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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자 여호와
시편 23편
1. 목자이신 여호와(1-4)
4중의 축복
① 영적 양식의 공급(2)
푸른 초장- 양떼가 편히 쉬어 먹고 마시게 하신다.
도망과 죽음의 위험에서 한상 피곤하지만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신다.
② 영적 회복
쉴만한 물가 - 잔잔한 물가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세미한 손길의 인도하심
③ 의의 길로 인도
양을 바른 길로 이끄는 목자
구원의 길로
천국길로
④ 완벽한 보호
지팡이와 막대기
2. 하나님께 감사하며 미래를 확신(5-6)
① 원수를 이기심
② 부요케 하심 - 머리에 기름
③ 잔이 넘침 - 최대의 기업을 소유
④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지속
인생의 여정
본문 말씀 ; 시 23:1-6
시2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23편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늘 암송하고 곡을 붙여서 좋은 찬양으로도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시는 단순히 추상적이며 감상적인 시가 아니고 바로 다윗의 인생의 고백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일생동안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면서 그가 경험했던 내용들을 많은 시로 남겼습니다. 오늘 이23편도 그런 다윗의 인생의 고백서 중 하나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인생의 여정’ 이라고 잡았는데 시23편은 다윗의 인생의 여정을 잘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인생의 여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어린 시절부터 양을 치는 목동으로서 늘 밖에서 양떼들과 함께 삶을 살아왔던 소년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을 위기 가운데서 건져내게 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골리앗을 물리침으로써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다윗은 영웅의 대접치고는 너무나 고통스런 대접을 받기 시작해서 결국은 그를 사랑하고 아끼고 써야 될 사울 왕이 다윗을 대적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오랜 기간을 도망자가 되고 또 남의 나라에 망명을 가서 거기서 미치광이처럼 행세를 해야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간들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영광스런 시간도 맞이하게 됩니다. 왕위에 재직하는 가운데 좋은 때도 있었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자기의 자식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역도 경험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도망을 가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노년에 들어가면서 그는 자기가 낳은 왕자들이 서로 왕위를 노리고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보면 그런 내용들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좋은 세월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참 평안하고 풍요롭고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인생의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5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넘어지는 인생의 과정들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3절에 소생시킨다는 말은 죽을 고비를 넘긴다는 말이며 4절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는 고백을 했고 5절에는 수많은 원수들의 목전에서 자기가 둘러싸여서 위기를 당했던 그런 상황들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인생 여정도 푸른 초장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헤매게 됩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대적해서 정말 위기에 빠지는 상황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인생의 여정들을 거치면서 그가 경험했던 소중한 재산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바로 6절에 있는 것처럼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기에 평생이라는 말은 ‘모든 날’을 말합니다. ‘all the days’ 어떤 한 날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의 모든 날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이 좀 잘 될 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보다 하고 간증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주일을 살면서 혹은 한달을 살면서 혹은 일년을 거치면서 하나님 살아계신다고 느끼고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날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반대로 어떤 상황이 벌어져서 앞길이 보이지 않고 하던 일들이 잘 안 되고 어려운 일들이 부딪히면 우리는 당장 무슨 생각을 갖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 있냐고 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일평생 경험한 것은 자기가 어려운 날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좋은 날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라는 최종적인 승리의 메시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인생이 이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푸른 초장에 눕게 되고 물가에 있어 풍성하고 모든 것이 여유가 있고 하는 일들이 잘 풀리고 정말 기분 좋은 인생을 살 때가 있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과정을 살 때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는 지금 그런 계절을 맞이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는 여기서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면서 더 이상 아무 희망이 없는 과정을 걷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수많은 문제들에 둘러싸여서 어떻게 헤쳐 나아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런 시간도 있을 것입니다.
옆에 사람의 얼굴을 좀 봅시다. 푸른 초장 같이 보이는지 아니면 완전히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다 죽을 상이 되어 보이는지 아니면 수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모르겠는지 아니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정신병자 비슷하게 눈동자가 절반은 간 상황에 있는지 그런데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무슨 특별한 사람만 푸른 초장이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인생을 사는 모든 이들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인데 푸른 초장에 누일지라도 너무나 깊이 잠이 들어서 깨어나지 못하니까 쓸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것이라고 해서 승리가 아닙니다. 풍요로움이 망하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풍요롭다고 성공했다거나 승리했다고 보면 안 됩니다. 어떠한 인생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진정한 승리의 비결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정말 감옥에 내려가고 팔려가고 살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과정 속에 계시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들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내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 되기도 하고 그것이 나를 해하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요셉은 그 어려운 고난의 과정을 거친 다음 고속도로와도 같은 순탄한 과정을 보지 않습니까?
