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그리움의 잠금해제, 가족애의 한도초과
에세이문예 가을를 읽고
권대근
Ⅰ.
시를 쓴다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제시되는 시적 세계는 이미지를 통해 구체적인 시적 정황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진술 역시 중요한 시적 언술이다. 하지만 시적 진술은 감각적인 묘사와의 호응을 통해 제시될 때 시적 언술로서의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할 여지가 많다. 시는 구체어를 통한 묘사다. 현대시는 중층묘사법을 통해 시의 옷을 입는다. 에세이문예 가을호에 실린 공광규, 김선아 시인의 시는 이런 시법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어서 시적 울림과 함께 공감을 자아낸다.
정이란 인간의 영혼이 응결된 심성의 꽃이다. 맑은 영혼을 드러내는 투박한 그릇이요, 풋풋한 향기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인간애, 그것이 없는 수필은 이미 수필이 아니다. 인간학의 명제에 바로 답하지 못하는 작품은 이미 문학으로서 실패한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도 가족과의 따스한 교감을 시의 소재로 더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삶의 현장에서 유난히도 사람을 사랑한다는 증거다. 이들은 시를 통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정임을 말하고 있는 휴머니스트 작가다. 시의 핵심은 원시의 정, 바로 인정의 향기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시에 있어서 향기는 매력적 요소다. 그 향기는 외부의 번득임이 아니라 내부의 번득임이다.
Ⅱ.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공광규, 김선아 두 시인은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정을 시라는 따스한 동네우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고 있는 사람이다. 오래 전부터 불심으로 세상의 그늘을 투시하는 자비심으로 오늘도 성실하게 자기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정진하는 구도자적인 분들이다. 이들의 시가 사물의 허상과 진상, 세계의 이편과 저편 사이를 탐색하는 인식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번 가을호 시는 자연의 빛깔과 인정의 향기가 서정이 되어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정감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과 인연의 소중함을, 그리움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창문 앞 푸른 감나무 잎은 햇살을 받아
빤득빤득 은빛으로 빛나고
베란다에 널린 희고 검고 파란 빨래는
햇볕에 바삭바삭 마른다
오늘은 반가운 딸이 오려나
까치가 미리 알고 감나무에 와서 운다
- 공광규의 <휴일>
눈물보다 끈적한 부정의 향기와 그리움의 미학이 펼쳐져 있는 시다. 그리움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시는 현대사회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이하여 파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움은 언어적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부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위치가 가장 확실한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의 부성 이데올로기는 가장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시적 화자는 딸을 둔 아버지로서의 전통적 지위와 역할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부성의 원리가 뜨겁게 솟구친다.
<휴일>라는 작품은 자식을 향한 시적 화자의 정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시다. 현대인들은 자식들에게 능력되면 대학까지 보내주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불편 없이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부모만이 베풀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시적 화자는 이런 진리를 작품을 통해 잘 보여준다. 휴일을 보내면서도 딸을 기다리며 행복해 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부성의 함이다. 아버지로서 딸과 오고가는 사랑의 화음을 들으면서 감동을 만끽한다. 까치소리 듣고 뭉클한 감동에 젖는 것은 그의 자식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시적 화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혈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내 일생 가장 쓸쓸한 날은
어버이 안 계시는 어버이날
좋아하는 바다도 비도
기다리던 바람의 향기도 눈부시지 않은
오늘은 마주 볼 수 없는 동공이 흐르는 날
그때 그 카네이션을 그대로 물려받으며
미처 헤아릴 줄 몰랐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 그 하얀 꽃이
잃고서야 만년설로 굳네
오늘은 내 일생 가득 핀 환상꽃이
가장 끈덕지게 달라붙는 날
맛있는 음식도 외출도 해맑은 웃음도
모두 놓을 수 없는 가장 가여운 날.
