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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 3,7-14
형제 여러분,
7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아야 합니다.
8 성경은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내다보고, “모든 민족들이 네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해 주었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10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율법은 믿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 규정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따름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러, 우리가 약속된 성령을 믿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15-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군중
15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24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25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26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영혼의 집이 ‘거룩한 분의 성전’이 되도록 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이에 대한 유대인들은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서 놀라워하는 이들이요, 둘째는 예수님의 권위와 권능을 의심하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들, 곧 예수님에게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뒤집어씌우는 이들이요, 셋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표징을 구하는 이들입니다.
그야말로, 요한복음사가의 말대로 그들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던 것입니다.'(요한 3,1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두 가지 논거로 반박하십니다.
첫째는 만일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한다면, 결국 베엘제불이 자신의 세력을 제거해버리는 것이기에 모순이요, 둘째로는 자신들의 아들들이 마귀를 쫓아내는 것 역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이기에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비방은 완전히 부정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단지 그들의 비방과 모함에 대해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그 일로 이루어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카 11,20)
그러니 예수님께서 사탄을 쫒아낸 ‘자리’를 눈여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탄이 쫓겨난 자리에 ‘하느님 나라’가 와 있음을 말입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심을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더 세고 맹렬한 힘을 갖추고 떼로 몰려올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영혼은 임자(주인)가 있어야 하는 집과 같습니다.
만약 집이 비어 있고 임자가 없으면, 마땅치 않는 자들이 침범해 들어와 살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집을 비우는 일이 아니라, 집을 빚으로 채우는 일인 것입니다.
만약 죄나 어둠을 비우고 깨끗해지고도 그냥 그대로 있게 되면 그 자리는 즉시 또 다시 어둠이 찾아들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어둠과 악이 동료들을 데리고 떼거리로 몰려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영혼의 집이 거룩함으로 채워져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혹 우리가 어둠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하더라도, 혹 빛으로도 채워져 있지도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어쩌면 우리는 어둠으로도 빛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채, 자기 자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있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거룩한 주인을 모셔야 할 일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 영혼의 집이 ‘거룩한 분의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의 감실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카 11,20)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비채'와 '쫓차'>
제가 만들어낸 말이 있습니다.
‘비채’입니다.
몇 년 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하고 있는데 강원도 시골의 카페 이름이 ‘비움과 채움’이었습니다.
카페 들어가는 것을 그리 기꺼워하지 않는 저지만 그 아름다움과 의미 때문에 그곳만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고, 그래서 그 의미를 간직하기 위해 두 음을 따 ‘비채’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비움과 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비우고 사랑은 채우는.
미움은 비우고 사랑은 채우는.
그런데 비우는 것보다 더 센 표현이 있습니다.
몰아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악습을 몰아내는 덕’을 이렇게 노래했지요.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동요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인색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걱정도 방황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킴에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자비와 신중함이 있는 곳에 지나침도 완고함도 없습니다."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쫓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 표현을 많이 쓰십니다.
마귀와 같은 존재는 강력하게 쫓아내야 하는 것이지요.
악령이나 더러운 영은 물처럼 비우면 비어지는 것이 아니고 비우려고 할수록 더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악령 추방은 강력한 의지가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쫓아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빈집처럼 우리 존재가 비어있는 채 있으니,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가득 차 있지 않으니 더 많은 악령이 들어차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악령을 쫓아내려는 강한 의지도 있어야겠지만 성령을 모셔 들이려는 강한 정신도 있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말 하나를 또 만들어내겠습니다.
‘쫓차’입니다.
악령은 쫓아내고 기도와 헌신의 정신은 차리자는 뜻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
마귀라는 말은 ‘중상자’, ‘고자질쟁이’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에 대적하는 이 세상의 왕 또는 악한 세력입니다(루카 4,6. 2코린 4,4).
그래서 하느님을 사칭하고(2테살 2,4), 하느님 일에 반대하며(마태 16,23), 악인을 조종(에페 2,2)합니다.
