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제3 문학회의 동인이 된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0여년이 흘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제3은 내적충실과 자아혁신을 통해 참다운 인간성을 표출해 내는 순수한 문학 단체입니다.
고교 시절의 부푼 희망 아래 키워 온 꿈들을 모두 만족시켜 줄만한 큰 틀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3이라는 이름 아래에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되는 여러분의 모습과 멀기만 했던 詩와 인생을 알게되었을 때의 기쁨을 지금부터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여러분의 충실한 삶 속에서만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제3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작은 관심속에서 제3은 영원할 것이고 우리 또한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제 제3을 통해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어제까지는 나만의, 너만의 것이었다 할지라도 오늘부터는 우리들만의 제3이라는 것을 명심해, 포기하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는 제3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함을 소나무에 비유합니다. 우리들의 영원함은 제 3이라는 문학 단체 속에서 언제나 푸르를 것입니다. 영원한 제3의 존속과 발전을 위하여 우리들은 계속 노력할 것임을 다짐하며 자아혁신, 내적충실, 참다운 인간성 기르기에 노력합시다.
★☆ 제 3 문학동인회 일동 ☆★
제 3 문학동인회의 명칭은
제 3 문학동인회의 명칭은,
··· 제 3 인간형처럼 꿋꿋한 기상, 의연함이 깃든 문학회라는 뜻입니다.
··· 제 1의 탄생이 육체적인 탄생, 제 2의 탄생이 정신적인 탄생이라면 제 3은 전문적인 탄생이어야 합니다.
··· 제 3은 제 3의 문학적 탄생을 위한 동인회라는 뜻입니다.
··· 제 3 세계라는 말에서의 제 3이나 세 번째 연합문학 써클이라는
제 3의 해석은 원래 우리 동인회의 대한 정석 해석이 아닙니다.
제 3 문학동인회
발행일자 : 2000. 7
발 행 자 : 신입 회원 오리엔테이션 교재
편 집 부 : 제 3 문학동인회
★ 창립에 붙임
하늘에서 내린 비는 지상의 많은 지류를 거쳐 다시 하늘로 돌아갑니다.
이는 기존 단체에 대한 반항이나 거부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넓은 대지에 큰 강이 있어 충분한 물이 흐른다 해도 모두를 적셔 줄 수는 없으며 한 구석 외로이 지나가는 잡초들에게도 필요한 작은 지류가 불가결한 요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배후는 어떠한 사상을 내걸을 수 있습니다. 다만 공통 분모가 있다면 그것은 순수라는 뿌리일 것입니다.
우리는 문인이기 보다 인간이고 싶은 욕망을 내재합니다. 문학은 인간이라는 근엄한 바탕 위에서 이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상이나 존재를 내세우기 보다 배우기에 힘쓰며 외적 활동보다 내적 충실에 힘을 기울입니다. 절대 자만하지 않는 인간으로 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흘러가길 희망합니다.
사랑스러운 우리 제 3은 이제 씨앗을 흙 속에 묻었습니다.
제 3은 젊으며 힘찬 고동이 남아 있습니다. 시작은 불완전한 자세이지만 힘차게 흘러갑니다.
이 지류가 하늘과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작은 몸짓은 영원히 간직 되리라 기원합니다.
각자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부분 문학에 관심을 갖고 창작의 시험을 거치는 때가 바로 고등학교 시절이 아닌가 한다.
이런 중요한 때에 문학을 공부하고 작품을 토론하며 창작하는 문학회는 회원 모두가 창작가는 아니된다 하더라도 독자로 남아 지켜 볼 것이요, 문학을 통해 삶의 자세를 배울 것이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내가 이재인 선생을 만난 건 1981년 5월 9일 시내 샘터 서림에서 였다. 이 때 문학회의 조직에 뜻을 같이 하고 조직의 역할은 필자가, 그 지원은 이재인 선생이 맡기로 하고 조직 작업에 들어갔다. 이재인 선생은 윤지용선생(당시 문인 협회 충북지구 사무국장)을 소개해 주어 창립 지도 교사로 두 분을 모시게 된 것이다. 필자는 같은 사계 동인인 남중희 회원과 안면이 있던 연송이 회원과 같은 백합 문예부인 진주 회원을 추천하고 윤지용 선생은 최병주, 한광현, 이정숙, 한희옥 회원을 추천하고 이재인 선생이 황창순 회원을 추천하여 창립 회원이 모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81년 6월 7일 청주 여고 연못가에서 지도 교사 두 분과 함께 창립 회의를 가졌다. 회의는 설립 취지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맺었고 장소와 명칭은 미해결이었다. 6월 21일 청주 대학에서 두 번째 모임으로 독서 토론을 가졌고 지범식 회원의 발의로 '제 3 문학동인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이어 우리는 모임을 계속했다. 7월 5일 청대에서 독서 토론을 가졌고, 7월 19일에는 서남 교회를 집회 요지로 결정했다. 이 때 필자는 입시 준비로 연송이 회원에게 회장을 인수했다. 7월 27일 속리산 야유회를 다녀왔고, 이 해 말까지 순항이었다. 회원의 보강은 계속되었고 지도 교사도 계속 추대했다. 10월부터는 최병주 회원이 회장의 일을 보았다. 이 해 마지막 12일 20일은 이재인 선생님 댁에서 전태의 선생님의 시조 강의를 들었다. 이 때 발행된 제 3 화보는 뒤의 혼란으로 계속되지 못했지만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82년 초부터 시련의 시작이었다. 회원의 참가율고 좋지 않고, 지도 교사도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2월 29일에 회장을 황창순 동인이 인수하면서 대대적인 회원 개별 작업을 벌이며 새롭게 시작하였다.
3월부터 대다수 회원의 참여와 의지가 가득했고, 4월 4일 단국대 답사는 완전한 성황이었다. 거의 전원 참석과 이재인, 김효동, 박회, 반숙자, 윤송연, 정연덕 선생의 동행과 창립 1주년 기념 패난록까지 작성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활발한 움직임은 오래가지 못하고 지금까지의 역사 중에서 제일 위험한 파도가 밀어 닥쳤다. '제 3'이라는 명칭에 관한 시비였다. 10.26사태 이후 혼란된 사회 환경과 지도 교사의 강력한 압력이었다. 그리하여 '나림'으로 개칭되었고, 필자는 이 때부터 9월까지 '나림'에 관계를 끊다시피 했고, 이 때부터 남중희 회원은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6월 6일에 창립 1주년을 기념으로 음성 반숙자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깨끗한 선생님의 생활 자세를 배우며 하루를 보냈다. 모임은 계속되어 6월 20일 전태익 선생의 시조 강의, 작품 토론 등이 계속되었다. 필자는 8월 1일 모임에서 제 3환원을 주장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9월 12일을 기점으로 하여 이재인 선생의 무관심이 시작되었고, 이 때부터 필자는 나림에 관여하게 되었다.
