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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國 家 中 興 會 원문보기 글쓴이: 국가중흥회
탈북자들이 남한에 처음 와서 적응하는데 가장 어려움을 겪는 문제가 바로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라 부르는 광주사태가 도대체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 하는 문제이다. 2008년 11월 조갑제 기자가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제목의 글을 쓴 것이 탈북자들에게는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5.18은 북한에서는 매년 성대한 광주인민봉기 기념 행사일이다. 5.18은 북한 주민에게 반미, 자주, 통일을 향한 광주인민봉기요, 그러기에 광주인민봉기는 이미 북한사의 일부로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이것은 단지 동일한 사건에 대한 관점의 차이만은 아니다. 북한에는 남한 사람들이 모르는 5.18 정보, 즉 북한이 5.18에 개입했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있다. 아래 사진을 보라.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은 북한에서는 분명한 물적 증거가 있는 사실이다. 윗 사진 왼편 물체는 북한의 평양룡성 기계공장에서 만든 1만톤 프레스인데, 위에 5·18 청년호라는 휘호가 벅혀 있다. 5·18 청년호 2호인 오른편 물체에도 동일한 글자가 박혀있다. 남조선에서 일어났던 5.18광주사태를 기리기 위해서 김정일이 직접 5·18 청년호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북한에는 이 외에도 5·18소년호 땅크, 5·18청년직장, 5·18식품가공공장, 5·18 고치 청년작업반 등 5·18 명칭을 달고 있는 대상들과 5·18무사고 정시견인차 운동 등 5·18로 시작되는 구호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조갑제 기자는 문제의 그의 글에서 광주사태 당시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었고 공중감시도 정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사실, 1996년 9월 18일 당시 국민회의의 정동영 대변인이 "북한 무장간첩 침투는 용서할 수 없는 도발행위라고 규탄하고 잠수정이 민간인에게 먼저 발견된 사실은 막대한 방위비를 쓰는 군의 해상방위 감지능력에 구멍이 뚫린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사실이 있다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9_6172.html : 사실 광주사태야말로 대규모 무장간첩 침투 사건이었음을 감안할 때 정동영의 이 날의 주장은 광주사태에 대한 그의 평소의 주장과 엇갈림).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우리는 무장간첩 혹은 무장공비라고 부르고 탈북자들을 북한에서 쓰던 표현대로 북한군 특수부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 1996년 9월 18일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9.18 강릉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잠시 아래 두 장의 사진을 보자.
광주시민군 배후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별도로 하더라도 남한 자료로도 그런 추정은 이미 충분히 가능하였다. 광주사태 당시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자들은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었다는 사실조차 몰라 공수부대 대장이라고 했었는데, 또 하나의 대장이 있었으니 시민군 대장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박남선 씨를 시민군 대장으로 임명하지 않고 어떤 배후 인물들이 지명했는데, 그 인물들은 박남선 자신도 누군지 모르는 인물들이었다. (시민군 대장은 전남대생이 아니었다. 막상 광주사태가 시작되자 전남대 운동권은 무기 탈취에 반대했으며,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광주에 침투해 있었던 북한군인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사실 전두환은 공수부대 대장도 아니었고, 공수부대 대장이라는 것도 없었다. 유언비어를 퍼뜨린 쪽에서 공수부대 대장 대 시민군 대장간의 싸움판을 만들어 놓았고, 많은 시민들이 그 유언비어 최면에 걸려있는 것이다.
2007년의 영화 "화려한 휴가"가 그 유언비어의 연속판이었다. 여전히 청중에게 전두환이 공수부대 대장이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고, 중학교 중퇴자였던 시민군 대장을 육사 출신 예비역 장성으로 등장시켜 공수부대 대장 대 시민군 대장간의 싸움판으로 인식되게 최면을 걸었으며, 대다수 국민이 또 그 최면에 걸려들었다. 1996년 9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첫날 방송사들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과민하였다. 무장공비가 승용차를 탈취해 도주한 것으로 파악되니 시민들은 신고해 달라는 방송을 했던 것이다. 북한군이 남한 시민과 동일한 복장을 하고 활보할 때는 그 누구도 육안으로 누가 북한군인지 식별할 수 없다. 그러나 식별이 불가능하니 무장간첩은 없었다는 논리가 가능하겠는가?
