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문명과 질병 그리고 인류와 교회의 길 (중) 십자군 전쟁과 페스트 - 종교분열과 교회개혁의 요구 전염병 창궐에 내적 평화 갈구하던 이들… ‘영성’에서 답을 찾다 열심히 기도해도 페스트는 확산 교황권 흔들리며 교회도 ‘대혼란’ 제도적 교회에 대한 불신 커지고 관상 지향하는 영성생활 나타나
발행일2020-04-12 [제3190호, 8면]
현재 멈추지 않고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는 인류에게 과제를 던지고 있다. 발병 원인을 규명하고 예방책과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특별기고 ‘문명과 질병 그리고 인류와 교회의 길’(중)에서는 중세시기 전세계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페스트(흑사병)와 교회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코로나19를 영성적으로 극복하는 길을 모색한다.
정보, 상품, 자본 그리고 사람 간에, 정치적, 지리적인 경계를 넘어선 그 흐름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전염병을 번지게 하는 데 일조했다. 오늘날 값싼 교통은 접근 불가능한 지역을 없게 했다. 세계화는 지구인들의 여행 증가를 촉발했고, 다양한 세계인들의 여행은 질병이 없던 원주민들에게 질병을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원주민들은 다가오는 새로운 질병에 대한 면역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질병에 쉽게 노출되고 감염될 수밖에 없었다.
■ 페스트 퍼뜨린 ‘십자군 원정’
8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1096~1291)으로 인한 끊이지 않는 세계적 전쟁은 주요한 페스트 확산의 원인으로 거론됐다. 전쟁으로 죽은 군인들의 시신을 수습하기도 어려웠고 폐허가 된 마을에는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검은 쥐들과 까마귀들이 파먹기 시작하면서 페스트균은 땅과 하늘을 가로지르며 돌아다녔다. 십자군의 동방원정은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염병의 확산으로 수많은 민간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지만, 원정은 멈추지 않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동방에서 페스트에 감염돼 서방 고향에 페스트를 확산시키는 주범이 됐다. 특히 4차 십자군 원정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십자군의 명분을 완전히 잃어버린 전쟁이었는데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으로 내려간 십자군이 그리스도 신자들을 학살했고, 페스트를 광범위하게 확산하는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교황이 그리스도인을 학살하는 십자군을 파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페스트,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은 인류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전염병 사건 가운데 하나였으며 세기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전개됐다. 중세 초기에 시작된 흑사병은 유럽 지역에서 다시 1346~1353년 사이 절정에 달했다.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 쥐들에 기생하던 동양 쥐벼룩을 기주로 해서 지중해 해운망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다시 시작된 흑사병의 유력한 매개체로 꼽혀 왔던 야생 검은 쥐는 12세기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흑사병으로 유럽 총인구의 적게는 30% 많게는 60%가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50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3억5000만 명~3억7500만 명 정도로 거의 1억 명 이상이 줄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채찍질 고행단의 행렬’.(1812~1814년)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기, 내적 평화 를 찾으려는 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육체에 고통을 가하며 하느님의 참회를 받으려는 운동이 일어 나기도 했다.
■ 페스트가 불러온 또다른 죽음들
중세시대 사람들은 페스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초기에 개와 고양이가 페스트의 주범이라 판단해 막대한 국가예산과 인력을 동원하며 개와 고양이를 잡아 죽였다. 그 결과 벼룩을 옮기던 매개체인 쥐가 더 창궐하게 됐다. 그러나 이상하게 유다인들에게는 페스트가 번지지 않았다. 이유인즉 그들은 구약의 정결례 예식에 따라 자주 손과 발을 씻어 병에 대한 예방을 할 수 있었고, 전염병이나 나병(한센병) 환자들은 가족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동체 밖으로 격리시킴으로써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으로 이러한 유다인들의 생존력에 독일 게르만 지역을 시작으로 ‘유다인들이 샘이나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다인 대학살을 불러 왔다. 전염병으로 동족을 잃은 독일 게르만 인들의 슬픔이 유다인들을 향한 증오와 분노, 질투로 이어져 당시 수많은 유다인들이 생매장되거나 화형당했다. 유다인 학살이 너무 확대되자 당시 클레멘스 6세 교황은 1348년 9월 26일 이러한 소문을 일축하는 칙서를 내리면서 유다인들에 대한 학살을 멈추게 했다.
■ 교회가 맞이한 변화
14세기 페스트 유행은 유럽사에서 종교사, 사회사,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스트가 한참이던 1347년부터 1380년 사이 교회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이뤄졌다. 황제를 겸하고 있던 교황 아래 통일돼 있던 유럽의 이상(理想)은 주권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독립국가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미 독립을 요구하는 국가들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교회는 페스트로 수많은 성직자들이 숨지면서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성직자들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등 자국어 기록이 늘어나면서 종교 안에서 ‘민족주의’가 싹트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는 이후 종교분열의 불씨가 된다.
교황직의 분열, 성직자와 수도자들 사이의 윤리적 방종, 평신도 사이에 퍼져 있는 거짓 신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쇄신과 교회 구조의 개혁이 필요했다. 페스트로 중세는 붕괴됐고 종교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성당에 가서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페스트는 맹위를 떨쳤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서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가 흔들리고, 인간은 신의 무력함을 체험하게 됐다. 이제 철학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신 중심의 철학이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시킨다.
제도적인 교회에 대한 불쾌감이 팽배했고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성사적인 교회에서 떠나 영적인 ‘보이지 않는’ 교회, ‘내면의 성전’을 향한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됐다. 14세기 그리스도교회의 영성은 정확히 이렇듯 관상과 신비 체험을 지향했고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덕적 방법이 제시됐다.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에서 근대적 신심운동(Devotio moderna)의 대표적 인물인 토마스 아 캠피스(1379~1471)의 ‘준주성범’까지, 교회의 영성은 근대변화의 서막을 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인의 신앙과 완덕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완전한 자아포기,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완전한 복종 및 온갖 감각의 거부가 영성생활의 목표였다.
‘영성생활’이라 하면 사람들은 ‘초월’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세상을 벗어나는 것’, ‘이탈하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초월’(trascendent)의 본래 의미는 ‘핵심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으로, ‘본질’로, ‘중심’으로 들어가서 꿰뚫어 보고 넘어서는 것이다. 온전히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적인 사람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사람들이었으며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었다. 구약의 예레미야, 이사야 예언자가 그러했고, 신약의 요한 세례자가 그러했으며,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의 대 데레사,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그러했다. 그들은 당대에 자신들의 동료들에게 따돌림당하고 고립되고 박해를 받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변하면서 그들의 진면목을 교회가 이해하고 교회는 당면한 위기를 그들의 영성적 안목으로 돌파해 나갔다. 교회 위기의 시대, 항상 영웅적인 성인들이 교회를 향해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회개와 변화를 지붕 위에서 소리쳤다.
지성용 신부 (인천 용유(준)본당 주임)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에서 2006년 영성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대학교(성심교정)에서 신학원론, 영성신학 등을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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