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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지 않으신다(3월 2일 오후 찬양예배 설교)
성경 : 사도행전 15:1-15
교회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으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성령 충만을 받아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공동체이고 그런 믿음의 고백 위에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교회는 갈등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성령으로 충만을 받고, 같은 성경을 가지고, 같은 하나님을 믿고, 한 마음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갈등하고 분쟁하기보다는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초대 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교회는 다양한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켜야 하지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보다 앞서는 것이 교리적 갈등입니다.
초대교회는 카톨릭 교회로 이어지게 되는데 카톨릭의 사제 중심과 면죄부 판매 같은 행위에 대해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믿음을 선포하면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해서 개신교가 출발하게 됐습니다.
개신교와 조금 다른 정교와 영국의 성공회가 나왔고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신교는 예정을 주장하는 칼빈의 견해를 따르는 일반적으로 장로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들이 있고, 자유의지론을 주장하는 감리교회가 있습니다. 감리교회에서 성결교회가 나왔고, 성결 부흥운동에서 오순절 교회들이 나오게 됐습니다.
같은 칼빈 신학을 따르는 장로교도 우리나라에서 합동 측이 있고, 통합 측이 있고, 기장 측이 있습니다. 통합과 기장은 하나이지만 합동은 약 300개가 넘은 교단들이 합동이란 이름을 사용합니다.
성결교회도 예수교 성결교회, 기독교 성결교회가 있고, 감리교회도 기독교 감리교회, 예수교 감리교회가 있습니다. 오순절 교회도, 하나님의 성회, 복음교회,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비슷비슷한 많은 교단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교단이 생긴 이유는 교리적인 문제가 가장 크고 그 다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로 교단들이 갈라졌고, 지금도 갈라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갈라지는 이유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거나 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하는 중요한 교리적 문제가 아니고 교리적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자존심 싸움이 교단을 갈라지게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일차 선교여행을 잘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와서 오래 머물면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 찾아온 유대주의자들로 인한 갈등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이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유대주의자들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주의자들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서 예루살렘 교회에 정식으로 이 문제를 상정해서 이 문제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듣기로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이야기 하는 가운데 베드로 사도, 자신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고 말함으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게 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을 중심으로 해서 “차별하지 않으신다.”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
안디옥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지역입니다. 안디옥은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서 교회의 구성원들도 다양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여러 나라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 유대에서 형제들이 와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1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기독교인들로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기독교 안에서 유대교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한 분파에 속한 사람들로서 율법과 할례를 필수적인 신앙의 조건으로 전제하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소아시아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고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지자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 시켜서 자기파에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로 안디옥까지 내려온 듯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은 선민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유대인으로 할례를 받은 것처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유대인 우월주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유대의 전통을 따라 이미 할례를 받았다는 교만한 자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기독교 안에서 이방인 선교와 함께 분파가 형성되었던 것 같습니다. 6:1에서는 헬라파와 히브리파가 대립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고, 고전 1:10-17에서도 나타나는 지도자별로 각 분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 우월주의에 입각해서 모든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을 지키고 또한 유대인들의 상징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1절을 다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이 문제는 초대교회에서 가장 심각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그러한 일들이 생활화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과 할례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듯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회심하여 성도가 되었다면 당연히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이방인들에게 할례는 전혀 낯선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무조건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친 것은 심각한 종교적 문제로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전도하고 가르쳤는데 유대주의자들은 할례가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이 되었다는 증거가 할례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유대인이 되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로 인해서 안디옥 교회 안에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2절을 보면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바울을 비롯한 선교사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서 할례 문제는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율법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율법을 지키라고 한 것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다시 율법으로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안에서 율법과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과 믿음으로 구원을 주장하는 바울과 다툼과 변론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총회에 안건으로 상정을 해서 이 문제에 대한 예루살렘 총회가 결정을 내려 달라고 한 것입니다.
2. 예루살렘 총회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에 대해서 스스로 해답을 찾기 보다는 예루살렘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 2절을 다시 보면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에 속한 몇 사람의 성도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게 되는데 이 중에 디도도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계속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아서 교회로 오고 있는 상황에서 율법과 할례에 대해서 빨리 해결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과 장로들을 함께 파견해서 예루살렘 총회의 정확한 뜻을 알기 원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문제를 가지고 가는 도중에 바울과 바나바는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갔습니다. 3-4절을 보면
15: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울 일행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기들이 지나가는 성읍에서 복음을 전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이 지역들이 비록 팔레스타인에 속해 있으나 유대인들에게 소외된 지역이면서 큰 성읍에 해당 되므로 그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또한 기존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선교사역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선교 보고를 했습니다.
베니게는 이방 지역으로서, 11:19에 따르면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에서 피신해 간 기독교인들에 의해 교회가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리아에는 빌립에 의해서(8:5)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지역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싫어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이방인에게 바울 일행이 전도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는 보고를 듣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지역들이 바울에게 동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바리새파였던 기독교인들은 율법과 할례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습니다. 5절을 보면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 바리새파 출신 개종자들도 있었다는 점은 기독교의 세력이 상당히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도 바리새파였던 점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급의 철저한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왔음을 보여줌으로써 유대교적 전통과 기독교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바리새파 출신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 선교에 대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유대교적 기독교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을 것이며 1절에서 언급된 ‘어떤 형제들’도 이들이 파송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6절에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할례를 포함한 율법과 교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기 위해서 모였고 베드로 사도가 발언을 하고 있는데 베드로 사도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이방인 성도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7절을 보면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베드로 사도가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셨으며 오래 전에 나를 택하셔서 이방인 고넬료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이미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연히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이 지금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하심에 의해 오늘 이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 사도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8절에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베드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분이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아신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10장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즉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마음에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 마음에 구원 받을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받으시고 그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오직 믿음 안에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를 아신다는 말입니다. 고넬료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성령으로 충만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슬프고 괴로워 죽게 되었는지 아니면 기쁘고 감사한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내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것까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9절에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차별을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 자녀이며 모든 성도는 하나님 주시는 축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시다는 말은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도 사랑하시고, 이방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유대인도 구원하시고, 이방인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차별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영혼을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차별이 없으신데 너희는 너희도 메지 못할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고 책망했습니다. 10절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율법과 할례는 유대인들에게도 버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이방인들에게 그 짐을 메게 하려고 하고 그 멍에를 메고 가게 하려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짐을 하나 더 메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이란 멍에를 메고 힘든 인생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1: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라고 예수님도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지막으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11절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단의 가르침은 구원을 위해서는 믿음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믿음 이외에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가 그 은혜에 감사해서 헌신하는 것이지 헌신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헌신하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을 지고 멍에를 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짐과 멍에를 가볍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한 갈라디아서 5: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고 했습니다.
공동 번역으로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라고 번역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하신 말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오직 은혜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기억하며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주님 앞에 내려 놓고 구원받은 성도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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