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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송금선(宋今璇)
1) 단체적 국가관념 주입에 전력
덕성여자실업학교장(德成女子實業學校長) 복택영자(福澤玲子, 후쿠자와)71)
1. 학교 사정에 따라 방법이 여러 가지겠지오마는 우리 학교에서는 전시(戰時) 국민생활에 중요한 건강을 몹시 생각한 바 있아와 생도들의 체련을 힘써 온 결과 병약으로 중도퇴학을 하거나 어떤 사고를 이르켜 본적이 없읍니다.
따라서 금년 겨울에도 생도들의 저온(低溫)생활을 훈련하는 의미에서 될 수있는 대로 난로를 낮게 한기(寒氣)의 정도를 보아 사용할까 합니다. 그래서 학교 교수(敎授) 중간시간을 이용하여 생도전체의 체련(體練)훈련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2. 절대 필요합니다.
생리적으로 보아 남녀의 구별이 있겠지마는 나라가 정말로 남자에게 모든 일을 매끼고 여자는 한가히 침식에만 열중할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여자에게도 군사교련의 절대 필요를 느낌니다.
우리학교에서도 결과는 아직 미약하나마 전체 생도들에게 군사교련을 식키는 중입니다.
특히 조선 가정에서 자라는 여학생들에게 지금같이 국가가 비상시에는 국체적(國體的) 국가관념을 인식식키는 데 필요
하거니와 아직까지 전시생활에 경험이 없는 조선 가정에 여학생을 통하여 훈련을 철저히 시키고 싶습니다.
71) 송금선(宋今璇)의 창씨명.
3. 어떤 학교나 건전한 정신생활을 시키기 위하여 영화나 서적을 엄중히 감시하므로 영화는 보도연맹의 지정영화를 보게 되었고 서적은 학교에 따라 다르겠지만은요. 우리 학교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여학생들에게 시국에 관한 서적을 권합니다마는 아직 철저치 못합니다. 상급반에 한해서는 교내에서만이라도 습관을 주기 위하여 신문을 매일 읽힘니다.
<출전 : 福澤玲子, 「團體的國家觀念 注入에 全力」, '三千里' 1942년 1월호, 102쪽>
11. 신봉조(辛鳳祚)
1) 황도에 칙(則)한 국민 연성
이화고녀교장(梨花高女校長) 신도순(辛島純)72)
과거의 교육은 개인의 인격완성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은 ‘황국의 도에 즉한 국민연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과거의 교육은 개인의 성공을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지금의 일본 교육은 국정(國定)이 요구하는 국민을 육영(育英)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전체주의인 국가의식이 토대가 된다.
따라서 정신적으로는 순충일철(純忠一徹)의 일본정신하에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력과 강인한 체력을 가지고 남자는 언제든지 결전전선에 나가서 용감한 장병이 되며 총후(銃後)에 있어서는 부지런한 산업전사가 되며 여자는 일본부도(日本婦道)를 배우고 군국의 좋은 주부와 군신의 어머니가 되며 실제에 능란한 사람이 되어 다시 말하자면 좋은 일본인으로서의 대동아의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 단계의 조선의 교육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내 자은(子恩)이라고 내소유처럼 애지중지했던 태도를 벗어나 국가의 재목으로서 이를 공적으로 책임있게 길러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현재 지도방법에 있어서는 이번 4월부터 일본과 같이 조선에서도 중등학교 이상의 학제가 변경되었다.
예를 들면 과목으로는 종래의 수신(修身), 국어, 역사, 지리를 국민과로 통일해서 역사라도 일본, 서양, 동양이 구별을 폐지하고 황국을 중심으로 종합적 교과편성을 취하게 되어 여학교에 있어서는 가정과에 치중하며 더욱 수련이라는 새 과목을 넣어서 새 시대에 적당한 교육방법을 취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묵은 시대는 영미인(英米人)의 지도세계(指導世界)라면 새 시대는 일본이 지도하는 세계가 출현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조선교육의 동향은 새 시대 새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을 만드는 데 있다.
<출전 : 辛島純, 「皇道에 則한 國民鍊成」, '春秋' 第4卷 5號, 1943년 5월, 90쪽>
72) 신봉조(辛鳳祚)의 창씨명.
12. 신태악(辛泰嶽)
1) 내지 동포의 제문제 -여행 중 잡감(雜感) 편편
필자는 지난 4월 12일 경성을 출발하여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가고시마(鹿兒島)73) 등지를 순력(歷巡)하고, 동 26일에 귀경한 일이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삼천리사 편집부에서는 내지 여행의 보고서를 써서 바치라고 지령하기 수차에 필경에는 기한까지 정하여 준엄한 최후 통첩을 전달하였기, 하는 수없이 금번 백천온천(白川溫泉)에 한유(閑遊)하는 촌가(寸暇)를 얻어 여행 중 잡감의 편편을 적어 보기로한다.
오사카 재주(在住)의 조선인 주택문제
필자는 년전(年前) 신흥 만주국의 각지를 여행하면서 그 땅에 이주하는 조선 동포는 대부분이 토착(土着)하여 만주의 광야를 한 평(坪) 두 평식(式) 개척하여 나가는 현황을 목도하고, 그에서 그들의 근기(根氣)있고, 착실한 성격을 보았고, 그 건전한 장래 발전의 소지가 축조되어 감을 감득하였다.
그런데 만주국에 봉직하는 관리 중에는, 이러한 조선인의 현상에 관하여 이해가 적은 이가 간혹 있는데, 그것은 같은 일계(日系) 관리 중에도 ‘내지’74)에서 직접 만주로 건너간 이 중에 조선에서 다년 관리 생활한 경력을 가진 이보다, 더 많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이유는 내지에서 직접 만주국으로 건너간 이중에는 대부분이 도쿄, 오사카를 위시하여 각지에 산재하는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을 보고 간 선입관념에서 그리된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 말이 사실 진상이라면 만주국 내의 조선인 문제, 우(又)는 일본국내의 내선일체 관념의 완수에 있어서는 위선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인 생활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함을 직감한 일이 있었더니, 이번 오사카에 들러 조선 동포의 생활상태, 더욱 주택관계를 시찰하고, 이러한 생각이 다시금 새로웠다.
오사카에 이주하는 조선 동포는 30만으로 산(算)한다고 하는데, 그 다부분(多部分)이 구(舊) 오사카시(市)를 중심한 주위의 군부(郡部)에 산재하였는데, 오사카시의 팽창에 따라 현금에는 그 거주지가 오사카시에 편입되어, 훌륭한 오사카시민이 되었다.
오사카시의 주택난은 직접 그들에게 영향되어, 한 집에 2,3가족의 잡거(雜居), 그에 따르는 불상사가 속출되고, 또 습관, 풍속이 다른 이역(異域)에서, 관자상제(冠子喪祭)에, 자기 습속을 고집하는 데서 인거(隣居)하는 내지인에게 이단시되어 불측(不測)의 오해가 깊어간 일이 적지 않었었다고 한다.
주거가 불안하면 의복도 불결하며, 주거 의복이 불결하면 일상 행사에도, 의례를 준수하는 일이 적게 되나니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 동포의 실신(失信)을 어찌, 그들의 허물에만 돌리고 안연(安然)할 바이랴.
그런데 근래에는 오사카의 산업적 경기가 고조됨에 따라,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 동포 중에도, 수십
73) 이 글의 경우 본문에서 지명은 한자어로만 표기되었음. 우리 말 병기시 동경을 도쿄로, 대판을 오사카 등으로 변경했음. 지명, 인명, 연호 등도 가능한 선에서 이 원칙을 따랐다.
74) 일본을 가리킴. 이하 동일함.
만 원으로부터 수백 만 원의 축재를 한 성공자도 내게 되었고, 또 자유노동자에서 점차 공장 직공으로 진출하여, 오사카의 공업적 생산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고 한다,
그리하여 점차 경제적 여유도 생기게 되고, 그것이 고정화되어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오사카 거주의 조선 동포의 신용도 점차 향상되어 감을 보았다.
그러나 오사카 전시(全市)의 주택난은, 그들에게 경제력 증진에 반(伴)한 주택의 개선을 간래(簡來)케 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 주택 문제가 해결되어, 위선(爲先) 외관상으로라도,생활의 문화 수준이 향상되지 않고는, 겨우 호전되어가는 조선 동포에 대한 일반의 관찰이, 더욱 그에서 영향되는 조선 동포에 대한 대우, 우(又)는 신용이 향상 혹은 영속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오사카 재주(在住)의 조선인 주택 문제는 그곳 재주의 조선 동포에만 한한 문제가 아니요, 조선인 전체의 문제이며, 내선일체의 구현상에 있어서도, 가장 근본적이요, 또한 중차대한 문제로, 쇼와성대(昭和聖代)에 일본 국민에 일부에 더욱 경제 도시의 심장부의 일변에 그러한 동포가 있다고 함에 상도(想到)할 시(時)는, 이는 장차 일본의 국내 문제로 근본적 해결을 요할 시기가 불원하리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다 같은 사회인으로서, 또한 같은 동포로서 연대적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가 대책과 증산 문제
전전(前前) 내각의 장상(藏相)이던 이케다(池田)씨는 미쓰이(三井) 재벌의 총장(總將)이던 경력도 있고, 자기가 금융 자본가에 출신이라고 해서 그리한 것은 아니겠지마는, 그가 장상이 되자, 크게 혁신주의를 발휘하여, 전시 중, 경제 통제를 강행하여, 저물가 정책을 어디까지던지 유지하랴고 힘썼었다.
그가 대장대신(大藏大臣)을 그만둔 뒤에도, 기후(其後) 2대 내각의 중앙물가위원회 회장으로, 저물가 정책을 위하여 분투 노력하였다.
이 중앙물가위원회라고 함은 여러 위원이 모여서 생산과 소비의 조사를하여, 적정 가격, 즉 주요한 품물의 공정 가격을 결정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결정된 공정 가격이 있는데 불구하고, 물폐(物幣)는 팽창하고, 물자는 부족한데서, 물가는 공정 가격을 돌파하고, 암취인(闇取人)은 성행되어 사실상 고물가의 사회가 되어서, 이대로 두다가는, 대다수의 국민 생활은 파탄에 직면하게 될 형세이다.
혁신적 생각을 가진 이케다씨는 정부에 향하여 강경한 주장을 계속하여, 물가의 정지 명령을 발(發)케 하였다.
그것은 월급을 올려서는 안되니, 그 대신에 쌀(米), 사탕(砂糖), 목탄, 담배 등도 값을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호응하여 민간의 유지자 중에서도 독일의 실례를 들어, 경제경찰의 강화에 의하여 정부 자신의 저물가 정책 유지를 찬동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생산자 측은, 자기들을 그렇게 탄압하는 바에야, 이 이상 더 증산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 하여 이익이 박(薄)한 물품을 제조할 것을 중지하였다.
이에서 이케다씨는 생산 명령과 보조금의 교부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보조금의 재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세(稅) 급(及) 공채로써 충당하자 한 것이다. 세를 올리고, 공채를 증모하여 이것을 다시 보조금의 형식으로 민간에 산포한다면 결국 도루아미타불로 물가고를 초래하지 안느냐고 반문하는 자가 있으며 그는 그때에 방지할 방법을 별도로 생각하기로 하고 위선 자기가 생각한 9월18일 물가정지령을 금과옥조로 하여 그 단행만 강요하였다.
그런데 아베(阿部) 내각이 출현하자, 이시와타(石渡)씨가 대장대신이 되어서는 단번에 쌀(米)은 5원이나 올리고 정부가 전매하는 연초(煙草)까지 값을 올려버리였다.
이에 대하여 이케다씨의 노(怒)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것이 직접 간접의 원인이 되었던지 아베 내각은 무위이자퇴(無爲而自退)하고 현 내각이 이에 대하게 되었는데, 신 내각의 상공대신으로는 생산자 측을 대표하는 일본의 제지왕(製紙王)의 칭호를 듣는 후지와라(藤原)씨가 등장하게 되었다.
후지와라씨는 상공대신을 배명(拜命)하자 이케다씨에게 대하여 중앙물가위원회 회장의 유임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의회에서 일(一)의원의 질문에 대하여 “저물가정책 때문에 물자의 증산이 정돈되어, 국민 생활에 지장을 생(生)케 하여서는 곤란함으로 증산 장려의 필요상, 일부의 가격 인상을 인정할 터”이라고 답하였다.
후지와라씨의 견해로 보면 9·18 정지령과 같이 날마다 팽창하여가는 통화는 그대로 두어두고 물건의 가격만 붙잡어
매어 놓으면 손볼 것은 제조업자뿐이니 이렇게 하는 것은 제조업자가 너무도 불상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래의 공정가격만 고수한들 사실상 실효 없는 일이니 금후부터는 통화 수축을 감행하고 주요물자의 관리를 기하여 배급 기관을 확립하고 일방으로 증산 장려금을 급여할 생각으로 기전(其前)의 중앙물가위원회는 폐지하고 금번 새로 내각에 물가대책심리회를 설(設)하고 따로 상공성에는 가격형성위원회라는 기관을 설하여 양자가 서로 도아(도와-검토자) 금후의 물가 조정과 물자 증산을 도(圖)하기로 되었다.
전자의 중앙물가위원회는 금융 자본가 출신의 이케다시대의 창안이라면 후자의 두 가지 회(會)는 제조업자 대표인 후지와라씨 시대의 시안(試案)인 데에 정책 추이상(推移上) 다분(多分)의 흥미를 느끼게 된다고 도쿄의 평론가들은 논의하고 있었다. 이러한 논의를 어찌 타산(他山)의 석(石)으로만 알고간과할 수 있으랴.
(4월 18일 백천온천에서)
<출전 : 辛泰嶽, 「內地 同胞의 諸問題-旅行中雜感片片」, '三千里' 第12卷 5號, 1940년 5월, 43~46쪽>
2) 내선일체이긴 하지만 ‘협화’에 항의하는 신태악 씨
“오사카(大阪)에는 오사카협화회(大阪協和會)가 있고 그 밑에 76개의 지회가 있다.
이 협화회가 오사카에 살고 있는 33만 ‘반도인(半島人)’75)을 지도하고 있는데, 나는 ‘협화’라는 두 글자에 이의가 있다. 맹방 만주국에서의 ‘협화’라면 오족(五族)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니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일본과 조선의 관계에서는 의문이다.
