는 시장이 되었으며, 또 공장이나 아파트 건설을 위한 토지의 공급원, 나아가 부동산 투기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토지도 자연도 마을도 사람도 마음도 마치 단물이 다 빠진 껌처럼 황폐화할 대로 황폐화해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하기 어려운 곳이 되어버렸다.
물론 가톨릭농민회나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그리고 전국귀농운동본부처럼 죽어가는 농촌, 농민, 농업을 살리자는 운동이 꾸준히 있어 왔고, 한살림을 비롯한 다양한 생협 운동이 도시의 소비자와 농촌의 생산자를 모두 살리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 도시를 떠나 농어촌으로 돌아간 귀농 인구가 2011년에 1만 가구를 넘어섰을 정도라 한다. 하지만, 도농격차나 모순을 해소하기엔 아직도 역부족이다. 오히려 우리의 사회구조나 사람들의 의식수준 어느 면을 보더라도, 갈수록 희망의 웃음보다는 절망의 한숨이 더 많이 나온다.
그 와중에 나라 전체적으로 식량 자급률이 25% 정도라 한다. 이것도 실은 과장된 면이 있다. 우선은 석유를 써서 하는 농업이 이 정도다. 석유에 의존하는 농기계, 그리고 비닐하우스 등은 석유 고갈 시대를 맞아 위기에 처할 것이다. 나아가 석유에서 나오는 비료, 농약 등은 자립의 요소에서 빠져야 한다. 그나마 쌀의 상대적 자급률이 높아서 그렇지 그 외 대부분의 곡물이나 과일은 갈수록 많이 수입에 의존한다.
칠레, 미국, 유럽연합, 그리고 중국 등과 맺는 각종 FTA(자유무역협정)는 당장에는 값싼 농산물을 수입하고 공산품을 더 많이 수출함으로써 ‘국익’이 증대하고 ‘소비자’가 덕을 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재벌급 대기업만 이득을 본다. 또 ‘트리클다운(낙수) 효과’라 해서 수출기업이나 대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중소기업이나 나라 전체가 떡고물을 많이 얻을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중소기업이나 노동자, 농민의 생명력을 독점 대기업이 체계적으로 빨아들이는 ‘스펀지 효과’가 더 크다.
실제 현실이 이렇게 뒤틀려있는데도 정치와 경제의 기득권층은 여전히 국민을 기만하고 자신도 기만한다. 석유가 고갈되고 부동산 거품이 꺼지며 기후위기와 식량대란의 위기가 다가오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고급 자동차를 사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며 수출만 많이 하면 잘살게 된다고 믿고 있고 그 잘못된 믿음을 전 사회에 강요한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농업, 농촌, 농민을 무시한 공업화나 산업화, 그러한 경제성장정책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 잘못된 정책이나 제도, 의식이나 행동의 밑바탕에는 “농업은 저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농업은 ‘산업’의 일환으로 바라볼 대상이 아니다. 농업은 그 자체로 생명활동이며 모든 경제활동의 근본적 기초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살아가려면 매일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한 사회가 지탱되려면 절대로 필요한 활동이다.
비유컨대, 한 가정의 밥상을 어머니가 차린다면, 한 사회의 밥상은 농민들이 차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농민이 종사하는 농업이란 화학농업이 아니라 유기농업이 원칙이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순환농법,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겸손하게 따르는 농법이 유기농업이다. 게다가 유기농법으로 지은 농산물조차 가능한 한 가까운 거리에서 생산된 것을 유통, 소비하는 것이 옳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텃밭 경작을 하거나 자영농으로 자급자족을 하는 것이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지역에서 난 것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다.
결국, 우리는 단순히 도농격차나 모순을 완화하는 수준을 넘어 더욱 종합적인 대안을 구상하고 도시와 농촌이 상생하거나 새로운 형태로 지양되기를 꿈꾸어야 한다.