9월 26일 단재 신채호 사당은 답사했고, 즉석 백일장도 개회하였다. 이 때 시화전이 계획되었다. 10월 시화전의 준비가 시작되었고 필자가 쓴 '시창작의 실체'가 간행되고 강의되었다. 12월 10~12일 제2회 시화전이 문화원에서 열렸다. 시화전은 성대하게 열렸으나 활동은 또다시 난항을 거듭하였다. 2기가 배출되면서 문학회는 완전한 해제가 되는 듯 했다. 이 때에는 중 3때부터 준회원으로 활약하던 정중환 회원이 나림을 인수받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박상용 회원과 함께 83년 제 3창립 2주년을 맞으며 대대적인 수습 작업을 벌였다. 우선 지도 교사의 압력에 의한 명칭 개조를 과감히 제 3 문학동인회로 환원하고 한편으로는 많은 도움을 주지만 장애가 되기도 하는 지도 교사를 1년 단위로 위축하기로 하여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이 후 정중용 회원과 박상용 회원의 노력으로 84년 현재의 제 3 문학회가 존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번영과 위기를 맞으며 제 3동인은 항상 발전의 방향을 지향했다. 외부 자체는 상당히 많은 변천을 겪었지만 참여했던 동인들은 각자 자기 출신 학교 문학회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활동했고 열심히 노력하는 제 3인이었다. 각자 개인은 노력하는 자세로 살았다.
현재의 신입 회원들도 제 3동인의 노력을 배워서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 추가기록 : 김영헌
83년 10월 30일 제 2차 신채호 영전을 답사, 임근수 선배님의 도움으로 단재 선생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후 정중환 회원을 중심으로 전 회원들의 적극적인 열의에 의하여 서로 아끼며 공부하는 문학회로 이끌어 갔다. 12월로 예정되었던 두 번째 시화전이 2월로 연기됨에 따라 그 공백으로 자체 문집을 발간하였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84년 1월부터 본격적인 시전 준비를 했고 회원 수가 적었던 면과 기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동인회는 또 한번 진통을 겪어야 했으나 선배님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하고야 말겠다는 회원들의 굳은 의지로 드디어 2월 24일부터 3일간 역사적인 시화전을 개최하였다.
시전 개최로 명예 회원과 현회원과의 화합을 더욱 공고히 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사실들을 경험으로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3월이 되면서 학년이 바뀌고 회장을 신진영 회원에게 인계, 제 3의 재도약을 다짐하였다.
4월 1일 문집을 계간 발행 건과 더불어 커리클럽의 모든 계획을 수집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의 앞날은 밝을 것이며
영예로운 제 3임을 확신합니다.
85년 신입생 환영회를 겸해 충주 탄금대로 야유회를 다녀왔다. 임근수 선배님의 문학 일반론 강의를 겸한 이 야유회에서 동인들은 제 3의 밝은 미래를 기약했다.
그 후 WK여진 커리클럽에 맞추어 모임을 이끌어 나아가며 좀 더 나은 제 3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문집 발간이 이루어졌고 문학의 다방면에 대한 토의도 계속되었다. 모임이 점점 진행되면서 제 3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했고, 회장직이 구자철 회원에게로 인계되는 과정에 있어 한동안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10월 신채호 영전을 답사하면서 동인 모두는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이번 답사에서는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많은 것을 공부하고, 백일장도 개최하는 등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해가 바뀌어 2월이 되어 제 3의 가장 큰 행사인 제 3시전이 개최되었다. 2월 28일부터 3일간 문화원에서 개최된 이번 시전에서 명예회원과 현 회원이 한 자리에 모여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새 학기를 들어가면서 박태순 회원이 회장직을 인계받으며 보다 나은 제 3을 만들 것을 다짐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85, 밝은 미래를 위하여
★ 추가기록 : 8기 신학수
(1986 ∼ 1988)
86년 봄에 회장이 인수되고 이상현(청석 <들> 6기)이 회장을 맡았다.
이상현은 마치 톰소여나 허클베리핀, 랭보와 로뜨레아옹, 제임스딘을 섞어 놓은 것 같은 인물이었다. 무척 미남이고 낭만파이고 詩를 좋아했으며, 거기다가 싸움까지 잘 했다. 청석고의 김흥채 교장의 암제에 이런 사람이 견디기는 너무 힘들어서 이상현은 더 이상 학교에서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자퇴를 했으며 이후에 방랑 생활과 연극, 술, 영화 등 그야말로 막가는 (어른들의 눈으로) 생활을 했다. 공부를 해서 경희대 철학과에 들어갔는데 대개 90년경부터 소식이 끊겼다. 지금은 연극을 한다는데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구심점이 없는 모임은 고 2, 3 (6기, 7기)들이 주축이 되어 끌어 나갔고 김철, 박은정 등이 入會함으로써 5인방 시대가 열렸다. 7기는 모두 서로간에 연애적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까 할만큼 서로간의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신입 회원 모집은 무척 어려워서 2학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8기가 들어왔다. 86년 가을 정충환 선배를 모시고 정철 사당에 다녀왔다. 원래는 신채호 사당行이 목적이었는데 엉뚱하게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문백에 선 것이다. 즐거운 모임이었고 7기들은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버스 정류장까지 왔는데 그 시대다운 풍속도라 할까나?
겨울에 접어들어 8기들이 많아지고 상반기에 많아야 일곱 여덟이던 출석자 수가 20명 이상 모이는 등 모임이 크게 양적인 성장을 거두었다. 수가 많아지면서 시전 준비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정충환, 김민형 선배 등의 도움으로 시전이 계획, 준비되었다. 시전 장소는 제 3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문화원을 벗어났는데, <조각 공원>이라는 경양식집/커피숍이었다. 지금은 물론 상호가 바뀌었는데 남궁 병원 뒤에 있다. 원래 우리는 커피숍을 시전 장소로 쓰는 것을 마땅찮게 생각했으나 선배가 나이와 경륜으로 밀어붙이는데 별 수가 없었다. 시간은 언제나처럼 2月末이었는데 시전 기간을 일주일로 잡았다. 2월에 <말토세>라는 빵집에서 모임을 갖고 시전 최종 준비를 했다. 임대료가 없었으므로 재정에 조금 여유가 생겼는데 결국 자장면 값 밖에는 안되었다. 2월의 마지막 주에 우리는 시전을 개최했다. 그러나 결과가 썩 좋지는 않았다. 우선 시전 장소가 야외였다. 2月末에 야외에서 모인 우리들은 너무 추워서 계속 체조를 하면서 사람들을 맞았다. 다른 문학 단체들은 처음 듣는 장소에 지레짐작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7기와 8기는 그야말로 생고생을 하면서 일주일을 개겼다.