나는 성공했다고 승리한 것도 아니고 골짜기를 헤매고 있다고 해서 실패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내 인생의 진정한 승리의 비결이 되기도 하고 내 인생의 실패나 절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인생의 목표를 올바르게 정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생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디 가기 위해서 사는 겁니까? 100평짜리 집 사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나 세상에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감사의 기도들 가운데 보면 주로 자기가 사람으로 존재한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의 성도된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왕이 된 것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도 보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시16:1-2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16:5-6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여기서 말하는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이란 이 땅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다윗의 시편 속에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왕으로서 살아가면서 정말 이룰 만큼 이룬 사람이지만 그의 마음속에 진정한 재산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늘 확신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푸른 초장에 있다 할지라도 그곳이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이 영원한 우리의 처소가 아닙니다.
진정한 우리의 목표는 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뜨면 세상의 복잡한 상황들이 보이지만 눈을 감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 그려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신할 때에 푸른 초장에 있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승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오늘 시23:6 말씀을 보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분위기에 따라서 하나님이 계셨다 안 계셨다 합니다. 내 하는 일이 잘 되면 계시는 것 같고 안 되면 안 계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안 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습니다.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고 그분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자기의 아들이 칼을 가슴에 대고 죽이겠다고 반역을 일으켜서 도망갈 때에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덤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윗이 그런 상황에서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맨발로 도망하게 되었으니 그 신세가 얼마나 처량합니까? 그때에 다윗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지 않습니까? 시므이와 같은 사람은 돌을 던지면서 사울의 피를 뿌리려 하더니 하나님이 벌을 주는 거라 말하니까 다윗의 신하들이 얼마나 화가 납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도망가는 판국에 그래서 죽이겠다고 그랬더니 다윗이 아니라면서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면 내게 이런 일이 올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허락지 아니하셨으면 그런 일들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그 절대적인 섭리와 사랑의 은혜로 자기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가 그러는데 아닙니다. 이 세상은 똑같습니다. 자식 사랑한다고 놔두면 무슨 자식이 되는지 아십니까? 불효자식이 됩니다. 그래서 자식들 나무라고 때로는 매도 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은 우리 식대로 우리 원하는 대로 놔두면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러면 지옥 갈 사람이 많이 생깁니다.
여러분 스스로에 대해서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십니까?
아직도 모르시는 분들이 계시면 자기를 좀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컨트롤 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내 멋대로 갈 사람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내 식대로 가면 그 종착역은 지옥불 속으로 가게 됩니다. 진정한 영광과 상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장소입니다.
애를 위해서 늘 기도하던 홀로 사는 엄마가 있었는데 자기 자식이 아파서 죽을 고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는 이 아이 없이는 못 삽니다. 이 아이를 데려 가려면 차라리 내 생명을 데려가 주세요’ 그러면서 눈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이 아이가 크면서 소년기 때 방탕하기 시작하여 청년기 때 완전히 잘못된 길로 갔습니다. 나중에는 이 아이가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그 아이를 염려하던 끝에 그 아이가 자살했다고 하는 고통스런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 어머니가 그때 하나님 앞에 울며불며 기도하면서 무슨 기도를 했느냐면 ‘하나님! 이 아이가 어렸을 때에 그 순하고 하나님 앞에 귀하게 자라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데려 가시려고 할 때 그냥 맡겼어야 되는데 왜 이 아이를 살려 달라고 기도했는지 너무나 원통합니다.’ 이렇게 울부짖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도 좀 하고 안식도 얻고 평안도 얻으라고 쉴만한 물가도 주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놓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야 정신이 드니까. 그래야 새롭게 변화될 수 있으니까. 쉴만한 물가로만 갖다 놓으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니까 그러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까지도 은혜로 받을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이런 일이 내게 올 수 없다. 오늘날 하나님이 나의 억울함을 감찰하시니 선으로 나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욥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욥은 정말 모든 믿었던 것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재산 다 사라지고 자식들도 다 죽고 자기 건강도 다 병들어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라도 좀 위로해 줘야 될 가장 가까운 아내가 절망적인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아내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아십니까?
욥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이가 어찌 고난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좋은 믿음은 좋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더 큰 믿음은 그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성도들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런 믿음을 갖는다면 그 어떤 환경도 그들을 굴복시키지 못합니다. 푸른 초장이 승리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는 것이 바로 진정한 승리의 비결입니다.