내선일체가 한 걸음씩 완전하게 구체화되고 있는 마당에 협화라니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오사카에 살고 있는 30여 만 명의 반도인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오사카에서의 반도인의 새로운 생활의 건설을 위해 일어선 ‘신생 오사카(新生大阪)’의 리더 신태악 씨(40)는 가을의 시원한 바람의 기쁨을 깊이 느끼게 하는 어느 날 아침, 경성부 무교정 사무소의 넓은 온돌방에서 시원시원한 도쿄 토박이 말투로 ‘협화’라는 두 글자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
옛 조선식 건물이지만 넓은, 마치 무도장(武道場)을 연상케 하는 느낌의 깨끗한 실내다.
벽에
75) 조선인.
는 고풍스러운 교훈을 쓴 ‘붓글씨’ 액자가 두세 개 걸려 있고, 책상 위에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 따님이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고 하는 ‘글라디올러스’ 꽃이 아름답게 피어, 실내의 클래시컬에 가까운 답답한 느낌을 밝게 감싸고 있다.
신씨는 조선 북쪽의 소도시 함북 부령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 그는 도쿄물리학교에 다녔고, 경성협성실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내일의 반도를 짊어지고 일어서야 할 청소년의 연성(鍊成)에 정성을 쏟는 건실한 교사였다. …… (판독불가) …… 그 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학적을 두고 법률 공부에 전념하는 한편, 사회과학 연구에 몰두한 끝에 일체의 사상운동에서 완전히 이탈해서 상아의 탑에 틀어박혀 학업에만 열중했다. 1928년 와세다대학 졸업과 동시에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과 3학년에 편입해 좁은 문인 고등문과시험 돌파를 목표로 눈물겨운 노력을 계속한 결과 1930년 사법과에 패스하는 개선을 올렸다.
1년 동안 법률을 연구하고 1931년 조선으로 돌아와 개업 간판을 걸고 반도법조계에 신예로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러다가 작년 3월 오사카에 사무소를 열어 올해 7월 오사카의 반도인의 문화적 향상을 목표로 한 ‘유력자회(有力者會)’ 또는 내일의 반도인을 등에 지고 일어서는 지도자의 연성을 목표로 하는 ‘청교회(淸交會)’를 각각 조직하고 그 지도자로서 활동 중이다.
특히 반도에 임전체제(臨戰體制)의 재편성 운동이 일어나자 그 진두에 과감히 일어섰다.
조선 내의 동포도 그렇지만 오사카의 반도 동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조선 내의 동포에 뒤지지 않는 열정을 갖고 시국에 협력하고 있다. 오사카도 명예로운 지원병 시험장소로 지정되길 모두 바라왔으며, 작년 반도인 2만 명의 서명을 받아 미나미(南) 총독에게 진정했을 정도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우리 33만 명의 반도인의 열성과 뜨거운 외침이 통하여 마침내 오사카도 지정되었기 때문에 모두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하고 있다.
지금까지 오사카에서 지원병의 영예를 입은 사람은 두세 명이었지만, 앞으로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오사카에는 그곳에 오래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고 거의 일본 내지의 풍습에 익숙해져서 예의범절도 일본인과 거의 다르지 않은 정도다.
또한 일본정신을 적절히 체득하고 있는 ‘우리는 천황폐하의 적자(赤子)다.
우리 생명도 재산도 천황폐하의 것이다. 이 생명과 재산을 천황폐하가 필요로 하실 경우에는 전부를 바치고자……’ 하는 훌륭한 황도정신을 갖고 있다. 이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오사카에 살고 있는 반도인이 지닌 미점(美點)이다. 그 뿐만이 아니지……. 청년들 중에는 피가 부족한 상이군인에게 수혈을 하고 있다든가, 출정군인의 가정을 돕는다든가 하며 훌륭하게 봉공(奉公)하고 있다. 작년, 병기헌납금 모집운동이 일어났을 때, 오사카는 15만 엔 예정이었지만 이를 훨씬 뛰어넘어 20만 엔을 모금했을 정도다.
오사카협화회관을 50만 엔으로 건립할 예정으로 기부금을 모았는데,이 또한 무려 60만 엔을 초과, 오사카 반도인의 늠름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종래 협화운동은 반도인의 지도보다 단속에 중점을 두고 있었지만, 지금은 단속에서 지도로 방향을 바꾸었다.
신씨의 재 오사카 반도인의 자랑은 좀처럼 그칠 줄 모른다. 홍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다 마친 신씨는 책상 위에 있는 ‘글라디올러스’ 꽃을 잠깐 쳐다보고 밝게 웃는다. “재작년 오사카에서 이선홍(李善洪) 씨가 대의사(代議士)에 입후보해서 낙선했는데, 다음에는 당신이 나오신다면서요?……”라며 넌지시 물어보자, 신씨는 “아뇨. 아직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닙니다. ……하하하……”라며 겸손하면서도 단호히 부정했다.
<출전 : 辛泰嶽, 「臨戰愛國者群像(十七) 內鮮一體でこそあれ‘協和’に抗議の辛泰嶽氏」,'三千里' 第13卷 12號, 1941년 12월, 62~64쪽>
13. 심형진(沈衡鎭)
1) 내선융화에 대하여
사이토(齋藤) 총독각하의 시정(施政)이래, 힘써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해, 반도의 개발과 1,600만 민족의 복리증진에 진력하고, 특히 내선인의 차별철폐와 내선융화에 대해서, 총독각하를 비롯하여 위정당국자가 크게 마음을 쓰고 계시는 것은, 우리 조선 민중이 기뻐하고 춤을 추며 또한 감사해 마지않는바이다.
그러나 내선융화에 대해서, 이러한 것이 쉽게 철저함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내선인 사이에 서로 의사가 통하지 않으며, 서로의 단점을 안으로 살피고 반성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내지인’76)의 성질을 말하자면, 내지인들은 너무나 조급하고, 또한 자신이 훌륭하다고 자만을 하며, 조선인에 대
해 압박적인 수단을 쓰며, 친절한 애정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서로 어깨를 견주며 말을 서로 주고받으며 교제하는 것이, 아무래도 내지인다운 자격을 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평소에 조선인을 바보 취급하는 한 실례를 들어 말해보겠다.
어떤 내지인과 조선인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내지인 쪽에서 조선인에 대해 여러 가지 비평을 하기에, 조선인은 이에 대해 변명을 하자 내지인이 “당신도 역시 귀가 있는가”라고 하였고, 조선인이 “벌레나 짐승들도 귀는 가지고 있다. 하물며 인간인데 귀가 없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그 후 그 조선인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떠난 것이다.
이러한 실례를 보아도, 그 조선인이 그 자리에서 뇌 속에 얼마만큼의 감정을 갖고 있었을까.
원래 조선인은 성질이 느긋하기 때문에 말하고 싶은 것도 말하지 않는 겸손함을 갖고 있다.
아무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에게 대해서는 “당신은 요보77)이기 때문에 알 까닭이 없을 거야”라고 말하고, 무엇인가 사물을 판별하는 자에 대해서는 “조선인으로서는 훌륭하다”고 말하며, 오히려 나쁜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만이 훌륭한 인물이라고 뽐내고 있다.
과연 일본제국은 메이지(明治)유신 이래 일지(日支)·일로(日露)의 양 전쟁78), 또한 이번 세계 대전쟁의 결과, 5대강국에 참가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50여 년 이래 수 십 만의 장사(壯士)를 희생하고, 수 십 억만의 재산을 들여서, 고심육력(苦心戮力)으로 오늘날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일에 부딪혀 성공한 유신 이래의 공신인, 사이고(西鄕), 이토(伊藤), 오오야마(大山), 카츠라(桂), 이노우에(井上), 오오
76) 일본인.
77) 조선인을 낮춰 부르는 말. ‘여보’라는 뜻.
78) 청일전쟁, 러일전쟁.
쿠마(大隈), 야마가타(山縣), 노기(乃木), 도고(東鄕) 및 전 조선총독 테라우치(寺內)와 지금의 조선총독사이토 제씨(諸氏)의 수완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제씨들은 참다운 세계의 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가 훌륭한 나라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므로, 아무런 공로도 없이, 아무런사업도 하지 않고, 오로지 야마토(大和)민족이라는 간판이 좋기 때문에 자기도 뽐내 보자는 것은 엄청난 잘못인 것이다. 마치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매달려 천릿길을 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지인 중에서 이와 같은 인물은 상류사회에는 적으나, 하류계급 중에는 많이 있어서, 상류계급에서 아무리 성심성의로써 내선융화를 도모해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하류계급이 이와 같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아무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조선인의 성질로서 부화(富華)허영을 좋아해 분수에 넘치는 것을 바란다, 예를 들면 자신은 아무런 학문을 닦지 않고도 고관대작이 되고 싶다, 아무런 일은 하지 않고서도 거부(巨富)가 되고 싶다는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오로지 이조 500년 이래 양반의 문벌을 가진 자는, 자신의 욕망대로 부귀의 지위를 차지하며, 따라서 이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학문도 없이 일도 하지 않고, 다만 내지인과 마찬가지 대우를 받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내지인이 충고를 하면 “뭐야, 천황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조서(詔書)가 분명히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에서 펴는 시정방침은 내외인 차별철폐인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내지인이라고 해서 조선인을 그렇게 괴롭히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반항을 한다.
왜 그럴까. 조선인으로서는 자신을 안으로 살피고 반성할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학문이 내지와 같은 상태가 될 수 있을까. 조선의 문명이 내지와 마찬가지로 발달할 수 있는가. 무슨 일을 보아도, 조선인은 내지인과 동일하게 할 수 있는 점이 있는가.
다만 내지의 덕분으로써 조선민족이 오늘날까지 안전한 행복을 향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툭하면 내선인의 차별철폐라고 하는 문제를 주장하고 있다.
같은 민족일지라도 차별은 있다.
옛날 조선에서도 양반과 상민과의 차별이 있지 않았는가.
예를 들면 서툰 자는 잘하는 자와 차이가 있고, 가난한 자는 가진 자와 차이가 있었다.
조선인의 오늘날의 처지를 보면 서툰 자와 가난한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의 현재 입장을 되돌아보지 않고 함부로 반항하는 것은, 천황폐하의 조서와 총독의 시정취지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말할 만하다.
오늘날 조선인의 처지로서는, 내지인에 대하여 차별철폐라고 말하는 것은 입을 벌리고 굳이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세계의 추세와 문명이 어떻다는 것을 아는 자는, 1,700만 민족 중에 몇 사람도 안 된다.
시골에서는 소위 양반은, 오늘날에 와서도 갓을 쓰고 띠를 두르고 대문을 닫고 방구석에 앉아 태곳적의 천황씨(天皇氏)를 부르짖으며,해가 동쪽에서 뜨는지 서쪽으로 지는지 시세(時勢)의 변천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완고한 사상이
뇌 속에 확실하게 박혀 있다. 그래서 내지인 이야기를 하면 왜놈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서 말하면, 어떤 조선인 도지사가 시골에 출장해, 서당(書堂) 상황을 시찰하려고 어떤 서당에 들어갔더니, 소위 선생이라고 하는 자가 커다란 조선 흰 갓을 쓰고 앉은 채로 응접하는 인사도 하지 않고 매우 교만이 극치에 이르러, 그 도지사의 수행원이 그 무례함을 꾸짖으며, “도지사는 옛날의 관찰사일 뿐만 아니라,손님이 왔으면 인사를 하는 것이 주인 된 도리가 아닌가” 하고 충고했더니, 그 선생이 “뭐야,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자는 관찰사가 아니야, 즉 ‘왜놈’이다. ‘왜놈’에게 인사하라는 말이냐”라고 응수 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자에게는 특히 내선융화라고 말해 봤자, 마이동풍인 것이다.
그와 같은 인물은 오히려 불쌍하게 여겨 말할 가치가 없으나, 조금이나마 문명의 머리를 갖고 있다고 말할 만한 자신(自信)을 갖고 있는 신사(紳士)라는 자는, 오히려 시골의 완고한 양반보다 더 심하다.
뱃속에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겉으로는 문명인과 같이 꾸미고, 신뢰해야 할 당국의 시정방침을 한사코 비난하며, 상해임시정부가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라고 망상을 하고 있는 자가 가끔 있다.
그리하여 시골의 완고하고 순진한 양반은, 머리가 너무 낡아 도시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내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이면서 아직도 차별철폐라거나 무엇이라거나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내지인과 조선인과의 심리상태는 이상에서 말씀드린 대로이기 때문에, 일조일석에 원만한 융화의 실현을 바란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한 가정(家庭)을 보아도, 마음이 서로 통하지 않으면 반목할 따름이고 화목하게 살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7,000만의 인구를 하나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면, 여간 심력(心力)을 같이 하며, 순치보거(脣齒輔車)79)의 관계를 이해하고, 서로 의지하며, 세계일가(世界一家)·사해형제(四海兄弟)의 이치를 확실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지인으로서는 조선인에 대하여 문명의 선도자이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조선인에게 친절, 또 온화한 애정을 베풀고.
자신의 마음속(心腹)을 조선인에게 주며, 지도에 힘쓰고, 조선인으로서는 세상의 낙오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선도자인 내지인의 지도에 복종해서, 서로가 제휴하여, 형제와 같이 격의 없이,지기(志氣)가 서로 통해서 원만히 일치해야 할 것이다. 같은 문명의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긴요한 것이다.
옛말에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붓은 서로 구한다’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요컨대 내지인은 자만심을, 조선인은 차별철폐의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모르는 사이에 유감없는 자연융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바이다.
<출전 : 沈衡鎭, 「內鮮融和に就き」, '朝鮮' 81號, 1921년 11월, 121~124쪽>
14. 유억겸(兪億兼)
1) 황국과 나의 심경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교수 유억겸
이제 국제관계는 혼돈상태에 빠져, 혹은 맹렬한 무력전으로, 혹은 심각한 경제전으로, 혹은 음험한 사상전으로, 정지할 줄 모르고, 꿈틀거리고 있다. 그 정세 실로 급전직하로, 머리를, 돌릴 수 없는 비상시국이다.
