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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한국사전]
조선 명재상 채제공. 그의 책 <번암집>에는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조 20년(1796) 가을. 제주 출신의 한 여인이 궁에 들어섰다. 평민신분의 여성으로 임금을 알현한 것은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김만덕, 그녀는 열녀도 효부도 아니었다. 빈손으로 시작해 일약 제주 최고 부자에 오른 상인이었다. 최악의 흉년에 시달리던 200년 전 제주, 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풀어 수천 명의 제주도민을 살릴 수 있었다. 상업을 천하게 여기던 조선사회, 그녀는 시대보다 앞서 돈의 가치에 주목했다.
조선의 여성 CEO 김만덕
제주여성으로 처음으로 아니 조선 최초로 임금을 알현한 평민여성 김만덕. 이 김만덕의 대한 최초의 기록은 정조 20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1) 당시 제주라는 조선 최변방에서 기생의 신분으로 재물을 풀어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한 여인 김만덕, 이 짧은 문장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조선시대 평민 그것도 여성에 관한 기록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만덕은 앞서보신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정사뿐만 아니라 정약용, 박제가 등 당대 실학자들에 의해서 시와 문장으로 남겨졌고 그녀의 일대기를 기록한 만덕전만도 5편에 달합니다. 이것만 봐도 이 당시 만덕의 기부가 사회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죠. 덕분에 수없이 많은 조선 여인들이 이름 없이 사라졌다는 것과는 달리 만덕은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 첫 페이지는 최악의 흉년을 맞은 200년 전 제주에서 시작됩니다.
정조 19년(1795) 윤2월. 제주목사 이우현은 벌써 며칠 째 영암에서 출발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는 조정에서 마련한 구휼미가 실려 있었다. 제주 최악의 흉년으로 기록되는 갑인년 흉년 제주목사는 조정에 구휼미 2만 섬을 요청했다.
‘동풍이 강하게 불어서 곡식이 짓밟히고 피해를 입었습니다. 만약 쌀 2만여 섬을 배로 실어 보내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장차 다 죽을 것입니다.’ - 정조 18년(1794) 9월 17일
정조 16년(1792)부터 4년 간 최악의 흉년이 제주를 휩쓸고 있었다. 매해 수천의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습도 참혹했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말과 소를 잡아먹거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참상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정형지 교수(오산대학)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경우, 시체를 파서 먹는 경우도 있게 되고 자식을 내버리는 이런 경우는 굉장히 비일비재한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인 기본의 참상이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보는 거죠. 그게 탈출구를 찾아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심각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요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화산암이 만들어낸 천혜의 관광지 제주 하지만 조선시대까지 제주는 사람이 살기 힘든 유배의 땅이었다. 돌 많고 바람 많은 제주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재해가 끈이지 않았다. 이곳 사계리엔 쓰나미 즉 해일 피해가 주기적으로 발생했다. 해일은 하루아침에 마을 하나를 삼켜버릴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고광민 학예사(제주대학교 박물관)
“해일이 일어났거든요. 기와장이 날아가고 하루 밤에 이 마을을 전부 모래가 덮쳤다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방파제라 부를 만큼 많은 태풍들이 보리수확 철부터 가을까지 제주를 괴롭혔다.
“어쩔 때는 태풍이 일찍 옵니다. 음력 5월에 오면 이 때는 보리 수확철인데 이 때는 보리가 가장 무거울 때 조그마한 바람만 불어도 보리가 전부 눕는다.”
척박한 자연환경에 잦은 흉년. 사람들이 하나 둘 육지로 떠나기 시작했다. 16C 이르면 제주를 떠난 남해 연안에 정착한 제주인이 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인구 유출이 심각해진다.
김동진 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
“점점 삶이 어려워지니까 제주도민들이 제주도를 떠나야 못살겠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다른 데로 도망을 가야하겠다.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배를 타서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구가 많이 축소됩니다.”