인간을 모함(욥기 1,9-11)할 뿐 아니라 유혹(2코린 11,3)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유혹(루카 4,5-7)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그에 대한 반응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했고,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중의 반응은 이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고도 뺨 맞는 격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지만, 마귀는 선한 것 안에서 악한 것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악한 영은 더 큰 악을 불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참과 거짓의 대립을 놓고 심판관을 자처한다면 아마도 그곳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중상, 모략의 마음을 버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는 상태는 이미 천국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가슴안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지 내 뜻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루카 4,1-14)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28절에는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에페 4,26-27) …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 하십시오.”(에페 6,1) 하고 권고합니다.
묵시록에서는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진리의 힘으로 그 악마를 이겨냈다.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웠다.”(묵시 12,11)고 말합니다.
결국 마귀를 물리치는 길은 말씀과 성령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힘과 위로가 되고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살고 있다면 그를 천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흉보며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선을 선으로 볼 수 있고 악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길 희망하며 마귀를 물리치는 사람 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바람이 이루어지게 하는 유일한 바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인들은 선을 위하여 하나가 되고 악인들은 악한 일을 위해 하나가 된다고 하시며 악마들도 악한 일에서는 갈라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청하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귀한 게 무엇일까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러니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인데,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그렇다면 우리가 죽기까지 청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청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그러니 먼저 우리 안의 악을 몰아내는 성령님을 청합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욕망을 몰아내십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머지는 다 곁들여 받게 됩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여 청하지 못하는 것도.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녀의 삶은 영적 평화와 연합을 추구하는 누군가를 통해 그녀의 가족을 포함해 누구라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강력한 예입니다.
가타리나는 이탈리아 시에나의 부유한 대가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25명의 자녀 중 25번째였지만, 그녀의 형제자매 중 상당수는 유아기까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자코모는 부유한 양모 염색가였고, 그녀의 어머니 라파는 의지가 강하고 실용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 가족과 마찬가지로 가타리나의 부모는 그녀가 결혼하여 존경할 만한 결합을 통해 가족의 지위와 부를 더욱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가타리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사회적, 재정적 지위에 있어 잠재적인 자산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가타리나는 대부분의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녀는 불과 여섯 살 때 사도 베드로, 바오로, 요한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환상을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가타리나가 나이가 들자 그녀의 가족은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회 계층의 젊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정상적인 기대였으며, 가타리나의 부모는 잠재적인 구혼자를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가타리나는 결혼이나 가족이 꿈꾸던 세속적인 삶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을 대체할 행복은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가타리나의 소망은 명성이나 영향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평화와 연합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그녀는 수녀원 밖에 있으면서도 기도와 봉사의 삶을 살았던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평신도 공동체인 ‘만텔라테’(Mantellate)에 합류했습니다.
그녀의 금욕적인 생활 방식은 그녀의 가족을 걱정시켰고, 가족은 그녀가 극단적인 영적 수행을 버리고 좀 더 전통적인 삶으로 돌아가기를 계속 희망했습니다.
그녀의 신비로운 경험 중 하나가 그녀를 고독한 삶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위해 봉사하도록 부르면서 그녀의 삶은 극적인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가타리나는 이에 순종했고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혼란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지만, 교회와 사회 모두에서 빠르게 강력하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타리나가 참여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는 아비뇽에서 로마로 교황권이 복귀된 일이었습니다.
거의 70년 동안 교황들은 로마가 아닌 프랑스 아비뇽에 살았는데, 그로 인해 이탈리아와 그리스도교국 전체에 큰 정치적, 종교적 불안정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하여 그에게 교황권을 로마로 돌려보내고 교회에 평화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카타리나의 지혜와 영적 권위에 감명받은 그레고리오 11세는 그녀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고 결국 1377년에 교황권은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교황권에 대한 참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카타리나는 이탈리아, 특히 교황권과의 갈등이 특히 심했던 피렌체의 다양한 전쟁 세력에 평화를 가져오려는 노력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피렌체로 가서 평화 협상을 했습니다.
가타리나는 결코 권력이나 명성을 추구한 적이 없었지만,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살기를 기대했지만, 가타리나는 오직 영적인 평화와 연합만을 추구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헌신을 통해 그녀는 교회 변화를 위한 강력한 힘이 되었으며, 로마에 교황권을 회복하고, 전쟁 중인 파벌들에 평화를 가져오고,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개혁과 거룩함을 촉구했습니다.