이 시국하에 천양무궁(天壤無窮)의 단체로 한 중고일본(中考一本)의 대의를 알어, 조국이상(肇國理想)의 구현에, 국시(國是)의 수행에 고도국방국가 체제 정비에, 전지전력(全智全力)을 다하여,멸사봉공하는 것은, 황국신민의 최상의 희열인 동시에, 자랑이라고 나는 믿는다.
79) 입술과 이, 수레의 양 바퀴. 서로 떨어지거나 협력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기 어렵다.
이러한 비상시국에 있어서 편협한 민족사상 기타의 불온사상에 잡펴서 국가대업을 오해하는 이 있다면 단연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일즉이, 편협한 민족자결의 관념에 잡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내선(內鮮) 양족(兩族)의 문화적 사명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래, 내외정세의 변천을 살펴서 종래의 주의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황국신민으로서의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야 일민족의 자결이란 것은 벌써, 당해(當該) 민족의 행복과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되려, 독립과 미약을 의미하는 것은 우리들이 현재 목격하는 바의 국제정세다.
아(我) 반도 민중의 이해휴척(利害休戚)은 전혀, 황국 전체에, 합치하여 약진 황국일본의 전도(前途)도, 역시, 반도 민중을 결코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는 동시에, 민족자결의 미망(迷妄)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반도 민중에게 고하고 싶다.
나는 내지인이나, 반도인이나, 폐하의 적자로서, 성지(聖旨)를 봉체(奉體)하여, 혼연일체가 되고, 황국대업의 익성(翼成)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부르짖는다.
아(我) 반도 2,300만 민중에게 과(課)한 임무의 하나로서, 내선일체운동이 있는 것을 명기(銘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운동은 황국 영원한 대계의 견지로부터, 동아와 세계 신질서 수립의 성업(聖業)완수의 견지로부터 고찰해서, 무엇보다도 긴요한 국가요청인 줄 안다.
일즉이 미나미(南)총독이, “동양인의 동양건설의 핵심은 내선일체의 완벽이고, 내선일체의 근저는 충량한 황국신민인 실질을 양성하는 데 있다”라고 술(述)한 것은 내선일체의 목적이 나변(奈邊)에 존재한 것을 명시한 것으로 우리들 일상생활에 그 정신을 구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운동은 결코 일시적 편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황국 영원의 번영조국(肇國) 이상의 실현,반도 민중의 행복을 생각한 국가적 운동이다. 그런 고로, 혹은 가정에 혹은 사회에 혹은 직역(職域)에 있어서, 우리들 각자가 이 운동의 강화, 내선일체의 구현에 총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믿는다.
다시 말하면 내선일체의 사명을 구현하는 것이, 반도 민중의 유일한 진로라는 것을 굳게 인식함으로서, 굳센 황국일본 건설의 대국민적 긍지와 포부아래에, 부여된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직역에 있어서든지, 이 신념과 각오로서 신도(臣道)의 실천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도 또한 불초(不肖)하나마, 전심봉공(專心奉公) 국은(國恩)의 만일(萬一)이라도 보(報)할 것은 서(誓)한다.
<출전 : 柳億兼, 「皇國과 余의 心境」, '三千里' 第13卷 4號, 1941년 4월, 174~175쪽>
15. 윤치호(尹致昊)
1)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
이 한 편은 지난 2월 9일 저녁, 경성부민관에서 열린 본사 주최의 ‘본지 창간기념강연과 영화의 밤’의 두 번째 저녁, 80에 가까운 몸으로 3,000명의 청중들을 향해 웅변한 선생의 강연 요지이다. (기자)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과 조선 측에서 여러 비평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저는 이에 대해 네 가지만 말씀드리고, 또 제 소신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내선일체라고 하면 이미 병합 당시에 구체화된 것이지, 새삼 그것을 강조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소론입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잘못된 논리입니다.
그야말로 지금 막 태어난 아이를 어른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조선인도 병합 당시는 단지 일본 국민으로서의 아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20년 정도 교육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 조선인도 병합 이래 19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일본 국민으로서 일본 내지인과 마찬가지로 어른이 될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봅니다.
요컨대 병합 이래 29년간의 총독정치는 우리 조선인을 일본 내지인과 일원화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따라서 총독정치의 각 단계가 달라짐에 따라 정치 그 자체에도 다양한 뉘앙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이토(齊藤) 총독의 통치 목표는 내선융화(內鮮融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가키(宇垣) 총독시대로 바뀌어서는 자력갱생이 표어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오늘날의 미나미(南) 총독의 시대가 되어서는 내선일체의 표어가 통치 목표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각 시대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표어의 변경 그 자체에는 다양한 모순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러나 그 본질적인 줄기는 조선의 민도(民度)를 일본 내지인의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내선일체를 완성하려는 데 있습
니다.
따라서 내선일체가 지금 문제가 되었다는 것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는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수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내선일체는 좋은 일이긴 하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보건대 굳이 그것을 완성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저는 작년 9월 5일 미나미 총독을 면담했을 때, 미나미 씨는 저에게 조선청년 지도에 관한 세 가지 사항을 적어 주셨습니다.
그중에 제2항에 “동양인의 동양 건설의 핵심은 내선일체의 완벽에 있다”라는 것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시 이 말에 많은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대체 우리 조선인이 일본 ‘내지인’80)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동양 전체를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을까? 여러 가지 점에서 보건대 우리는 일본 내지인보다 지금도 여전히 뒤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 내지인과 동등한 자격을 갖고 동양인의 동양 건설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런 점은 저 자신 매우 의문으로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 저는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하게 되면서 그런 의문을 완전히 일소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지리적으로 보건대 우리 조선은 제국의 대륙정책상 실로 경시할 수 없는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신동아 건설의 가능 여하의 문제가 실로 내선일체의 완성 여하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반도는 제국의 대륙정책상 이른바 병참기지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지리적 중요성에서 보건대 일본과 조선의 일원화, 즉 우리 조선인을 일본 내지인과 마찬가지로 동양 건설을 위해 동등한 국민적 의무와 자격을 갖고 매진하게끔
80) 일본인. 이하 동일함.
하는 일이 얼마나 긴요한 것인지는 제국의 대륙정책의 입장에서 보건대 매우 자명한 일입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일본 내지의 어떤 경제학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산 미곡은 제국의 국책 수행상 더 없이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고, 이는 오늘날 대륙전선을 지지하는 중요한 힘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인적으로 보더라도 오늘날의 조선인은 물론 문화적으로는 뒤처져 있지만 민족적 소질에서 보건대 결코 열등한 민족이 아닙니다. 저는 조선민족의 우수한 소질을 늘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근대적인 교육과 문화와 자격만 부여된다면 분명 일본 내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동양 지도는 물론 세계의 지도를 위해서도 공헌할 수 있는 우수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조선인이 열등한 민족이라는 것은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늦었을 뿐입니다.
도리어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조선인은 실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수많은 문화재를 남기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근년의 일을 보더라도 세계를 재패한 손기정 군이 우리와 같은 ‘반도인(半島人)’81)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사소한 예이긴 합니다만 역시 조선인이 민족적으로 결코 다른 민족에 뒤지지 않는 체력과 의지력을 갖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실재 사례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인적으로 보더라도 우수한 소질을 갖고 있는 우리 조선인이 일본 내지인과 동등한 국민적 의무 및 자격을 부여받았을 경우, 일본 내지인과 동등하게 동양 건설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이유에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미나미 총독이 말씀하신 “동양인의 동양 건설의 핵심은 내선일체의
완벽에 있다”는 표어를 매우 심각한 의의를 지닌 진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셋째로, 조선인 측에서 나오는 비평입니다만, 조선인이 내선일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소론입니다.
이는 주로 민족주의적 편견의 표현입니다만, 그러나 어떠한 입장에서 보더라도 내선일체의 길 이외에 조선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까? 내선일체의 길을 거부한다고 하면 조선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 공산주의 이외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공산주의에 의해 조선인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론은 그렇다 치고 혁명 이후 20년을 경과한 오늘날의 러시아의 실정을 보십시오. 역사에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참혹하기 그지없는 비참한 상태에 우리가 놓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공산주의는 결코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닐뿐더러 결정적으로 이를 배제하고 박멸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의 길이라 믿습니다.
이처럼 생각할 때, 내선일체는 우리 조선인에게 실로 사활을 건 중대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내선일체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민족적 진로를 별견하고 또 이 도로에서 행복한 장래를 전폭적으로 기대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마지막으로 내선일체에 반대하는 논의로서 이른바 ‘내주선종(內主鮮從)’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을 식민지로 보는 시각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시동인(一視同仁)은 황송하게도 천황폐하의 성지(聖旨)이시고, 우리도 하나같이 천황폐하의 적자(赤子)라는 자격과 의무가 이 성지에 의해 보장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조선을 식민지로 보는 것은 일시동인의 성지를 무시하는 형법상의 불경죄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따
라서 이런 견지에서의 내선일체 반대론에 대해서는 국가의 경찰이 간섭할 문제이지 우리가 간여할 문제는 아닙니다.
81) 조선인.
또한 내선일체라 해도 오늘날 그것은 조선 내의 일본인과 조선인들 사이에서만 하는 말이고, 일본내지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참으로 어리석은 우론(愚論)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금강산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멋진 산이지만, 일본 내지인 대부분은 그것을 지금도 여전히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일본 내지인이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금강산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 내지의 내지인이 지금도 여전히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내선일체의 진실성이 저하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내선일체에 대한 일반내지인의 인식을 높이고 또 지도해야만 합니다.
<출전 : 尹致昊, 「內鮮一體に對する所信」, '東洋之光' 1939년 4월호, 6~9쪽>
2) 동아의 신건설과 내선일체
1.
조선이란 것은 과거에 잇서서 수천 년 역사를 가진 국가를 형성하얏섯슴에도 불구하고 국제상에는 겨우 존재를 인식치 못하는 그저 지리상의 한 명칭에 불과하엿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와서 돌연히 동서양 교통의 중심이 되다십히 되고 또 일본제국의 대륙진출하는데 추추점(樞抽點)이 됨으로 인하야 전세계가 주목하는 구역이 되엿다.
전일(前日)에는 거운 존재를 모르든 지역으로서 금일(今日)에는 그 풍치(風致)의 미려(美麗)한 것이라든가 기후의 온화한 것이라든지 토지의 비옥이라든지 지상, 지하의 재물로 보든지 소위 삼천리 강산의 일권(一拳)의 토지라도 등한히 버릴 점이 업는 거운 완전무결한 ‘국토’이라고도 할 수가 잇다.
그러나 이러한 조흔 지역의 주인으로 잇든 우리 조선민중이 이 천혜의 풍부한 토지를 충분히 개발하고 이용하지 못하엿든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것을 우리 조선민중 자체의 소질로 인한 것이라고는 보지안는다.
불행으로 조선의 위치가 간호대국(間乎大國)하야 소목(小木)이 대목(大木) 아레에서 자라나지 못하는 것 가치 사대주의(事大主義)와 모화주의(慕華主義), 문존무비주의(文尊武卑主義), 이 삼(三) 주의에 중독이 되어서 독립진취하고 활발한 용감한 기상과 훈련이 업시되여서 의뢰심, 창조성의 결핍과 문약한 것이 거운 우리의 제이(第二)의 천성이 되다십히 되엿다.
2.
지금 우리가 세계대세의 전환에 따라서 우리 민중이 일본제국신민의 일(一) 분자가 되어서 천황폐하의 적자로서 일시동인의 대이상에 야마토민족(大和民族)과 흥망을 갓치하게 되는 동시에 비로소 조선민중의 자연적 소질의 엇더한 미점이 잇든지 유감업시 발휘할 기회를 엇게 되엿다. 이것은 조선민중을 위하야 경하하야마지 안는 바이다.
일로부터는 조선민중 압헤는 압록강을 건너서 일즉히 고향이엿섯든 대륙을 차저서 새로히 활약할 지역이 열녀지다.
이러한 훌늉한 무대와 기회를 압헤두고 이저서 아니될 것은 우리들이 야마토민족과 한몸이 되어 한 편으로는 수천년간 백련(百鍊)된 바의 용감과 능률을 가진 야마토민족으로부터 지도편달을 바다야 할 것이요, 또 한 편으로는 우리 소질에 고유한 전통적 양풍미속(良風美俗)을 보존하고 지속하야서 내선인(內鮮人)의 장처(長處)를 합하야 가지고 동양신건설에 매진한다는 것이다.
동아의 신건설에 잇서서 조선민중이 공헌할 역할을 경시할 수 업다고 밋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미나미(南)총독이 내선일체를 고규(高呌)하는 뜻이 여기에 잇는 줄 안다. 혹은 내선일체의 정의가 무엇이냐 무르면 나는 좌(左)와 여(如)히 대답하랸다.
내지인도 천황폐하의 적자요 조선민중도 천황폐하의 적자요 일시동인하에 다가치 생활하는 것이 내선일체의 기초원칙이다. 이 원칙상에서 내선일체를 실현하는 방법은 하나박게는 업다.
즉 우리가 내지인 조선인을 물론하고 황실에 대하여 철저히 충량한 신민이 되는 것이 유일한 방책으로 나는 안다.
(1939. 4. 24)
<출전 : 尹致昊, 「東亞の新建設と內鮮一體」, '總動員' 創刊號, 1939년 6월, 21~23쪽>
3) 내선일체에 대한 사견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대하여 나는 이러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순서적으로 말하면 첫째로 내선일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법률적 경제적으로는 이미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무엇으로써 내선일체에 대한 표어를 내세울 것이냐 하면 현재 남아있는 것은 정신적, 소위 심적 내선일체일 것이다.
즉 내선일체의 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황국신민의 서사 중 제2조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즉 이것이 완전히 지배됨에 의하여 내선일체가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즉 일본인, 조선인은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여 협력하고 굳게 단결하여야 이에 내선일체가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둘째로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오로지 정신적 작용으로서 결코 외면적 행정으로는 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 같이 천황폐하의 적자가 된 이상 우리는 형제이다. 형제가 된 이상 서로 믿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이에서 내선일체라고 하는 훌륭한 목표하에서 오해되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내선일체를 완전히 하려면 ‘반도인’82)이할 역할, ‘내지인’83)이 할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도인은 반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충분히 자각하고, 내지인은 반도인에 대하여 신애(信愛)로서 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적상매(外的商賣)의 취인(取引)84)과 같이 교환조건으로 하면 언제까지든지 신(信)과 애(愛)는 완전히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도인으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일 차별대우를 철폐하지 않으면 내선일체는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에 다소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다. 차별대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
82) 조선인.