종합적 대안이란 나라 정책의 기본에 ‘농자천하지대본’이 근간이 되는 것이다. 특히 식량자급률을 70% 이상으로 높이기 위한 ‘식량자급 5개년 계획’을 순차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헌법에 있는 ‘경자유전’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유기농업 공무원제’ 같은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유기농업을 일상화해야 한다. 유기농법으로 하는 학교 텃밭이나 직장 텃밭 운동도 권장할 필요가 있다. 농업 생산물은 일반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과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최소한 다단계 식으로 조성된 유통 마진을 없애고 농협이나 농민회 같은 전국 조직이 중심이 되어 도농 직거래를 활성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각종 부동산 투기를 원천봉쇄한 위에서 귀농과 귀촌 희망자를 지원하는 ‘귀농간사’ 제도를 도입하고 집과 농지를 쉽게 구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공업과 서비스업을 배제하진 않되, 농업이 다른 모든 것의 근간이란 인식을 바탕으로 종합적 지원책이 나와야 한다. 이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유통, 대량폐기라는 ‘악순환’ 구조 속의 공업이나 상업의 기형적 팽창에 제동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그 위에서 도시와 농촌이 상생한다는 것은 더 이상 농촌이 도시를 위한 식민지가 아니라 농촌은 농촌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자기완결적인 발전을 해나가되, 서로 부족한 부분은 대등한 위치에서 상호 협력하는 형태로 해결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넘어 도시와 농촌이 새로운 형태로 지양된다는 것은 더 이상 도시와 농촌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을 ‘전원마을’ 형태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전원마을은 농촌의 정겨운 공동체나 자연 생태계, 유기농업은 원래의 모습처럼 잘 살리면서도 교육이나 문화, 정치 등 도시적인 요소를 적절히 가미하여 더욱 살기 좋은 공간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다.
도농상생의 가능성 - 선순환 구조와 사회적 실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밥 한 그릇 안에 천지인(天地人)이 다 들어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른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 밥 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주적인 협동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편으로는 인간이 우주적인 협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 경제를 보라. 우주적인 협동보다는 우주적인 경쟁을 하고 있고, 범지구적인 상생이 아니라 범지구적 분열이 가속화한다. 앞의 송효순 씨도 “같은 현장에서 함께 일을 했건만 마땅히 받을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서로 경쟁을 시키는 것”이 직장 현실이라 꼬집었다. 나라와 나라, 기업과 기업만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 사이도 그렇다. 어쩌면 나라와 나라의 경쟁과 분열, 구체적으로는 기업과 기업 사이의 경쟁과 분열은 각 사회마다 존재하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열과 모순에 토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심지의 독점 대기업 본사는, 도심은 물론 그 주변부와 인근 농촌, 그리고 원거리 농촌에, 더 멀리는 해외의 도시와 농촌에 빨대를 꽂고 사람과 자연의 생명력을 ‘흡혈귀처럼’ 빨아들인다. 이 자본이라는 흡혈귀는 일반적인 동물과는 달리 만족을 모른다. 배부름을 모르기 때문에 국경이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빨아들이려 한다. 국내외 어디든 ‘24시간 슈퍼’나 ‘24시간 편의점’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물론 그 뒤엔 ‘24시간 공장’이 돌아간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공장 안의 노동력만이 아니라 인간의 온 삶 전체를 대상으로 이윤 추구를 한다. 갈수록 사람들이 “대안이 없다.”며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식으로, ‘대안’에 대한 상상의 여지조차 좁아지거나 없어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숨 막히는 현실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면, 또 무한히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발상의 전환을 하고 국가, 지역, 개인적 차원 등 다차원에서 뼈를 깎는 실천을 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주 안의 천지인 사이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선순환이 되며, 도시와 농촌 사이에, 밥과 똥 사이에 선순환이 된다.
