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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ey carried the ark of God in a new cart out of the house of Abinadab: and Uzza and Ahio drave the cart. And David and all Israel played before God with all their might, and with singing, and with harps, and with psalteries, and with timbrels, and with cymbals, and with trumpets. And when they came unto the threshingfloor of Chidon, Uzza put forth his hand to hold the ark; for the oxen stumbled. And the anger of the LORD was kindled against Uzza, and he smote him, because he put his hand to the ark: and there he died before God. / So David did not take the ark with him to the city of David, but took it aside to the house of Obed-edom the Gittite. And the ark of God remained with the family of Obededom in his house three months. And the LORD blessed the house of Obededom, and all that he had.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니라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 메어들이지 못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1 Chronicles 13: 13,14
지금은 새벽 2시, 한 밤중에 묵상하며 성경을 읽다가 이거 너무하신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아 손으로 잡았더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분노하셔서 웃사의 생명을 거둬가셨다. 그순간 사랑의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고 온통 두려운 하나님으로 마음속이 가득차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두려워 하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 것을 중단한 이유를 알것 같다. 다윗은 얼마나 기대에 차있었을까?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수 있을 것이란 기대, 그로 인해 더욱 친밀하고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복을 대대에 받는 그런 기대 말이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었다. 웃사는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그토록 허무하게 죽었을까?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궁금했다. 영어 성경을 읽어보고 한글과 대조해 보며 묵상한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시길 원하시는가?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은 그랬다. 다윗의 절친인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과 함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리더를 잃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다윗에게 나아와 기름을 붓고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 사울이 전사한 이유는 그가 여호와께 범죄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여인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요나단이나 사울을 묵상하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렇게 한 가정이 무너졌다. 이를 통해 아버지의 역활을 다시한번 중요함을 묵상한다. 그러나 한 리더가 무너지면 또 다른 리더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음을 알수 있다. 그렇게 모든 족속이 다윗에게 나와 충성을 맹세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기쁨이 넘치는 시간을 갖았다. 모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되고 기뻐했던 시간이었다. 그후 다윗은 모든 천부장, 백부장등 지휘관들을 모으고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알렸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은 하나님으로 인한것이니 만일 모두가 기뻐하면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고 제안했다. 사울때에는 하나님의 궤 앞에서 우리가 묻지 않았는데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행하자 하고 건의하자 모두가 좋게 여겨 그리하기로 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의 궤는 기랏여림에 있었다. 그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레셋사람들과 싸우다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는데 당시는 왕이 없었고 사사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시대였다. 하나님의 궤가 빠앗겼던 '아벡 전투' 당시 전투를 총괄하는 이스라엘의 사사는 엘리 대제사장이였고 전투 현장의 지휘관은 엘리의 두아들 홉니 와 비느하스가 맡았었다. 그러나 성경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불리해지자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가 블레셋과의 전쟁을 이기려 했다. 한마디로 부적처럼 사용하려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보병 3만명이 죽고 하나님의 궤까지 빼앗기는 참패를 당했다. 리더의 범죄가 이렇게 무섭다. 엘리 대제사장은 영적이면서 정치적 최고 책임자였지만 영적으로 매우 둔감해 있었다. 아들들의 죄를 강력하게 치리하지 못했고 전투현장에도 나가지도 않고 자가 소파에 앉아 그저 전투 소식만 기다리고 있는 직무 유기상태였다. 전투가 패하고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이 들리자 엘리는 놀라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나이도 많았지만 식탐으로 몸은 비만덩어리였다. 그가 사사로 40년을 지냈는데 그의 종말이 비참했다.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는 차라리 블레셋의 포로가 될지언정 아버지의 거룩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어떠한 모습으로 모셔야 하는지를 '아벡 전투'가 명확히 제시해 주고 있다.
