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과 훈장에 초연하였던 차일혁 경무관

조선일보 창간 80주년 기념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인물 선정 (가운데 차일혁 경무관, 2000년 4월)
2011년 6월 16일, 다섯 번째 백일기도를 회향하는 날이었다. 선원에서 기도를 마칠 무렵, 한통의 문자를 받았다. ‘부친 차일혁 총경의 경무관 추서를 축하드립니다’ 벅차오르는 감격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친께서 돌아가신지 53년만의 특진이었다. 뜻깊게도 6.25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하거나 위험한 직무를 수행하다가 순직한 경찰관 708명도 부친과 함께 한 계급씩 특진을 하게 되었다.
자유당 시절, 부친의 계급은 총경이었다. 당시 총경은 몇 십 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 위로는 경무관과 치안국장, 두 계급이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총경은 지금의 치안감이며 치안국장은 치안총수, 경무관은 각 지방 경찰청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경찰관의 꿈은 당연히 경무관이다. 경무관은 경찰관의 꽃이요, 군대의 별로 따져보면 사단장급 장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총경에서 한 계급만 특진되면 경무관이 되는 것이었지만 아버지는 계급에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
1953년 9월 하동 쌍계사 근방 빗점골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는 작전이 성공하자, 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이 단일 전투로서는 최다인 세 개가 한꺼번에 수여되었다. 첫 번째 훈장은 내무부 장관이, 두 번째 훈장은 치안국장, 세 번째는 현지 사령관이었던 김종원 경무관이 받았다. 빨치산 토벌대 제2연대장으로서 전투를 총괄지휘하고, 이현상을 사살했던 부친은 훈장을 수여받지 못했다.
훗날 부친께는 태극무공훈장에 비해 급이 낮은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부대원들의 1계급 특진과 대통령의 부대표창장을 받긴 했지만 오랫동안 그 경위가 수상했었다. 알고 보니 부친 스스로 태극무공훈장 수여를 정중히 거절하셨다고 한다.
부친은 남과 북이 언젠가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으셨다. 부친은 한때 빨치산 토벌대 부대원 33명 중, 순수 전투 경찰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원들을 모두 귀순한 빨치산 포로들로 채우신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군과 경찰은 부친을 ‘온정주의자’라고 비난하였지만 부친은 그런 뒷말 따위엔 신경 쓰지 않는 분이셨다.
결정적으로 훈장 수여를 못한 이유는 부친께서 이현상의 장례를 직접 치러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처리 되어 20일간 창경원에 전시되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하였으며, 일가친척조차 찾아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살벌한 시국 속에서 부친은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나서서 이현상의 시신을 거두셨다.
부친께서는 이현상의 시신을 화장한 뒤 군인의 예를 다해 자신의 철모에 M1 소총으로 빻아 섬진강에 뿌렸다. 이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지만 부친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만약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주지 않았다면 부친은 태극무공훈장과 더불어 경무관으로 특진되셨을 지도 모른다.
1974년, 부친께서 국가치안 분야에서 유공자로 선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부친을 위한 비석을 세우라며 하사금을 전달하였지만 나는 비석 대신 전국의 사찰에서 부친을 위한 기도를 올린 바 있었다. 그후 1998년, 구례 화엄사에는 부친을 위한 공적비가 세워졌다. 1951년 빨치산토벌 작전 중, 남부군의 근거지인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고심 끝에 각황전 문짝만 태우고 천년고찰 화엄사를 보존하신 부친의 문화경찰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부친의 생애를 담은 가극 <눈물의 여왕>이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되어 20만 명 관객을 동원해 흥행에 성공하자 부친의 경무관 추서가 조심스레 논의되었지만 나는 “잔이 넘칩니다. 아버님은 절대 혼자 추서되실 분이 아닙니다.”라면서 정중히 거절한 바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8년 부친께서는 경찰로는 최초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으셨고, 마침내 2011년, 708명의 거룩한 순직 경찰 영령들과 함께 특진되어 경무관으로 추서되셨다.
2011년 6월 6일, 현충일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부친께서 현충일 추념식 롤콜(Roll Call: 다시 부르는 영웅)에 선정되시어 부친의 영상이 전국에 방송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부친께서는 2014년 전쟁기념사업회 선정 9월의 호국인물, 2015년에는 우정사업본부 호국영웅 영원우표 인물로 선정되었고, 2017년 9월 29일에는 전북 정읍시 내장산 워터파크에 부친의 흉상이 제막되었다. 올해도 호국의 달 6월이 찾아왔다.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셨고, 동족상잔의 비극에 가슴 아파 하셨으며, 항상 인의(仁義)를 위해 싸우셨고, 계급과 훈장에 초연하셨던 부친의 따뜻한 미소가 오늘따라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