시전이 끝나기 직전 8기들은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순진한, 아니 순진했던 8기들은 술을 통 마시지 않으려 해서 사실 강요 반으로 취하도록 마시게 되었다. 당시에 가장 많이 마시고 취한 사람이 신학수였는데 그것 하나로 8기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모두가 이적 거릴 때 용감하게 술을 마심으로써 회장이 됐으니 회장이 되고 싶은 사람은 기억하길 바란다.
시전의 평가가 끝나고 8기들은 한 번 더 모여 앞으로의 일을 준비했다. 어떤식으로 모임을 끌어가야 하는지, 독서 토론에 관한 얘기가 나오고 새롭게 3학년이 된 8기들은 의욕에 차 있었다. 당시에 8기에는 지금보다 수가 적었다. 봄에 신현섭과 조용덕이, 여름에 남수남이 들어와서 8기는 쪽수로 밀어붙이는 8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때가 87년이었다. 맨 처음에는 4기인 정충환 선배가 모임을 지도했는데, 4월이 되면서 4기 박상용 선배 (신흥<사계>)가 모임을 맡았다. 박선배는 군대 가기 전의 짧은 기간동안 참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박선배 밑에서 본격적으로 독서 토론을 실시했다. 그 때 읽을 책이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것을 보면, 우리도 참 열심히 준비했고 선배도 참 열심히 가르쳤다는 생각이 든다.
모임은 박선배의 주도하에 잘 이끌어 졌고 신입생 환영회가 실시되었다. 마침 내린 비로 우리는 천만호의 집에 모여서 결국 그곳에서 환영회를 열었다. 당시 내리던 비가 너무도 원망스러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8기는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여름에 박선배가 軍에 입대하고 난 후 그전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9기 모집이 참 어려웠다. 원래 제 3에는 청여고 출신이 상당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전혀 없었다. 우리는 그래서 어떻게 하나라도 스카웃 할까 무진 노력을 기울였는데 끝내 소득이 없었다. 당시에는 제 3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대개 '술 잘 마시는 곳', '이상한 시 쓰는 곳' 정도로 인식돼 있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1학년 초에 푸른문에도 나갔는데 그 곳 분위기는 선배가 거의 나와 주지 않고, 술 마시는 일도 없으며, 여학생이 훨씬 많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半돛대기 시장 분위기였다. 30∼40명이 모이는데 詩 한편을 합평회하면 너도나도 한마디하려는 통에 오락가락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지금이야 거의 10년이 지났지만 그런게 더 좋다면 언제든 가도 좋다. 어쨌거나 당시 파벌은 청주 - 충북 - 청주여 - 중앙여 (푸른문), 운호 - 신흥 - 대성여 - 청주여 (제 3), 독서회는 종합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였는데 지금하고는 상당히 달랐던 것 같다.
결국 9기의 숫자가 너무 적었고 해서 우리가 선배한테 받은 것을 후배한테 주지 못한 것이 우리가 가장 크게 자책하는 점이다. 88년 초의 시전은 우리의 주도하에 이루어 졌다. 이상현 선배가 다시 나와서 우리를 도왔고 6, 7, 8기들의 역량으로 시전을 치렀다. 당시 청주 문학계에는 문학에 미친 애들이 참 많아서 합평회 열기는 참 뜨거웠고, 출품되는 시의 수준도 높고 실험적인 것들이 많았다. 무사히 시전을 치르고 나서 9기의 이영규가 회장을 맡았다.
한가지. 그 때쯤, 즉 시전때 쯤 2학년 때 모임에서 빠진 그러니깐 前회원이 나왔다. 서로 인사를 하고 이야기 없이 모임에 빠진 까닭을 물어 보니까 공부하려고 모임을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곧 고 3이니 나도 모임에 나오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충고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친구는 충북대에 들어갔다. 공부에 전념하고 文學會를 빠져서 하버드 쯤 가는 줄 알았더니 ······ 文學會를 한다고 공부를 안한다면 이것은 자기 의무를 버리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공부하기 위해서 文學會를 빠진다는 말은 제발 하지 않기를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文學이나 공부나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반성해 보자. 과연 그런 말할 자격이 있는가?
이영규 회장은 무척 열심히였다. 그러나 고 2때 활동으로 생간 피로와 고 3 초의 압박감으로 8기가 일시에 빠지자 9기는 참 힘든 것이 많아졌다. 마침 특별히 지도해 줄 선배도 없었다. 이 상태는 그 해 봄 내내 그러하다가 여름이 되고 6기 김민형 (청석<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모임에 계속 나오는 9기는 셋 뿐이어서 선배에 치이고 후배에 치여서 9기는 참 어렵게 생활했다. 제 3은 5기까지는 거의 모두 재수도 하지 않고 대화에 들어갔다가 6기부터는 성향이 바뀌었다. 대학을 가도 재수를 하는 일이 많았고 또 하나 특징은 방위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현역을 마친 사람이 한 기수에서 둘 넘는 법이 별로 없었다. 방위야 일요일이면 쉬니까 그전과 같이 입대로 인한 단절이 없어서 어떤 연속성이 확보되었다. 그래서 김민형 선배도 제 3지도를 상당 기간 할 수 있었고 장태동 선배나 신현섭 등도 계속 제 3에 나올 수 있어서 제 3으로서는 다행한 일이 되었다.
88년 김민형 선배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 독서 토론을 개최하였고 문집을 내는 등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시전은 김민형 선배의 주도하에 순조롭게 개최되었고, 당시 졸업생들은 푸른문, 사계와 함께 처음으로 총 모임을 가지고 다과회를 가졌다. 총 모임은 그 후 이어지지 못하였으나 후배들이 참고할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시전이 끝나고 10기가 제 3의 중심이 되면서 제 3모임은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위한 도약을 준비하였다.