첫째, 국가적 차원에서는 더 이상 북미 식의 (농촌을 희생시켜 공업을 발전시키고, 중소기업을 희생시켜 독점 대기업만 돈 버는) ‘자유무역’이 아니라 남미 식의 ‘민중무역’ 협정을 추구해야 한다. 남미의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 3국은 서로 어떻게 하면 이득을 더 많이 볼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서로 어떻게 하면 도움을 더 줄까를 고민하며 우애 관계를 맺고 있다. 쿠바는 다른 나라에 의료 지원하고,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지원하며, 볼리비아는 광물을 지원한다.
이런 호혜와 선물, 우애와 환대의 아이디어를 확장해 우리도 뜻을 같이하는 나라들과 민중무역 협정을 맺고 상부상조의 관계를 넓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모든 나라가 도농상생과 도농지양을 이루는 방식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말한 종합적 대안을 국가시책으로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둘째, 지역적 차원에서는 한편으로 도농상생을 위한 ‘직거래’ 방식이나 ‘생협’ 운동, 학교급식 운동, 직장급식 운동, 나아가 ‘협동조합’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다른 편으로는 도시와 농촌의 분리와 모순을 극복하고 지양할 수 있는 ‘전원마을’을 더욱 체계적으로 형성해야 한다.
셋째, 개인적 차원에서는 ‘나부터’ 할 수 있는 실천을 하면서도 사회적 실천(국가적, 지역적 차원의 과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례로, 귀농·귀촌을 하고 텃밭을 일구거나 생태화장실을 쓰면서 똥과 오줌을 거름으로 만드는 일, 아니면 생협에 참여하거나 도농 직거래에 참여하는 일, 최소한 그런 활동을 하는 모임이나 운동을 후원하는 일, 자녀들의 학교급식(유기농, 지역 농산물) 운동에 참여하는 일, 직장급식을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일, 1사 1농 운동에 동참하는 일, 앞서 말한 ‘전원마을’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마을 만들기 운동에 동참하는 일 같은 실천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실천의 바탕에는 ‘농촌, 농민, 농업이 살아야 온 사회가 산다.’는 신념이 깔려있다. 서두에 나온 이농향도의 물결도 결국은 ‘잘살아보겠다.’는 (개인적, 집단적) 의지의 결과였다. 그러나 40-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과연 잘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막연히 강대국을 따라 하고 부자가 되고 재벌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참되게 잘산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식량자급률을 높이면서도 이웃 나라와 연대하고, 유기농업을 발전시키면서도 나라 전체의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 생산과 소비 등 모든 경제활동을 이윤이나 차별의 원리가 아니라 필요와 만족의 원리에 따라 하는 것이며, 전체적으로 경제와 사회, 생태 사이에 적대관계가 아니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옳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단기적으로는 도시와 농촌이 ‘공생공락’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더 이상 도농 사이의 모순이 없게 전원마을의 형태로 ‘도농지양’을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 대안이 될 것이다.
[경향 돋보기 - 피로사회 탈출, 귀농] 도시와 농촌의 상생
“우리 마을은 … 약 20가구밖에 살지 않는 아주 아담하고 조그마한 가난한 시골마을이다. … 마을사람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밤에는 서로 모여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도 하고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나누는 한집안같이 정답게 살아가고 있다. 봄이 되면 마을은 온통 진달래꽃으로 빨갛게 된다. 어머니들은 뒷산에 올라가 산나물을 뜯어오기도 하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따다가 도토리묵을 만들어서 먹기도 하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1982년에 나온 「서울로 가는 길」이란 책 속에서 묘사된 송효순 씨의 고향 풍경이다.
이농향도와 도농격차
스웨덴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우연히 방문했다가 인간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에 감탄하며 눌러앉은 인도 북부의 라다크 마을이 곧 우리의 전통 시골 마을이다. 그러나 잘못된 개발정책이나 돈벌이 중심의 경제정책, 농업과 여성에 대한 멸시 풍토 등으로 말미암아 농어촌의 젊은이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향한다.