한편, 전쟁에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에벤에셀에서 빼앗아 아스돗까지 가지고 가서 자기들의 신 다곤 신전에 두었다. 그러나 다음날 다곤 신상이 엎어져 하나님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연인가 하고 다곤신상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이번에는 다곤 신상이 또 다시 엎드러져 있고 얼굴이 땅에 닿았는데 머리와 손 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둥이만 남을 것을 발견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궤를 보고 블레셋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그래서 아스돗에서 가드란 도시로 옮겨 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의 손이 큰 환란을 일으켜 성 모든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가 나게 하셨다. 그래서 다시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자 이러한 소식을 들은 에그론 사람들은 누굴 죽일 일있냐며 하나님의 궤가 자기들에게 오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결국 일곱달을 버티다가 블레셋 방백들은 회의를 열어 하나님의 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하나니님의 궤를 보낼 때 자기들 생각에 예의를 갖춘답시고 자기들이 거하는 다섯 도시 즉, 아스돗, 가사, 가드, 아스글론, 에글론을 위해 속건제물로 독한 금으로 만든 독종형상 다섯과 금 쥐 다섯마리를 만들었다. 그것과 함께 새수레를 만들어 멍에를 메지 않은 소 두 마리끌어 다가 하나님의 궤를 싣고 원래 있던 방향 벧세메스로 가면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런것이고 만일 다른 길로 가면 재앙이 우연히 온 것이라 생각하자 하고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어 보냈다. 이에 암소들은 곧바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원래 궤가 있던 방향인 벧세메스 길로 울면서 바로 갔다. 당시 벧세메스 사람들은 밀을 베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궤가 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암소들을 잡아 번제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이때 궤와 함께 온 금보물 상자들을 큰 돌 위에놓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지 않은 다른 형태의 번제를 드렸다. 또한 벧세메스 사람들은 호기심을 쫓아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다가 오만 칠천명이 죽는 재앙을 맞게 되었다. 그후 하나님의 궤는 이스라엘 깃랏여아림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졌고 아비나답은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했다. 그렇게 깃랏여아림에서 하나님의 궤는 20년이 그곳에서 머물게 된것이 본문의 배경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웃사는 어떻게 해야 죽지 않았을까? 여기서 죽목해야 할 것은 아비나답에게는 아들들이 웃사와 엘르아살, 아히오등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웃사와 아히오가 수레를 몰고 갔던 것이다. 아비나답의 집안은 20년동안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지켜온 집안이었다. 그들은 20년 이란 오랜 시간을 궤와 가깝게 지내서 궤를 모시는 데 익숙했지만 그 익숙함이 오히려 경솔함을 가져왔다. 그들은 궤를 들여다 보다 57000명이 죽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들이었다. 민수기 7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은 여호와의 궤를 옮길 때는 고핫자손이 수레가 아닌 어께에 메고 가라 명령하신 것을 알수있다. 그런데 다윗과 웃사는 블레셋 사람들이 하듯이 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싣고 갔던 것과 같은 즉,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편리함을 선택했다. 또한 민수기 4장 15절에 보면 고핫자손이라도 성물을 만지면 죽게 된다는 말씀이 있다. 다윗이 역대상 15장에 너희(레위인)가 메지 아니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찢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웃사는 아마 레위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인간의 편의성과 효율성을 우선시하느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효율이 아닌 거룩함과 순종이 우선되어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수레에 싣고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짐짝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그저 목적지까지 빨리 옮기면 그만이라는 결과중심적 사고가 그 이면에 작동하였음을 알수 있다. 반면 어께로 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편리함은 경솔함을 가져온다.
이를 좀 더 묵상해보면 요즘 다문화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문화적 수용(Contextualization)과 세속화(Secularization)의 경계선 위에서 자칫하면 편리함과 효율성만 따르다 경솔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기 쉬운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슬람권에 살면서 어디까지 이슬람을 문화라는 것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다윗과 웃사는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보낼 때 수레를 썼던 방식을 보고 그대로 따라 했다. 비판없이 이방종교를 수용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세상을 변화 시키려면 인간의 방식이 아닌 성령의 방식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효율이라는 우상(the idol of efficiency)를 따르는 것은 인간의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을 궤를 메고 발걸음으로 걷게 하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안에는 경영기법, 심리학적 위로, 마케팅, 정치수단을 끌어다가 활용해 양적 성장만 추구하고 있는, 일종의 기업 비지니스 같은 모습이 만연하고 있는 것 같아 두렵고 떨린다. 수레(세상방식)은 편하고 빠르지만 암소가 뛰듯이 통제불능의 순간을 만들 수 있다. 수레가 아닌 어께의 영성을 회복해야 함을 주님은 이 새벽에 말씀하신다. 심리학 대신 말씀의 검을 들고 경영기법대신 무릎꿇는 기도 최우선 전략, 마케팅대신 초대교회 성도들과 일제 시대 믿음의 선진들처럼 주님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는 삶을 살라 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 올때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며 기뻐했다. 아무리 화려한 예배 시스템, 웅장한 건물, 열광적인 찬양이 있어도 그 안에 하나님의 법(순종)이 없다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이 대목에서 참 두렵고 떨리며 회개한다. 진정 나는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효율성, 편리함의 계산기만 두두리며 결과에만 집착함으로 존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함을 훼손하고 있지는 않는가? 내게 하나님은 이용의 대상인가? 경외의 대상인가? 편리한 수레 신앙인가? 불편한 순종의 어께 신앙인가? 주님은 어께의 영성을 회복하라 말씀하신다. 웃사 처럼 익숙함에 빠져 내가 다 해봐서 알아 하며 하나님의 법을 간과하다가 위기의 순간에 본능에 따라 하나님의 궤를 만지는 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영혼아 하나님과 친밀하면서도 그분의 거룩함 앞에 겸손히 거룩한 거리감(Holy distance)를 지키는 것을 명심하자. 아버지 하나님은 친구같은 분이시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심판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시다.