1995. 6. 12.
신학수
★ 추가기록 : 15기 조용범
- 기록에 앞서
필자는 괴롭다!
한 모임에서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영광일 수도 있으나 고통일 수도 있다. 필자인 나는 93년도에 제 3에 들어와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기록기간은 89년∼97년 6월까지이니 말이다. 문제는 89년∼93년 초까지가 문제라면 문제다. 우선 기록이 미비하고 선배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고고학자나 점쟁이 노릇이나 해야지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기록 미비문제는 불거져 나왔고 그 방법으로 주최 기수 회장이 매년 연말에 기록하자는 말은 나왔으나 말은 말로 끝났다. 어쨌든 나에게 주어진 이 일을 쓰는데 있어 기록의 객관성의 문제가 있고 서술 방식의 문제에 붕착하게 된다. 이를 위해 93년∼97년 6월까지는 필자인 나도 참석하였기에 좀 더 내실 있는 기록이 될 것이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작년까지 81년∼88년 그 까마득한 상고 시절의 역사를 가지고 신입생 환영회를 개최했으니 말이다. 서술방식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연도 중심(=기수 중심) 그리고 인물 중심(=회장 중심, 기수 동인 중심, 선배 중심)이 있는데 어느 한가지만을 선택해서 할 수 없는 노릇이니 진실을 왜곡할 수도 있는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에 탄력적으로 대응 대처하기로 한다.
제3의 딜레마
① 좀 더 낳은 제 3
② 문학의 다방면에 대한 토의
③ 어려움 붕착과 불안정한 상태 지속
④ 새로운 분위기 조성
⑤ 동인간 유대
⑥ 제 3 타임
▣ 1989년 ∼1993년 초까지
제 3의 역사를 역사 교과서의 방식대로 구분한다면 89년부터 91년까지 중세에 비유되는 암흑기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기록, 집회록이라고는 쓰여지지 않았고 선배님들은 계셔도 마치 산 속의 산신령 같이 베일에 쌓여 있으나 말이다. 남아 있는 것으로는 한 권의 신입생 환영회 교재와 시전 문집이 다 일뿐이다.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제 3선배들의 최대 약점인 술 한잔만 대접하면 하룻밤이 새지는 않을까? 89년 6월 6일 현충일에 제 3 창립 기념과 더불어 진천 길상사에서 강성수(10기) 회장의 주도하에 신입생 환영회가 개최되었다. 그 후 충대에서 시 합평회 및 모임이 지속되었으며 그 시대의 한 조류였던 집단 창작시 및 왕종훈(10기)·주현(10기) 동인의 공동 창작 시인 '진달래'가 합평회에서 선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역사시 또한 많이 쓰여졌다. 7월쯤에는 그동안 별로 왕래가 없었던 금천고에서 그 당시 2학년이었던 오세견 동인이 입회하여 활기찬 분위기를 맞이하였다. 합평회 외에 주제토론과 독서 토론도 행해졌으며 그 당시 주제 토론의 주제로는 '친일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건전한 순수시의 의미, 상업주의 문학과 대중문화와의 관계' 등을 심각하게 고민하였으며 문예사조에 관하여도 학습을 하였다. 독서 토론은 윤정모, 박완서 등의 작품으로 토론을 개최하였다. 그 당시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서 동인들은 얼마나 논의가 치열했던지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성숙해 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모임은 탄력적으로 운영이 되었다.
그 다음해인 90년에는 절망과 시련과 투쟁의 80년을 저버리고 새로운 대망의 90년을 맞아 11기가 주최가 되어 제3을 이끌어 갔다. 회장은 이석주(11기) 동인이 되었다. 그 당시 회원으로는 박청, 홍은희, 조은정, 김철, 양승부 등이 있었으며 저마다 제3과 자신의 내적 수양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필자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에피소드나 행사 합평회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해당 기수 동인에게 물어 볼 수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91년에는 동인의 수가 무척이나 많았다. 선배들은 내부분열 등 여러 소란 등을 걱정했으나 한봉희(사계) 동인이 되어 서로 똘똘 뭉쳤으며 서로간 우애도 깊었다. 91년 7월 21일 단재 신채호 사당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이날은 날씨가 흐리고 비도 내렸다. 그래서 처마 밑에서 돗자리를 뒤집어쓰고 합평회를 하였다. 이날 후배는 단 둘 뿐이어서 13기에 최영오(들), 김태수(사계) 동인이 아주 앳된 얼굴로 재롱을 떨었으며 신입생 환영회가 아니라 선배들의 동문 잔치의 성격을 띄는 듯이 아주 화기애애했다. 8월말에는 왕종훈(10기) 선배의 지도 아래 '비평에 관하여'라는 주제를 갖고 학습과 토론을 개최하였으며 제3 사상 최초로 출석부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8기 신학수 선배님은 후배들을 위해서 책을 한 보따리나 갖고 출현 심히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책을 제때 돌려준 후배는 얼마 없었다는 후문이다. 91년 12월 8일 이날은 날씨가 추운 가운데에서도 아름다운 셍덱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를 가지고 독서토론을 개최, 작자에 대해, 친구의 의미와 현실 세계, 꿈 등의 소기의 성과는 있었으나 날씨가 추워서인지 몰라도 깊이 있는 내용 파악까지는 역부족이었다는 말이 있었다. 92년 1월 5일 시전에 앞서 동인들의 통일된 의식 고양 극기, 스트레스 해소 차원으로 속리산 등반을 갖다 오게 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왠 눈이 그리도 많이 왔는지 동인들은 서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서로가 서로를 꼭잡고 산을 올랐으나 혼자 넘어질걸 모두가 넘어지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배울 것도 많았다. 서로의 우정과 시전에 대한 공동 작업등 자연스럽게 평소에 소홀했던 동인까지도 하나가 되어 나뭇가지마다 맺힌 고드름처럼 투명한 빛이 되어 동인들은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13기의 참여가 부족했다는 점에서 12기 동네 잔치는 아니었는가라는 문제 제기도 없지 않아 있던 것은 사실이다. 이제 드디어 제3의 한해 풍미를 장식하는 시전이 92년 2월 열 번째 제3시전이 청주 문화원에서 개최되었다. 다음 회장으로는 그 당시 제3의 모범생이었던 성실성의 상징 김태수(사계)동인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당시 회장 선출은 요즘의 대통령 선거처럼 아주 치열했다고 한다.