인구감소로 제주 해안 방어가 취약해졌다. 조정에서는 제주도민의 육지 출입을 금지하는 출륙금지령까지 내린다.2) 뭍으로 나가는 배들은 모두 출륙허가서인 출선기를 발급받아야 했다. 관에 허락 없이는 단 한발자국도 제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발이 묶인 제주민들은 흉년이 들어도 육지처럼 형편이 조금 더 나은 지역을 찾아 옮겨 다닐 수조차 없었다. 제주도 전체가 거대한 감옥과 같았다. 구휼미 2만 섬을 보내달라는 제주목사의 장계가 도착한 조정.
‘섬 안에서 굶주려 있는 백성들이 어찌 불쌍하고 가엾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영조
‘하오나 호남 연안의 고을들도 피해가 극심해 제주도민들을 따로 걱정할 처지가 못 되옵니다.’ : 조정 대신 중 한명의 말
하지만 정조는 단호했다. 전라도 강진, 해남, 장흥에 구휼미 마련을 지시했다. 정조 19년 윤2월. 드디어 구휼미 만여 섬을 실은 배 12척이 영암을 출발했다. 아직 파도가 높았지만 보릿고개 전에 쌀이 도착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해 제주는 지독히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12척 중 5척이 풍랑을 만나 침몰된 것이다.3) 제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옹기종기 떼를 지은 수십 명의 거렁뱅이 하나같이 옷도 못해 입고 털 빠진 개가죽 둘러썼네. 검게 타서 여윈 살갗 뼛골에 달라붙고 목소리도 배고픔에 실낱같이 가느다랗게 ‘사또님, 사또님 불쌍한 인생 살려 주옵소서’” - 탐라록(신광수 著)
당시 최고의 부자였던 만덕. 연이은 흉년의 참상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갑인년과 을묘년에 걸쳐 제주도민 3분의 1이 흉년으로 목숨을 잃을 만큼 상황은 심각했다.
‘지금 어서 육지로 나가 쌀을 구해오너라’ : 만덕
수십 년 동안 모아온 만덕의 전 재산이었다. 만덕은 전라, 경상 등 육지에서 쌀을 들여와 모두 관아로 보냈다. 채제공은 당시 상황을 ‘부황난 자가 소문을 듣고 관가 뜰에 모여들기를 마치 구름과 같았다. 사람들은 우리를 살려준 이가 만덕이로구나 하고 만덕의 은혜를 칭송했다’4)고 기록하고 있다.
‘개비년 숭년에도 살앙 남아신디’
‘갑인년 흉년에도 살아남았는데’라는 제주 속담입니다. 여기서 갑인년은 바로 1794년 즉 정조 18년을 가르키는데요. 극심한 흉년을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됐을 정도로 200년 전 당시 흉년은 참혹했습니다. 만덕은 그때 굶주리는 제주도민을 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게 됩니다. 이 만덕이 구호곡으로 내놓았다는 쌀과 돈이 얼마인지는 기록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정승 채제공의 <만덕전>엔 천금으로 그리고 조수삼의 <추재기이>에는 수천 석의 쌀과 수천 궤미의 돈으로 기록이 돼있는데 그 액수가 상당히 컸다는 것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만덕은 이처럼 큰돈을 선뜻 내놓았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배포가 큰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만덕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지금부터는 그녀의 생애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제주시 사라봉 만덕 기념탑. 매년 이곳에서는 김만덕의 덕을 기리기 위한 제사가 치러진다. 제주도민에게는 만덕이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다. 만덕의 생애를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이 묘비에는 그녀가 탐라의 양가집 딸로 김해 김씨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제작진은 만덕의 흔적을 찾아 제주 김해김씨 종친회를 찾았다. 좌정승공파 15대 손에서 만덕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덕은 아버지 응렬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12살 되던 해 풍랑에 아버지를 여의고 만다.
김대은 상임부회장(가락 제주도 청년회)
“무역을 아버지 때부터 해가지고 육지서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서 돌아가셨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째거나 우리 할머니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다.”