욥은 욥19:25에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나의 구원자가 살아계신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고 욥23:10에서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 같은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는 나중에 귀한 은혜로 되돌아 왔습니다. 마지막 장에 가서 보면 욥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여러분! 푸른 초장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의 시간을 주신 뜻이 어디에 있을까? 왜 하나님은 이 좋은 환경을 나에게 맡기셨나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이것을 바르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신이나 된 것처럼 자기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여건을 주시든 아니면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맞이했든 간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것은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많은 훌륭한 교훈을 남겨 준 사람입니다.
그의 글 속에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말씀이 빌3:12-14입니다. 여기 보면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더 가야 한다면서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서 달려간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다 이룬 것처럼 생각합니다.
고전4:8을 보면 고린도 교인을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따끔한 교훈을 합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참으로 너희가 왕 노릇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시편의 말씀을 빌리면 푸른 초장에 누워 있는 사람들처럼 또 쉴만한 물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풍성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서로 다투고 서로 분쟁하고 서로 자기가 잘 났다고 자기가 큰 사람이라고 자기가 왕이라고 당을 지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배운 것처럼 더 배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다 이룬 사람들처럼 뭔가 새로운 것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제는 마치 왕이나 된 것처럼 그들은 서로 다 자기만이 섬김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다 배부른 사람처럼 그러느냐 너희가 벌써 다 끝난 사람처럼 다 완성한 사람들처럼 그러느냐면서 책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푸른 초장에 누워 있고 쉴만한 물가로 다니면서 인생이 참 즐겁구나.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은혜를 주시는구나. 이런 여건들을 맞이한 분들이 계시다면 다 이룬 것이 아직 아니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더 가야 될 길이 있으며 더 달려갈 길이 남아 있으며 더 해야 될 일들이 남아 있으며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를 일하게 하시려고 이런 환경과 여건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할 줄 알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모든 여건들이 다 바뀌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이제는 다 끝났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다만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있는 것이 어느 날 사라졌습니까? 그래서 실패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나에게 새로운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좀 더 나를 만나고 싶으셔서 그러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너무 눈앞에 보이는 거에만 매여 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만 놀고 나하고 좀 만나자고 그것을 치우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것들을 통해서 일했지만 뭔가 하나님이 다른 사명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옮겨 놓으신 겁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왜 그것을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절망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잠시 다른 역할과 사명을 위해서 좀 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났어. 하나님은 살아계셔.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어.’ 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나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스런 시간이 있었어.’ 라는 말을 대신하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평안하고 즐거울 때는 그 삶을 누리느라고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좀 만나자고 하셔도 바빠서 못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치우시는 겁니다. 그래서 치우신 분들 계시면 ‘정말 감사하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이제 그것을 자꾸 그리워하지 맙시다. 무엇하려고 자꾸 그리워합니까? 그 대신 누구를 그리워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말씀 앞에 엎드리면서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만납시다.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하나님이 보시고 ‘됐다. 이제는 너 가서 일 좀 해라. 그러면 또 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있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고 그것이 세상의 만물의 이치입니다. 있다가 없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없다가 있는 것 때문에 또 여기가 좋사오니 그러지 마시고.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좋은 여건을 가졌어도 다 이룬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실패자가 아니고 다 끝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이 크리스챤들이 갖는 위대한 승리의 비결입니다. 해야 될 역할이 바뀌었거나 할 때는 내가 이제 다른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주의 뜻이 있으시고 좀 더 하나님이 나와 같이 만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 앞에는 어떤 상황이 와도 실패하지 않습니다.
시23편은 노래하는 사람들이 그저 노래 한 곡 만드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은 항상 준비하며 사셔야 합니다. 어떤 때는 푸른 초장으로 갈 때도 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옵니다. 그러므로 준비하며 사셔야 합니다. 어려운 날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준비 없이 맞이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준비하며 삽시다. 그리고 그런 환경들이 결코 실패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광과 기업과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들입니다.