영적인 평화만을 원했던 카타리나는 로마에 교황권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평화를 가져오며, 교회가 거룩함을 향하도록 영감을 주는 등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학원도 보내고 돈을 많이 들이며 노력합니다.
하지만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은 덤으로 받게 된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벨상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녀 가타리나처럼 마음의 평화,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됩니다.
그녀는 <대화>라는 책을 써서 교회 학자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글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소원합시다.
죽기까지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생각만 해도 주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시대 악령의 실체>
우리 시대 대 마귀 베엘제불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마귀!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괴한 형상에 날카롭고 큰 뿔이 달린 얼굴에, 괴성을 지르고 길길이 뛰는 무서운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 다른 형태의 마귀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마귀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기괴하고 흉측한 이미지와는 반대입니다.
화려한 포장지와 달콤한 맛과 향기로 자신을 감추고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취약함을 파고듭니다.
어쩌면 천박한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우리 시대 경계해야 할 대 마귀입니다.
오직 돈이 최고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돈이 하느님 위에 위치하며, 돈을 숭배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인간 취급도 안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악령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승승장구와 떵떵거림, 이를 방조하고 외면하는 사회 시스템이 이 시대 악령입니다.
불의한 방법을 총동원해 천문학적 재물을 쌓은 이들이 휘두르는 횡포와 갑질의 칼날이 이 시대 악령입니다.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고통과 상처를 외면하는 우리 교회의 안일함이 이 시대 악령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이 시대 악령으로 천박한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배경으로 하고있는 ‘죽음의 문화’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 안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배금주의, 극단적 이기주의, 가정 폭력, 대화의 단절, 편리주의, 물질만능주의가 슬금슬금 들어오더니 완전히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 시대 악령의 실체인 것입니다.
오늘의 가정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그 간교한 악의 세력, 죽음의 문화를 우리 가운데서 쫓아내기 위해 합심해야겠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시대 악령의 우두머리는 다름 아닌 배금주의입니다.
재물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입니다.
돈을 하느님 윗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합심해서 큰 목소리로 외쳐야겠습니다.
“돈이 다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리가 다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실상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은 모두 사라져갑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만은 영원하십니다.
이 세상 지나가면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스러워도 견딥시다.
모든 것 주님 손에 맡기고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갑시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생활은 ‘구경’이 아니라 ‘동참’입니다>
1)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예수님을 안 믿는 율법학자들(마르 3,22), 또는 바리사이들입니다(마태 12,24).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많은 군중이 직접 보았기 때문에(루카 11,14), 그들은 그 일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고, 그 일이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예수님이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억지 논리’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싫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인정하는 것도 싫어서 억지로 생각해낸 ‘궁여지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억지 논리’를 상식적인 논리로 반박하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라고 반박하신 말씀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입니다.
사람들을 마귀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인간 구원 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그 해방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해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활동을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으로 ‘사탄의 악’을 제압하는 싸움.
이 싸움에는 중립이란 없습니다.
선이 아니면 악입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이 아니면 ‘밖’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해도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활동은 바로 ‘나를’ 위한 활동이기 때문이고, ‘나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동참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구경’만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동참’해야만 하는 생활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죄만 안 지으면 된다.’ 라고 생각하면서, 수동적으로, 또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죄만 안 지으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마태 7,21).
4)
24절-26절의 말씀은 예수님 덕분에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면, 성령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마귀 들렸다가 해방된 사람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모든 신앙인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해방과 평화를 얻어 누리게 되는데,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아무것도 안 한다면, 마치 주인 없는 빈 집에 도둑이 드는 것처럼 마귀들이 다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또는 자신의 삶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과 정신과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2베드 2,20-22)
예를 들면, 만일에 신앙인이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서 점을 본다면,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큰 죄를 짓는 것이고, 그런 짓을 끊어버리겠다고 서약한 세례 서약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고, 자기 안에 마귀를 다시 끌어들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온전한 삶 - 악령 퇴치>
오랜만에 가뭄에 단비처럼 기쁜 소식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덕분에 새벽 산책길도 기도하며 힘차게 단숨에 걸었습니다.