83) 일본인.
84) 거래를 뜻함.
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의 차별대우가 생긴 원인은 능률의 차별이 원인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도인 개인 개인에 대하여 어떤 내지인 개인과의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반도인은 단체생활에 이르러서는 내지인에 비할 수 없는 것은 누구든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단체생활을 완전히 함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 것이다.
제1은 책임감,제2는 공덕심(公德心)이다.
이 두 가지의 요소가 결여되면 단체생활은 원만히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도인이 내지인에 비하여 단체적 능률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오로지 반도인이 책임감과 공덕심이 결핍한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반도인이 책임감과 공덕심이 내지인과 같게 되면 차별대우라는 것은 자연 철폐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반도인이 이 차별대우를 철폐하여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단체생활의 요소인 책임감과 공덕심을 하루라도 속히 함양하여 내지인의 수준에 달할 것이 반도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반도인이 각 방면으로 단체생활에 있어 내지인에 지지 아니한다고 하면 이 차별대우라고 하는 것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그러므로 금일 반도인으로서 이 차별대우를 철폐하지 않으면 내선일체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상매적(商賣的) 취인(取引)일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할 것을 충분히 하면 자연이 이런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지인은 이른바 무사도(武士道)의 기풍이 풍부하므로 반도인으로서 성심성의 천황폐하의 적자된 본분을 다하는 이상 결코 반도인에 대하여 차별대우를 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이상은 반도인에 대하여 말하였으나 또한 내지인 측으로도 생각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반도인은 물론 그 단체생활이 내지인에 추급(追及)지 못하나 개인으로서는 확실히 그의 능률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관공리에 자꾸자꾸 채용하여 그의 능률이 있는 자에 대하여 결코 차별대우를 하지 말고 선처할 것이다.
내선일체는 지금 내지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일본제국이 각하(刻下)의 중요문제라고 하는 것은 내지뿐만이 아니라 반도인으로서도 중요문제인 이상 내선이 일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오직 정치적 경제적 법률적의 일체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신적으로 일체가 되어 황국신민서사의 제2조를 실행실현하기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될 줄로 생각하는 동시에 또한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출전 : 尹致昊, 「內鮮一體에 對한 私見」, '靑年' 19號, 1940년 1월, 4~5쪽>
4) 내선일체에 대한 이념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대하여 나는 이러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순서적으로 말하면 첫째로 내선일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법률적 경제적으로는 이미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무엇으로써 내선일체에 대한 표어를 내세울 것이냐 하면 현재 남아있는 것은 정신적, 소위 심적 내선일체일 것이다.
즉 내선일체의 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황국신민의 서사 중 제2조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즉 이것이 완전히 지배됨에 의하여 내선일제가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즉 내지인, 조선인은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여 협력하고 굳게 단결하여야 이에 내선일체가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둘째로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오로지 정신적 작용으로서 결코 외면적 행정으로는 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 같이 천황폐하의 적자가 된 이상 우리는 형제이다. 형제가 된 이상 서로 믿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이에서 내선일체라고 하는 훌륭한 목표하에서 오해되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내선일체를 완전히 하려면 반도인이 할 역할, 내지인이 할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도인은 반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충분히 자각하고,내지인은 반도인에 대하여 신애(信愛)로서 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적상매(外的商賣)의 취인(取引)과 같이 교환조건으로 하면 언제까지든지 신(信)과 애(愛)는 완전히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도인으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일차별대우를 철폐하지 않으면 내선일체는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에 다소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다. 차별대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의 차별대우가 생긴 원인은 능률의 차별이 원인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도인 개인 개인에 대하여 어떤 내지인 개인과의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반도인은 단체생활에 이르러서는 내지인에 비할 수 없는 것은 누구든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단체생활을 완전히 함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 것이다. 제1은 책임감, 제2는 공덕심(公德心)이다.
이 두 가지의 요소가 결여되면 단체생활은 원만히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도인이 일본인에 비하여 단체적 능률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오로지 반도인이 책임감과 공덕심이 결핍한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반도인이 책임감과 공덕심이 일본인과 같게 되면 차별대우라는 것은 자연 철폐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반도인이 이 차별대우를 철폐하여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단체생활의 요소인 책임감과 공덕심을 하루라도 속히 함양하여 일본인의 수준에 달할 것이 반도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반도인이 각 방면으로 단체생활에 있어 내지인에 지지 아니한다고 하면 이 차별대우라고 하는 것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그러므로 금일 반도인으로서 이 차별대우를 철폐하지 않으면 내선일체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상매적(商賣的) 취인(取引)일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할 것을 충분히 하면 자연이 이런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지인은 이른바 무사도(武士道)의 기풍이 풍부하므로 반도인으로서 성심성의 천황폐하의 적자된 본분을 다하는 이상 결코 반도인에 대하여 차별대우를 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이상은 반도인에 대하여 말하였으나 또한 내지인 측으로도 생각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반도인은 물론 그 단체생활이 일본인에 추급(追及)지 못하나 개인으로서는 확실히 그의 능률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관공리에 자꾸자꾸 채용하여 그의 능률이 있는 자에 대하여 결코 차별대우를 하지 말고 선처할 것이다. 내선일체는 지금 내지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일본제국이 각하(刻下)85)의 중요문제라고 하는 것은 내지 뿐만이 아니라 반도인으로서도 중요문제인 이상 내선이 일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오직 정치적 경제적 법률적의 일체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신적으로 일체가 되어 황국신민서사의 제2조를 실행실현하기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될 줄로 생각하는 동시에 또한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출전 : 尹致昊, 「內鮮一體에 對한 理念」, '朝光' 第6卷 13號, 1940년 3월, 48~49쪽>
85) 시각이 다급한 이때. 바로 지금.
16. 이동화(李東華)
1) '국방과 조선인'(1933) 발췌
서(緖)
일본의 위기는 왔다.
일본은 세계에 대해 무장해야 한다.
나는 십 수 년 동안 ‘일선일가론(日鮮一家論)’을 외쳐왔다.
그 ‘일선일가론’도 마침내 무장을 실행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음을 느낀다.
나는 일본의 위기를 맞이하여 일본 국민의 불타오르는 듯한 조국애의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조국애가 있는 한 일본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서 나는 조선을 생각한다.
거기에는 위미(萎微)·침체한 조선인의 무기력과 소아병적, 반일 조선인의 광조(狂燥)가 있다.
일본의 위기가 실현되었을 때, 하나의 폭탄이 그들에게 주는 맹아적 충동의 위험성을 나는 거기서 본다.
일본의 위기를 맞이하여 이 위험성은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나는 외친다.
조선인을 무장시켜 조직하라.
무장이란?
동포애다.
동포애란?
“일본을 지켜라”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그렇다.
“일본을 지켜라”라는 슬로건을 높이 치켜들고 나는 조선인을 무장시키기 위해 일어선다.
이 책은 그 기념탑이다.
‘일선일가론’으로 무장해서 나는 새로이 여기서 출발한다.
도쿄 고마역(駒澤)에서 이동화
그렇다면 나가라, 나의 책이여
기회가 그대를 인도하리라.
조선인의 병역의 의무
1.
1935년을 기점으로 한 국방의 위기!!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전 일본의 위기이자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위기에 다름 아니다.
다난한 이때에 나는 경종을 난타하며 외친다-“우리 조선인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여하라”-라고.
그러나 내 주장은 딱히 현실의 전쟁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고, 또 다가오는 위기를 앞에 두고 하는 기회주의적인 제언도 아니다.
“위기다!! 국가존망의 위기다!! 평화냐 전쟁이냐”……들끓어 오르는 거친 외침이 이전부터 품고 있는 이러한 내 주장에 박차를 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건대 다가오는 위기에 대한 대책은 조금의 의심과 주저도 정체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주위의 국제정세는 긴박한 상태이다. 그리고 도전에 대한 대책은 딱히 현실의 싸움으로 응수하는 것이 최상일 수는 없다.
요는 준비다.
도전에 앞선 준비다. 국민의 충분한 준비가 있어야 비로소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 속에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국방의 충실은 상대국의 전의를 잃게 하고, 미연에 전쟁의 참화를 막을 수 있음을 몇몇 과거의 역사, 그리고 최근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조선인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여하라”고 제언하는 것이다.
대체 어째서 우리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담시키지 않는 것일까?
2.
작금 국가를 형성하고 그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정무 비용을 부담하고 대가를 지변(支辨)할 목적으로 인민들이 재력 또는 노력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있으면 국가가 있다. 집에는 가족이 있다. 가족을 돌봄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된다.
따라서 각자 국가에 대해 정무 비용·대가의 의미에 있어서 조세를 부담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며, 게다가 일본인은 조세 외에 병역의 의무를 부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선인에게만 이를 부과하지 않고 있다.
신민(臣民)이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자격에 있어서 한 목숨을 바쳐 국가의 무력을 구성하고 국가의 운명을 그 두 어깨에 짊어져야 하는 당연한 의무에서 우리 조선인은 제외되어 있다.
어째서 우리는 병역 의무자일 수 없는가?
우리는 그 의무자의 자격, 혹은 능력에서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일까?
1910년 합병의 조서(詔書)에 “본디 고질적으로 나약하고 피폐함이 극에 달하면서 만회할 가망이 없다”며 무한한 애수를 담고 섬나라 일본과 반도 조선은 서로 합쳐 하나의 나라가 된 이래 일본제국은 일본 내지인(內地人)만의 제국이 아니라 일본인·조선인이 일치단결해서 형성하는 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조선 두 민족이 동종동근(同種同根)임을 긍정하는 이상 우리는 징병의무에서 제외될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다.
1919년 이른바 3월 소요사건 이래 벌써 15년. 그동안 헌병제도를 철폐하고 또 무차별 대우를 선고하거나 언론과 출판의 자유, 정담(政談)집회의 개방 등 감사해야 할 수많은 시정(施政)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징병 응모의 권리를 주어서 의무를 짊어지게 하지 않는 것일까?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표방한 이래 역대 당국자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일이 과연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점에서 우리가 그런 자격을 결여하고 있었을까?
대체로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A. 전한시대(前韓時代), 요상한 명목하에 부과된 각종 가혹한 정치의 부담으로 인해 곤비피폐(困憊疲弊)가 극에 달한 민족이기 때문에 단지 조세만 부담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거기다가 혈세를 내도록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온정주의적 이유로 내 제안을 거부한다면 나는 그 근거가 너무나 빈약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극소수의 특수 계급을 제외하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오늘날 경제적인 실상에서 보건대 적령기청년을 징집하는 일은 남아 있는 대가족들 입장에서는 그보다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에게만 해당되는 실상일까? 조선의 일반 대중의 생활과 일본 내지의 그것 사이에 징병의무의 존부
(存否)의 구별을 둘 만큼, 그만큼 큰 격차가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징병제도 발포이래 실제로 오랜 역사를 지닌 일본 내지인조차 경제적인 이유에서 징병 기피를 시도하려는 장정들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도리어 국내 일반에게 공평하게 징병의무를 부과한 뒤 경제적인 이유에 따른 병역 면제 제도를 두든가, 아니면 입영 가족에 대한 보증제도(딱히 실제로 금전을 지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를 두든가,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병역·징병이란 널리 일반인에게도 언제든 군대를 조직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러한 경제적 이유를 배격하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서 따르는 데 병역의무의 위대함·존귀함의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무릇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는 작은 목적을 포기해야 함은 진리이다.
B. 다음으로 “종래 방종하고 무규율에 익숙한 탓에 기풍이 연약하고” 따라서 “의무의 관념이 희박하고 투안주의(偸安主義)86)에 타락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바로 병역을 부과하는 것은 통제된 제국 군대
86) 할 일을 미루어 주고 눈앞의 이익과 안일함만 탐닉하는 것.
의 규율을 해치고, 제국 군인의 진가를 실추시키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불이익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특히 엄격한 병역을 부과함으로써 일어날 원망과 탄식의 소리는 이윽고 서로 모여 일단 완급의 경우 반역을 도모하고 ‘조국회복운동’·‘독립운동’ 등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편견, 이는 일상적으로 일본내지의 잡지 등에서 우리 조선인을 비평할 경우 종종 볼 수 있는 것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조선인은 멍청하기 때문에 안 돼”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말들은 우리로서는 참을 수 없는 조소와 모독의 말이긴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징병 범위 밖에 내버려 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가령 이러한 말을 감수한다 해도 태만 혹은 투안주의라는 전제하에 곧바로 규율적인 군대생활을 해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현저한 논리의 비약임을 간과할 수 없다. 태만하기 때문에 도리어 통제적인 군대 교육을 실시해 의용정신을 진작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부단히 무사도적 정신을 고취해 우정과 국민적 연대감과 희생정신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투안주의라고 해서 이를 방임한 채 돌보지 않는 것은 현명한 위정자가 결코 취해서는 안 될 태도일 것이다. 평시에도 그러할 진대,하물며 비상시의 심각성을 통감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음으로 이제 와서 새삼 반기를 들고 독립을 도모해서 1907년 이전 못지않은 불안한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과연 있을까?
다만 이때 우리는 일찍이 몇 차례 반복한 비굴함과 음모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동양에 일본이 있기 때문에 동양의 나라들은 지금까지 백인 오랑캐의 유린을 벗어날 수 있지 않았던가?
일본이 세계의 외교무대에서 모습을 감추는 것은 우리 동양 민족들이 서구 국가들에 대한 예속을 의미한다.
그럴 경우 아무리 자유를 외치고 독립을 도모한다 해도 그들의 인종적 멸시의 압박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동양의 맹주 일본의 위기는 전 동양인의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민족주의의 오류를 청산하고 국민주의의 정의 아래 그리고 정의 일본의 깃발 아래 단결할 때가 온 것이다.
일본인과 일치협동해서 위기에 맞서라!!