-김선아의 <어버이날>
시대가 지닌 특성은 그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주관한다. 이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인간의 가슴에 밝은 빛을 드리우기도 하고, 전혀 반대의 경우로 그늘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어버이날을 ‘오늘은 내 일생 가득 핀 환상꽃이/ 가장 끈덕지게 달라붙는 날’로 설정하고 그 위에 부모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따스한 애정의 체온이 그 위에 서려 번지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정제된 정신을 통해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만나고 있다. 상상력의 발원처가 고향이고 부모라는 것에 대한 단서를 이 작품은 보여준다. 귀소본능의 텃밭에 발아한 작가의 효심이 ‘내 일생 가장 쓸쓸한 날은/ 어버이 안 계시는 어버이날’이란 표현으로 잘 나타나 있다. 김선아 문학이 갖고 있는 하나의 특징은 전통적인 인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에는 체온이 살아 있고, 그 체온의 뿌리는 언제나 인륜이라는 것과 맞닿아 있다. 그녀의 글은 일차적으로 끈끈한 가족애에서 비롯되고 있다. 모든 것이 흐트러져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시대다. 그녀는 올곧은 정신으로 전통을 껴안는다. 어찌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겠는가. 애틋한 가족 사랑은 생활 속에서도 보여진다.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혈육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일상 속의 사실들이다. 가족간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버이날’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작품 속에는 카네이션이 나타나고, ‘하얀 꽃’과 ‘환상 꽃’의 대비를 통하여 생과 사를 의미화한 주제화 전략이 좋았다. 자신을 반성대 위에 세운 것도 독자와의 교감을 생명으로 하겠다는 차원에서 바람직했다. 작품 속에는 압축된 삶의 영혼이 서려 있다. 그 영혼을 만나기 위해 시적 화자는 일상 또는 상상 속에서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삶의 진경을 찾아 나선다. 바로 토포필리아의 구축이다. 자신이 발을 디뎠던 영역의 그 순수와 향기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한 것이리라.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따라서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줄 수 있는 따뜻한 둥지를 찾아 끝없는 방황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 둥지의 실체는 사람이다.
Ⅲ
무엇인가에 끌리거나 몰입하는 것은 둥지를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시인들이 이런 토포필리아적 정신을 고집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위의 두 시는 향토적 그리움이 녹아 있는 시다. 이미 제목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서정성이 매우 짙다.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로부터 나오는 정이 바탕이 되어 만물을 껴안는 서정의 힘이 공감을 견인한다. 인류사회는 궁극적으로 그리움을 바탕으로 서로 의지하는 생활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문학은 어떤 의미에서 일상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이 시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식물성적인 그리움이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시적 화자의 의지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어 감동을 준다. 그런 시적 화자의 마음을 잘 그려놓았다.
시 속의 ‘휴일’이나 ‘어버이날’에 가족 생각에 젖는 것은 건강한 생명에의 표식들로서 인간과 생명,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에로의 회향을 바라는 작가의 무의식에 내재한 꿈의 그림자 형상이라 하겠다. 낭만과 순수를 머금은 인연에 얽힌 따스한 이야기가 미적 울림통을 강하게 울려준다. 인위적이며 인공적인 구조물에 둘러싸여 사는 이 시대적 삶에 비켜서서 따뜻한 인연을 잊지 않고 지켜나가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그리움이 ‘혈연애’란 주제를 구축한 것은 아름다운 삶에 대한 경외이며 진정한 삶의 원형에 대한 희구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 시의 감상에 있어서 최고의 묘미는 한마디로 그리움에 대한 흔적 남기기라 할 수 있겠다. 문학의 존재가치는 삶의 흔적이고, 작가의 체온이 흔적으로 서려 있을 때 가치를 발한다. 잊을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표백이 녹아 있다.
“한 권의 장편소설을 여덟 줄의 시로 쓸 수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대로 시인은 우주의 섭리나 세상의 모든 것, 산수나 자연 그리고 정서나 사고의 세계까지 응축된 시형 속에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언어와 그 구조 속에 우주와 삼라만상을 응축해서 형태화할 수 있는 장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일상을 시 속에 응축하여 한국적 휴머니즘과 인원원리를 기초해서 그리움을 엮어냈다고 하겠다. ‘결핍의 시심’이야말로 이들 시의 본질을 추론해내는 근거라고 하겠다. 두 시는 한국적 전통과 한의 정서에 충실한 서정시를 지향하면서도 인연을 바탕으로 보편적이며 한국적인 인정을 생성해 내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이들의 시적 관심사는 빛과 어둠, 절망과 희망 등 삶의 근본적인 모순의 인식에 바탕을 두고 양자 간의 갈등을 넘어 원만하고 조화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이들의 서정시는 한국 순수시의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