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태(1936-2007)
김영태는 1936년 11월 22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1957년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1959년 홍대 재학 중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사상계』에 시 「시련의 사과나무」, 「설경」, 「꽃씨를 받아둔다」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한국외환은행 입사하여 조사부에서 일했다. 1992년 외환은행을 퇴사할 때까지 조사부에서 근무하며 은행 잡지와, 단행본, 각종 통계 자료를 만들었다.
생애 동안 18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1965년 첫 시집 『유태인이 사는 마을의 겨울』(중앙문화사)을 발간한 후, 1968년황동규, 마종기와의 3인 시집 『평균율1』, 1970년『바람이 센 날의 인상』(현대문학사), 1972년『평균율2』, 1975년『초개수첩』(현대문학사), 1978년『객초』(문예비평사), 1979년『간주곡』(문예비평사), 1981년『여울목 비오리』(문학과지성사), 1986년『결혼식과 장례식』(문학과지성사), 1989년『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민음사), 『매혹』(청하), 1993년『고래는 명상가』(민음사), 1994년『현대시 94』(문학세계사), 『침묵으로도 다하지 못하는 그리움』(양문각), 1995년『남몰래 흐르는 눈물』(문학과지성사), 1997년『하늘 바람꽃이 핀다』(양문각) 등을 간행했다.
관념적인 색채가 베어 있는 초기의 시에서 벗어나서 보다 예리한 감각의 시인으로 자리잡는다. 그의 시 는 소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r lv고, 색채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넓어진다. 이러한 놀라운 감각은 이미지의 대조와 그 구상력에 의해 시적인 형식성에 도달한다.
그는 화가로서, 개인전도 7회나 가졌다.
시인으로서의 활동 외에도 김영태는 무용평론가, 서양화가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1984년『객석』 무용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무용평론을 썼고, 동아무용콩크루 심사위원, 서울무용제 운영위원, 국립극장 발레단 무용자문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무용평론가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대학의 전공을 살려 7차례의 그림 전시를 갖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김영태의 시는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단편적인 인상과 상념들에 감각적 분위기와 표정을 부여하였으며, 독특한 심미안과 언어의 연금술로 시적 환상의 세계를 창출했다고 언급된다. 또한 『초개수첩』 이후에는 철저한 자기 축소의 극화를 보여주면서, 미완과 여백의 수법에 의한 현실과의 긴장관계라는 긍정의 범주로 순환하는 시세계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미의식의 측면에서 김영태의 시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사유는 “무(無)에 대한 인식”이며, “무에 대한 깨달음이 미에 대한 인식이고, 미에 대한 깨달음이 무라는 인식”을 보여 주었다고 평가된다.
몇 개의 정적
김영태
나는
정적이고 그 뒤에 있는
어떤 배경도 정적이다.
너의 몸의
일불분 미지수는 발견되었다.
밸견되어지는 것이 너에게는 크다란
충격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너의 정적이 어떻게
다른 정적으로
무너지고 있는가
풀잎처럼 들판으로 따라와서
떨기도 하는가
지금
너의 눈은 사소한 사물에 가서
닿아도 견디어 내지 못하고
지구력을 잃어버린다.
너의 눈빛이
어디서 지켜보고 있다.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너의 평면에 입체감을 그리고 있다.
너의 눈빛은 무용한 너의 말을
넘어서 온다.
김영태는 시적 감각의 구현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일상의 감각으로부터 벗어난 인식의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감각저인 것을 넘어서서 도달하는 본질적인 인식의 세계는 그가 꿈꾸는 자유의 공간이다.
그의 시집 객초(1978), 결혼식과 장례식(1986) 등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은 삶에 대한 내성적 성찰이 짙게 나타난다. 눈부신 감각의 언어에 뒤이어 관조의 언어가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기지에 찬 냉소적인 언어들을 현실을 향해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권영미의 ‘한국현대 문학사’ p 439)
첫댓글 수고가 많으십니다...
선생님 덕분에 좋은 시 잘 읽고 잘 느끼며...
시문학에 눈을 뜨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