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강가에 서서
손동숙
삶이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내 경우도 그렇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이곳을 벗어나 살리라는 건 상상을 못했다. 1980년 가을, 시댁이 있는 광주에서 잠시 산다는 생각만 하고 떠났던 서울. ‘5월 민주화 운동’으로 온통 무질서 속에 엉망이 된 그곳으로 생활터전을 옮기면서 낯선 광주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도시는 흑색 그림자를 드리운 듯 암울했기에 젊은 나이의 내겐 참 무서운 시간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광주는 생각보다 작은 도시였다. 익숙치 않은 문화와 생활방식으로 모두 낯설기만 했다. 처음엔 운암동에 집을 구하며 임시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열심히 적응하려 애썼지만 유배지에 온 사람처럼 외롭고 힘들었다.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주위 사람들을 보며 광주와는 인연이 없어 아는 사람도, 친구도 없이 부러움 반 소외감 반으로 보낸 시간은 꽤 길었다.
광주는 예향의 도시답게 미술작품은 어디서나 흔해서 작은 음식점에도 한국화 한 두점은 예사로 걸려 있다. 전시회도 활발했다. 음식은 또 얼마나 맛있는지. 맛있다고만 하면 반찬은 얼마든지 더 주는 후한 인심. 살다보니 저절로 친한 사람들도 생겼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좋은 이웃들 때문에 서서히 외로움이 잦아들 때쯤 서울로 왔다. 이제 오랜 시간이 흘러 희미해진 기억들 사이로 하나씩 옛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곳 사람들이 보고 싶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데모와 최루탄이다. 거기서 사는 동안 최루가스를 안 맡고 보낸 날이 얼마나 될까. 조선대학교 앞에는 항상 전경들과 그들의 버스로 길고 긴 진을 치고 있었고, 데모가 시작되면 온 시내는 삽시간에 뿌연 회색도시가 되어 모두들 서둘러 집으로 향해야 했다. 도저히 길을 다닐 수가 없는 독한 가스로 사람들은 체면일랑 다 버려야 했다.
어느 날 남편의 귀가 모습은 참으로 우스웠다.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는 상황이라 와이셔츠 끝자락으로 눈물 닦고, 코 막고 내의는 다 드러나도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중심가에 살다보니 집에서 문을 이중으로 잠가도 집안까지 새들어오는 징그러운 최루가스. 나중엔 집 구석구석 촛불을 켜서 냄새를 이겨내야 했다. 그런 시간을 몇 년 보내는 동안 어느새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데모가 시작된다 싶으면 여기 저기 치약을 갖다 놓는다. 물론 치약을 취급하지 않는 곳에서도.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치약이 불티나게 팔렸다. 어린아이들이 눈 밑에 치약을 쭉 짜서 바르고 서둘러 귀가하는 하교 길은 참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매운 연기를 좀 피할 수 있고 눈물이 덜 난다고 했다. 어느 날 난 뿌연 가스에 울면서 바삐 걷는데 한 남자가 담배를 죽기 살기로 피우며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남자는 담배 없이는 한시도 못사는 사람인가보다. 뭐 이런 상황에서까지 담배를. 그런데 알고 보니 독가스를 피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한번 시작되면 무서우리만치 치열한 싸움들, 그 안에서 살다보니 정보에 강한 사람들이 되어갔다. 오늘 또 데모가 있을 거란 걸 피부로 느끼면 대인시장, 양동시장 등 큰 시장에서 좌판에 생선을 파는 아줌마들조차도 생업을 거두고 흥분하며 함께 나선다. 모두 마음이 하나가 되어간다. 비교적 큰 장소를 지니고 있는 목재상 같은 곳은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어 숨겨주기도 했다. 이런 날들이 지속되다보니 최루가스가 없는 날은 고마운 날이다. 한번 발사된 가스냄새는 없어지는데 며칠 걸릴 만큼 독하다. 그런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88년 서울로 올라와 이십여 년을 여의도에서 살고 있다.
그 시절 살면서 보고 들은 일은 많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가슴에 묻어 둔다. ‘5월 민주화 운동’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진실이 조금씩 파헤쳐져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외국신부님이 찍은 당시 사진전도 보는 등 비교적 정확히 알고 나니 관심이 많아졌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가끔씩 화제가 되어 이야기 될 때 몇몇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무관심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사고에 흥분했던 젊은 시절, 적어도 관심을 갖고 미안해하며 쓰다듬어 줄줄 알아야 한다고 외치던 지난 날, 오월만 되면 그때 일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한국인들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시간에 독일의 NDR방송은 저녁 8시 뉴스에 광주에서 있었던 사건을 방송했다. 광주에 몰래 들어갔다가 독일까지 목숨을 걸고 당시 현장이 담긴 필름을 보낸 카메라 기자 힌츠페터에게서 들어보는 광주의 진실'
이렇게 소개된 동영상을 보면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Juergen Hinzpeter)기자와 녹음기사 두 사람의 대단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테잎 10롤 중 5롤은 절대로 뺏기면 안된다고 몸에다 숨겨 서울로 무사히 가져온다. 빵집에서 산 쿠키상자에 담아 아내에게 줄 선물처럼 그것 하나만 들고 비행기를 탄다. 일본을 거쳐 독일로 보내지고 전 세계에 방송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3주 동안 불통되었던 우리의 언론사. 진실 앞에 목숨을 건 두 독일인의 행동이 놀랍다.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는 1986년 광화문 시위를 취재하던 중 사복경찰에게 구타를 당해 목뼈와 척추를 다쳐 결국 기자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고향에서 불편한 몸으로 요양생활을 하며 사후에 광주 5.18묘역에 묻히기를 원한다.
내겐 제2의 고향 광주, 오랜만에 그곳을 가면 젊은 날의 기억들로 만감이 교차한다. 시댁이 있었던 금남로의 기억은 지금도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졌음을.
베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한강이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 물결로 빛나고 있다. 지금 기억의 강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그 시절 그곳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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