“1973년 봄이었다. 서울로 이사를 하신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을 다니러 오셨다. 외할머니는 내게 새 일자리를 내놓으셨다. 서울 사는 이모가 잘 아는 목욕탕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송 씨는 서울에서 돈을 벌어 동생 학비에 보태려고 취업을 한다. 처음엔 목욕탕에, 나중엔 공장에 취업한다. 이런 식으로 새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 도시 또는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이 1960-70년대에 이농향도(離農向都)물결을 이루었다. 많을 때는 해마다 1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도시로 향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약 5천만 명이 사는 대한민국엔 서울과 수도권에 무려 그 절반인 2천 5백만이 몰려 살고, 그나마 나머지 50%도 그 외의 도시에 많이 몰려 산다. 1960년대 초에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던 농어촌 인구는 오늘날 5% 정도밖에 안 된다. 게다가 아직도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60-70세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농어촌 인구는 더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우리 모두가 ‘발전’이라 부르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내면의 고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농상생의 필요성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 곧 도농격차는 한편으로 도시의 과밀화, 다른 편으로 농촌의 공동화라는 양극화의 모순을 낳았다. 그러나 이 양극화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내부 식민화’라는 고리이다. 도시가 농어촌을 식민지처럼 이용하는 것이다.
농어촌은 처음엔 도시의 공업단지 또는 수출산업기지를 위한 노동력의 공급원이자 각종 공업 원료나 도시 노동자를 위한 식량의 공급처였고, 다음엔 저가의 공산품이나 농약, 비료 등을 파는 시장이 되었으며, 또 공장이나 아파트 건설을 위한 토지의 공급원, 나아가 부동산 투기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토지도 자연도 마을도 사람도 마음도 마치 단물이 다 빠진 껌처럼 황폐화할 대로 황폐화해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하기 어려운 곳이 되어버렸다.
물론 가톨릭농민회나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그리고 전국귀농운동본부처럼 죽어가는 농촌, 농민, 농업을 살리자는 운동이 꾸준히 있어 왔고, 한살림을 비롯한 다양한 생협 운동이 도시의 소비자와 농촌의 생산자를 모두 살리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 도시를 떠나 농어촌으로 돌아간 귀농 인구가 2011년에 1만 가구를 넘어섰을 정도라 한다. 하지만, 도농격차나 모순을 해소하기엔 아직도 역부족이다. 오히려 우리의 사회구조나 사람들의 의식수준 어느 면을 보더라도, 갈수록 희망의 웃음보다는 절망의 한숨이 더 많이 나온다.
그 와중에 나라 전체적으로 식량 자급률이 25% 정도라 한다. 이것도 실은 과장된 면이 있다. 우선은 석유를 써서 하는 농업이 이 정도다. 석유에 의존하는 농기계, 그리고 비닐하우스 등은 석유 고갈 시대를 맞아 위기에 처할 것이다. 나아가 석유에서 나오는 비료, 농약 등은 자립의 요소에서 빠져야 한다. 그나마 쌀의 상대적 자급률이 높아서 그렇지 그 외 대부분의 곡물이나 과일은 갈수록 많이 수입에 의존한다.
칠레, 미국, 유럽연합, 그리고 중국 등과 맺는 각종 FTA(자유무역협정)는 당장에는 값싼 농산물을 수입하고 공산품을 더 많이 수출함으로써 ‘국익’이 증대하고 ‘소비자’가 덕을 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재벌급 대기업만 이득을 본다. 또 ‘트리클다운(낙수) 효과’라 해서 수출기업이나 대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중소기업이나 나라 전체가 떡고물을 많이 얻을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중소기업이나 노동자, 농민의 생명력을 독점 대기업이 체계적으로 빨아들이는 ‘스펀지 효과’가 더 크다.
실제 현실이 이렇게 뒤틀려있는데도 정치와 경제의 기득권층은 여전히 국민을 기만하고 자신도 기만한다. 석유가 고갈되고 부동산 거품이 꺼지며 기후위기와 식량대란의 위기가 다가오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고급 자동차를 사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며 수출만 많이 하면 잘살게 된다고 믿고 있고 그 잘못된 믿음을 전 사회에 강요한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농업, 농촌, 농민을 무시한 공업화나 산업화, 그러한 경제성장정책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 잘못된 정책이나 제도, 의식이나 행동의 밑바탕에는 “농업은 저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농업은 ‘산업’의 일환으로 바라볼 대상이 아니다. 농업은 그 자체로 생명활동이며 모든 경제활동의 근본적 기초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살아가려면 매일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한 사회가 지탱되려면 절대로 필요한 활동이다.