그리고 우리에게도 전쟁터의 발판을 부여하라!! 그것이야말로 동양인으로서의 조선인을 영원히 유지하는 단 하나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총후(銃後)의 치중(輜重)87)이 되는 일조차 허용되고 있지 않다. 일찍이 이토(伊藤)88)공의 보호정책 시절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고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무장을 해제한 일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오늘날과 같이 비남성적인 것으로 만들어 항쟁적 정신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따라서 무기력한 조선인은 이제 도적·강도의 재앙에서 자기 자신의 가정을 방어할 힘조차 잃게 되었다.
그리고 외국의 침략도 국내의 폭동도 일본 군대의 힘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옹호하는 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인을 거세하는 것-이것이 한국 군대 해산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조선통치의 근본방
87) 군수품.
88)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침일까?
일본인에게는 군국사상을 고취하고 조선인은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대정책을 이론에서 실천으로 옮긴 자세일까.
지난 7월 2일 경성에서 벌어질 예정이던 센슈대학(專修大學)·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대 조선 클럽의 권투시합을 갑자기 중단한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신성한 스포츠를 모독하면서까지 조선민족의 항쟁심을 억압하는 고식적 태도가 진정한 융화정책의 표현일까.
위기는 다가왔다.
의혹과 위구(危懼)를 영원히 버려야만 비로소 일선일치(日鮮一致)와 국방의 충실을 기대할 수 있을것이다.
일본인이여, 그리고 일본의 위정자들이여, 20여 년 전에 품고 있던 편견을 언제까지 갖고 있을 것인가! 우리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위구의 생각을 기꺼이 버릴 때가 바로 지금이다.
조선인에서 패기를 빼앗고 또 병역의 의무를 부담시키지 않는 것은 백해무익한 제도다.
식민지군을 편성하지 않은 독일은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식민지군을 편성한 프랑스는 식민지의 안전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멀리 유럽전선에 출동시켜 부족한 프랑스 장정들을 보완했고 ‘루르’ 지방점령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리고 인도를 보라. 영국인 한 명에 대해 인도인 약 3명의 비율로 조직한 인도군은 북청사변(北淸事變)과 유럽전쟁에서 본국을 도와 혁혁한 무훈을 세웠고, 지금은 중국 각지에 주둔해서 본국 병사를 보조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인도인은 사관 이상이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우리 조선인은 일반 병역은 부과되지 않았지만 사관학교에 입학해서 장교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겠는가.
C. 마지막으로 나 자신조차도 가장 큰 장벽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언어의 차이다.
그러나 이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1) 전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조선 장정들에 대해 조선어에 의한 특별 군대교육을 실시할 것.
(2) 군대교육 실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미리 ‘국어’89) 교육을 실시할 것.
(3) 군대교육 실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국어를 이해하는 자만 징집할 것.
(1)의 경우는 특히 조선인 부대로서 조선인만으로 하나의 단체를 조직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2)의 방법은 지금 당장 실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조선통치에 관한 동화주의와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3)의 수단은 징병제도의 근본정신에 반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원의 길을 열라!!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현재 이미 그 길은 열려 있다-육군사관학교·유년학교·공학학교·비행학교·통신학교 등에 입학 지원을 함으로써 장래 제국 군인이 될 수 있다-라고 말이다.
89) 일본어.
이 모순된 제도를 보라!! 지원함으로써 우리는 장교가 될 수는 있어도 국방의 기초인 일반 군인이 될 수는 없는 현 상황이다.
나는 지금 하나의 모순된 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무릇 그 어떤 나라에서도 방비제도와 경찰제도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자는 대외적으로 일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이고, 후자는 대내적으로 국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제도이다.
따라서 식민지에서는 이 양자를 분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우리 조선이 식민지인지 일본 내지의 연장인지는 여기서 논할 수는 없으나 1919년까지는 방비와 경찰은 모두 동일 기관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현재 경찰권에 채용되어 있는 일본 내지인과 조선인의 숫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총독부요람 1933년도
경시 경부 경 부 보 순사
내지인 46 내지인 338 내지인 591 내지인 9,761
조선인 9 조선인 86 조선인 154 조선인 7,913
합계 내지인 10,751명, 조선인 8,162명
한 나라의 통치에 있어서 순치보거(脣齒輔車)의 관계에 있는 경찰과 방비 사이에 이처럼 큰 격차가 있다.
즉 경찰제도에서는 일본 내지인과 거의 같은 숫자의 조선인이 채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명의 조선인도 병역 지원이 허용되고 있지 않다.
‘태만한 성질’은 경찰관이 될 자격은 있어도 군인이 될 자격은 없다는 것일까?
‘투안주의’는 경시(警視)는 될 수 있어도 일개 병졸은 될 수 없는 것일까?
언어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영구히 방바닥 위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일까.
반역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우리 조선인은 전쟁터에서 쓰러져 죽을 수 있는 명예를 영원히 갖지 못하는 것일까.
전쟁만이 능히 누가 선천적으로 전사인가를 보여준다. 오로지 전쟁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용감한 전사와 바닥짐에 지나지 않는 오합지졸을 구별할 수 있다.
“적에게 맞아 죽는 것 이상으로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이상과 같이 가치 없는 이유로 우리에 대한 병역의 실시를 주저하기에 앞서, 일본 국민도 위정자도 모두 유럽전쟁의 비참한 종막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장정들의 부족으로 이미 부녀자들이 전선으로 출동하게 되지 않았는가.
일본에 장정이 부족한 경우를 상상해 보라! 그때에야말로 오히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엄청난 위험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극동의 풍운이 위급함을 알리고 있는 오늘날, 일본에 장정이 부족한 경우는 절대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저 막연하게 1936년의 위기를 외쳐서 국민들을 동요시키고 국민을 불안의 나락에 빠트리기 전에 먼저 조선민족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해서 위기에 대한 준비를 하라!!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담케 하라!! 일본제국 발전을 위해, 그리고 이와 동시에 조선민족 발전을 위해 일본인의 위기는 곧 조선인의 위기다.
1936년 일본의 위기를 목전에 두고 나는 다시 경종을 난타하며 절규한다.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라!
일본제국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하여.
내선일치(內鮮一致)하여 외적에 대적하기 위하여.
그리고 눈앞에 다가온 위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섬나라 일본과 반도 조선!!
일본 예찬
일본을 예찬하라.
서양숭배는 이미 과거의 꿈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세계에서의 일본의 위압적인 모습을 보라.
국제연맹의 탈퇴는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세계는 일본에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아메리카는 어떤가.
저 대함대는 쓸데없이 태평양으로 회항해서 일본에 허무한 시위를 하는 데 그치고 서둘러 대서양으로 귀항을 표명했다.
이것이 일본의 무위(武威)에 대한 항복적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그 여성적이고 비굴한 정략(政略)을 보라.
소비에트 러시아와 결탁해 일본에 대한 협격(挾擊)을 감행하려 한다.
게다가 그 소비에트 러시아는 어떤가. 만주 북쪽의 국경 가까이에 20여 사단을 집중시켜 불과 두세 사단도 되지 않는 일본군의 위압에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은 어떤가.
인도에 대한 일본 상품의 진출은 대영국의 심장부 랭커셔에 궁사적(窮死的) 비명을 지르게 하고 있다.
공장에서의 영국인 6명의 작업을 일본인은 2명의 작업으로 처리한다.
일본인의 이 힘.
이런 사실은 일본의 세계경제에서의 군림적(君臨的) 상징이다.
지금 일본 상품은 세계의 모든 상품을 차버리고 홍수와 같이 세계의 시장에 흘러들어가고 있다.
일본은 세계에 군림하고 있다.
예찬하라. 일본을. 세계의 태양을.
그리고 조선이여 비상하라. 태양을 향하여.
사나운 독수리는 눈을 뜨고 태양을 향해 돌진한다고 한다.
조선이여. 태양을 향한 사나운 독수리가 되어 비상하라.
일본은 세계의 태양이다.
뜨거운 태양의 빛은 그 정신력에 있다.
묘행진(廟行鎭)의 3용사의 호용과감(豪勇果敢)한 행동을 생각하라.
인간이 수류탄이 되어 적의 철조망을 폭파한 것이다.
정신일본의 극치. 노기(乃木)90) 장군의 피는 여기에도 흐르고 있다.
음력 17일의 달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는 밤이었다.
돌격진지는 적의 100미터 지점부터 개척되었다. 파괴통(破壞筒) 토낭(土囊) 준비를 마치고 파괴대 전원 36명은 은밀히 전진하기 시작했지만, 적이 눈치를 채고 맹렬하게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
총 공격시간인 5시 30분은 눈앞에 다가왔다.
달 그림자가 희미해지면서 동쪽 하늘이 붉은 색을 띠기 시작했다. 날이 밝으면 만사가 헛일이다.
마지막 돌격이다.
전진 명령이 떨어졌다. 20미터 앞에는 정면과 좌우에 엄폐물로 가린 기관총이 3문, 불을 뿜으며 사격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줄줄이 쓰러져갔다. 한 병사가 홀로 대나무로 된 파괴통에 점화해서 어깨에 메고 뛰었지만 수십 미터 달린 뒤 애석하게도 쓰러지고 말았다.
“마지막 파괴다.”
피를 토할 것 같은 비통한 외침이다.
이 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세 병사가 4미터의 대나무 파괴통에 점화한 뒤 세 명이서 들고 뛰어나갔다.
이 경우 이들 세 명은 폭탄과 함께 뛰어들지 않으면 절대 보병로를 개척할 수 없을 테니 자신의 육체를 폭파해서 철조망을 파괴하자는 약속을 미리 한 것이다.
세 명이서 어깨에 둘러멘 이유는 누가 한 명 쓰러지더라도 나머지 두 명이 뛰어들고, 두 사람 중 한명이 쓰러져도 마지막 한 명은 철조망을 폭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병사는 철조망에 부딪칠 때까지 한 발의 적탄도 맞지 않고 완전하게 목적을 수행했다.
동시에 큰 폭음이 일어나고 커다란 살덩이가 쿵 하며 8~9미터나 솟아오른 뒤 떨어졌다.
세 병사가 수류탄이 되어 철조망을 폭파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이다.
“돌격로가 뚫렸다.”
하는 함성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중국군을 향해 쇄도했다.
조선이여. 이것이 일찍이 그대와 같은 선조로부터 피를 나눈 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 조선이여. 그대의 혼은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다.
90)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 : 육군대장. 청일전쟁·러일전쟁에 참전했다. 메이지천황이 사망했을 때 부인과 함께 자살함.
그러나.
나는 세계의 태양, 일본을 낳은 어머니인 땅을 부러워한다.
기후에 자극이 없기 때문에 주민의 정신을 타락시킨 하바나 군도(群島).
동양의 하바나 군도-조선.
거기서는 조선인이 열등화 되어 있다.
풍토의 혜택을 입지 못한 조선.
일본은 섬나라이다. 섬나라이기에 산의 나라이고, 산의 나라이기에 변화가 풍부하다.
일본은 섬나라이기에 바다의 민족이고, 동시에 산의 민족이며 늘 산과 바다에 도전한다.
상무의 기풍은 여기서 일어난다.
일본의 경도는 남북으로 길다. 남북으로 긴 나라는 동일원리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민족은 이론보
다 실행으로 치닫는다.
그것이 일본의 모습이다.
바다의 변화. 산의 변화. 일본은 자연으로부터 실로 많은 것을 배운다.
일본인은 미술에 대칭(symmetry)을 좋아하지 않는다. 서양인이 트럼프 모양을 똑같이 하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인은 화투의 쭉정이 패까지도 같은 그림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변화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성격은 일본의 자연계의 반영이다.
일본인의 머리는 복잡하고 치밀하고 예리하게 될 수밖에 없다.
래프카디오 헌91)은 일본을 노래했다.
“여행을 하면서 나아갈수록 매일매일 토지의 경치 아름다워졌다……”라고.
지중해의 다도해를 예찬한 바이런이,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본다면 “자연의 궁전이여”라는 절찬
을 다도해에서 거두어들였을 것이다.
어머니인 대지의 혜택을 입지 못한 조선.
거기에는 산이 있다. 그러나 황량하게.
거기에는 강이 흐른다. 그러나 황량하게.
거기에 태어나는 초목에는 생기가 없다.
새소리는 쓸쓸하다.
사람의 혼도 비참한 몰골이다.
시인이 태어나지 않는 조선.
이것이 조선의 숙명일까.
나는 일본을 낳은, 어머니인 땅을 부러워하다.
<출전 : 李東華, 「緖, 朝鮮人への兵役の義務, 日本禮讚」, '國防と朝鮮人',
東京:黃人社, 1933년, 1~3쪽, 53~70쪽, 96~104쪽>
91) 래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 일본에 귀화한 영국인 작가.
17. 이성환(李晟煥)
1) 내선일체는 먼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5가지 운동
대동광업(大同鑛業) 서무과장 이성환
1. 정신적으로는
1) 흥아(興亞) 원리의 일원화 운동
2) 국민사상의 일원화 운동
2. 제도상으로는
1) 의무교육 실시 운동
2) 징병제도의 실시 운동
3) 참정권의 부여 운동
<출전 : 李晟煥, 「內鮮一體は先づ何から始むべきか-五つの運動」, '綠旗' 第4卷 8號, 1939년 8월, 33쪽>
18. 이영근(李泳根)
1) 국체생명으로 살아가는 자
이영근(李泳根)
일인지천하(一人之天下)
국체관념에 관한 근본적인 연구는 존귀한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국학자 중에 국체를 우롱하는 자가 있다.
이는 엄청난 망국의 짓이 아니겠는가.
천하를 나누어 ‘천하지천하(天下之天下)’와 ‘일인지천하(一人之天下)’로 구분한다.
일본은 일인지천하로서의 국가다. 국가 그 자체와 국가 성질의 구별이 없고, 따라서 국가와 국체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천하지천하로서의 국가는 세계 곳곳에 존재하지만, 일인지천하로서의 일본 국체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이자 만물에 비할 바가 없는 것이다.
천하지천하는 한 명이 넘어지면 전체가 분산되지만, 일인지천하는 늘 홀로 서서 움직이고 분산하는 성질은 갖고 있지 않다.