여기 어설프게 전경 복장을 한 시민군이 시민군 차량 위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았다. 여태까지는 이런 무장폭도들을 민주화운동가와 동일시하는 주장이 지배해 왔었다. 그러나 탈북자들은 북한군이 이런 복장으로 위장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자, 전경 복장을 하고 군사장비로 무장한 이 폭도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광주사태 때 북한군이 침투해 있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북한이 광주사태에 개입했느냐 안했느냐의 문제는 사실 광주사태는 남한의 5.18이냐 북한의 5.18이냐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광주사태는 과연 언제 시작되었는가? 학생 운동권이 제작하여 1980년 5월 22일 대학가에 붙은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는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사망설"이 유포된 시점인 5월 18일을 광주사태의 시작으로 간주하였으며, 5.18이란 명칭은 이 유언비어에서 유래한다.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란 5월 18일 박관현이 여수로 떠난 직후 김대중 조직이 "광주경찰이 박관현을죽였다"고 퍼뜨린 유언비어를 말한다. 이 유언비어가 퍼지자 경찷서들이 파괴되고 순경 45명이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광주경찰서로부터 치안유지 지원요청을 받은 광주향토사단이 7공수 2개 대대를 보내 시위 진압을 지원한 것이 광주사태 전개의 서막이었다. 김대중의 국민연합은 본래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일을 5월 22일로 잡았었음에도 김대중 내란과 5.18이 동의어가 된 까닭은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유포된 시점을 광주사태의 시작으로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가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작은 수치스러운 거짓말이었다. 그럼에도 서록 적국 관계인 남한과 북한 양국에서 5.18이 성스러운 날이 되었다. 탈북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양립이 불가능한 명제이다. 5.18은 도대체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
금년 9월 하순에 발간된 탈북자들의 5.18 증언록 "화려한 사기극의실체" 증언 1은 광주시민군을 배후에서 조종한 북한군 지휘관 중에 534부대 타격대의 안창식 대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한다. 과연 조갑제 기자 등이 주장하는 것처럼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어서 북한군 침투가 불가능했었는가? 안창식 대위의 내연의 처였던 탈북여성은 광주사태를 지휘한 아지트는 목포에 있었으며, 목포에 침투해 있었던 북한군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시민군을 조종했다고 증언한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76쪽),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77쪽).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78쪽).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81쪽).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87쪽).>>
만약 조갑제 기자 등이 주장하듯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면 북한군이 목포에 침투하여 있었다는 위의 증언은 부정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목포 주재 박홍서 조선일보 기자는 목포가 광주사태의 아지트였다는 탈북여성 증언과 상당히 일치하는 기사를 송고하였다.
목포가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기는커녕 경찰과 군인의 그림자도 안보였다. 목포사태가 아니었음에도 광주보다 더 난장판이었다. 22일 새벽 2시에 목포역 대합실 전부 파괴, 연동 파출소 모기관 목포지부 방화. 항동 파출소 무기고 태우고, 시내 파출소 전부 파괴. 해안경찰서, 세무서 등이 파괴되었다. 새벽 3시에는 무장복면부대 백 명이 아무데나 총 쏘며 다녔다. 기자조차 무장복면부대 백 명이 갑자기 어디서 출현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조갑제 가지 등이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상황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1996년 9월 18일 목포처럼 항만 도시였던 강릉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도한 아래 뉴스 동영상과 비교해 보라. 그때는 북한잠수함이 암초에 걸려 있었고, 택시 운전사의 신고가 있어 군의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음에도 언론과 여야 정치권이 한 목소리로 안보에 구멍이 뚤려 있음을 질타하지 않았는가!