같은 해 6월(1750년) 제주도에서만 882명의 사망자를 낸 전염병에 어머니마저 잃고 만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남매는 의탁할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홍순만 원장(제주문화원)
“오빠 둘인가 있었는데 오빠는 친척들이 하나씩 데려가고 여자는 누가 데려갈 사람이 없는데 김만덕이 경우는 마침 그 퇴기가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이 자기가 자식이 없으니까 데려다 키우겠다고 해서 데려간 경우입니다.”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간 만덕. 보통 기녀는 자신의 딸에게 기녀 직을 대물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비록 수양딸이었지만 만덕이 기예에 재능 있는 것을 알고 기녀 명부인 기안에 만덕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관아의 교방에서 춤과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 만덕. 15살 무렵부터 관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제주의 자연, 역사, 풍속이 생생하게 그려진 탐라순력도. 당시 제주 기녀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귤 밭에서 제주목사가 기녀들과 풍악을 즐기고 있다. 또 양로회와 같은 연회에도 참석해 춤과 노래를 담당했다. 기녀는 관원에게 수청들 의무가 있었고 그 지방 향족들의 연회에 참여해야 했다.
만덕 역시 마찬가지였다. 춤과 노래 등 여악을 담당하는 기녀에 특성상 관기는 재색이 뛰어난 자로 삼았다. 만덕은 특히 악기 다루는 솜씨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기예에 소질 있고 용모 또한 빼어났던 만덕은 제주는 물론 육지까지 알려졌을 정도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홍순만 원장(제주문화원)
“헌데 실지 전해지기로는 굉장한 미인으로 나타납니다. 워낙 절세미인이라는 말이 퍼지니까 육지에서 제주목사로 자청해서 오는 경우도 있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김만덕을 한번 보려는 하는 의도에서였다고 합니다.”
조실부모한 뒤, 퇴기에 의탁해 불우한 시절을 보낸 만덕. 타고난 재능 덕에 가난에서 벗어나 재물도 제법 모을 수 있었지만 만덕에게는 떨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기녀는 여염집 규수처럼 사는 것이 불가능했다. 본래 양가집 자손이었던 만덕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만덕은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녀노릇을 할망정 기녀로 자처하지는 않았다.5) 전라감영에 소속된 노비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노비안. 여기에는 기녀도 포함되어 있다. 기녀는 그 신분이 노비였던 것이다. 기녀는 관의 소유물로 엄격하게 관리를 받았다. 기녀들은 50세까지 기역을 담당했다. 그 전에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부자 집에 소실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만덕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만덕은 20여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사정을 울면서 관아에 호소하게 된다.6)
‘사또 소녀는 본시 양가 출생이온데 조실부모하여 부득이하게 관기가 된 것이옵니다. 소녀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 만덕
‘만덕이 처음에 기적에 오를 때 기안을 가져오너라.’ - 제주목사7)
목사가 전후 사정을 알고 이를 불쌍히 여겨 기안에서 삭제한 후 다시 양인으로 되돌려 주었다. 화려한 기생의 생활도 부잣집 소실로서의 안정된 삶도 마다한 만덕. 이제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비록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당시 제주 기녀는 위세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의 <지영록>을 보면 ‘관리들이 총애하는 것을 믿고 건방져서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며 보통 일도 기녀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당시 최고라는 평양 기생 못지않은 호사를 누리면서 비단을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하니 만덕의 입장에서는 비록 천민의 신분이지만 기생을 그만 둔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과감히 기녀의 자리를 물리친 만덕. 그녀는 과연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요.