일본 국체의 형식 속에 독재주의 국가의 형식이 있고, 민주주의 국가의 형식이 있으며, 이를 두고 떤 이는 일본을 독재국가이라고 하고 민주국가라고 한다. 이는 일본 국가의 본의를 제대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얼굴은 모두 같은 숫자와 형식을 갖고 있으나 그 본연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 게다가 가장 좋은 얼굴은 가장 좋은 마음에 깃든다고 한다면 그 구별은 자연히 분명해질 것이다.
일본 국가의 본질은 일본의 마음 ˙ ˙ ˙ ˙ ˙ 에 있고, 일본의 마음이란 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며, 신의 마음이란 천황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천황의 나라이고, 천황 한 분의 천하인 국가이다. 그리고 천황은 국체이시고 그 국체에 우리 국민은 동질 분자로서 생성·발전하는 것이다. 천황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동일할 경우를 일본국체의 진정한 모습에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천황은 우리 생명의 중심이고, 따라서 우리 생명은 중심 생명이 있은 뒤에 생성한다.
우리 생명이 있어야 중심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 생명이 있어야 우리 생명이 있다.
독재국가의 중심 생명은 개체로서의 국민 생명이 있고 그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중심점을 그 국가의 대표자에게서 찾는다. 따라서 그러한 국가는 개체 생명이 죽으면 중심 생명도 더 이상 없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
우리 생명은 천황으로부터 파생된다. 천황의 생명이 발전하는 하나의 분체(分體)가 우리 생명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 생명은 늘 천황의 생명에 귀일한다.
조선반도에서 살아가는 자여
조선반도에 살면서 일본 국체에 삶을 누리는 자, 그 충성스러운 국민의식에 먹구름이 끼게 해서는안 된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일례를 들자면, 만약 조선의 민족 생명이 황민(皇民)으로서 생명을 향유함으로써 완전한 멸망을 초래한다 해도 우리는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일한합병은 일한 양국의 이해관계에 기초하는 공화국 결성이 아니라 일본 생명의 연장으로서의 조선 생명의 용해이고, 단지 이름뿐인 조선민족 생명이 단지 내실 있는 초민족 생명으로 바뀌는 데 있어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무겁부동(無劫不動)의 삶을 얻는 것이다. 우리 생명이 천황의 생명을 향유하는 것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형식 아래 여전히 존재하는 모든 그릇된 것은 사실 일본인·조선인을 불문하고 아직 국체의 본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의를 사랑하고 자신의 이익보다 민족의 생명에 중점을 두고, 일시적인 것이지만 참으로 괴로운 이른바 정의인(正義人)의 오해나 비방에 대해 인내할 수 있을 만큼의 마음의 용기와 살아도 국가를 위해,죽어도 천황(君)을 위해서라며 이미 체념의 경지에 도달한 자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저 자신의 양심이 명하는 대로 실행하면 된다.
이에 반해 자신을 기만하고 세계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습관과 역사를 종교화하여 이를 맹종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동양을 죽이고 세계를 죽음으로 이끌려고 한다.
게다가 이러한 일체의 행위준칙이 이해득실을 척도로 삼는 무리에게는 일본 국체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국체에 자신을 바치려는 자는 오늘날의 선각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반도에서 태어나 일본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자각을 갖고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신일본의 선각자이다.
선각자의 길은 좁아서 어리석은 자만이 잘 걸을 수 있다. 교언영색·영리영달을 추구하는 자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일본주의·내선일체론·동아협동체론 등을 설파하는 자들 중에 여전히 진정한 국체정신에 살아가는 자가 드물다.
반도의 천지에서 살아가는 정신운동자여! 절대 시대의 유행아가 되지 말라.
내선일체라는 간판을 장사 선전인 것처럼, 가증스러운 사교인(社交人)이 되지 말라.
다시 심사숙고해야 한다. 하나의 새로운 생명권을 창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지금부터 앞으로 나아가는 자여! 먼저 그대가 두는 낡은 옷을 눈물로 적신 뒤 벌거벗은 몸을 신명(神命) 앞에 바치고 영원히 거짓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출전 : 李泳根, 「國體生命に生きるもの」, '綠旗' 第4卷 9號, 綠旗聯盟, 1939년 9월, 24~25쪽>
2) 일본관의 확립 -조선의 입장에서
하본용남(河本龍男, 가와모토 타츠오)92)
일본 내지의 현 상황
나는 지금까지 일본이라 하면 일본 내지는 물론 사할린·타이완·조선을 포함하고 그 밖의 조차지·위임통치 지역 등도 포괄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는 문서로 나타나거나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거나 강연회에서 얘기를 하는 것 외에 일본 전국의 사람들이 누구나 깊이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입으로 전국이라 하면 반드시 이러한 지역들도 포함해서 머릿속에서라도 생각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일본 내지에 살면서 처음으로 놀란 것은 아직 일본 내지인 전부가 거의 일본의 현대 국가 인식에 철저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일본 전국이라 하면 십중팔구 일본 내지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언제나 전국××청년이라든가 전국의 ××라고 할 경우 그 사람은 모두 옛날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한편 야마토민족(大和民族)93)의 대륙적 환원이라는 것을 요란하게 외치면서 학자들은 놀랄 만큼 노력하고 있다.
야마토민족이 투란계 민족이라느니 몽고인에서 왔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일본민
92) 이영근(李永根)의 창씨명.
93) 일본민족.
족은 대륙으로 나가야 하고, 황국근성을 버리는 길은 일본인이 대륙적인 감정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원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야마토민족은 야마토민족일 뿐이지 우리 선조가 몽고인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반대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이런 학문적인 투쟁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또 이에 대해 언급할 만큼의 실력도 없다. 따라서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일본인이 황국근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이 몽고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상태의 일본 국민의 의식, 그중에서도 대륙적 의식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민의식으로서의 전국 의식조차 철저하지 못하다는 점은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여지가 있다.
나는 조선 출신이기 때문에 조선에 관한 일이라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고 언급해야 할 이유도 있으며 상당한 자신감도 있다.
조선의 입장
솔직한 고백을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전국이라고 할 경우에는 반드시 조선도 포함하기를 바란다.
전국민이라 하면 그 속에는 당연히 조선 사람도 포함되어 있음을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일본문화라고 할 경우에는 그 속에 어떤 부분에 조선의 문화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하면 굳이 그런 당연한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존경할 수 없다.
조선이라 하면 일본의 땅으로서 몸에 딱 달라붙는 정도까지는 아직 일본 내지인 자신의 사회에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는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다.
아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뜻있는 사람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은 군사상의 병참기지로서만 중요한 토지가 아니다. 인구·문화·사상 등 모든 방면에서 보더라도 등한시할 수 없는 곳이다.
첫째로 인구나 그 밀도, 또 인구의 번식률에서 보더라도 일본 내지와 거의 차이가 없고, 멕시코와 거의 비슷한 인구를 갖고 있다.
문화와 사상에서 조선인은 그리스적인 고도한 것을 갖고 있다.
느긋한 마음으로 유유자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나는 기회가 되면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일본 내지의 고대문화와 조선의 문화는 오늘날의 접촉 정도 이상이었다.
이를 나중에 일본인이 서양인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문제가 복잡하게 된 것이다.
내가 도쿄(東京)에 가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조선에 관해 물어보니 일본의 식민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관동주(關東州)나 남양군도(南洋群島)와 같은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신문의 용어에 아무렇지 않게 조선·일본이라고 쓰고 있다.
라디오 방송인이 조선청년·일본청년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외지청년단(外地靑年團) 운운하고 있었는데, 나는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라도 말하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듣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조선반도의 청년단을 운운하고 있다.
“식민지라 하시면 조선·대만(臺灣)을 말하는 겁니까?”라는 것이 항상 귀에 들어온다.
구별과 일체, 조건 의식의 배제
일본 내지인은 사물을 구별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을 구별하고 토지를 구별하고 역사를 구별하는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구별이 다양한 종류가 될 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원래 일본에는 하나의 구별밖에 없다. 그런데 다양한 구별을 하는 것은 일본정신에 어긋난다.
아무리 조선에서 우리가 일체를 운운해도 일본 내지는 일체란 무엇인지에 관한 이론조차 파악하고 있지 않다.
하물며 실천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현명한 관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성전(聖戰)에서 황군으로서 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전사(戰死)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어떤 군인은 그 사람을 칭찬하기를 “조선인이라도 이렇게 훌륭하게 전사하니”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그 사무관은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참으로 훌륭한 일본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이 사람에게 자연히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군인의 최후를 칭찬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 말 앞에 “조선인이라도”라는 조건이 붙는다면 그 예찬의 가치는 반감된다.
중국 군인을 칭찬하는 경우와 영국 군인을 칭찬하는 경우는 같은 칭찬이라도 그 내용이 다르다.
“조선인이라도”라는 조건은 제국 군인으로서 칭찬하는 것과는 내용이 다르다.
신문을 보고 떠올리는 것은 이(李)라는 남자가 훌륭한 행위를 하면 ‘반도인(半島人)’94) 모씨라는 제목을 붙인다.
반도부인·반도청년은 반드시 특수화된다.
그러나 시코쿠(四國) 사람이 선행을 했다고 해서 시코쿠인 ××씨라고는 결코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적당한 처치가 있을 수 있다. 이름을 거론하고 필요한 때만 반도 출신이라는 것을 넣어 두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어디 출신입니까?
조선에 건너온 사람에게 “당신의 출신은 어디입니까?”라고 물으면 “후쿠오카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 사람의 아이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로 “후쿠오카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부자 모두 후쿠오카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 사람의 아이는 분명 조선에서 태어났다.
그 아이의 출신은 당연히 조선이어야 할 텐데, 어째서 후쿠오카라고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일본 내지인이 조선에 건너올 경우에는 본적은 일본 내지에 두고 조선에는 거주신고를 한다.
이럴경우 출가라는 감정이 나온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일본 내지를 중심으로 사고하게 된다.
그것은 큰 입장에서 보자면 좋지 않다.
조선에 상당히 많은 일본 내지인들이 있지만, 그들은 모두 ××현 사람일 뿐,단 한 명도 조선인은 없다.
그 아이들도 모두 일본 내지인이다.
따라서 내지인과 조선인의 구별이 생기고 일체(一體)의 일본인은 생기지 않는다.
이는 매우 간단한 일이지만, 내선일체운동 등은 먼저 여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교육적으로도 매우 나쁘다. 조선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네 출신은 ××현, 너는 내지인이야”라고 가르치면 그들은 왠지 이상하게 생각한다. 본적이 경성 사쿠라기초(櫻木町) 8번지인 나카야마(中山安兵衛)라는 사람에게 출신이 어디냐고 물으면 그는 조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성이라고 말해야 한다.
94) 조선인.
조선·일본 내지의 인간적·지역적 구별을 철폐하는 것이 내선일체의 형식이다.
형식과 내용
일본 내지에 와 있는 많은 사람들이 김(金)이라는 성에서 유독 와카모토(若本)라는 성으로 바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본 내지인이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다. 조선옷을 입고 걷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어색한 일본옷을 입거나 아니면 아예 양장을 입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하면 여론은 이를 보고 내선일체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 내지인과 같은 성을 사용하고 같은 복장을 하면 친근감은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입는 것은 장래에 상처를 남기는 원인이 된다.
이런 형식은 마음의 교육을 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조심할 것은 일본 내지인의 이름을 사용하고 일본 내지의 옷을 입고 있어도 자신은 내지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 이 점을 특별히 유념해서 어설프게 사물을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형식은 근본에 이르는 첫걸음이지만 형식으로 내용을 규정하는 것은 경솔한 모험가들이나 하는 짓이다.
모험은 때로는 성공하지만 때로는 죽음을 가져온다.
조선을 공부하라
나는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郞) 박사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라는 서적을 읽은 일이 있다.
그 책에서 박사는 일본 내지인이 조선 연구를 등한시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한다.
박사가 그 연구에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를 고백하고 있다.
나 같은 사람도 가나자와 박사에게 동정하고 있는데, 참으로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 내지인은 조선 연구를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어느 날 히틀러 유겐트의 방일(訪日)단장이던 슐체 씨를 만나 조선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있다.
그의 질문은 참으로 면밀한 것으로, 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철저한 질문을 했다.
이는 외국인의 질문이지만, 나는 아직 일본 내지인들로부터 이만큼 예리하고 상세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없다.
일본내지 전부가 조선을 다 알고 있어서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국가를 위해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인이 진정 일본정신을 철저히 갖고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내지인들 중에도 진정으로 조선에 관해 알고, 또 알고자 하는 열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양쪽 모두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중요한다.
‘전국’의 정의
전국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데 있어서 참으로 기쁜 발견이 있다.
스기모토(杉本) 중좌의 유고(遺稿)인'대의(大義)'에서 “일본이란 천황폐하의 어심(大御心)이 미치는 곳, 곧 일본이다”라고 말한 것을 발견했다.
나는 참으로 탁월한 명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 사람이다”라거나 일본 내지인·조선인을 형식주의로 구별하는 편협한 마음으로 일본에서 살고 작은 일본을 만드는 것보다 한걸음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 커다란 마음, 커다란 일본에서 살고 폐하의 어심이 미치시는 곳을 생각하고, 어심이 미치시지 않는 곳이 과연 지상에 존재하겠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전국이란 천황폐하의 빛이 빛나는 곳의 땅이다. 그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폐하의 적자(赤子)를 어찌 사심을 갖고 구별하고 어찌 서로 차별 관념을 갖고 깔볼 수 있겠는가!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인연
내선일체 운동이 점차 높은 단계로 나아감에 따라 해결되어야 할 구체적인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언어의 문제, 생활 형식의 문제, 역사와 전통의 문제, 경제 생활상의 대우 문제, 교육의 문제, 징병제도의 문제, 정치상의 권리문제, 종교의 문제, 외지에서의 일본인과 조선인의 문제, 최근에는 성씨의 문제,일본인과 조선인의 결혼문제 등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나는 이런 문제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문제의 근본에 우리는(일본인·조선인) 결국 서로 아무리 두렵고 함께 될 수 없는 현실에 봉착해서 함께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결국에는 하나가 되어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공동체적인 운명에 서 있다.
