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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9일(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 송년 주일)
요한계시록 20:11~15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 문
본문 접맥 적 주제 설교형식
김규태 목사
when?
혹시 여러분은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이 주연한 영화 <로키>(Rocky)를 아십니까? 이 영화에서 매우 인상 깊은 장면이 있습니다. 로키는 헤비급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와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시합 전날 밤, 그는 여자 친구 에이드리언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실 나는 이번 싸움에 이길 수 없을지 몰라. 하지만 분명한 건 끝까지 넘어지지 않고 버틸 거라는 거야. 시합에 져도 괜찮고, 몸이 부서져도 괜찮아. 다만 끝까지 해내고 싶어. 여태까지 크리드를 상대로 15라운드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15라운드를 마치는 종이 울릴 때 내가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서 있다면, 그때 나는 입증하게 될 거야. 내가 그저 그런 동네 건달 중 한 명이 아니라는 것을.”
로키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멋있게 보이거나 부자가 되기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무시한 사람들, 자기를 매몰차게 버리고 떠난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링 위에서 자신이 무가치한 불량배가 아님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출처: 팀 켈러, 「팀 켈러의 인생 질문」(두란노, 2019); 「생명의 삶」(두란노, 2020년 3월호), 67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인생의 끝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해 줍니다. 인생의 끝을 생각하고, 인생의 끝을 준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주어진 시간을 헛되지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 도자기나 골동품을 보면 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골동품 수집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엄청나게 큰 미술품 가게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언론인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매우 가슴 뛰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럽의 한 명문가에서 가보(家寶)로 내려오는 도자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부터 그는 그 도자기를 사고 싶은 마음에 밤잠을 설쳤고, 마침내 짐을 꾸려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몇 년간 도자기를 찾아 유럽의 구석구석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도자기를 미국의 한 언론인이 사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도자기를 사 간 언론인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언론인을 찾았습니다. 그 언론인이 누구였을까요? 그 언론인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오래전, 도자기를 사서 자기 집 창고에 갖다 놓고는 그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자기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수년의 세월만 허비한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이 골동품 수집가 같지는 않습니까?
-출처: 고명진, 「지저스 퍼스트」(두란노, 2018);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2년 3월호), 261쪽에서 재인용.
우리가 인생의 끝을 생각하고, 그 끝을 준비하는 사람은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번뿐인 인생을 정말 가치 있게, 후회함이 없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인류가 맞이할 최후의 심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흰 보좌 심판’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세상에는 끝이 있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고,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어,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잘못을 범한 사람은 살아서 그 죄에 대한 합당한 심판을 받습니다. 혹 운이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합당한 심판을 피하여 살다가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그의 모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셔서 그 행위에 합당한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것은 온 인류가 겪어야 할 최후의 심판이면서, 동시에 둘째 사망입니다. 첫째 사망은 모든 사람이 육체의 죽음을 겪는 일입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셔서 흰 보좌 앞에 세우시고, 그가 살아서 행한 모든 일을 기록한 책에 따라 합당한 심판을 내리는 일입니다. 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던져지는 심판입니다.
what’s problem?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부풀리거나 트집을 잡아서 인간에게 죄를 덮어씌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시기에 우리가 그분의 불의함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바로 우리의 죄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번 인간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대표적인 심판은 인, 나팔, 대접 심판입니다. 이 심판들은 모두 일곱 가지 단계를 거쳐 내려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지만,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게) … 하라”(11절).
C. S. 루이스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Great Divorce)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지옥 사람들이 가득 찬 버스를 타고 천국을 방문하러 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지옥 사람들은 천국을 둘러보고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지옥이 싫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지옥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사람들은 지옥을 떠올리며 꺼지지 않는 ‘불 못’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옥의 본질은 불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천국을 떠올리며 온통 황금으로 된 거리를 생각하지요. 그러나 천국의 본질도 황금으로 된 거리가 아닙니다. 천국의 본질은 하나님이십니다. 반대로 지옥의 본질은 하나님의 부재(不在)이십니다.
