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 근대(영어: Liquid Modernity)는 후기 근대성의 성격을 분석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배경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기획과 체계가 더 이상 원래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애초에 여러 장르의 예술에서 모더니즘 양식을 비판하고 그것을 해체,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출발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근대성을 어떻게 평가하는 가와 맞물려 다양한 의견을 쏟아내었다.[1] 1990년대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가 몰락하면서 그 동안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졌던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져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다.[2] 포스트모더니즘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좌파의 여러 이론들마저 자본주의와 다를 것 없이 근대적 기획에 기여한다며 그 가장 큰 공통점으로 구조주의, 획일성, 목적론과 같은 특징을 들었다.
이러한 비판을 바탕으로 포스트구조주의와 같은 생각들은 구조의 해체, 다양성, 탈목적론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시대의 아방가르드마저도 시스템의 유지에 복무한다고 비판하면서 그로 말미암아 애초에 갖고 있던 전위성마저 상실하게 된다고 본다. 슬라보예 지젝은 아방가르드 예술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 지는 현상 자체가 이미 아방가르드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비판한다.[3]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역으로 근대성이란 무엇인지를 반문하게 하였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전통적인 근대성을 <딱딱한 고체>로 <현대의 근대성을 흐르는 액체>로 비유
하면서 현대를 후기 근대성의 시기로 파악한다. 액체성은 그의 학문 후반기의 핵심 주제였다. 또한 다른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이 종종 포스트(post)를 벗어남을 뜻하는 탈(脫)로 읽는다면[4] 바우만의 액체 근대는 연속적이나 질적 변화를 일으킨 후기 근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우만은 현대의 특징으로 전통적인 대립 관계가 붕괴되어 서로 섞여 흐르는 것을 들었다.[5]
유동성 차를 가져라, 그러면 여행할 수 있다 — 《액체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 근대라는 개념을 내세운 까닭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너무나도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고 있어 오히려 실제를 알기 어렵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속적이고 유동적인 유체의 특징으로 후기 근대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바우만은 "우리는 대개 연속적이고 유동적인 '되기'(becoming)를 갈구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6] 이러한 유동성은 전통적인 근대의 견고한 체제를 녹여낸다. 노동과 자본, 생산자와 소비자와 같은 개념들은 더 이상 각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견고한 강체가 아니라 모호하고 개인화된 네트워크상의 개념이 되어간다. 그렇다고 이러한 유동성과 개인화가 고체 근대의 억압을 해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모든 욕망을 소비로 집중시키고 파편화 하여 양극화를 심화시킨다.[7] 합리성이 사라진 자리에 소비만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시공간과 사회의 변화
액체 근대에서 시공간은 더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네트워크의 발달은 결국 전세계를 실시간으로 연결시켰고 공간의 제약 역시 사람들의 삶에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전통적인 근대에서 멀다는 오래걸린다와 가깝다는 곧과 한 쌍이 되어 묶였다면 현대에서 공간의 멀고 가까움은 시간의 짧고 김과 더 이상 함께 엮이지 않는다.[8] :178 사람들은 파편화된 개인으로서 살아가지만 소셜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24시간 언제나 온라인 상태이다. 이러한 네트워킹은 삶의 양식을 바꾸어버렸다. 바우만은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고 이러한 세태를 비판하였다.[9]
실천
바우만의 액체 근대에 대한 인식은 세계화에 따른 빈곤과 양극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바우만은 “유동적 현대의 삶에서 영원한 연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결된다고 해도 환경 변화에 따라 쉽게 풀려나기 위해 느슨하게 묶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화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학자의 사물들(장석주)
바우만의 은유를 빌린다면, 근대는 정원사의 시대였다. 근대는 유토피아의 꿈이 그나마 남아 있던 시절이다. 정원사는 자신의 정원을 잘 가꿈으로써 유토피아의 꿈을 추구할 수 있었다. 정원에 식물들을 배치하고, 불필요한 잡초들은 제거한다. 그렇게 정원사는 유토피아 창조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탈근대의 시대는 사냥꾼의 시대다. 사냥꾼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둘이다. 사냥꾼이 되느냐 사냥감이 되느냐, 달리 말하면 죽이느냐 죽느냐다. 이런 사회는 '위험사회'이고, 위험이 깔린 세계는 곧 '지옥’이다. 이것이 진짜 '지옥'인 이유는 또 다른 데 있다. 사냥이 사냥감을 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원사에게, 유토피아는 길의 끝이었다. 그러나 사냥꾼에게는 길 자체다. 정원사는 길의 끝을 유토피아의 정당화이자 궁극적 승리로 생각했다. 반면 사냥꾼에게, 길의 끝은 이미 삶의 현실이 된 유토피아의 종착점이자 수치스러운 패배이다. 문제는 그 사냥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사냥을 그만두는 순간 개인의 수치스러운 패배로 귀 결되며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즉각 사라진다. 그는 곧 바로 유토피아에서 밀려난다.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사냥이 계속되는 한에서만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죽이거나(사냥꾼), 아니면 죽임을 당하거나(사냥감) 둘 중의 하나다. 용케도 사냥꾼이 되었다고 해도 악몽은 종결되지 않는다. 사냥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계속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계속 사냥에 참여하는 삶이 또 다른 유토피아라면, 그것은 과거의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끝이 없는 유토피아다. 사실 정통적인 기준으로 보면 기괴한 유토피아다. 본래 유토피아는 고생이 끝날 것이라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이에 반해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고생이 결코 끝나지 않는 꿈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다. 눈을 크게 뜨고 보라. 세계는 지옥의 유토피아거나 유토피아의 지옥이다.
고양이 액체설 강서일
고양이는 액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맞지도 않는 종이상자에 몸을 맞추고 동그란 어항에도 구겨져 들어가는 고양이는 분명 흐르는 액체다, 딱딱한 책이 아니다. (그는 분명 시인이며 화가일 것이다. 시인은 엉뚱한 시론으로 언어를 조작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언어로 고정된 이미지를 흔들어 또 다른 사물을 창조하고 화가는 형태를 부수어 뒷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끝내 시간 앞에 액체다. 나무도 비단뱀도 남한산성도 액체다. 녹아 흐른다, 흐르고 흘러 어느 순간에 기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여 금광을 가졌다고 좋아하지 말지어다. 금보다 먼저 당신이 액화하고 기화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럼 우리집 고양이는 액체가 아니라 기체다, 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렇게 우기고 보니 왠지 몸이 가볍고 늦은 봄밤이 더욱 향기롭다, 액체 고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