또 이 운명이 노력 없이 나타나는 자연법칙 같이 완전히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세상에 이렇게 살지 않으면 모두 함께 죽을 것이라는 큰 암시를 주고, 이 암시에 세계의 인류를 살려야 하는 사명을 포함한 당위성이 있음을 깨닫는 마음이 있으면 충분하다.
새로운 세계관, 일본관으로서의 내선일체
이렇게 생각하면 내선일체론은 결국 세계사의 문제가 되고 인류사의 문제가 되며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세계관이나 인생관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세계관·새로운 인생관이 생기게 된다.
내선일체란 일본 내지인에게만 편리한 것도 아니고 조선인의 불평을 만족시키는 것만도 아니다.
일본 내지인도 조선인도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 최근 논단에 나오고 있는 내선일체론의 대부분은 하나같이 조선식이고 식민지성을 탈피하지 못한 느낌이다.
일본 내지인이 더욱 크고 넓어져야 하는 것처럼 조선인도 더욱 더 크게 되어야 한다. 이웃 일본 내지인이 내게 “센진(鮮人)”, 혹은 “여보”, “어머니”, “기집애”, “센진 주제에”, “센진 따위가”라고 하거나, 같은 공부를 하고 같은 학교를 나와도 자신의 월급이 일본 내지인 월급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데 무슨 내선일체냐고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결국에는 불평만 늘어놓는 불쌍한 사람이 될 뿐이다.
일본 내지인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이렇게 우리가 고생해서 조선을 좋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무슨 불평이냐며 화를 내봤자 소용없다.
오른손을 다쳐서 움직일 수 없는데 화가 난다고 해서 그 손을 때리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본’을 생각해야 한다. ‘일본’에서 살아가야 한다.
일본의 생명을 향유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일본을 잊은 일본 내지인의 생각도, 일본을 잊은 조선인의 생각도 모두 건설성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일본 내지인이 될 필요는 없고 또 조선인이 될 필요도 없다. 일본인이 되면 된다. 일본인!
세계·일본
일본을 철저하게 생각하면 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를 철저하게 생각하면 일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팔굉일우(八紘一宇)란 야마토일우(大和一宇)이다. 세계란 일본을 말하는 것이고, 일본이란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과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세계이고 세계의 일본의 문제이다.
이로써 우리는 결국 원래 자리도 돌아왔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가 곧 세계이다.
얘기가 다소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지만, 공자의 ‘입지(立志)’란 세계관의 확립을 의미한다.
공자의 5척의 작은 체구는 능히 우주를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무리 빠른 속도로 세계를 둘러보아도 그 전부를 볼 수는 없다. 일본 전국을 걸어 다니는 일도 불가능하다.
우리 모든 것은 한정되어 있다.
이 한정된 것 속에서 전부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면 결국 이 한정된 선을 돌파하게 된다.
이런 경지를 깨달은 사람은 일본과 조선의 문제를 논할 경우 항상 일본 전체의 입장에서 말할 것이다.
일본의 문제를 논할 경우 세계의 입장에서 말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문제를 생각할 경우 일본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인은 세계를 알아야 한다.
일본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조선 자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조선을 모르는 일본인, 일본을 모르는 조선인, 세계를 모르는 일본인, 일본을 모르는 세계인,이는 모두 불구자이다.
완전한 사람이란 보편에 살고 특수에 끝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일본관의 확립 -극복되어야 할 패러독스
앞으로 일본은 크게 된다. 참으로 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신념을 만방에 비할 바 없는 국체(國體)의 자랑과 함께 늘 품고 있다.
이 일본이 크게 됨에 따라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일본관을 확립해야 한다.
새로운 일본관 없이 새로운 세계는 오지 않는다. 동아신질서 위에, 아시아의 여명에, 세계의 종말에 새로운 일본관이 수립되어야 한다.
군부(軍部)에 일본관이 있다. 정부에 일본관이 있다. 그러나 국민에게-국민의식에, 국민생활에-세계를 지도하고도 남을 일본관이 있는가!
조선인의 생활에 일본관이 구체화되어 있는가! 옹졸하고 어리석은 불평을 늘어놓는 노예근성의 생활을 청산하라.
그리고 서로 이때 일본관을 수립하라. 새로운 일본관을 건설하지 않을 텐가.
관리들이 해주겠지, 정부가 만들어 주겠지, 군이 보여 주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가만히 않아 있을 텐가.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큰 사명을 지닌 자, 새로운 깃발을 세우는 자-일본의 생명을 살아가는 자가 해야 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모두 배제하자. 국민의 뇌는 침묵하고 있는 자가 오히려 더 잘 알고 있다.
주절주절 지껄이며 돌아다니는 자 중에서 제대로 된 자는 없다.
우리는 서로 더 사랑하고 서로를 더 이해해야 한다.
이상으로 본 논고의 취지를 이해했으리라 믿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일본관은 요컨대 새로운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내가 생활하는 한정된 루트를 완전하게 활용하고 또 그 한계선을 돌파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루하루 우리 개인생활이 중요하다.
우리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가 모두 우주의 생명과 맞닿아 있다.
이런 의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자신·국가·세계라는 세 개념에 모순은 없을 것이다.
새로운 일본관은 개인생활의 완성, 국민생활의 확충, 일본적 세계관 및 세계적 일본관의 확립에 이르러 비로소 건설된다.
터무니없는 허풍을 떨지 말고 국민 전체의 처지를 잊지 말고, 일본 국체의 영원한 생명력을 믿고 성실하게 부여받은 ˙ ˙ ˙ ˙ 일에 정진하여, 구애받지 않고 헤쳐 나가는 ˙ ˙ ˙ ˙ ˙ ˙ ˙ ˙ ˙ ˙ ˙ , 패러독스를 극복한 사람만이 새로운 일본관을 창건할 수 있는 일본인이다.
감격스러운 황기(皇紀) 2600년을 맞이해 우리는 건국의 이상을 바로 이때 실현해야 하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일은 위와 같은 내용을 지닌 일본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스탈린이, 멸망한 히틀러가 무릎을 꿇고 무솔리니가 잘난 척 할 수 없는 일본관. 흑인이 기뻐하고 백인이 반성하며 황인이 재생하는 일본관. 이것을 수립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위대한 일본관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앞으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요구하는 일본관은 일본의 생명이 싹을 틔운 2600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이전부터 수립되어 있었다.
이 일본관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이제부터이다.
일본의 국민 전체가 이 위대한 역사를 잊지 말고 세계를 응시하며 일어났을 때 우리 일은 시작된다.
<출전 : 河本龍男, 「日本觀の確立-朝鮮の立場から」, '綠旗' 第5卷 1號, 1940년 1월, 22~28쪽>
3) 고대 내선일체
용감한 우리는 먼 옛날의 일본과 조선은 하나의 혼이었음을 긍정한다.
구차한 논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신념은 여기에서 안식처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자들은 대체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런 대담한 말을 할 수 있냐며 물을지도 모르겠다. 대답은 매우 명료하고 간단하다. 조선인의 마음의 형태는 먼 옛날부터 일본인 마음의 형태와 동일한 것이었다. 단지 그뿐이다.
일본의 신화는 말해주고 있다. 스사노오노 미코토(素戔鳴尊), 그 아들 이소타케루노 카미(五十猛神)를 데리고 소시모리(曾尸茂梨)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우리는 이를 사실로서 그대로 믿고 싶다.
기기(記紀)95)의 해석으로 묘한 이론이나 역리(逆理)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저 웅혼(雄渾)한 신화에 살아가는 신들이 일본 내지에만 내려와 저 좁은 바다(혹은 육지였을지도 모르겠다)를 건너지 못했을 리가 없다.
저 몇몇 섬들만이 천손(天孫)이 거주할 땅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역시 이 반도도 포함해서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 반도뿐만 아니다.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 이상이 어찌 이곳 반도뿐이었겠는가.
제주도 섬의 시초에 관한 전설은 아름답다. 거기에 나오는 ‘일본 마음의 전설’을 그대로 믿고 싶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날개옷 이야기를 그대로 하나의 것으로서 생각하고 싶다.
단군(檀君) 전설
95)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총칭.
을 비롯한 갖가지 인공적인 허설(虛說)을 배척하고 옛날 조선에 흐르고 있던 800만 신들의 생생한 조선을 그대로 믿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 발견되는 것은 일본의 마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단군 전설을 신화화하고 이를 조선의 정신적 중핵으로 삼아 연대를 붙여 5000년의 조선사를 창조하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가상하여 주(周)나라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노린 북방민족의 정치적 야심에 저항해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신도(惟神道)를 계속 유지한 일한족(日韓族, Kozeo-JapaneseGzonps)의 고투는 역시 이 일본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혈토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신화의 세계를 믿고 있는 그들의 활동은 역시 강했다.
조선에서 조선의 조선을 발견하지 못하고 중국의 조선만 보고 있는 우리는 거기에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일본의 조선이 멀리 신대(神代)로부터 이어지고 있음을 잊고 있었다.
우리는 이 망각에서 깨어나 조선과 일본이 한 마음임을 믿고 일본의 조선이 신대로부터 필연이며 또한 역사적으로 타당한 까닭을 알아야 한다.
조선에 신화가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없는 것이 당연했다.
일본에 저 존귀한 단 하나의 신회 이외에 신화가 또 있을 리 만무하다.
신화가 하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들여오고, 심지어는 중국에 몰락한 갖가지, 조선에서의 문화재는 어디까지나 ‘재(材)’에 머물고 그대로 문화가 되지는 않았다.
언어는 중국어와는 계통을 달리했다.
일본어와 중국어의 혼동된 방언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를 속언이라며 무시한 한어학자들에 의해 더욱 속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였다.
오늘날의 조선어는 우리에게는 분명 외국어다.
일본어의 학습은 외국어에서 모국어로의 복귀이다.
언어만이 아니다. 모든 생활재료가 그러하다.
신화가 역사의 세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명확한 형식이 필요하다.
이 신화를 이어받는 형식이야말로 그 신화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일본의 신화를 인황(人皇) 제1대 천황이 이어받을 때,저 웅대한 신화가 일본민족의 혈액이 되는 길을 열 수 있었다.
천양무궁(天壤無窮)·팔굉일우(八紘一 )의 정신·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96)로 표현되는 영혼의 작용, 이것이 일본 역사의 내용의 전부이다.
조선은 단군에서 기자로 인위적 가작(假作)을 시도했다. 일본인을 중국인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정치가나 특권계급의 자기옹호를 위한 음모였다. 서양제국에서 볼 수 있는 제왕 신성화 운동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일본 국내에 하나의 국가를 구성하려는 반국체(反國體)운동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실패했다.
가짜 국신(國神)을 제사지내는 사당의 일시적인 세력이라 할지라도 유현(幽玄)한 신대와 이어진 민초들의 마음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산의 신·바위의 신·풀의 신·물의 신, 온갖 신들을 특별한 형식을 갖추지 않고 섬기는 사람들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지식계급·위정자들은 그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참으로 행복했다.
일본의 남녀를 맺어주는 신들은, 자신이 낳은(조선의 민간어에서는 낳는다는 것을 ‘빚는다’고 한다.
이것은 맺는다는 의미이다) 신의 자식들을 시작으로 하게 되었다. 때문에 북방민족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는 조선에 오랜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가호(加護)와 관계가 이어진 것이다.
인연을 빚는 신화에서 출발한 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원래 그 마음이 하나였음을 알고 조선은 역사 이전부터 분명히 일본의 것이며, 일본 민족이 생활하는 곳이었음을 믿을 수 있었던 우리는 이제부터 다양한 역사의 흔적을 되돌아
96) 역대 천황들이 황위를 증명하는 것으로 물려받았다고 하는 거울·검·구슬 세 가지 물건.
보고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맺어졌는가를 탐구하도록 하자.
<출전 : 上田龍男, 「古代內鮮一體」, 'すめら朝鮮', 日本靑年文化協會版, 1943년, 26~30쪽>
4) 내선일체의 절대성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즉 최근까지 조선인 지식층을 중독시킨 단군신화가 얼토당토않은 허설(虛說)이라는 사실, 조선의 역사를 기자조선 이전부터 시작된다며 5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 또한 아이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신화시대는 곧바로 조선의 신화시대이며 조선에 유행하는 유사 신화는 사실은 신화가 아니라 매우 불확실한 동화나 혹은 일본신화의 분신인 전
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이런 사실에서 보건대 우리 조선의 혼의 기초는 일본 그 자체에 놓여야 한다는 것 등이다. 아울러 우리 세대에 이르러 고조선에서 신라에 의한 조선 통일까지를 조선에서의 일본 마음의 생활화시대라고 간주하고, 일본과의 소승적(小乘的) 싸움은 가정불화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 북방계 민족의 생활사상이 조선에 들어와 일본민족적 생활사상과 충돌·분리하는 징후임을 인식한다.
그리고 마침내 덴지(天智)천황의 조선에 대한 정책 변경으로 조선은 급속히 중국화하게 된다.
그렇지만 봉래(蓬萊) 들판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은 어디까지나 일본 마음과 일본인적 종교형식에 의해 계속 살아가고, 조선민심의 저류에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없다.
따라서 근본적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의 조선정책 변경의 원인은 일본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일본 외부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신라에 의한 조선 통일 전후로 도쿠가와(德川)막부 성립 전까지 조선에서 일본에 귀화하고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간 수많은 일본인·조선인 숫자는 역사적 기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실로 엄청난 숫자이다.
이 두 민족의 피의 교류는 정치적 교섭이 한산한 데 비해 너무나 격렬하고, 두 민족이 접촉하려는 본능은 신화적 마음의 원리를 무시하고서는 긍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며, 만약 신화가 하나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만큼의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민족결합의 본질적 인식에 있어서 세계 역사상 드문 사실이며, 두 민족은 형이상학적으로도 형이하학적으로도 하나이지 둘이 아님을 단정할 수 있다.
오늘날 내지인이라 불리는 자들 가운데 조선인의 피가 얼마나 들어가 있고, 조선인 중에 일본인의 피와 혼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가.