제주의 관문 건입동 제주항. 과거 건입포, 산지포라 불리던 이곳은 탐라국 시절부터 개화기까지 육지와 제주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 관기를 그만 둔 만덕은 이 건입 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하게 된다. 현재 만덕의 객주는 세월의 풍화와 함께 살아졌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만덕의 객주는 최고의 명당자리였다. 제주목 관아에 인접한 건입 포에는 장사배에서 관선에 이르기까지 많은 배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객주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을 위탁 판매하는 일종의 중개상인이었다. 시장이 점점 활성화되면서 객주는 초기 중개업을 넘어 시장을 움직이는 큰 손으로 등장하게 된다. 객주의 상업적 이익이 커지면서 웃돈을 주고 객주권리를 사고팔았다. 매매가 성사되면 단지 객주 집만이 아니라 거래하던 상인과 상품에 대한 권리까지 물려받았다. 객주를 한다는 것은 근처 상권을 장악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양진석 박사(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만일 다른 지역에서 여기 와가지고 그런 물품을 판다거나 아니면 원래 팔아야 할 사람이 딴 데 팔아버리거나 이렇게 못하도록 여기서 나름대로 권리를 확보하는 그런 것이 이 문서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관기생활을 하며 모아둔 밑천을 가지고 객주를 시작한 만덕. 객주초기 만덕은 관기 시절의 인맥을 십분 활용하게 된다. 제주 관리들은 물론 육지에서 공무로 온 관리들도 만덕의 객주를 드나들었고 만덕은 이러한 과정에서 육지와 제주의 물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 한 때 일류 기생이던 만덕을 보기 위해 제주와 육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박찬식 연구교수(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가장 기본적으로 김만덕이 관청에서 관기역할을 했다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관아와 연관성이 있다는 점, 그리고 김만덕 자신이 갖고 있는 기질도 있겠죠. 용모도 좋고 언변도 있고 관청에서 배웠던 예절 같은 것 다 포함해서 봤을 때 일반 제주도 내에 토착인들 뿐만 아니라 외래 상인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졌던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과연 만덕의 객주에선 어떤 물품들이 거래되었을까. 제주시 남원읍 바닷가. 이 바위 웅덩이의 이름은 짐치통이다. 태양열의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배추저리기에 적당한 염도의 물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고광민 학예연구사(제주대학교 박물관)
“여름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 물을 떠서 소박에 담고 부엌에 가서 솥에서 달여서 소금을 만듭니다. 그런데 겨울에는 아무래도 태양열이 약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소금을 만들지 않습니다. 겨울에는 그 대신 배추를 절일만큼은 염도가 딱 맞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너나 없이 겨울철이 되면 여기 와서 띄엄띄엄 앉아서 배추를 절여서 김치를 만들어 먹습니다. 그래서 ‘짐치통’ 입니다.”
갯벌이 없는 제주는 사면이 바다여도 소금을 만들 수가 없었다. 대신 너른 바위 위에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만들어 생산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제주의 소금자급률은 겨우 23%. 육지보다 100배의 힘을 들여도 얻는 소금은 적어 반드시 진도나 남해 등에서 구입해 와야 했다.8) 소금뿐만 아니라 식량도 크게 부족했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척박한 대지에서는 논농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덕은 쌀과 소금 등 주요 생필품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쌀과 소금은 생필품이면서도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절대적인 교역품목이었다. 장사의 기본은 싸게 사 비싸게 파는 것이다. 값이 헐한 가을에 쌀을 넉넉히 사들였다가 봄이 되면 파는 식으로 물량을 조절했다.
고동환 교수(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주도 건입 포가 가장 중심적인 포구였죠. 거기의 객주였다면 외부에서 반입되는 미곡에 대한 독점적 유통권도 장악하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엄청만 물품의 교환을 통해서 부를 축적했다고 보입니다.”
쌀과 소금은 제주의 특산물과 거래됐다. 제주는 농업에는 부적합한 곳이었지만 반면 전복이나 오징어 등 어느 지역보다 진귀한 특산물이 많이 나는 섬이었다. 특히 미역은 제주사람들에게 있어 일종의 화폐와도 같았다. 지금이야 미역을 양식하지만 조선시대의 미역은 동남해 일부와 제주에서만 채취할 수 있었다. 조선백성 절반이 제주도 미역을 먹었다고 할 만큼 미역은 당시 제주 최고의 상품이었다.9) 고립되어 있는 제주의 특성상 물건이 바다를 건너면 가격이 산지보다 월등히 높아졌다. 만덕은 제주와 육지 간 시세차익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섬 제주에 갇혀 있었지만 고위 관리와 육지 상인들과 교류하면서 물류동향에 대해 누구보다 앞선 정보를 가질 수 있었던 만덕. 그녀는 더 큰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조선사회에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강한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17C이래 대동법의 실시로 수공업이 발달하고 화폐사용이 장려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바로 이 돈의 가치와 상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를 뒷받침하듯 18C가 되면 전국에 천여 개가 달하는 시장들이 생겨납니다. 시장은 팔도에서 올라온 각종 특산물들로 항상 활기가 넘쳤습니다. 개성인삼, 한산모시, 안성유기, 전주한지 그리고 원산북어 이들 특산물들은 희소성으로 인해서 매점매석이 가능했는데 상인들은 이 거래를 통해서 조선후기에 신흥부자들로 등장을 하게 됩니다. 만덕도 역시 제주 특산물의 가치를 주목하게 됩니다.