비유컨대, 한 가정의 밥상을 어머니가 차린다면, 한 사회의 밥상은 농민들이 차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농민이 종사하는 농업이란 화학농업이 아니라 유기농업이 원칙이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순환농법,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겸손하게 따르는 농법이 유기농업이다. 게다가 유기농법으로 지은 농산물조차 가능한 한 가까운 거리에서 생산된 것을 유통, 소비하는 것이 옳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텃밭 경작을 하거나 자영농으로 자급자족을 하는 것이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지역에서 난 것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다.
결국, 우리는 단순히 도농격차나 모순을 완화하는 수준을 넘어 더욱 종합적인 대안을 구상하고 도시와 농촌이 상생하거나 새로운 형태로 지양되기를 꿈꾸어야 한다.
종합적 대안이란 나라 정책의 기본에 ‘농자천하지대본’이 근간이 되는 것이다. 특히 식량자급률을 70% 이상으로 높이기 위한 ‘식량자급 5개년 계획’을 순차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헌법에 있는 ‘경자유전’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유기농업 공무원제’ 같은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유기농업을 일상화해야 한다. 유기농법으로 하는 학교 텃밭이나 직장 텃밭 운동도 권장할 필요가 있다. 농업 생산물은 일반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과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최소한 다단계 식으로 조성된 유통 마진을 없애고 농협이나 농민회 같은 전국 조직이 중심이 되어 도농 직거래를 활성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각종 부동산 투기를 원천봉쇄한 위에서 귀농과 귀촌 희망자를 지원하는 ‘귀농간사’ 제도를 도입하고 집과 농지를 쉽게 구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공업과 서비스업을 배제하진 않되, 농업이 다른 모든 것의 근간이란 인식을 바탕으로 종합적 지원책이 나와야 한다. 이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유통, 대량폐기라는 ‘악순환’ 구조 속의 공업이나 상업의 기형적 팽창에 제동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그 위에서 도시와 농촌이 상생한다는 것은 더 이상 농촌이 도시를 위한 식민지가 아니라 농촌은 농촌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자기완결적인 발전을 해나가되, 서로 부족한 부분은 대등한 위치에서 상호 협력하는 형태로 해결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넘어 도시와 농촌이 새로운 형태로 지양된다는 것은 더 이상 도시와 농촌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을 ‘전원마을’ 형태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전원마을은 농촌의 정겨운 공동체나 자연 생태계, 유기농업은 원래의 모습처럼 잘 살리면서도 교육이나 문화, 정치 등 도시적인 요소를 적절히 가미하여 더욱 살기 좋은 공간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다.