-출처; J. D. 그리어, 「모두의 질문」(두란노, 202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12월호), 291쪽에서 재인용.
천국이 행복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옥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되나요? 과연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까요?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견해는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 앞에 서지 않게 된다는 견해지요.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성도들은 훗날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가르치는데,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도가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지만, 천년이 지나고 나면 그 나머지 죽은 자들 즉, 불신자들도 다시 살아나 신자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최후 심판대 앞에 서지 않게 된다는 첫 번째 견해를 따르는 분들은 12절의 “죽은 자들”을 “불신자들”로 이해하는 것이고, 믿는 성도들도 최후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두 번째 견해를 따르는 분들은 같은 “죽은 자들”을 “신자와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우리가 무엇을 택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 가지 견해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두 번째 견해를 택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일관되게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그 죽음의 자리에서 일으키셔서, 반드시 흰 보좌 앞에 세우실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때 악인들과 함께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질 것인데,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what?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의 운명은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생명의 길을 걷게 될 수 있을까요?
흰 보좌 앞에는 책들이 펴져 있는데, 그 책은 사람들의 행위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나 흰 보좌 앞에는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습니다. 그 책은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의 가장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면서, 수많은 사람의 이름들을 그 책에 기록했습니다. 그 책에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었던 자매 뵈뵈를 비롯해서, 바울의 동역자요 복음을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그 책에는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였던 에배네도와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수많은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바울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며 그들을 떠올렸을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했던 수많은 사람의 이름들을 언급하면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복음으로 그들을 능히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롬 16:26~27).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보좌 앞에 펼쳐진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 주지 못할지라도, 훗날 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발견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선사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후 심판 날, 알곡은 모아 그의 곳간에 들이시고 가라지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최후 심판의 날, 양과 염소를 나누시고,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 날에 있을 흰 보좌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까요? 어차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들어갈 사람들이니 우리가 그들과 상종하지 않고 지내라고 주신 말씀일까요? 혹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자만에 빠져 세상을 정죄하고 마귀의 영적 공격을 우습게 여기라고 주신 말씀일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그와는 반대의 목적으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더욱 겸손하고 진지하게 믿음의 길을 달려가도록 격려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이끌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how?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주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에릭과 딜런, 이 두 고등학생이 총을 난사해서 무고한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사살하고, 스물네 명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습니다. 결국, 범행을 저질렀던 두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총에 맞은 사람 대부분은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대단히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었던 딜런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훗날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 내용은 아들 딜런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들이 그렇게 끔찍한 살인마로 변해 가는 동안, 자신이 그걸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한 한탄이 주된 내용이었지요.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힘겨웠던 어느 날 밤, 딜런의 아버지 톰이 지친 듯 이렇게 말했다. ‘걔가 우리도 죽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뒤 여러 해 동안 같은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아들이 저지른 죄를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못된 짓을 저지른 자기 아들을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구요? 아들이니까요. 부모는 아들의 죄를 보며 “저런 나쁜 놈! 지옥에나 떨어져 버려라!”하고 말한 후에 점심을 먹으러 나갈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아이가 나도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요.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나 자매가 죄를 저질렀다면, 우리는 그저 그를 비난하고 홀가분하게 점심을 먹으러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들은 나의 형제와 자매니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말입니다.
-출처: 이정규, 「예수님의 기도학교」(IVP, 2021); 「생명의 삶 플러스」(2024년 9월호), 273쪽에서 재인용.
만약 여러분 주위에 있는 불신자가 죄를 저질렀다면, 우리 역시 그를 비난하고 홀가분하게 점심을 먹으러 나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니까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니까요(딤전 2:4).
오늘은 송년 주일입니다. 올 한해, 어려운 일이 많으셨지요? 여러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아마 여러분이 노심초사했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잘 견디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기쁜 소식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닳아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