제주는 조선 군마의 최대 생산지였다. 기후가 따뜻하고 광활한 초지가 펼쳐져 말을 사육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말을 키워 조정에 진상하는 것은 제주목사의 중요한 임무였다. 그러나 진상되는 말 이외에 개인목장의 말은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큰 말 상등품 한필은 쌀 20석의 가치가 있었다.10)
장덕지 교수(제주산업정보대학)
“모든 말들은 우리 조천포라든지 하북포를 통해서 강진이라든지 영암 쪽으로 도착을 해서 다시 나주로 갑니다. 나주에 가면은 제주 말 가격이 두 배로 올라서 쌀 40석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한양에 가면 80석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시 상인들은 말 매매로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말꼬리 털인 말총 또한 제주만의 특산품이었다. 이 시기 작품인 박지원의 열하일기. 허생이 제주도 들어와 말총을 모두 거두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망건 값이 열배나 올랐다고 할 정도였다. 허생은 한양 사람이었다. 말총을 매점하기 위해 멀리 한양뿐만 아니라 개성에서도 직접 제주도를 찾았을 정도로 말총은 그 가치가 상당했다. 말총과 함께 양태도 제주 특산물이었다. 갓의 테두리에 해당하는 양태는 대나무를 재료로 만든 수공예품으로 제주 양태가 전국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말총과 양태는 모두 양반의 복식인 갓에 필요한 재료였다. 조선후기 봉건적 신분제가 해체되면서 양반의 수가 증가하게 되고 더불어 갓과 망건, 탕건의 수요 또한 급증했다.
김동진 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
“이 양태업이라고 하는 것은 ‘연중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역은 봄철에만 채취가 가능하지만 양주기 경우는 베어다가 집에 나두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든지 집안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양태는 20C 초반까지 제주여인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였지만 정조후기에 들어서면 제주상인도 전국 각지에서 자유로운 판매를 보장받았다. 대신 육지와 거래할 수 있는 포구를 정해놓았는데 조천포구 그리고 화북포구가 그것이다.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자연히 포구의 정비와 확장도 이루어졌다. 영조 때 제주목사 김정의 진두지휘로 화북포구에 일대 확장 공사가 이루어진다.
“포구는 비좁고 선박은 많다보니까 조그마한 풍랑이나 바람이 불면 배끼리 부닥쳐서 배가 파손되는 일이 많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피해들이 많다보니까 노봉 김정이 그러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이 포구공사를 재촉하게 되고 그래서 노봉 김정이 직접 돌을 등짐에 지고 나르면서 솔선수범한다.”
당시는 제주뿐 아니라 전국의 포구를 중심으로 배를 이용한 상품유통이 활발해진다. 배는 육상교통보다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유리했다. 조선후기 이중환의 인문지리지 <택리지>에서도 상업 활동에 있어 해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11) 만덕도 육지와의 직거래를 시작한다. 멀리 개성에서부터 찾아올 정도였으니 제주의 특산품을 직접 가지고 나가면 훨씬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갓양태나 마른 미역은 저장성이 좋기 때문에 먼거리 이동에도 부패할 염려가 없었다.
