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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정말 아름다운 계절을 즐겼다. 햇빛에 굶주렸던 이곳 사람들 모두가 탄성을 자아낼 만큼 화려하고 우아한 가을이었다. 우리는 이 계절을 원없이 즐겼다.
그런데 다시 캐나다 밴쿠버 특유의 잿빛 우기가 시작되려나보다. 몇 일 전부터 지금 쯤이면 우기가 시작될 때가 됐는데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날씨가 오락가락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제철이 돌아온 게다. 한동안 우리는 이 계절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가 풍성하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도 많다. 우선 공기가 아주 깨끗해서 좋다. 코 속으로 흘러드는 깔끔하고 상큼한 공기의 맛이 참 좋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자주 한다. 한국에서는 하루 입은 옷을 다음 날 다시 입을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었다. 특히 흰색 셔츠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땀이 잘 나지 않는 선선한 기후 탓이기도 하겠지만 공기가 무척 깨끗한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깨끗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면서 아침 일찍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믿어지기 어렵겠지만, 밤에 바깥 공기가 실내로 유입되지 않도록 문을 꼭 닫고 잠을 자야 하는 곳도 있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오염된 공기, 특히나 밤에 마구 쏟아내는 공장 굴뚝들의 매연을 조금이라도 덜 흡입하려고 그래야 하는 곳이 있다. 내가 한 번 살았던 어느 나라 한 도시는 정말 그랬다. 그곳에서 아침에 조깅이나 산책을 하는 것은 아주 지혜롭지 못한 일이었다. 의료진들도 호흡을 크게 해야하는 실외 운동은 공장 매연이 비교적 덜한 오후로 미루거나, 가급적이면 실내 운동으로 대체하도록 권하는 기사를 여러 번 읽었다. 그곳에서는 비가 한 죽 내리고 나면 뿌연 매연이 사라지고 그나마 잠시 비교적 청명한 하늘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인간의 무지나 이기심에서 비롯된 대기의 오염으로 장차 우리가 지불해야할 대가가 얼마일지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고 먹먹하다. 아니, 벌써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세계 지도자들은 이런 현상을 극복하고자 더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려 힘써야 할 것이다.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것은 잃어서는 안되는 큰 축복임에 틀림없다.
사람마다 색깔에 대한 취향이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세상이 온통 푸르러서 좋다. 활엽수 건 침엽수 건 이파리 마다 윤기가 흐르고 저마다 하늘을 찌를 듯 드높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싱싱한 나뭇잎을 보면 참 행복하다. 그 싱그러움 하나만으로도 풍요를 느낀다. 더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내 뇌리가 신선하고 맑고 영롱한 것들도 채워지는 기분이다. 울창한 숲 속을 거니노라면 신비한 생명감을 느낀다. 그 생기가 내 몸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아서 기쁘다. 과학적인 설명들은 차제에 두더라도, 그곳에서 생명의 경외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만일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오늘 캘리포니아의 팜 스프링스에 한 번 다녀와 보시라. 인위적으로 적절히 물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선인장 종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식물이 살아남기 힘든 척박한 곳이다. 그런 삭막한 광야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며 기염을 토할 것이다. 나무든지 풀이든지, 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예쁘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명색이 푸른 것이기만 해도 귀인 대접을 받는 그곳 식물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나는 온 천지를 녹색으로 옷입혀 놓으신 조물주께 감사드린다.
비가 풍성하면 물이 깨끗해서 좋다. 좋은 물에 대한 과학적인 정의를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상큼한 물을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것이 큰 복이라 여긴다. 얼마 전 동부 여행 중에 뻑뻑하고 텁텁한 물 맛이 여기와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비 많은 동네의 깨끗하고 순한 물을 즐기는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얘기일 뿐이다. 긴 우기 때의 칙칙함이나 지루함, 그리고 불편함에 대해 이제 입을 닫기로 했다. 때때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내가 좋은 것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해 진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다. 내가 누리고 있는 특권들을 망각하고, 좋아 보이는 남의 것과 비교하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누구나 다 한 가지 이상씩 나름의 애로사항들을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세상 누구에게도 만족이란 없는 것이고… 허면, 마음을 바꾸어, 내게 베풀어진 것들을 잘 보전하며 마음껏 즐길 일이다. 주어진 것들에 대해 마음껏 감사하면서. 그런 사람에게는 친구도 많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