시23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생 여정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시고 푸른 초장에 있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든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모든 날들 속에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결코 나 떠나지 아니하고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진정한 목표가 되며 우리의 목적지인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라는 승리의 고백이 다윗의 고백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선시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 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은 가장 감미로운 시입니다. 시편 150편중에서 반지의 보석알과 같은 시가 있다면 바로 시편 23편이라 할 것입니다. 새가 공중을 날면서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듯 이 여섯 절의 짧은 시는 이 세상을 노래로 가득 차게 합니다. 시편 23편은 고난을 사라지게 하고, 슬픔에 잠긴 자들을 위로합니다. 감옥에 갇힌 자들을 불안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낙망한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병든 자에게는 새 힘을, 뼈아픈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과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청년에게 안식과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죽어 가는 군인들은 이 시를 들으며 평안히 눈을 감았고, 음침했던 병원은 이 시로 인해 빛으로 가득하게 되었으며, 옥에 갇힌 자들은 이 시를 읽고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노예된 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주인이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누렸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시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모든 시대의 모든 환경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최후의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시편 23편은 그 날개를 결코 접지 아니할 것입니다.”(헨리 워드 비처의 글 재편집, 스펄전 『시편 강해』에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시편 23편 6절에서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르리니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다프’라는 동사는 좇아오다 추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사울로부터 쫓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좇는 사울과 그 추격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망자는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뒤에서 누가 덮치지 않을까 항상 불안합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의 다윗의 고백은 어떠합니까? 자기를 따라오고 추격했던 것은 원수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자기를 뒤따르던 것은 적이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 대하여 선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를 말합니다. 선함은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가장 좋은 것을 주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심, 보시기에 좋게 하심의 뜻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좋은 일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일도 있고 우리가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실수와 잘못과 역경들을 합하여 그 결국이 좋게 되도록 만드십니다. 예수님에게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주님을 부활시키셨고, 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고백한 여호와의 선하심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에게 추격당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불안한 인생이요 곤고한 인생이라 여겼는데 결국 보니까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자기를 높이셨고 자기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다윗의 뒤를 쫓았던 것은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 선하심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일이 되도록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다윗은 이 여호와의 선하심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실수도 많이 하고 잘못도 많이 합니다. 또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실패했다는 판단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이런 소리들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내면의 소리라면 더욱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쫓기는 꿈을 꿀 때가 있습니다. 문제에 시달리고 일이 진척이 되지 않을 때, 나만 뒤쳐져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이런 쫓기는 꿈들을 꿉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를 쫓아왔던 것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라 고백합니다. ‘인자하심’은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무한한 자비하심, 용서하심, 이해하심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시편 103편 8절에서 11절까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8-11)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지 땅에서 저 높은 하늘을 가득 채울 만큼 그 인자하심이 크고 무궁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고 용서해주셨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 드리면서도 좀 염려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꼭 악인들이나 죄지은 자들이 더 잘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도 자기는 하나님에게 용서받았다고 하며 피해자 앞에서도 뻔뻔스럽게 행동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의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완전히 낙망하거나 패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뜻입니다. 자기 잘못을 교정해가면서도 자기 안에 있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잘못한 만큼 많이 아파하고 다시 일어나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런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끝났다고 하는 데 하나님은 아직 안 끝났다고 하십니다. 나는 부족하다고 자책하는데 너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격려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인자하심입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실패했을 때, 죄를 지어 의기소침 했을 때 자기를 격려하는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렘3:22)
여러분 뒤에는 누가 쫓아옵니까? 원수입니까? 으르렁 대는 사자입니까? 일거리입니까? 문제들입니까? 율법입니까? 정죄하는 자입니까? 다윗의 뒤에는 ‘정녕’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쫓아온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얼마나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평생을 악이나 문제나 심판에 쫓기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아는 즐거운 인생이 되십시오. 뒤에서 우리를 밀고 있는 것은 격려의 손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뒤에서 몰 때 그것은 필경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이거나 아니면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의 소원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그는 왕으로서 화려한 왕궁에 거하고, 상아로 만든 침상에서 자고, 온갖 진미를 먹을 수 있지만 그것이 더 이상 그의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잠자리는 불편하고, 먹는 것은 거칠지 모르지만 여호와 계신 집에서 자기는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기쁘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는 시편 84편 10절의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 참된 생명이 어디에 있는가, 참된 성공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시편 23편의 첫 절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했던 그는 이제 그 마지막도 여호와와 함께 영원히 거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물질이 아니라 지위가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할 때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목자를 떠나서 홀로 푸른 초장을 찾아 나선 양처럼 위험한 처지에 빠진 양도 없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결국 인생의 참된 행복과 성공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탕자는 돼지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탕자의 고백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 아버지 품에 있다는 것은 구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하고 더 풍요롭게 합니다. 홀로 있을 때는 문제와 원수들이 추격했지만 아버지의 품에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평안과 위로가 흘러넘칩니다.
천국이 좋은 이유는 그곳이 아픔도 병도 없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성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만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천국’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데 그 천국이라는 뜻이 ‘하늘에 있는 나라’란 뜻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높여서 하늘에 계신 분으로 불렀는데 그 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없는 천국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 곳은 지옥입니다. 예수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천국을 결정합니다.
믿는 자들은 죽으면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느냐고 물으면 자신이 없어 합니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만큼 선하게 살았는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천국은 그렇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저는 천국을 이렇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 동행의 연장선상에서 그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곳에 들어갈 확신이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확신입니다.