92년 6월 21일 진천 길상사에 신입생 환영회가 개최되었으며 백일장과 합평회도 열리었다. 모임은 계속되어 여름으로 접어들어 제3사상 처음으로 여름 수련회가 8월 16일 화양동 송면에서 열려 견문을 넓히고 동인 의식을 두텁게 하였다. 그 후 충대에서 모임을 갖고 합평회와 선배들의 경험, 시학, 그리고 나름대로의 철학 등을 경청하면서 어느덧 모임은 겨울로 접어들어 93년 2월 20일∼2월 22일까지 제3 열 한 번째 시전이 개최되었으며 다음 회장으로는 오랜만에 여자동인인 김현태(등나무) 동인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선배들은 모임이 잘 안될 경우 그 대책으로 동기끼리의 여행, 비정기 모임 개최, 단합 대회, 편지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해결하려 노력했다. 지금의 동인 의식, 전통은 이때 토대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 시를 또는 책을, 세상을, 선배를, 동기를, 모임을 통해서 꿈을 확고히 다져갔다. 이 당시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6.29선언, 노사 분규, 시위 대학생의 죽음 등 민족 문학이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3의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면 바로 방위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 93년 초∼97년 6월
93년은 14기가 주최 기수였다. 우리 제3은 타 문학회와는 조금 성격이 다른 면이 있는데 이를 하나의 낱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민족 문학 계열이었다. 그리고 철저히 생활에서 소재를 찾고 자아 혁신하는 자세를 개인적으로 갖고 모임에 임했다. 이 전통은 6기 김민형 선배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이 때도 이 전통은 이어져 93년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때 우리를 지도한 선배들은 앞서 말한 김민형(6기) 선배 외에 장태동(7기), 권일문(8기), 남수남(8기), 신현섭(8기), 주현(10기), 양승부(11기), 박호재(12기), 김영범(12기), 한봉희(12기) 선배님 등 그밖에 많은 선배들이 있었다. 그 당시 모임 운영에 있어 선배 구조는 11기 이상 선배님의 지도 아래 12,13기가 주최 기수 14기에게 매개 중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여선배님들은 물밑으로 우리를 지원하던 구조였다. 이 구조는 93년을 정점으로 해서 94년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95년 즉 16기가 모임을 주도하는 해, 이 구조가 이 선배님들의 대학졸업, 취업, 군입대 등의 기타 여러 이유로 거의 무너지고 그 명맥만이 이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안 그래도 동인 수가 적은 16기는 매우 불안해하였다. 그러나 예상보다는 잘 모임을 이끌어 갔다. 문제는 17기 조도의 해인 96년 그나마 남아 있던 그 명맥마저도 박호재 선배를 제외하고 모두 일선에서 물러나시게 되었다. 그 자리를 신학수(8기), 조용덕(8기), 필자, 정일국(15기), 홍석현(15기) 동인이 메우게 되었고 후배들에게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효율성 없는 자유 토론은 지양하고 강의식의 교육방법이 시도되었다. 당시 17기들은 이에 대처하지 못하여 극심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래서 선배와 후배 모두 상처를 입었다. 97년에는 이와는 달리 주최기수가 자치적으로 움직이는 구조 속에 박희선(12기), 홍석현(15기), 이명종(16기), 김연복(16기) 동인이 합평회에 참석, 함께 하는 구조로 변화하였다. 이제까지 서술한 내용은 선배들의 참석 구조에 따른 후배들의 모습을 본 것이다. 우리 제 3은 그 동안 너무 심할 정도로 모임에 있어서 선배 의존적인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너무 많이 선배에 의존하다 보니 선배의 부재시 언제나 혼란에 쌓여 있었던 과거가 있다. 물론 이 말은 선배를 깔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모두는 문학을 통해서 모였고 언제나 모임을 이끌어 간 것은 주최 기수였다는 사실이 새삼 중요해진다.
93년 3월 모임에서 권장 도서가 추천되고 '대학은 왜 가야 하는지' 등 여러 가지 주제를 갖고 합평회 외에 토론도 가졌다. 이 당시 남수남 선배님은 우리들에게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합평회 시간에 많은 설명을 하셨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 어려워서 제대로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배님의 열정에 감동 받아 나도 모르는 사이 암암리에 배워 가게 되었다. 93년 5월 28일 진천 길상사에 신입생 환영회를 개최, 백일장을 갖고 싸간 김밥을 먹으며 두 번째로 제 3타입 즉 약속이다(이는 제 3이 앞으로도 계속 풀어야 할 패스 워드이다) 7월 17일∼18일까지 제 3여름 수련회가 화양동 구곡에서 일박 이일의 일정으로 행해졌다. 김영범 동인의 '모순'이라는 시를 가지고 합평회를 갖고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가운데 캠프 화이어도 열었으며 김태수 선배가 가져온 감자를 불에 구워 먹기도 하였다. 우린 여기서 더욱 동기끼리 친해졌으며 서로 속에 깊이 묵힌 말까지도 스스럼없이 나누기도 하였다. 이 날 저녁 필자가 실종되기도 하였다. (그 후 야영 때마다 반복) 7월 25일 장태동 선배의 지도 아래 '시의 언어 형상'을 학습했다. 기나긴 여름도 한풀 꺽일쯤에서 청주고 원탑문학회에서 당시 2학년이던 류근화 동인이 입회하였다. 그 때까지 우리 팀은 창립 시절을 빼고는 청주고 출신은 전무한 상태였다. 그리고 청주고는 푸른문 쪽이 많았다.
여기서 우리 제 3에는 2학년때 입회해서 모임을 성실히 참석하는 동인이 각 기수에 평균 한명 꼴로 있었다. -15기 황기성, 16기 이명종 이들은 예상과는 다르게 제 3에 빠르게 적응, 모임을 생동감 있게 이끌어 가는데 촉매제 역할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94년 1월 9일 속리산 구성원 화합 다지기를 다녀 왔다. 드디어 94년 2월 25일∼27일까지 청주 문화원에서 열 두 번째 제 3시전이 열리고 다음 회장으로 필자인 조용범(산·향토) 동인과 부회장 성혜진(향원)동인이 선출되었다. -필자인 나는 무척 놀라면서도 내심 기뻤으며 제 3의 회장 선출은 성실성이 우선 이었던 것 같다. 이 때 시전 준비는 태수 선배님 댁에서 행해졌는데 방과후 고픈 배를 채워 주셨던 태수 선배 누님께 감사 인사 한번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시전이 끝나고 뒤풀이에서 현태 선배는 무척이나 눈물을 많이 흘려 선배 후배들이 말리느냐고 바빴다. 사실 현태 선배는 여장부라는 말이 있었다. 또한 언제나 배고픈 천사라 해서 고현태라는 별명도 있었다.
