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가 한국을 형제국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건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였던것 같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환단고기라는 판타지 소설책의 내용을 사실인양 홍보하던 붉은악마란 단체가 터키 응원을 주도하면서 퍼뜨렸던 것이 그 시작이었던 것 같네요.
당시 주위엔 중국, 일본, 북한 등 우리 역사에 아픔을 주었던 이웃들 뿐이었고, 가장 강력한 우방이라는 미국도 당시 벌어진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인해 반미감정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라 한국인들은 꽤나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마침 등장한 '터키가 한국을 피를 나눈 형제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는 그런 한국인들에게 아주 반갑게 다가왔을 겁니다. 가깝지는 않더라도 이 지구상에 한국을 지지해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소리니까요.
방송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퍼지게 된 이 이야기는 급기야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관중석에 대형 태극기와 아이일디즈(터키기)가 동시에 펼쳐지게 만들었고, 이는 경기를 시청한 터키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기에 이르렀죠. 그리고 그 덕분에 터키인들이 터키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었음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왜 터키가 우리를 형제국으로 생각하는가에 집중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형제가 아닌 칸가르데쉬, 즉 피를 나눈 형제로 생각하는지 말이죠. 6.25 전쟁때 터키가 미국에 이어 2번째 규모로 파병을 단행했던 것이 그 첫번째 이유로 꼽혔습니다. 15000명을 파병한 터키군에서는 3500명이나 되는 전사자가 발생했죠. 미군에 비하면 아주 적은 규모였다 해도 대단한 희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대체 왜 터키가 한국에 파병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나온 주장이 '원래 터키는 고구려 때부터 우리를 형제로 생각해왔고 그때문에 형제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파병을 하게 된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의 정통을 이어받은 국가를 남한으로 한정했다는 그 발상도 웃기지만, 아무튼 그 자세한 내용을 보면, 중국의 수당시절 고구려와 터키의 전신인 돌궐이 동맹을 맺고 중국에 대항을 했었고, 터키에서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자국의 역사교과서에서도 관련 내용을 교육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그럴듯한 내용은 순식간에 각종 게시판과 커뮤니티에 옮겨져 사실인 양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터키'하면 형제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2002년 월드컵 이후에 우리의 머리속에 떠오르긴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리어지는 이유는 무엇일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역사를 배웠다면 원래, 나라와 나라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우리나라의 중,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이러한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람들을 인터넷 곳곳에서 볼 수 있으며, 제 조카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다니는 중학교에서도 국사교사란 양반이 이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합니다.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말 고구려와 돌궐이 형제를 운운할 정도로 깊은 동맹관계였던 적이 있었는가? 과연 터키교과서에 그러한 내용이 기술되고 있는가? 제가 가진 역사지식 속에서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저는 관련 자료들을 뒤지며 역사를 다시 되짚어 보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그나마 찾아볼 수 있는 몇가지 기록을 살피며 내용을 정리해 봤습니다.
우선, 동로마제국의 역사가 Theophylactus Simocatta가 613년에 저술한 《Historiam》이란 역사서의 <VII. Origin of the Avars>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So, when the Avars had been defeated (for we are returning to the account), some of them made their escape to those who inhabit Taugast. Taugast is a famous city, which is a total of one thousand five hundred miles distant from those who are called Turks, and which borders on the Indians. The barbarians whose abode is near Taugast are a very brave and numerous nation, and without rival in size among the nations of the world. Others of the Avars, who declined to humbler fortune because of their defeat, came to those who are called Mucri; this nation is the closest neighbor to the men of Taugast; it has great might in battle both because of its daily practice of drill and because of endurance of spirit in danger. http://faction.co.kr/140095546231
여기서 일반적으로 Avars는 유연, Turks는 돌궐, Taugast는 북제(탁발선비), Mouxri는 고구려로 비정합니다. 돌궐은 시베리아에 있었던 고구려의 강력한 동맹 유연을 멸망시키며 등장한 유목국가였습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유연의 잔존 세력들은 돌궐에 쫓겨 북제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도 쫓겨 결국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합니다. 이 내용과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돌궐이 자신들의 적과 동맹이었던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고구려로서도 돌궐의 등장은 위협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기록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양원왕 7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가을 9월에 돌궐이 와서 신성을 에워 쌌다가 이기지 못하고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므로 왕이 장군 고흘을 시켜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대항하게 하여 이기고 적 1000여명을 살획하였다.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양원왕 7년은 A.D.551년으로, 552년 초 돌궐이 지금의 하북성 북단인 회황진 북쪽에서 유연을 격파하였으므로 551년에 돌궐이 신성까지 진출하긴 어려울 것이란 이의 제기를 할 수 있으나, <수서> 권84 돌궐전 문제 개황 2년(A.D.582)의 조서내용에 "왕년에 돌궐의 이계찰이 고려 말갈에 크게 격파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시기가 정확히 맞지 않더라도 돌궐의 동방진출 초기인 582년 이전 양자간에 어느정도의 충돌이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신라 진흥왕이 함흥까지 진출하는 상황에서도 고구려가 그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건 서북방의 돌궐이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겠죠.