이것은 우리의 과학적 상상력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보더라도 오늘날까지 일본인에 반대하고 일본 국체를 불분명한 것으로 만들려는 조선인들은 사실은 일본인과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피를 지닌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인 및 대륙민족과 마음과 생활과 혈액이 같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덴치천황의 시대부터 메이지(明治)천황 시대에 이르는 내선분리(內鮮分離)는 동족의 슬픈 분리이며,커다란 시련을 견뎌내고 빛나는 일체(一體)의 희망으로 가득 찼음을 알게 될 때,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고 감개무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출전 : 上田龍男, 「內鮮一體の絶對性」, 'すめら朝鮮', 日本靑年文化協會版, 1943년, 70~72쪽>
5) 전통에 사는 생명 -제1원리 확정
1. 일본민족으로의 환원과 의지
조선반도에서 태어나 영혼은 대일본의 영원한 신대(神代)와 결부되어 있고 이상을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세계 건설에 두고 있는 청년, 그것은 근세 조선에서 용감하게 일어난 순수 일본청년들 그 자체이다.
그들은 현재의 생활에 명예와 감격과 이상을 갖고 참으로 올바른 일본인이라 자임하고 있다.
저자는 잠시 그 청년들의 대변자가 되고자 한다. 저자 스스로 이 명예로운 신일본 청년들의 행렬에 참여하는 영광에 감격하고 있다.
이하는 이 청년들의 목소리인 동시에 저자 자신의 목소리이며, 저자 자신의 신념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과거의 역사에서 강제적으로 우리 선조의 생활에 들어가 그것이 나중에는 제2의 천성을 창조하고, 이리하여 결국에는 혈액의 혼동을 초래한 중국적인 일체의 역사적 사실을 배격한다.
중국의 조선, 그것은 조선인을 영혼 없는 집시로 만들고, 모습 없는 유령으로 만들며, 생활력 없는 주검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 여전히 둥지를 틀고 있는 신라에 의한 조선 통일에서 이씨 조선의 성립까지 1,400여 년에 걸친 조선사를 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계속 주장해온 것이다.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에 불타는 늠름한 우리 선조들은 이 오랜 침략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다.
그 생명적 흐름은 아주 미미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영원히 멸망을 모르는 영혼이기에, 실로 신들끼리의 연결로 탄생한 것이기에 오늘날까지 면면히 일관되게 흘러온 것이다.
우리는 우리 현재의 존재가 이 역사적 사실의 소산임을 자임한다. 야마토노미코토모치에 순순히 따르고 영원히 천황의 덕을 사모하며 받들고, 가깝게는 일본생명의 한없는 발전을 위해 분투한 우리 선조들의 후예라는 자부심이야말로 중
국을 숭배하고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때로는 중국세력에 편승하여 일본부(日本府) 세력을 절멸한 반역적 정신, 혁명적 정신에 날카롭게 대립한다. 어떤 논자는 우리를 보고 일한족(日韓族)의 후예라고 한다.
그것도 좋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깊이 들어간 우리는 천황의 신민이라는 한없는 자부심에 감격하고 있다. 일본혼의 대륙적 발전의 고대적 표현이야말로 우리 현재의 정신력 그 자체이다.
우리는 지금 조국 일본에 복귀했다. 일본민족으로의 환원을 이룬 것이다.
일본 내지에 살고 있는 그리운 사람들에게 아버지·어머니·형·누이라고 외치고 있다.
위대하고 자비로운 아버지 손에 안겨 괴로웠던 과거 일들을 틀어놓고, 그칠 줄 모르는 애정의 세계로 몰입할 뿐이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충만해 있는 비(非)일본적인 모든 것을 행복하고 부드러운 동포의 힘으로 정화하고 떨쳐내고 싶다.
영혼의 포로가 자신의 영혼의 나라로 되돌아갔을 때의 격렬한 심적 동요와 감격, 그 속에서 지금 우리는 조용한 반성과 참회의 생활을 하고 있다.
중국의 조선, 그것은 우리의 원한 깊은 숙적이었다. 일본의 조선, 그것은 우리가 늘 그리워해온 고향이다.
중국적 조선에서 만들어진 신화적 전통, 강요받은 역사를 격멸하라.
대체 조선문화란 무엇이었던가.
조선의 전통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던가.
지금이야말로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정복당하면서 그것을 명예라고 느낀 중국적 조선인들의 학술과 사상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 거짓으로 인해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던가. 거짓, 거짓, 거짓의 조선이 지상에서 사라졌을 때, 일
본적 생명은 자연스레 열릴 것이다. 아니, 작렬하는 일본적 생명 앞에는 거짓 조선은 소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야심에서 모략적으로 가상한 단군신화를 그렇게도 당연한 신화인 것처럼 믿고, 이를 보급하려는 중국계 학자,
도교적 교의와 인생관에 의해 타락한 일본 무사도의 변형인 국선도(國仙道)를 조선문화의 정신적 본류로 보는 민족주의적 학도, 조선의 특수성을 맹신하고 5000년의 조선사를 단시일에 기교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조선의 일본적 성격을 무시하려는 반일본적 사상가들에게 우리는 전쟁을 선언한다.
그 모든 것이 허위이고 영구히 구원받지 못할 영혼의 타락임을 지적한다. 슬프고 애통하게도 현재의 조선이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외국이며, 현행 풍속과 습관이 외국풍이 많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다.
그것은 북방대륙민족 및 한민족(漢民族)에 의해 강제적으로 부식된 것임을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조선인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낡은 것은 그 진위 여부를 불문하고 끝까지 유지하려는 본능적인 무언가를 발견한다. 이러한 완고한 아집이야말로 오랫동안 외래적 사상과 생활에 의해 고통받아온 필연적 소산이다. 지금도 완강하게 조선문화의 특수성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자기 마음의 본능이 증명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조선문화·조선정신이라 불리는 것은 우리에게는 모두 외국의 것이다.
2. 대어심(大御心) 귀일(歸一)을 향한 싸움
우리는 오늘날 더욱 비약해서 또 새로운 서양적 국가관 및 인생관에도 도전한다.
즉 서양적 정신으로 조선에서의 신화시대의 연결을 의심하고, 자유주의적 인생관으로 조선 문제를 논하고, 공산주의 혹
은 민족주의 사상으로 조선을 유물화하거나 민족적 이원성을 주장하면서 유대인적 모략에 넘어간 사상가들을 격멸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아울러 우리는 '고사기'와 바이블97)의 사상적 격돌이 지금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지금 태평양에서는 참으로 올바른 사상과 근본적으로 타락한 사상이 새로운 세기의 질서를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조선의 문제도 필연적으로 이 성전(聖戰)과 관련되어 있고 우리주장 또한 이 격전에서 예리한 일본도(日本刀)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서 격리된 지식인의 고도(孤島)에는 저 사회에만 통용되는 독선과 공리공론이 많다.
우리는 이처럼 차단된 군중의 독선과 공리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
그들의 언동은 전부 묵살할 작정이다.
아무리 교묘한 이론이라 해도 그것이 허위인 이상 진전되고 있는 역사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끝내는 사라지게 될 최후의 모습이다.
우리가 바로 일본인이라고 절규하는 우리의 적심(赤心)은 아무런 세속적인 것을 바라지 않는 지상지고(至上至高)한 것이다. 행복이라든가 득실이라는 등의 공리주의적인 이념은 전혀 없다.
일본인이 되는편이 득이라고 해서 일본인이 된다든가, 일본인의 생활을 하는 편이 여러 가지로 편하다든가 하는 타산
적인 기분은 조금도 가질 수 없다. 민족주의적 정치운동의 청산이 곧바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의 입문은 아니다.
완전한 멸사(滅私),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변심-지고무상(至高無上)의 대어심(大御心)
97) 성경(聖經)을 뜻함.
으로의 귀일, 이것 없이는 일본인의 길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없다.
우리로 하여금 일본인의 길을 밟고 세계 인류의 지도자가 되어 황도(皇道)를 중외에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일본인이 될 수 있다면, 물론 우리는 더 없는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멀리 조국을 떠나 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시체, 산에 가면 풀이 자란 시체가 되어 이 몸, 이 뼈가 그 어느 산하에서 썩을지라도 천황 쪽을 그리워하면서 한없는 조국 일본에 대한 연심을 품고 조용히 쓰러지고 싶다. 설
령 우리 환경과 생활조건 등 모든 것이 우리에게 불리하든 이득이든 간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뿐만아니라 우리를 직간접적으로 유혹하거나 공격하고, 그리고 교활한 시대편승주의자로 타락시키려는 자가 있다면 그들과는 단호히 싸울 작정이다. 상대가 육친관계이든 동료·선배이든 간에 그 신분 여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끝까지 싸워서 이길 작정이다.
우리는 우리 전통과 생활의 제1원리를 신대(神代)에서 인대(人代)에 이르는 신화와 역사의 결부에 두었다.
우리 영혼은 물론 그 높은 근원에서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이 현실과 역사적 관련성을 무시해 존재하고, 역사적 생활관계와 무관하게 독립·독보하며 생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본인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일본의 신화를 빌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신화의 자식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 신화를 가장 올바르게 있는 그대로 이어받아온 일본 내지인들의 생활도(生活道)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불행히도 신화를 이어받을 수 없는 슬픈 생활을 해온 것이다.
신화에 살아가지 않았던 생활이기 때문에 중심이 없이 쇠약해진 것이다.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온 우리이기 때문에 이대로는 도저히 일본의 길로 들어갈 수 없다. 먼저 내 몸에 붙은 비일본적인
때를 깨끗이 씻어내야 비로소 올바른 일본의 길에 순순히 들어갈 수 있다. 여기에 우리 길이 있다.
우리는 일본 내지인을 우리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내지를 동경하고 그 벗을 연모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러한 기분 때문이다.
일본 내지의 동지·선배, 형제들이여! 우리를 인도해 달라, 가르쳐 달라, 채찍질 해 달라. 그리고 우리를 당신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길을 걸을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도록 신들에게 기도해 달라.
우리는 주인집 현관 앞에 서성이는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다. 과감히 사랑방에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당당하게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다.
용기가 없는 소심한 자는 우리가 사랑방에 들어가는 것은 평화로운 가정을 깨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상태의 조선인은 결코 사랑방에 들어갈 수 없다. 먼지를 털고 때를 벗겨낸 뒤 예의를 갖추고 사랑방에 올라가
야 한다.
올라갔을 때는 결코 그 집의 질서와 풍속을 깨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입장에 쉽게 동정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서양 시인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동정은 애정보다 먼 것이다.
애매한 동정보다는 오히려 엄한 훈련과 교육만이 조선인을 구할 수 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괴로운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진심을 의심하고 좀처럼 일본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어떤 다른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심으로 노력해도 일본인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근세의 자연과학적 사상에 중독된 사람들의 그러한 태도야말로 우리 행위를 의심하는 강적이다. 우리에게도 때로는 슬픔이 밀려온다. 그것은 우리 진심이 의심받았을 때이다.
조선의 움직임과 발전 모습만큼 이상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일본의 진정한 정신과 이상을 알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의심할 것이 없다.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보라. 우리 뒤를 잇는 젊은 청소년들을-지식의 고도(孤島)에서 살아가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그럴리 없다”라며 의심해도 그들은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며 당당히 진군하고 있다.
그들은 좋은 지도자의 좋은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성은 없다. 감정만이 그들의 행위의 동기가 된다.
그 감정이란 무엇인가. 단지 일본을 좋아하는 마음, 그뿐이다. 죽으라 하면 아무 말 없이 죽을 수 있는 마음이다.
쇼와(昭和) 무사도는 조선에서-이는 우리 신념이자 이상이다.
외적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 토지에서 새로운 생명과 더불어 일본 무사도가 일어날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보고 생각하라.
변경의 이민이 되어에조(蝦夷)98)와 함께 살고 나중에는 그 땅을 무육(撫育)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주둔시켰다. 에조의 동화인(同化人)과 조선으로부터의 귀화인은 야마토(大和)의 군대와 혼연일체의 심경으로 융화되어 그것이 고대정신으로 복귀함으로써 무사가 흥기하게 되었고 일본의 번영을 위해 공헌하고 일본 무사도의 전통을 수립하지 않았던가.
지금 조선의 산천은 일본생명이 약동하는 곳이 되었고 이름 없는 청년들은 대일본 청년의 자각으로 불타오르고 있으며, 이 땅에 거주하는 일본 내지인 또한 이 산천의 씨족신이 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일체가 되어 가까운 외적과 대치하고 있다. 일단 싸움이 일어나면 조선의 청년들도 천황의 방패가 되어 기꺼이 죽을 것이다. 산화함으로써 비로소 보람이 있는 목숨의 눈부신 활약도 있을 것이다.
대동아전쟁의 드넓은 전쟁터를 바라보라. 이미 우리 외침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진심을 보여줄 곳은 바로 여기라고 주장하는 양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을 장제스(蔣介石)도 보고 있을 것이다. 루스벨트·처칠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이상한 나라 일본을 다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그들의 적 일본을 인정하고 더욱 우리에
대한 반항을 시도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기이며, 싸움은 바로 지금부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조선의 백성이면서 여전히 우리 외침을 배신하는 자들이 결코 없지는 않다. 여기에 조선인 2,400만의 총력을 기울여 일본인으로의 연성(鍊成)에 매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44년 그것은 ‘반도인(半島人)’99) 모두 부름을 받고 싸움의 제일선에 설 때이다.
1946년 그것은 반도의 자식들이 모두 일본의 역사의 자식이 될 때이다.
징병제도과 의무교육제도, 이 두 가지 커다란 일을 떠맡고 조선은 지금 오로지 연성·연성에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성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우리 주장을 보다 강력한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세계 각국 모든 나라에서도 성취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던 국양(國讓)의 제전(祭典)이 지금 여기서 거행되고 있다.
전 인류가 수립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던 인간생활의 제1원리가 여기서는 훌륭하게
98) 고대 호쿠리쿠(北陸)·간토(關東)북구에서 홋카이도(北海道)에 걸쳐 거주한 사람들. 이민족으로 멸시를 받고 북방으로 내몰렸음.
99) 조선인.
확립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 있는 생명임을 믿고 제1원리 입증의 실체임을 알 때, “천황의 백성인 우리는 살아있는 보람이 있다”라고 외치고, 외치고, 계속 외치고 싶다.
<출전 : 上田龍男, 「傳統に生きる生命 -第一原理定る」, 'すめら朝鮮',日本靑年文化協會 版, 1943년, 133~1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