교육면에 있어서 94년도엔 김영범, 박호재 선배등 12기 선배들의 지도 아래 제3 교재로 '현대 시작법'책이 선정되어 매 모임마다 합평회가 끝난 다음 일정 부분씩 일년간 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우리 기수와 후배들의 열의 부족으로 잘 운영되지 못했다. 95년도에는 '바로 보는 우리 역사'라는 책이 교재로 선정되어 박호재 선배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었다. 그 때 필자와 선배 사이에 교육의 범위를 놓고 논쟁이 치열했다. 96년에는 특별한 교재 없이 신학수 선배와 필자의 자료로 충대 강의실에서 강의식으로 전개되었으나 후배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이 때의 주제는 만화, 영화, 작문, 역사 등 매우 다양했다. 올 97년에는 시 감상에 조첨이 맞춰져 필자의 준비 교재와 '현대시의 이해'라는 책을 교재로 운영되며 그밖에 매 모임마다 권장 도서를 추천하고 있다.
94년 6월 4일 진천 길상사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김밥을 잘 못 먹은 필자와 신학수 선배가 병원에 실려가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지만 그 중 김밥 싸는 것을 거의 주도하다시피 한 김미례 동인은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함. 94년 8월 괴산 청천에서 제 3 여름 수련회가 열리었다. 필자의 잘못으로 인해 15기 전체가 김태수 선배로부터 고초를 당했다. 우린 여기서 반성의 기회를 가졌으며 동기간의 뜨거운 우정을 다시 확인했다. 이 당시 모임은 매우 심각하게 굴러가고 있어서 선배 다섯 명에 현회원 두명이 모인 모임도 있었다.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현회원의 참여 의식은 우리끼리의 여행과 제 3발전 토론 등으로 인해 점차로 나아졌다. 95년 1월에는 속리산으로 구성원 화합 다지기가 있었다. 이날 박호재 선배의 잘못된 길 인도로 눈 덮인 봉우리를 네 개나 넘어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95년 2월 24일 ∼26일까지 청주 문화원에서 시전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 즈음에는 선배님들의 결혼식이 많았고 95년 경향 신문 신춘 문예에 김민형(6기) 선배가 시부분 '강에서'가 당선되어 우리 제 3은 축제 분위기에 쌓이기도 하였다.
95년 주최기수인 16기는 모임을 이끌어 가기에 너무 부족해서 양적 팽창을 추구했다. 이 때 운호고 돌벼개 2학년인 이명종 동인이 입회하였다. 새롭게 꾸민 교재를 갖고 6월 7일 진천 정철 사당에서 신입생 환영회가 개최되었다. 8월 11일 ∼13일까지 괴산군 정천면 사담리에서 여름 수련회가 열렸으며 박희선 선배가 준비한 시를 감상하였다. 이날 김태수 선배가 준비한 제 3 T도 있었다. 그의 호재 선배의 잠수 고문과 영범 선배의 달밤 체조가 아닌 달밤 조깅도 있었다. 우리는 흐르는 물 속에 우리의 때묻은 마음을 씻고 돌아왔다. 96년 1월 14일 제 3 구성원 화합 다지기가 원래는 속리산이었으나 우천 관계로 독립 기념관으로 바뀌어서 진행되었다. 96년 2월 28일 ∼3월 1일까지 열 네 번째 시전이 청주 에술관 제 4전시실에서 열렸으며 다음 회장으로 노진호(산), 부회장 이진경(백합), 총무 서은순(등나무)이 뽑혔다. 96년 동아 일보 신춘 문예 소설 부문에서 유승찬(2기) 선배의 '희곡을 찾아서'가 가작으로 당선되는 기쁜 소식도 있었다.
96년 제 3의 모임은 큰 진통의 해이며 큰 변화의 해이다. 앞서 말한 구조적 문제와 선배들의 교육 방식, 모임 내부 조직의 한계, 후배의 열의, 책임감 등 복합적은 부실로 엄청난 혼란으로 표출되었다. 출구 없는 미로에서 마치 끝없이 방황하다 지쳐 쓰러지는 모양이 제 3의 모습이었다. 물론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선배와 후배가 모두 애를 썼지만 당시 제 3 상황에선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극단적으로 회장 폐위론 까지 나왔었다.
96년 6월 내수 운보의 집에서 신입생 환영회가 개최되었다. 즉석 합평회와 운보의 집 관람 등 운보 김기창 화백의 일제 진일 행위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8월 4일∼6일까지 송면에서 그 말 많은 제 3수련회가 열렸다. 이 날 선배로는 양승부, 박호재 선배와 정일국, 필자, 황기성, 홍석현 15기 남자 선배들은 전원 참석하였다. 저녁때마다 시 감상과 인생사, 별과 바람 속에서 노래를 했다. 두 번째 날은 승부, 호재 선배의 주도 아래 제 3 극기 훈련이 1학년을 제외되고 실시되었다. -필자는 PT체조에서 엄청난 창피를 당했다. 그러고 보면 필자는 행사 때마다 튀는 존재인지도! 97년 1월 18일 보은 양승부 선배님 댁에서 동인 화합 다지기 행사를 치렀다. 식사로 회와 빙어 그 귀한 염소 고기도 맛보았다. 시골이라 유난히도 밤에 별이 많았다. 실감날 정도로 별은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도 별은 부족한지 몰랐다. 97년 2월 27일∼3월 1일까지 역사적인 제 3 열 다섯 번째 시전이 청주 예술 회관 제 4전시실에서 열렸다. 특히 이번 제 3 포스터는 칼라 인쇄로 매우 특별하게 만들어졌다. 다음 회장으로는 한선희(향원), 부회장 전찬주(사계), 총무 김영미(등나무)가 선출되었다.
97년 18기가 모임을 주도해 가고 있으며 내부 조직 개편도 이루어졌다. 영원한 자아 혁신, 내적 충실, 참다운 인간성 실현의 모토 아래 오늘에 이른다.
▣ 기록을 마치며
연어는 모전 희귀성 물고기이다. 오늘 나는 내가 태어나 자란 제 3의 고향, 제 3의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이제 한숨 자야 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연어는 지나간 강에서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행복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어는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려 강을 거슬러 오르며 험난한 폭포를 뛰어 오를 때만이 연어인 것이다. 연어는 알을 낳고 죽는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 필자의 마음도 이러하다. 우리 제 3은 무천에서 수많은 연어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영원할 것이라 나는 믿는다.