제주도에서 출발한 배는 하루 만에 해남이나 강진에 닿을 수 있었다. 특히 강진은 제주와의 교역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강진 마랑항은 지명에 말마자가 남아 있을 정도로 제주와 인연이 깊은 교통의 요충지이자 상업의 거점이었다. 당시의 포구는 제주에서 건너온 배들로 장관이었다.
강진에 도착한 만덕상단. 강진은 갓양태의 집산지였다. 팔도의 상인들이 제주의 갓양태를 구입하기위해 진을 치고 달려들었다. 갓양태를 매점하기 위한 개성상인과 한양상인과의 다툼도 흔한 일상이었다.
김동진 교수(제주대 사학과)
“제주의 그런 양태들을 실은 배가 강진에 도착을 하면 거기 많은 상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제주산 양태를 선점하기 위해서 쟁탈전을 벌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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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업은 농업보다 이문이 많이 남았다. 특히 양반들을 상대로 판매하는 갓은 고부가 가치 상품이었다. 제주 특산품은 뱃길이 험했던 칠산바다를 건너 당시 전국 삼대시장 중 하나인 충청도 강경까지 진출했다. 표류선박들의 기록을 담고 있는 <표인영래등록>. 강경은 물론 전국에서 제주상인들의 표류사실이 발견된다. 당시 제주인들의 상업 활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의 강경포구는 18C이래 충청, 전라 두 지역의 생산물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번성했다. 제주에서 충청도까지 만만치 않는 항해였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제주배가 강경포구로 진출한 이유는 명확했다. 한양이 가까워질수록 물건 값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고동환 교수(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주도 특산물 말총이라든가 또는 말 같은 것들을 육지부에 보내서 상당히 많은 차익을 실현을 하고 또 돌아오는 뱃길에 미곡을 실고 제주에 들어와서 또 수십 배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실현하면서 부를 축적해갈 수 있었지 않았는가 보여집니다.”
만덕은 시세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을 잘 짐작하여 사고팔기를 계속하니 몇십년 만에 부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12) 객주를 시작으로 유통업에 뛰어든 지 30여 년 그녀는 제주 최고부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모든 성공한 기업인들이 그렇듯 만덕의 성공에는 남다른 근검절약이 한 몫을 했습니다. ‘의복을 줄이고 먹을 것을 먹지 아니하니 재산이 대단히 커졌다’, ‘만덕의 성품이 음흉하고 인색해 돈을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나는데 … 이리하여 그녀는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된 것이다’13)라고 적고 있는데 악착같은 그녀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인데요. 그러나 만덕은 이렇게 번 돈을 누구보다 가치 있게 쓸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만덕의 선행을 알게 된 조정은 만덕의 소원을 묻고 그것이 쉽든 어렵든 가리지 말고 특별시행하라고 명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소원을 말씀하시겠습니까? 과연 만덕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밥 한 그릇으로도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썩은 흙과 같다고 생각한 만덕. 자신의 전 재산을 풀어 굶주린 제주 사람들을 살려냈다. 제주목사는 이런 만덕의 선행을 조정에 보고했다. 만덕을 기특하게 여긴 정조는 목사를 시켜 만덕에게 소원을 물었다.14)
‘어명이다. 주저 말고 소원을 말해보아라.’ 제주목사
‘제 소원은 단 한번이라도 이곳 제주를 벗어나 임금이 계시는 한양과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유람하는 것이옵니다.’ : 만덕
벼슬도 금은보화도 원하지 않았지만 만덕의 소원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제주인들의 출륙금지령이 국법으로 엄연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자는 육지 사람과의 결혼까지 금지할 정도로 엄하게 규제했다.
박찬식 연구교수(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진짜 육지 구경해보고 싶다. 그런 소박하면서도 당시 어떤 시대적 한계, 섬이라는 꽉 묶여져 있는 세상을 한번 뛰어넘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조는 그런 만덕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 주었다. 정조는 만덕을 내의원 행수로 삼았다.15) 평민인 만덕이 궁궐에 들 수 있는 자격과 지위를 준 것이다.
‘내가 여자로서 의기를 발휘하여 수많은 굶주린 백성을 구했으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로다.’ 정조.