한반도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 용기와 힘을 붇돋아 주는 참 좋은 노벨상 선물입니다.
국위가 마냥 선양되는 느낌에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으로 세계적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얼마전 한글날을 지냈는데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이 제일 기뻐하실 것입니다.
더불어 모방송국 동영상을 보며 한글날을 개천적으로 소개한 실수에 경악한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분명 한글날 노래 가사인데 자막엔 개천절이라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새벽 인터넷을 열어보니 한강 여성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희소식이 언론 매체마다 톱기사로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노벨평화상에 이은 두 번째 한국인이 받는 노벨상입니다.
한강은 중견 작가 한승원의 딸이기도 합니다.
몇몇 대표적 기사를 소개합니다.
“온몸에 소름, 낙수가 바위 뚫듯, 한강 노벨문학상에 시민 환호”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쾌거, ‘그의 산문은 잔혹한 권력에 맞서는 힘’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 수상, 노벨위원회 ‘현대 산문의 혁신가’, AP ‘한국문화의 세계적 영향력 보여준다.”
“한국 노벨문학상 쾌거, ‘제조업국가의 벽 돌파, 고은-황석영이 못이룬 ’벽’ 돌파.”
참으로 놀라운 노벨상 소식이 일순 마음을 환히 밝히는 듯 했습니다.
이 낭보가 국민들 마음 속, 어둠속 절망의 기류들을 날려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희망과 꿈을 잃고,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잃고, 길을 잃고 방황 표류중입니다.
그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니 어둠의 세력들에 아주 취약한 마음 상태입니다.
사탄, 마귀, 악령등이 지칭하는 바 악의 세력들입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지금 지옥은 텅 비어있다. 악마들은 모두 지옥을 뛰쳐 나와 지상에서 활개치고 있다.”
언뜻 수긍이 가는 말마디입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정신질환자들이, 영혼의 병을 앓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작 튼튼하고 온전하고 건강해야할 정신들이, 마음들이, 영혼들이, 희망과 꿈을, 길을 잃고, 무지의 탐욕에 병들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의 일화가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답을 줍니다.
우리 마음속에 희망의 빛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바로 삶의 중심 자리에 주님이 아닌 벙어리 마귀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벙어리 마귀가 쫓겨난 중심 자리에 예수님이 자리 잡으니 온전한 삶으로의 회복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중심한 온전한 믿음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께 대해 부정적 시각을 지닌 이들은 곡해하여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말하며,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부정적 시각을 지닌 불신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이 주어져도 믿지 못하고 또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할 것입니다.
벙어리 마귀축출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보여준 표징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또 하늘의 표징을 요구합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절대 영리한 사탄은 분열하지 않습니다.
악의 일치는 견고합니다.
예수님이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내면 마귀세력들의 붕괴를 뜻하니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절대로 이런 일은 없을 것이고 이들의 곡해가 참으로 터무니 없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곤 마귀 세력의 축출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있는 것이다.”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위한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인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우리 또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고생하기 전에 유비무환,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악령에 대한 최고의 예방이자 대책입니다.
악령 퇴치의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나 악마는 진공을 사랑한다.”
(Narure may abhor a vacuum but the devil loves one!)
자연을 하느님으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바로 우리 삶의 중심 자리를 진공상태로 놔둬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를 보세요.
악령이 쫓겨난 깨끗한 진공의 자리에 성령의 주님을 모시지 않으니 더 고약한 악령 일곱이 자리함으로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지지 않습니까?
진공을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지 않으면 마음의 진공상태는 악마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어제 구입한 책이 흥미롭습니다.
꼭 읽고 싶은,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삶이 무겁고 힘든 사람에게 니체의 니힐리즘이 전하는 지혜>라는 책인데 제목은 멋집니다만 그러나 섣불리 어설프게 니힐리스트로 살다보면 중심 자리에 악령이 자리잡기 십중팔구입니다.