1997년 6월 4일
★ 추가기록 : 18기 전찬주
(97년의 제3)
※ 본 기록은 실제 사건을 거짓없이 있는 그대로 서술한 것으며 경우에 따라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97년 3월부터 18기가 제 3을 이끌어 가게 되었다. 회장은 제 3 역사상 네 번째 여자 회장인 한선희(향원)가, 그리고 부회장은 전찬주(사계), 총무는 김영미(등나무)가 맡게 되었다.
3월 들어 세 번째 모임까지는 비교적 순탄했다. 순수 제3인만 거의 20명씩 출석해서 활기 있는 모임을 가졌었다. 그런데다가 15기 조용범 선배가 '현대시의 이해'라는 책을 교육 자료로 내세우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교육 자료들을 만들어와 우리들은 열심히 가르쳤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까지는 다른 회원들도 잘 따랐기 때문에 모임은 더욱더 활기를 띄었었다. 그러나 첫끝발이 개끝발이란 말이 있듯이 제 3도 그랬다. 네 번째 모임부터는 모임에 나오는 사람의 수는 20명을 훨씬 웃돌았지만 그 중에서 타 문학회에서 방문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순수 제3인은 10명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명예 회원들의 발길은 점점 멀어져만 간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회장이 집안 사정 따위의 이유로 모임을 많이 빠졌다. 그럼으로 해서 18기의 배용준(가명)이 모임 준비부터 지휘까지 모두를 이끌게 되었다. 제 3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4월말부터 5월까지는 신입생 모집 기간이었다. 그때도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그래서인지 신입생 모집도 잘 되지 않았다. 신입생 환영회 시기는 점점 다가오는데 신입생은 들어오지 않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등나무와 향원, 청록에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7명을 끌어왔다. 그 후 교원대부고의 박상미가 박모선배의 권유로 입회하게 되면서 19기 신입생은 8명이 되었다.
그 상태에서 6월 6일 정철 사당에서 예전과 다를바 없는 신입생 환영회를 가졌다.
그 후 19기가 합류한 모임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초기의 어려움은 어느 정도 완화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변한게 없었다 19기가 모임에 나오는 만큼 18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조용범 선배의 열의가 담겼던 가르침도 흐지부지해졌다. 회장은 여전히 모임 참석 횟수가 적었고 제 3에 점점 소홀해져 갔다. 그래서 다른 회원들의 회장에 대한 불신·불만은 높아만 갔다. 급기야는 회장을 제외한 모든 18기들이 회장 되기를 거부했고, 또 필자를 중심으로한 몇몇 반대파의 강력한 주장으로 회장 교체설은 힘겹게 잠수해 버렸다. 회장 교체설이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 사건이 18기 각개인, 또 18기 전체, 더 나아가 제 3에 입힌 상처는 너무도 크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에서 8월 15일 ∼17일까지 송면으로 야영을 갔다. 이 때는 16기 김연복 선배가 레크레이션을 준비해왔으나 사람 숫자도 레크레이션에는 부적합했고, 그나마 있는 회원들의 호응도 별로 였기 때문에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야영 이후의 모임은 전보다 더욱 악화되어, 심지어는 한 번 모임에 현회원 3명만 모였다가 해산한 적도 있다. 그 시기에 모임에 나온 명예 회원은 15기 조용범, 홍석현, 정일국 선배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명예 회원들은 등을 돌렸다. 그런 상황 속에서 침체된 모임은 계속 되었고, 서너 번의 회장 교체설이 더 나돌았다.
어려움 속에 시간은 흘러 겨울이 시작되면서 12기 김영범 선배와 송헌출 선배가 군복무를 마치고, 또 17기 하정원 선배가 수능시험을 마치면서 제 3에 합류했다. 그러면서 침체되었던 모임은 조금씩이나마 활기를 띄어 갔다. 18기들로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 가운데 98년 1월 18일 속리산에서 겨울 수련회를 실시했다. 눈이 하얗게 덮인 산을 오르면서 그 때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 하나씩은 얻어 왔을 것이다.
드디어 2월이 되어 열 여섯 번째 시전 준비가 시작되었다. 시전 준비에서 선배들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 도움 하나 없이 제재만 가할 뿐이었다. 정신적은 뒷받침도 없었고, 재정적인 도움도 없었다. 그런 힘겨움 속에서도 우리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회장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너무 늦은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정말 시전 준비 기간은 천국과 같았다. 1년동안 이 정도로 18, 19기가 단합된 적은 없었다. 그 단합이 있었기에 명예 회원들의 살벌하리 만치 철저한 외면 속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시전을 했고,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치고 제 3의 98년을 이끌어 갈 회장은 박상미(교원대부고)가, 부회장은 박지은(등나무)이 맡게 되었다.
명예 회원들의 잔인한 외면, 현회원들의 외도, 현회원들간의 잦은 다툼. 그런 속에서 1년동안 제 3을 이끈 18기들, 그리고 불만 없이 잘 따라와준 19기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자랑스럽고 대견스럽다.
98년을 이끌어 갈 19기들에게 보다 나은 제 3의 하제를 기대해 본다.
1998년 5월 24일
★ 추가기록: 20기 김학준
(98년 5월~2000년 2월)
§기록에 앞서 우선 이 필자의 바보 같음에 용서를 바란다.
앞의 기록들을 보고 또 다른 기록들을 위해 기억을 되뇌어 보지만
머리를 두드려 보아도 나오지 않는 기억들을 그나마 남아있는 기억들 속에서 최대한의 진실됨으로 담담히 기록하려 한다.
(98년5월부터 99년 3월까지)
회장 박상미를 비롯한 19기 동인들이 주체기수로 활동을 시작하였던 당시 입회한 20기 5명으로 5월 31일 문의 민속마을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가졌다. 약15명의 명예회원과 재학회원들의 참가로 뜻 있는
시간들을 보냈음에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6월 초 필자는 입회했고 꿈에 그리던 시 토론자리 한 켠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합평회는 명예회원들의 많은 참여와 재학회원들의 충실한 노력들로 아름다운 자리가 되어 갔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 무렵 신입생 모집을 위한 대외 합평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어서 등나무(대성여상) 3명의 입회로 8명의 신입생이 모집되었고 계속되는 모집 가운데 이유 모를 이유로 2명의 신입생이 탈퇴하였다. 8월 14일∼8월 16일, 2박3일 계획된 삼탄에서의 여름MT가 이루어졌다. 이 역시도 필자는 사정상 참가를 하지 못했지만 참가했던 회원들은 한결같이 소중한 시간들이 되었다 라는 것이 아니까…?!