여러분의 애인이나 남편이나 아내가 먼 타국에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오라고. 그러면 여러분 확신을 가지고 가지 않겠습니까? 그 낯선 나라에서 저 사람이 정말 나를 받아 줄까하고 의심한다면 갈 수도 없고, 그것은 잘못된 사랑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많이 알아 가십시오. 그분과 많은 동행을 하십시오. 그런 분이라면 죽음 이후 천국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그분의 나의 손을 굳게 붙잡아 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분이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에서 우리를 맞으실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은 시편 23편의 이 마지막 구절을 되새기며 평안한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최근 한국교회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신성종 목사님의 ‘내가 본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분이 8일 동안 꿈과 환상으로 체험했던 지옥과 천국 이야기를 책으로 기록하고 또 간증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분의 간증 집회 동영상을 보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잘못하면 성도들을 이상한 방향으로 오도하겠다는 우려도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 분은 강양욱이라는 북한의 목사와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를 따라서 지옥과 천국 여행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분이 본 바로는 지옥은 상층 중층 하층의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국은 12개의 상급 반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각 층에는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들이 그들의 죄악과 믿음 정도에 따라서 고통이나 영화를 받거나 누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히틀러부터 테레사수녀 주기철 목사, 살인마 김대두까지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 중에 지옥에 간 분도 있고, 개척교회 목회자들 중에 천국의 높은 곳에 있는 분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 내용들이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저와 같이 작은 개척 교회를 하는 목회자에게 매우 마음에 드는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고통을 당한 수많은 목회자들은 3반열의 천국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1반열이 손양원 주기철 목사와 같은 순교자들이 가는 곳이니까 대단히 높은 천국입니다. 우리 밑에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가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개척교회를 다니면 협력한 집사들과 평신도들도 3반열의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휴 제가 어째서 이런 내용들을 설교 석상에서 언급해야 하는지 참 한심합니다. 한국교회는 누가 환상을 보았다든가 하면 너무 쉽게 넘어갑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이런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신성종 목사님의 간증을 너무 신뢰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환상 내용은 대부분 단테의 『신곡』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인도 단테의 『신곡』을 즐겨 읽었다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단테가 계시를 받아 쓴 것이 아니라 단지 신앙적 교훈을 위해 창작한 작품일 뿐입니다. 신 목사님의 간증은 단테의 『신곡』의 틀에 맞추어 지금 자신의 생각하고 있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과 구원관을 거기에 투영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신성종 목사 개인이 그리는 천국일 뿐이지 성서가 말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약한지 누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면 거기에 혹하고, 이상한 것을 본 자는 자기 사견인지 백일몽인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어디까지인지 구분을 못합니다. 그냥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즐기듯이 지나쳐야지 실제 거기에 언급된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의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자기 형제 다섯 명이 아직 살고 있는데 저 거지 나사로를 보내서 이 사실을 알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면 아마 그 다섯 형제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청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29, 31)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해도 잠깐 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잘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들어갑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8:35) 그러므로 더 이상 천국은 낯선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아버지 집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나왔던 본향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그것을 죽는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집이라 하였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예수님께서 아버지 집의 거처를 마련해 놓으시고 군불을 지피며 음식을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장례식에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께로 갑니다. 한신대에 구약학을 가르치시던 김정준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폐결핵으로 마지막 소천하시기 전에 지으셨던 “내가 죽는 날”이라는 제목의 시는 신앙인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에 이르니" 찬송을 불러주오
요한계시록 20장 이하를 끝까지 읽어주오.
그리고 나의 묘비에는 이것을 새겨주오.
‘임마누엘’ 단 한 마디만을....
내가 죽는 날은 비가와도 좋다.
그것은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는 감격의 눈물이기 까닭에.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 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긴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어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라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잘 보여줍니다. 죽음은 절망의 구렁텅이가 아니라 아버지 집으로 향하는 포근한 귀향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합니다. 이곳에서 주님과 동행한 적도 없이 죽어서 어떻게 낯선 그 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서 사랑해야 죽음 저 너머에 계신 분을 두려움 없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내가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로다 하였을 때 이 때 여호와의 집은 지상에 있는 성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집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집은 지금 이 땅에도 있습니다. 교회가 여호와의 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9)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 교회를 늘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것을 영원한 즐거움을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는 말은 여호와와 늘 함께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교회문을 나가면서 하나님을 이곳에 두고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모시고 여러분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잠잘 때나 일할 때나, 앉았을 때나 걸어갈 때나,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항상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이분으로 여러분의 즐거움을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