정조는 만덕의 선행을 다른 도에 본받도록 널리 알리라 하명하고 육지에 머무는 동안 양식과 노자를 지급했다. 이듬해 1797년 3월. 만덕은 드디어 금강산 유람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왜 금강산이었을까. 금강산은 삼라만상을 축소해 놓은 하나의 세계였다. 그 세계를 유람하는 것은 풍류객들에게도 대단한 명예로 여겨졌다. 금강산 유람을 위해 계를 결성할 정도로 당시의 금강산 유람은 열풍이었다고 한다. 만덕은 만폭동 묘길상에 기이한 경치를 다 구경했다. 사찰에 들릴 때마다 정성을 다해 공양을 드렸으며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통천 총석정에 올라 한달 여에 걸친 금강산 유람을 마쳤다.
한양에 도착한 만덕은 그야말로 장안에 화제가 됐다. 변방 제주여인으로 주린 백성을 살린 만큼 상업으로 크게 성공한 부자였다. 게다가 사대부들을 쉽게 하지 못하는 금강산 구경을 두루 하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당시 만덕의 이름이 한양 안에 가득하여 공경대부와 선비 등 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고자 했다.16) 당대의 천재학자이자 문장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제가, 이가환, 정약용 이들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육지 여행을 마치고 귀향하는 만덕을 위해 환송의 시를 지어 주었다.
‘만덕은 제주의 훌륭한 여인
예순 나이 마흔쯤으로 보이구료
평생 모은 돈으로 쌀을 사 백성을 구제하고
한번 바다를 건너 궁궐에 조회하였네’ - 이가환
특히 당시 정승이던 채제공은 그녀의 일대기를 글로 써서 선물할 만큼 그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넌 탐라에서 자라 한라산 백록담 물을 먹고 이제 또 금강산 구경을 두루 하였으니 온 세상의 사내들 중에서도 누가 또 그런 복을 누릴 수 있겠느냐’ - 만덕전.
6개월의 짧지만 잊을 수 없는 육지 여행을 마친 만덕. 그녀는 제주에서 여생을 마쳤다. 김만덕. 그녀는 18C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모험과 도전을 통해 큰돈을 모은 전문경영인이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금기를 깨고 자신의 삶을 경영할 줄 알았던 앞선 근대인이었다.
우린 오늘 조선 최초의 여상인으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던 한 여성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런데 만덕의 덕을 칭송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려한 이들에겐 남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조, 채제공, 정약용, 박제가, 이가환. 이들은 모두 새로운 조선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경제에 중요성을 깨닫고 있던 개혁군주와 실학자들이었습니다. 한 시대의 변화를 주도했던 이들이 만덕을 주목한 것은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변화의 시기엔 언제나 반대 여론이 높은 법이죠.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여전히 상업에 대한 반대여론이 만만치 않던 시대에 여론을 무마하고 상업을 발달시키기 위해선 좋은 모범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돈의 흐름을 쫓아서 영리하게 부를 축적할 줄도 알았지만 그 돈을 기꺼이 사회에 환원할 줄 알았던 만덕. 바로 이것이 그들이 꿈꿨던 상도의 전형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기부를 통한 부에 사회 환원이란 만덕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나눔의 미덕일 것입니다.
※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지.
1) ‘제주 기생 만덕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 - 정조실록(1796년 11월 25일)
2) ‘제주의 백성들이 육지로 떠나갔다. 비변사가 제주도민의 육지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출륙금지령)’ - 인조 7년(1629) 8월 13일. 3) 1795년 윤2월. 4) 만덕전(채제공 著). 5) 만덕전.7) ‘목사가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 기안에서 빼주고 양민으로 되돌려 주었다.’ - 만덕전.
11) ‘길이 멀면 운반비 때문에 이득이 적게 된다. 그러므로 물화를 옮겨가고 바꾸어 이득을 보려면 배에 싣고 운반해야만 한다.’ - 택리지.
첫댓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한 멋진 여성
이런 멋진 여성이 더 많이 나와서 진정으로
남여평등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너어제 성매매합법화 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