또, 당시 고구려 주변국들의 동향을 살펴보아도 돌궐과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구당서> 권199 말갈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말갈은 무릇 수십 부로 나뉘어 있으며, 그 각각에 추수(酋帥)가 있어 혹은 고려에 복속하고 혹은 돌궐에 신속하였다. 其國凡爲數十部, 各有酋帥, 或附於高麗, 或臣於突厥.
기존에 대체로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있던 말갈의 일부 세력이 돌궐에 신속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돌궐의 영역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말갈은 속말말갈(후에 발해를 세운 말갈인 대조영의 출신부, 구당서 권 39 지리지 2 하북도 신주 및 여주조에 속말말갈을 부유말갈로도 적고 있고, 후에 속말말갈의 돌지계가 부여후로 책봉된 것으로 보아 속말말갈은 멸망한 부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임)로, 마침 돌궐이 실위에 지방관인 토둔을 두며 고구려 서북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6세기 후반 고구려를 자주 침공하기 시작합니다.(수서 권81 동이 말갈전)
속말부는 고려와 접하고 있으며, 승병이 수천이고 대부분 용맹하여 자주 고려에 침공하고 노략질하였다. 粟末部, 與高麗相接, 勝兵數千, 多驍武, 每寇高麗中
그런데 동시기 속말말갈은 돌궐과는 싸운 기록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속말말갈의 북쪽에 위치한 실위까지 남진한 돌궐에 속말말갈이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면 돌궐에 신속했다는 말갈(或臣於突厥)은 이 속말부가 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583년 돌궐이 양분되어 수에게 대파되는 시기, 속말말갈은 고구려에게 패해 돌지계 등이 속말말갈의 8부 승병 수천명을 이끌고 수에 내부하게 됩니다(태평환우기 권 71 하북도 연주조 인용 북번풍속기). 이는 속말말갈이 그간 돌궐의 후방지원에 힘입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해줍니다.
또한 547년 이후 물길의 퇴조와 함께 끊겼던 중국에 대한 조공이 563년부터 말갈이란 이름으로 다시 시작(위서, 북제서, 책부원구 조공문에 의해 노태돈이 작성한 표 참고)되는데요, 고구려사의 권위자 노태돈교수는 물길(勿吉)과 말갈(靺鞨)의 고음운이 똑같이 Mat-kat으로 같은 민족을 지칭한다고 해도 그 음사의 변동은 그 정치적 주체가 바뀐데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한다며 그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고구려와 극렬한 항쟁을 한 속말말갈로 꼽았습니다. 노교수의 주장이 맞다면 속말말갈이 조공을 하러 가기 위해선 고구려의 세력권인 요동을 거쳐 현재의 랴오닝성 차오양 지역인 유성에 진입하는것이 가장 빠르나 고구려가 이를 허락할리가 없고, 거란을 통과하자니 당시 속말말갈과 거란은 해마다 전투를 치루는 적대적 관계(其國西北與契丹相接, 每相劫掠, 수서 말갈전)에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거란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우회해 중국으로 들어가는 루트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곳은 돌궐의 영역이었으므로 돌궐을 우방으로 두지 않았다면 이를 이용하는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또 수서 거란전에 의하면 거란 역시도 고구려와 돌궐의 핍박을 받으며(當後魏時, 爲高麗所侵, 部落萬餘口求內附, 止于白比河. 其後爲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 각각에 차례로 복속되다 수가 강해지자 수에 내부하게 됩니다. 즉 고구려와 돌궐이 전쟁을 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두개 뿐이지만, 속말말갈과 거란의 당시 동향을 보았을때 양자는 계속해서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돌궐이 우호적이었던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구당서> 권75 위운기전과 <신당서> 권116 위운기전, <자치통감> 권180 수기 4 양제 대업 원년(A.D.605)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습니다.