뒤이어 꾸준한 합평회 활동으로 문학의 배움의 자리가 되어갔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술자리가 더욱 큰 배움의 자리요, 기쁨의 자리가 되어갔음이 사실이었다. 그 여름날 밤 진실된 마음들을 열어놓았던 그 자리가 지금에서는 그리움의 탑이 되어버렸으니……
어느새 홀연히 여름이 가고 며느리도 모르게 가을은 바쁜 걸음질을 했다. 겨울이라는 차가운 계절이 다가왔던 것이다.
또 다시 20기 한 명의 사정상 어려움으로 탈퇴를 하였고, 99년 1월 10일 속리산으로 겨울MT와 MT준비 전부터 시전 준비작업이 차차 진행되어졌다. 본격적인 시전작업은 11기 양승부 선배님댁에서 이루어졌으며 시전 준비 중간에도 명예회원들의 참여는 매우 컸다. 선후배간의 많은 참여 속에 비교적 시전 준비는 순탄했고 드디어 대막의 99년의 열일곱번째 시전이 2월 25일~27일까지 문화원 제3전시실에서 성공리에 개최되었다.
시전이 끝나고 마지막 후임 자리에서 다음을 이끌어갈 20기 회장으로 박진감(원탑), 부회장 김학준(돌베개), 총무 이행용(등나무) 동인이 선출되었다. 19기 박상미 동인은 한 해동안 회장이라는 직책을 행하며 서운했던 것이 너무 많았다고 펑펑 눈물을 쏟기도 하였다.
후임 받은 필자는 그 자리에서 깊은 다짐들을 했다. 흐르는 눈물이 미안해서라도 결코 저버리지 않겠노라고……
19기 주체로서 활동하였던 98년은 필자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어느정도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위가 멀어지고 아래가 길어갈수록 이음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 인식해야 할 것은 주체로서의 역할일 듯 싶다.
98년 5월부터 99년 2월까지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한 해를 훌륭히 이끌어주었던 19기 동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99년 3월~2000년 2월)
99년을 이끌게 된 20기들은 첫 모임부터가 매우 절망적이었다. 모임 참가 인원은 고작 회장(박진감)과 부회장(김학준) 둘 뿐이었으니……
그렇게 둘은 모임시간을 넘기고 참가 인원이 더하여 지기를 목메이게 기다렸다. 40분이 지난 후에서만 비로소 석현 선배님과 찬주선배님의 출현으로 겨우 모임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지만 이미 합평회는 물건넜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아마도 제3 역사상 모임 첫날을 4명이라는 인원에 술자리로 대신 했던 적은 20기가 처음인 듯 싶다. 이 얼마나 슬픈 시작이었던가! 하지만 절박한 것은 동인들의 무관심 뿐만이 아니었다. 후임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진행 하려고 할 때마다 실수의 반복이라는 결과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19기는 후임기간 약 1달동안 모르는 것을 물어보라는 식의 답만 해줄 뿐 정작 어떤 일에 맞닿게 되었을 때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기에 노력은 노력대로, 실수는 실수대로, 어려움을 짊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차츰 더해가는 노력들로 모임참가인원의 활보와 대외 합평회는 비교적 좋은 결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신입생 모집 기간 초에 21기 3명의 입회로 기운을 내어 점점 활발한 분위기가 되어갔다.
필자의 건의로 모임 계획서 여백 한켠에 『생각의 창가에서』가 만들어졌으며 계속해서 신입생 모집과 분위기 조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위의 깨어지지 않는 부작용과 그 외의 다소 미흡한 활동성으로 신입생 환영회를 뒤로 미루어 8월 중순경에 여름 MT와 함께 하게 되었다. 여름 MT & OT의 준비과정 또한 19기의 무관심적인 태도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18기 전찬주 선배님과 15기 홍석현 선배님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의 준비는 할 수 있었다.
총 9명의 동인이 참가한 그날 밤의 하늘은 정말 아름다웠다. 흘러가는 냇물, 흘러가는 기차, 흘러가는 하늘의 별 그리고 별 위로 흘러가는 모닥불연기……. 필자의 맘속에 있는 그리움의 탑이 한층 한층 쌓여갔던 것 만큼 그렇게 다른 동인들의 맘속에도 남았으리라 믿음을 가져본다.
MT의 계기로 20기들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차츰 20기의 활동 인원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적어져 갔다. 시간의 진전으로 가을 무렵 3명의 추가 입회로 총 8명의 21기가 결성 되었다. 그리고 그 쯤 해서 20기 장병조 동인의 입회와 20기 성길제 동인이 탈퇴 하였다.
곧 속리산으로 겨울 MT와 겨울 시전 준비에 착수하여야만 했다. 시전 준비는 20기 김정훈 동인과 박진감 동인의 집에서 이루어졌지만 준비의 많은 부분이 대성여상 등나무 문학회의 도움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시전이 운호고등학교 돌벼개 문학회와 날짜, 장소가 겹치는 부분 때문에 양쪽 문학회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지만 적절한 타협 끝에 시전은 잘 끝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작자는 양 문학회를 이끄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괴로운 시전의 나날들이었다.
또 한 해를 넘기고 후임하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앞의 추가기록들을 보며 느낀 것이기는 하지만 주체기수의 거대한 짐들과 그 짐들로 인하여 주체기수들의 이탈로 활동이 오히려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무거운 짐이 이끌어야할 한 계층에게만 가중 될 뿐이라는 지금까지 이어온 현실과, 앞으로 계속 끊이지 못할 그리고 해결해야만 할 이 과제는 선배들의 몫이라는 필자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져본다.
후임자리를 끝으로 작년 이맘때 후임받던 그 자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다만 서운함이라는 마음 속에 하나의 앨범처럼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었다.
다음 2000년 한 해를 이끌어갈 동인중에 회장 석정림(등나무), 부회장 이보람(사대부고), 총무 전다영(사대부고) 동인이 선출되었다. 한 보 물러서는 자리에서 필자는 21기 주체동인들이 훗날 이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한권의 소중한 앨범을 큰 아쉬움이라는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람으로 가져본다. 그때쯤이면 아쉬움은 머무르고 싶은 굳은 다짐이 되어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