도농상생의 가능성 - 선순환 구조와 사회적 실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밥 한 그릇 안에 천지인(天地人)이 다 들어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른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 밥 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주적인 협동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편으로는 인간이 우주적인 협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 경제를 보라. 우주적인 협동보다는 우주적인 경쟁을 하고 있고, 범지구적인 상생이 아니라 범지구적 분열이 가속화한다. 앞의 송효순 씨도 “같은 현장에서 함께 일을 했건만 마땅히 받을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서로 경쟁을 시키는 것”이 직장 현실이라 꼬집었다. 나라와 나라, 기업과 기업만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 사이도 그렇다. 어쩌면 나라와 나라의 경쟁과 분열, 구체적으로는 기업과 기업 사이의 경쟁과 분열은 각 사회마다 존재하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열과 모순에 토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심지의 독점 대기업 본사는, 도심은 물론 그 주변부와 인근 농촌, 그리고 원거리 농촌에, 더 멀리는 해외의 도시와 농촌에 빨대를 꽂고 사람과 자연의 생명력을 ‘흡혈귀처럼’ 빨아들인다. 이 자본이라는 흡혈귀는 일반적인 동물과는 달리 만족을 모른다. 배부름을 모르기 때문에 국경이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빨아들이려 한다. 국내외 어디든 ‘24시간 슈퍼’나 ‘24시간 편의점’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물론 그 뒤엔 ‘24시간 공장’이 돌아간다. 이제 자본은 더 이상 공장 안의 노동력만이 아니라 인간의 온 삶 전체를 대상으로 이윤 추구를 한다. 갈수록 사람들이 “대안이 없다.”며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식으로, ‘대안’에 대한 상상의 여지조차 좁아지거나 없어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숨 막히는 현실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면, 또 무한히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발상의 전환을 하고 국가, 지역, 개인적 차원 등 다차원에서 뼈를 깎는 실천을 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주 안의 천지인 사이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선순환이 되며, 도시와 농촌 사이에, 밥과 똥 사이에 선순환이 된다.
첫째, 국가적 차원에서는 더 이상 북미 식의 (농촌을 희생시켜 공업을 발전시키고, 중소기업을 희생시켜 독점 대기업만 돈 버는) ‘자유무역’이 아니라 남미 식의 ‘민중무역’ 협정을 추구해야 한다. 남미의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 3국은 서로 어떻게 하면 이득을 더 많이 볼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서로 어떻게 하면 도움을 더 줄까를 고민하며 우애 관계를 맺고 있다. 쿠바는 다른 나라에 의료 지원하고,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지원하며, 볼리비아는 광물을 지원한다.
이런 호혜와 선물, 우애와 환대의 아이디어를 확장해 우리도 뜻을 같이하는 나라들과 민중무역 협정을 맺고 상부상조의 관계를 넓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모든 나라가 도농상생과 도농지양을 이루는 방식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말한 종합적 대안을 국가시책으로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둘째, 지역적 차원에서는 한편으로 도농상생을 위한 ‘직거래’ 방식이나 ‘생협’ 운동, 학교급식 운동, 직장급식 운동, 나아가 ‘협동조합’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다른 편으로는 도시와 농촌의 분리와 모순을 극복하고 지양할 수 있는 ‘전원마을’을 더욱 체계적으로 형성해야 한다.
셋째, 개인적 차원에서는 ‘나부터’ 할 수 있는 실천을 하면서도 사회적 실천(국가적, 지역적 차원의 과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례로, 귀농·귀촌을 하고 텃밭을 일구거나 생태화장실을 쓰면서 똥과 오줌을 거름으로 만드는 일, 아니면 생협에 참여하거나 도농 직거래에 참여하는 일, 최소한 그런 활동을 하는 모임이나 운동을 후원하는 일, 자녀들의 학교급식(유기농, 지역 농산물) 운동에 참여하는 일, 직장급식을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일, 1사 1농 운동에 동참하는 일, 앞서 말한 ‘전원마을’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마을 만들기 운동에 동참하는 일 같은 실천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실천의 바탕에는 ‘농촌, 농민, 농업이 살아야 온 사회가 산다.’는 신념이 깔려있다. 서두에 나온 이농향도의 물결도 결국은 ‘잘살아보겠다.’는 (개인적, 집단적) 의지의 결과였다. 그러나 40-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과연 잘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막연히 강대국을 따라 하고 부자가 되고 재벌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참되게 잘산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식량자급률을 높이면서도 이웃 나라와 연대하고, 유기농업을 발전시키면서도 나라 전체의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 생산과 소비 등 모든 경제활동을 이윤이나 차별의 원리가 아니라 필요와 만족의 원리에 따라 하는 것이며, 전체적으로 경제와 사회, 생태 사이에 적대관계가 아니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옳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단기적으로는 도시와 농촌이 ‘공생공락’하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더 이상 도농 사이의 모순이 없게 전원마을의 형태로 ‘도농지양’을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 대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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