거란이 영주지역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위운기에게 명을 내려 돌궐의 병사를 이끌고서 거란부락을 토벌하도록 보냈다. 돌궐의 계민가한이 병사 2만명을 동원했다. (중략) 운기가 거란의 경계에 들어갈 때에 돌궐의 병사 2만을 상인단으로 위장시켜 유성에서 고려와 교역하러 간다고 거란에게 속이고, 무리 가운데 수나라 사신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감히 말하는 자는 죽여버렸다. 거란이 방어를 하지 않았다.
거란이 동돌궐과 고구려 사이에 벌어진 2만명 규모의 교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도 이러한 교역이 몇차례 행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고구려와 돌궐 사이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죠.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인 607년, 수 양제는 동돌궐의 수장 계민가한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8년, 내용 길어 원문 생략). 두 나라의 연합 가능성에 격분한 양제는 고구려에게 위협을 가하고 결국 4년 후 고구려를 친다는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수 양제에게 고구려 사신이 와있다는 사실을 냅다 불어버릴 정도로 수에 지나치게 굴종적이었던 계민가한의 태도와, 돌궐이 고구려를 도운 흔적이 없는것을 볼때 돌궐과 고구려의 연합은 시도 단계에서 끝나버린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수가 내부분열을 일으켰을때 돌궐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강성해져 고구려따위(?)와 연합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곧이어 중국에 새로이 등장한 당 왕조에 굴복해 당의 고구려 원정에 다수의 돌궐인들이 동참(호쇼촤이담 퀼테긴비문)하게 됩니다.
즉, 고구려와 돌궐이 우호적, 혹은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였던 기간은 길어봤자 돌궐이 수에게 굴복하기 시작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의 20여년 뿐이었고, 이 기간 내에서도 동맹이라고 까지 불릴 만한 관계가 형성된 적은 없었다고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답변: 질문하신 내용과 유사한 질문을 저희 공관 홈페이지에 남기신 분이 있었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터키 교육부에 현재 사용중인 교과서를 요청, 확인해 본 결과, 고구려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형제의 나라라는 말도 당시에 쓰여졌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투르크가 돌궐의 다른 발음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만, 터키역사에서는 '굑 튜르크'로 알려진 국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터키인들은 터키를 튜르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튜르키예'라고 부르며, 튜르크는 터키인을 말합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고구려와의 동맹에 관련된 내용은 커녕 고구려 자체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들(물론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고 계신분들도 많지만)이 사실처럼 믿고 있었던 이야기가 완벽한 날조였던 것입니다.
사실 터키인들이 한국을 '피를 나눈 형제'로 부르게 된 배경에는 이슬람권 특유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슬람권인 터키인들에게 피를 나눈 형제, 즉 칸가르데쉬라는 표현은 굉장히 흔하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사람 뿐 아니라 자국의 이익과 관계되는 나라들에는 사이가 가깝고 멀고를 떠나서 모두 칸가르데쉬로 부른다고 합니다. 터키와 인접한 주변국들은 물론 유럽 국가, 중국 일본에게도 이러한 표현을 자주 씁니다. 터키는 한국전쟁에 참전했을때 미국 및 UN과의 관계에서 큰 실익을 보았습니다. 한국 역시 터키에게 이익을 주는 수많은 형제국중 하나인 칸가르데쉬 코리아가 된 것이죠.
몇달 전, 우리나라로 치면 파코즈하드웨어에 해당하는 터키의 컴퓨터 관련 커뮤니티 Donanim Haber에서 "터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형제국가는(En sevdiğiniz kardeş ulke hangisi)?" 이란 주제로 설문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그 중간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아래 링크 들어가시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으나 제가 이 글을 올린 후 한국인들의 투표가 이뤄지고 있다는 정황증거가 포착되었으니 참고하시길)
http://forum.donanimhaber.com/m_28302100/mpage_2/tm.htm
아제르바이잔, 파키스탄, 한국,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이탈리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기타의 항목중 한국은 14%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태극기보다 큰 대형 터키기를 흔들며 형제를 반겼던 한국인들에겐 굉장히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댓글들에 설문자가 제시한 항목에 불만을 표하며 일본, 쿠바, 핀란드, 폴란드, 노르웨이 등 수많은 나라들이 형제국으로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를 식민지배 했던 일본의 경우 수차례 언급되며 강한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한국이 14%나 차지하며 선전한 건, 월드컵때의 기억 때문일 겁니다. 결국 터키인들에게 한국은 고구려 돌궐 관계사와는 관계없이 그저 한국전쟁때 인연이 있었던 친근한 국가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터키와 한국이 돌궐과 고구려 때부터 혈맹국이었다는 날조문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작성했던 걸까요?
