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엄마의 일기
수능 시험 날
권금주
고3 자녀를 두면 부모도 고삼처럼 힘들다는 말을 듣고는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고 다만 가족 간에 따뜻한 배려가 필요 했습니다.
여러 님들의 말씀을 교훈으로 욕심을 버리면 버린 만큼 편할 것 같고,
모두가 일등을 하여 머리만 되려 한다면 머리만 여럿인 괴물 나라가 되니까
손과 발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딸아이를 위로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험 전날 밤부터 제가 떨려오는걸 느끼고,
그 모습을 아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감추고 아침에 시험장으로 보냈습니다.
아침에 나가면서 “엄마, 나 시험보다 뛰쳐나올지도 몰라요.”
“아니다. 너가 어려우면 다른 애들도 다 어려울 것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와
라.”
시험을 치루는 내내 긴장되어 평소에 신심도 없으면서 신을 찾기가 염치가 없어
조용히 장독대를
예전에 어머님이 그러셨던 것이 생각나서………….
닦고 그 위에 물 한 그릇 떠 놓았습니다.
오후에 일터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과목만 잘못 보고, 다른 과목은 평상시보다 올랐다고.
너가 쉬우면 다른 사람도 다 쉬웠을 거란 말은 속으로만 하고
“수고했다, 푹 쉬어라."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엄마, 저 내일부터 열하루 정도 아르바이트(백화점 이벤트 안내) 해서
삼십만 원 벌어서 운전 면허시험 준비 할 거예요.”
헉! 딸아이에게서 내 모습이 보입니다.
저는 어머니 사시던 모습을 따라 장독대에 물 떠 놓았고,
딸은 제 모습을 따라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딸년은 이쁜 도둑
딸아이는 수능시험이 끝나자마자 다음날로 아르바이트를 나가더니
열하루 일을 무사히 마치고, 수고료 봉투를 내미는데 기분이 묘했다.
그러고 나서는 바로 운전 학원 등록을 하고, 최신 카메라 장착 전화기를 구입하고,
미장원 가서 디지털 파마를 하더니, 옷 타령에다가 화장품 세트를 사달란다.
거기다가 재즈댄스 학원에 등록도 해달라니……….
옆에서 바라보는 내가 숨이 차다.
아무리 그동안 그 좋은 청소년기를 대입 수능에 시달리고, 절제하며 살았다지만
딸아이는 한꺼번에 그 시절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마구 뛰어든다.
나는 날뛰는 딸에게 졸업하고 대학도 합격 한 뒤에
천천히 하나하나 하자고 달래 보았으나
지금 안 하면 시간이 없다며 뭐든 다 해보려고 한다.
미카엘엔 데의 '모모'에 나오는 시간 도둑인 회색 도당이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딸아이에게 파고 들어가
아이가 점령당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침에 눈뜨기가 무섭다.
오천 원, 만원만 하던 딸아이가 오만 원, 십만 원 일주일 만에 백만 원을 써 치운다.
며칠 전, 아르바이트로 사만 원을 받아 주머니에 넣어놨더니
오늘 아침 롯데월드 간다니 또 털리고 말았다.
앞으로 얼마나 자주 많이 주머니를 털어갈는지 모르겠다.
시집을 와 놓고도 친정에 가면 김치며 된장이며 반찬을 퍼 나르고
어머니 주머니 동전을 털어오던 내가 죄 받는가 보다.
'딸은 이쁜 도둑' 이라는데…
하루는 이 미운 새끼가 일마치고 늦은 시간에 귀가 하는데
검정 비닐봉지에 뿌리만 잘라 내 버린 미나리 3단을
버스 정류장에서 누가 버리기에 주워 왔단다.
상태가 안 좋아서 화분에 심으며 싹이 나올까 염려스러웠는데
일주일이 지나니 진초록의 실한 미나리 줄기가 돋아 올라온다.
그 미나리를 바라보며, 천방지축인 우리 딸도 저렇게 싹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아침에 주머니 털린 분함을 달래본다.
2005/23집
첫댓글 뿌리만 잘라 내 버린 미나리 3단을
버스 정류장에서 누가 버리기에 주워 왔단다.
상태가 안 좋아서 화분에 심으며 싹이 나올까 염려스러웠는데
일주일이 지나니 진초록의 실한 미나리 줄기가 돋아 올라온다.
그 미나리를 바라보며, 천방지축인 우리 딸도 저렇게 싹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아침에 주머니 털린 분함을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