에베소 교회가 처사랑을 버려 성령님께 책망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 웃사를 묵상하다 에베소교회를 보다니...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고 거짓 사도들을 드러냈고 게으르지 않고 인내하며 수고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신앙의 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시스템이나 업적 보다 비록 투박해도 하나님에 대한 떨리는 첫사랑으로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뜨겁지 못했다. 에베소 교회는 신학적 지식과 교리가 탁월했지만 이것이 상대방을 정죄하고 자신을 교만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성령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신다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익숙한 사역, 익숙한 말씀, 익숙한 임재에 빠져있다고 첫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궤를 어께에 메는 수고를 회피하고 편안함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거운 궤를 메고 한걸음 한걸음 황소처럼 늦더라도 뚜벅 뚜벅 주께서 주신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 펜데믹을 거치면서 쇼파에 기대거나 누워서 예배드리는 온라인 예배는 가장 편하게 하나님을 소비하는 어께의 예배가 아닌 수레의 예배였다. 거룩함의 경계선이 무너진 것이다. 내 삶의 주권자가 아니라 시간 되면 찾아오는 구독 서비스나 배달 콘텐츠 같은 하나님으로 전락시킨 죄를 회개한다. 웃사는 본능적인 선을 쫓았다. 궤를 보호하자는 그 본능 말이다. 의도 자체는 선한 것었다. 베드로도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께 이루어 지지 아니하리이다. 하며 본능을 쫓아 주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막아섰었다.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뭐 중요하냐 말하지만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기에 마음과 몸의 자세가 다 중요하다. 우리가 보기에 선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법 앞에 결코 앞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경배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본받고 싶다. 그들은 정해진 건물(교회당)없었다. 카타곰(지하무덤) 같은 장소의 불편함이 있었다. 눅눅하고 어두운 동굴, 모이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으나 그 곳은 세상에서 분리된 거룩한 구별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동트기 전 새벽이나 늦은 밤에 모였다. 발각되면 생명을 걸어야 하는 시간의 무거움을 느끼며 예배했다. 오늘 이 예배가 나의 마지막 예배가 될 수도 있는 간절과 절박함 이 예배속에 녹아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늘날 처럼 작은 빵 한 조각을 나누는 형식이 아니라 실제로 식사를 나누는 애찬을 시행했다. 그 속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구분없이 계급도 없이 형제 자매로 섞이는 연합(섞임)의 불편함을 체험했다. 자기 것을 자기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나누는 사랑을 실천하며 탐심을 내려놓는 베품의 무게를 어께에 메었다. 하나님은 불편함의 절차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심을 가르치셨다.
나의 묵상은 여기서 다시 본문 마지막에 나오는 오벳에돔을 묵상해 본다. 다윗이 두려움에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에 가져가기를 주저할 때 궤를 맡아 모신 사람이 가드 사람 에벳에돔이다. 웃사의 형제 엘르아살, 아히오가 아니었다. 그는 누구일까? 가드는 사실 이스라엘 도시가 아니라 블레셋 주요 도시중 하나다. 그가 비록 이방 출신이나 역대상 26장 4절에 보면 그는 고라 자손의 레위인 문지기임무를 수행했다. 다윗 왕조차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 하며 두려워하며 예루살렘으로들이기를 포기할 바로 그때에 그는 웃사의 비극을 눈앞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궤를 자기 집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쩌면 죽으면 죽으리나는 일생일대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배팅한 것과 같이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궤를 옮길 시 수레가 아닌 율법이 명하는 대로 어께에 메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궤를 자기 집에 모셨다는 것이다. 그는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꿰툻고 있었다. 웃사는 익숙한 물건으로 하나님의 궤를 대했지만 그는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대했다.
오벳에돔의 사람 됨됨이는 후에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옮겨질 때 자신도 따라가서 성막의 문지기가 되어 하나님의 궤 곁을 떠나지 않고 평생 곁에서 섬기길 워했던 것을 역대상 15장 24절을 통해서 알수 있다. 그는 중심이 옳곧은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역대상 15장 22절에 맛디디야와 엘리블레후와 믹네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과 아사시야는 수금을 타서 여덟째 음에 맞추어 인도하는 자요 라고 나옴에서 알수 있다. 오벳에돔, 그는 두려움을 경외함으로 바꾼 용기를 갖은 사람이었다. 모두가 하나님의 궤를 심판의 상자로 봤지만 그는 하나님의 임재로 봤다. 오벳에돔은 궤가 집에 머무는 3개월동안 한 한번의 실수도 없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켜냈다. 소파에 눕거나 기대어 쉬던 일상 공간을 하나님의 지성소로 바꾸어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오벳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삼하 6:11) 웃사의 '수레'를 치우고 오벳에돔의 '어깨'를 선택하기로 결단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을 궤짝이 아닌 살아계신 나의 왕으로 모시는 결단은 2026년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본질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