저는 사실 엉터리 선동문을 작성한 주인공보다, 날조된 내용에 감동받아 사실관계를 파악지도 않고 퍼다 나르기에 열심히였던 한국인들의 고질적 습성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산케이신문의 구로다 한국지부장이 "수십년동안 한국에 있어본 결과 알게 된 한국인들의 특징은 소문에 약하다는 것이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래서야 부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도 네이트나 아고라에 상주하는 네티즌들의 행태를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게시판과 댓글란엔 각종 음모론과 루머가 넘쳐나고 읽는 사람들은 먼저 의심하기 보단 고개를 끄덕이며 추천 버튼부터 닥치는대로 눌러댑니다. 2002년과 비교해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아요.
학생에게 먼저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고 가르쳐주는대로 머릿속에 넣어야 하는 주입식 교육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같은 대한민국의 멍청한(?) 상태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블로그 글이 한동안 업데이트 되지 못했는데, 내일부터 당분간 하루 꽉채워 출퇴근을 해야하기 때문에 업데이트가 더욱 어려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시간나는대로 틈틈이 여행과 역사, 대전에 관한 글들을 업데이트 하도록 할게요. 접속자가 많이 줄었는데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네요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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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미 올렸던 글인데 중복이네요.
저 번에도 올렸었는데 운영자 지**님에 의하여 삭제 당해서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히 1 주일만에.
그 당시의 게시 글 등록 시간에 거의 정확히 맞추어.
이 번에 제가 새로 다시 올린 것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5.27 01:49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5.27 01:54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5.27 01:5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5.27 01:5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5.27 01:57
http://blog.daum.net/chemi1st/6757682
잘못알고 계신 것 같은데 삭제되지 않았습니다. 한민족고대사 방에 247번글입니다.
답장-답답장들이 너무 많아져서
답장 위치와 답장 란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너무 불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로 이동하여 답장-답답장들을 이어 가겠습니다.
위 내용은.....맞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터키인들은 교과서로 한민족에 대해 배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고대역사적으로
터키인들이 한민족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면
그 또한 오류일 것입니다.
예컨데, 징기스칸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같은 유목민들인 몽골 민족들 사이에서도 서로 피비린내 나게
전쟁을 하며 살륙을 해댔다는 사실.
즉, 한민족, 몽골족, 돌궐족 등은 모두 유목민족들로서
같은 대초원 위에서 서로 세력다툼을 한 종족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민족적으로는 서로 방계 관계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의 터키인들이
그에 대해 학교 교육을 받든 못받든...
위 본문글의 주장을 잘못 확대해석하게 되면
자칫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피비린내 나게 싸웠으므로
고구려, 백제는 서로 이민족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 없는 오류가 되는 것이지요.
┗ 다문화타도 09:24
잘못알고 계신 것 같은데 삭제되지 않았습니다. 한민족고대사 방에 247번글입니다.
잘 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저의 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잘 못 말씀 하신 것 같은데.
“한민족고대사” 게시 판에 “247”번 글이 아니라
한민족고대사” 게시 판에 257번 글을 말씀 하시는 것 같습니다.
‘“<b>한민족고대사</b>” ‘|’ “한민족 관련 고대사 얘기들”’
‘“257” “한국과 터키가 형제국이라는 주장은 낭설에 불과 [18]” “다문화타도” “13.05.19” “939” “1”’
‘“246” “[불교에 의한 역사 왜곡] [13]” “아이호” “13.05.15” “561” “7”’
‘“247” “Re:[불교에 의한 역사 왜곡] [19]” “知天命” “13.05.15” “489” “4”’
http://cafe987.daum.net/_c21_/bbs_list?grpid=1MsBh&fldid=f8lD
link 1 줄만 달랑 (걸려 )있기 때문에
글 올린 이가
수고를 조금 한 대신에
글 읽는 이들이
읽으려면 click 해서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시간 낭비 등의 불편이 있고
원문이 삭제, 비공개, ...되면 (여기 정론직필 cafe에서는 )더 이상은 볼 수 없게 되는
다문화타도님의 “257” 번 글과
전문을 복사하기+붙여 넣기가 되도록 퍼 왔기 때문에
글 올린 이가
수고를 많이 한 대신에
글 읽는 이들이
읽으려면 바로 읽을 수 있는 편리함이 있고
원문이 삭제, 비공개, ...되어도 (여기 정론직필 cafe에서는 )볼 수 있게 되는
저의 글은
같은 글들로 (나쁘게 )보아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고,
다른 글들로 (좋게 )보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점들도 조금은 있지만,
다른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중복 게재라고 (저에게 불리하게 )보아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고,
중복 게재가 아니라고 (저에게 유리하게 )보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