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은 심술이 참 대단했다. 올 땐 기척도 없이 찾아오더니 갈 땐 눈치도 없이 무거운 엉덩이를 한참 뭉갰다. 긴 겨울을 보내며 날 풀리면 뭘 해야지 하는 생각이 참 많았는데, 막상 봄이 되니 내가 뭘 하려고 했었지 멍한 상태가 된다. 새봄을 맞이하는 일은 자각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어리석음을 다시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 같다. 남도에서부터 꽃 소식이 들려오니 슬슬 상춘의 채비를 해야겠다.
옛 시인들은 매화를 감상하며 봄을 기다렸다. 백화가 만발한 봄,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보다 고고히 먼저 피는 매화에 의미를 부여하며 시를 남겼다. 벗처럼 아내처럼 대우하며 가까이 두고 아꼈다.
매화가 기대처럼 겨울에 피는 꽃은 아니었기에 화분에 심어 방안에서 더운 물을 주며 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 매화 화분의 그림자가 등불에 비친 모습을 즐기고 노래하였다. 홍주화(洪胄華)의 시에 “작은 집에 봄빛 간직하여, 시를 읊다 밤이 깊었네. 등불 아래 매화 그림자, 주인 마음 알아주네.(小屋藏春色 吟詩到夜深 一枝燈下影 能識主人心)”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그러한 운치를 잘 묘사한 시라 할 수 있다. 꼭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처럼 매화도 주인을 알아본다고 여겼던 것 같다.
이명한도 매화를 즐길 줄 알았고 많은 매화시를 남겼다. 그는 아버지 이정귀(李廷龜), 아들 이일상(李一相)까지 3대가 대제학을 지낸 명문가의 일원이었으며, 아버지와 동생 이소한(李昭漢)과 함께 삼소(三蘇)로 병칭될 정도로 문명(文名)을 떨친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집에는 조선 제일의 명품 매화가 있었는데 이정귀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사신에게 바둑을 이겨 얻었다는 명품 홍매(紅梅)였다. 타고난 문재(文才)에 매화에 대한 심미안까지 갖춘 그이기에 그의 시 곳곳에 매화에 대한 감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이명한의 매화 감상은 당시의 유행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당시 문인들은 눈 내리는 밤 매화 화분을 감상하며 모여 술 마시고 차 마시는 운치를 즐겼는데, 이 시에서 이명한은 방 안에 매화를 모셔 놓고 감상하는 일은 그다지 그의 취미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등불 아래 매화 화분을 놓고 감상할 여건이 안 돼서가 아니라, 달빛 아래 매화를 감상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일이라며 자신만의 매화 감상법을 피력하고 있다.
그의 다른 시에 “아름다운 사기병에 꽃 피니 유달리 새롭네. 한 잔 물 담뿍 머금었으나 백년 봄은 영원히 이별이네.[好是沙甁裏 花開特地新 偏沾一勺水 永負百年春]”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또한 세속의 매화 감상법과는 구별되는 개성 있는 시각을 보여준다. 화병에 매화 가지를 담아 꽃을 피우고 감상하는 풍조도 당시에 유행하였는데, 이명한은 화병의 꽃을 보며 한 철만 피고 말 매화의 운명에 대해 또 다른 감회가 인 모양이다.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는 그의 시각에서 자연과 인위에 대한 그만의 심미적 기준을 엿볼 수 있다.
이명한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었다. 타고난 본성을 인위적으로 조장하여 감상하는 방식은 그에게는 딱히 추구하고 싶은 방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인위로 인해 천진함을 잃는다면 그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나이가 덜 찬 탓인지 감성이 부족한 탓인지 아직 꽃과 나무를 보고 그리 많은 감동을 느끼진 못한다. 그러나 늘 오가는 길 메마른 가지에 어느 날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훈훈해지는 건 나만의 상춘법이 아닌지 모르겠다. 유난히 긴 겨울 속에서 뭔가 더 근사한 것이 준비되어 있나 모르겠다. 겨우내 땅속에 모인 것이 봄볕에 재잘재잘 풀어지면 또 어떤 이름 모를 꽃들이 길 위에서 인사를 건넬지 기대된다.
오랜 시간 봄을 품었을 겨울의 뒷모습에 인사하고 싶다. 그리고 긴 겨울에 힘들었을 사람에게 봄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따뜻한 봄이 찾아올 테니 많이 시렸을 겨울에 작별 인사를 하고 편히 보내 주라고, 그 겨울의 뒷모습을 같이 봐주겠노라고 마음을 전하고 싶다.
*참고 문헌 : 『알고 보면 반할 매화』(이종묵, 태학사, 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