참으로 마음의 중심 자리, 삶의 중심 자리에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반면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느님과의 합일론>이란 어느 수도사제의 훌륭한 영성신학 박사학위 논문집도 선물받았습니다.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책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두 권 다 곧 독파할 예정입니다.
믿는 우리들에게는 예수님만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 부재시 마귀의 우상이 이 중심 자리를 차지할 때 이보다 더 큰 재앙은, 불행은 없습니다.
이래서 다음 고백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새삼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온전한 믿음의 삶이 믿는 이들의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살도록 우리를 고무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삽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러, 우리가 약속한 성령을 믿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약속한 성령을 '믿음으로' 받음으로 참으로 영육으로 온전하고 건강한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악령퇴치에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 자리에 모심으로 주님과 일치되어 성령충만한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온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
‘수업료 낸 셈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려면 수업료를 내야 합니다.
인생의 길에도 거저 주어지는 건 별로 없습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면서 하나둘씩 배워가는 겁니다.
꼼꼼하게 챙기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가끔 수업료를 낼 때가 있습니다.
아마존에서 물건을 샀는데, 잘 모르고 정기 배송을 선택했습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신청 안했는데 의아해하면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1달이 지나니 또 왔습니다.
별로 필요도 없는 거라서 꼼꼼하게 살펴보니 제가 정기 배송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정기 배송을 취소했고, 이왕 온 것은 소모품이라 그냥 두고 쓰기로 했습니다.
수업료를 내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예도 있습니다.
도박에 빠지는 사람은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해도 늦을 때가 있습니다.
도벽에 빠지는 사람도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교도소에 다녀와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질, 자본, 기술, 디지털 문화는 어느덧 우리 마음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풍요로운 시대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영적인 갈망이 커지고 있습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정신적인 피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 가을 단풍, 흘러가는 시냇물, 지저귀는 새의 노래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근심의 먼지가, 시기의 먼지가, 욕망의 먼지가 수북이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어디에 있는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배는 12척이고, 적의 배는 수백 척입니다.
당연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부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었습니다.
장군의 뛰어난 전략을 믿었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려는 부하들의 용기를 믿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하셨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셨고, 제자들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무질서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잘 지은 집도 3년만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고, 엉망이 되곤 합니다.
집 앞의 텃밭도 한해만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착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와 함께 있어야 안전하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세력은 힘들고 어려운 일 속에서도 우리를 넘어트리지만, 즐겁고 기쁜 일을 통해서도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일지라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가는 우리들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하느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을 섭리하시니, 저희에게 해로운 것은 물리치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소서.”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대한 믿음만 있다면 다른 것에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요즘에는 많은 이가 스마트 워치를 차고 있습니다.
이 워치는 단순히 시간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알림, 운동량, 스트레스, 혈압, 혈중 산소, 심지어 수면 상태까지 알려줍니다.
저 역시 스마트 워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혈압약을 먹게 되면서, 이제 건강에 신경 쓸 나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거의 차지 않습니다.
제 몸의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내는 알림 때문입니다.
분명히 푹 잤는데, 수면 시간이 짧아서인지 수면 점수가 항상 낮습니다.
지난밤에 제대로 못 잤다면서 오늘 피곤할 것이라면서 ‘관심 필요’라는 알림을 제게 보냅니다.
문제는 이 알림을 받으면 정말로 하루 종일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또 갑자기 심박수가 올라갔다면서 큰 문제 있는 것처럼 진동이 울리기도 합니다.
제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사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 영향을 차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스마트 워치를 멀리하면 됩니다.
지금은 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스마트 워치를 사용하지 않다 보니, 피곤함도 없어지고 더 건강해진 것 같습니다.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굳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행복을 외부에 위탁시키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을 우리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키울 수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만 있다면 다른 것에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을 두고 사람들이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나쁜 일일까요?
만약 마귀를 쫓아내지 않고 사람들을 악으로 기울게 한다면 정말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는 것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 두목조차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께 이런 말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 인간들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외부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습니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 비방을 하게 되면 어떠합니까?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을 나쁜 의도로 받아들이면, 다시는 그런 좋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럴 수 있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보여 주셨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방과 악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외부의 영향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영향을 계속 받게 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뜻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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