<<오늘 새벽 1시 35분 택시기사 이진규氏의 신고를 받은 강릉시 강동파출소 경찰관은 이氏와 함께 현장을 확인하고 인근 軍초소에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軍초소에서는 관할구역이 아니라며 신고접수를 거부했습니다.
● 이진규氏(최초 신고자): 순경이 軍초소에다가 전화를 하니까 여기 관할이 아니고 이 관할은 저기 경포 관할이라 이러면서...
● 기자: 할수없이 파출소 경찰관은 신고자 이진규氏를 데리고 바로 이곳 軍초소로 달려왔습니다.
이때 軍초소 병력은 취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관과 이氏는 10분 이상 군장을 갖추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4_6172.html )
<<● 앵커: 식량사정이 극도로 나빠지는 등 체제붕괴 위기에도 불구하고 일으킨 이번 북한의 도발은 북한 스스로가 긴장을 자초했다고 하는 점에서 바로 그 점이 나름대로 노렸던 목적이 아니었던가 하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5_6172.html )
<<● 기자: 북한 남포에서 합영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대우그룹 북한관계 사무실에서는 오늘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북한에 파견돼 있는 직원들의 신변이 걱정되기 때문입니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6_6172.html)
<<● 앵커: 정부는 오늘 오후 권오기 통일 부총리 주재로 통일 안보정책조정회의를 갖고 북한 무장간첩의 침투가 국내의 정국 혼란을 유도하기위한 것으로 보고, 도주한 간첩을 철저히 색출할 것과 이 같은 침투기도에 대해 단호히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7_6172.html )
<<● 기자: 의원들은 또 대간첩 작전이 주임무인 해안부대가 초기에 잠수함 식별을 하지 못해 그만큼 대처가 늦어졌다고 지적하면서 유기적인작전 지휘 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8_6172.html )
<<● 앵커: 신한국당의 김 철 대변인은 오늘 성명을 통해 무장간첩이 침투하고 친북한 조직이 활보하는 안보상황에서 정치권의 각성이 절실히 요구되며 일부 정치세력의 환상적인 오판은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국민회의의 정동영 대변인은 북한 무장간첩 침투는 용서할 수 없는 도발행위라고 규탄하고 잠수정이 민간인에게 먼저 발견된 사실은막대한 방위비를 쓰는 군의 해상방위 감지능력에 구멍이 뚫린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자민련의 안택수 대변인은 무장간첩 침투는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 야욕이 변함 없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며, 평소 안보태세를 소홀히 한정부의 안이한 대북자세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9_6172.html )
<<● 앵커: 로이터와 AP통신 그리고 CNN과 NHK 방송 등 세계주요 언론사들은 오늘 잠수함을 이용해서 우리나라 강릉 앞바다로 침투한 북한의 무장간첩단 도발사건을 신속히 보도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100_6172.html )
<<● 김상균(통일외교부장): 지난 68년 이른바 청와대를 부수기 위해 남파됐다는 김신조 일당은 당시 우연히 마주쳤던 2명의 나무꾼 신고로 대부분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근 30여년이 지난 오늘 다시 잠수함을 타고 남파됐던 북한 무장간첩들의 비극적인 상황 이면에는 역시 한 택시기사의 재빠른 신고와 군경 합동작전요원들의 노고가 함께 어우려져 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101_6172.html )
그런데, 광주사태 당시에는 세계주요 언론사들이 광주사태 뉴스를 더욱 긴박하게 보도했었다. 그러면 미국 3대 방송사 ABC, CBS, NBC의 방송을 다시 시청해 보자.
동영상 시작후 3분 3초부터 3분 10초에서 NBC 기자는 시민군 총기에 의한 총상으로 죽임을 당한 시민 사망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못박아 말한다. 그리고 이 동영상 끝무렵에서 원래 시위를 주도하였던 운동권 학생들은 총기 무장을 거부하였고,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과격파가 등장해 무장봉기를 주도하였다는 멘트가 나온다. 이 두가지 멘트 모두 광주에 침투해 있었던 북한군 증언과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