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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31일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 : 코헬 1,2; 2,21-23
제2독서 : 콜로 3,1-5.9-11
복 음 : 루카 12,13-21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불운이 계속되는 날이 있습니다.
좋은 일만 계속되면 좋겠지만, 나쁜 일이 또 연달아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운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불운과 행운은 크게 차이 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말 한 마리가 달아났습니다.
사람들은 불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이걸 왜 불운이라고 하지?”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 말은 며칠 뒤에 야생마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들 행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농부의 아들이 야생마를 길들이겠다고 탔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불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군인들이 전쟁에 징집하러 들이닥쳤습니다.
다친 아들은 전쟁에 나갈 수가 없었지요.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정말 행운아예요. 아들은 징집되지 않았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불운을 불운으로 받아들이면 계속된 불운이 찾아올 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불운이라며 화를 내면 상황만 더 나빠질 뿐이야.
이미 일어난 일이야. 여기서 최선을 다하면 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불운인지 행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처한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을 찾아야 전혀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부자가 된다고 해서 행운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돈이나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그보다 더 귀중하고 높은 가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이야기해주시지요.
그는 수확한 것을 모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소출을 거둡니다.
그에 대한 어떤 비판도 없는 것을 볼 때, 성실하게 일해서 부유함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당하게 모은 재산이라도 여기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수확한 것을 모아 둘 곳이 없으면 옆에 모아 둘 새로운 곳간을 지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 곳간을 헐어 내고 더 큰 곳간을 짓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재물을 낭비하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잉여 곡물을 이웃을 돕는 데 쓰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만을 위한 마음으로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 재산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불운으로 이끌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행운아가 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코헬렛서에서 말하듯, 인간의 모든 것은 허무입니다.
큰 부자 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받은 것을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유욕은 인간이 물질을 통해 자기 존재를 공간적으로 확대하려는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 욕심은 만족시켜 주면 시켜줄수록 더해집니다.
더 많이 지배하고 싶은 마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소유하고 지배하는 마음은 결코 만족을 모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기보다 오히려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게 됩니다.
물질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참으로 사람을 빈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베푸는 마음은 베풀면 베풀수록 마음을 부유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도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남에게 베푸는 것에서 만족한 삶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또 그것에 애착을 두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또 가진 것이 적더라도 그것에 애착하고 손에 넣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역시 부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자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알베리오네 신부).
그들은 세상의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들은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 주시든지 둘중에 하나를 꼭 들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26장 12절-13절에 보면
“이사악은 땅에 씨를 뿌려, 그해에 수확을 백배나 올렸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내리시어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더 부유해져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소유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수단이 됩니다.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출의 맏물로 주님께 영광을 드려라.
그러면 네 곳간은 그득 차고 네 술통은 포도즙으로 넘치리라.”(잠언3,9)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으로 부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곳간을 그득 채울 수 있는 큰 부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재물은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재산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창세기 13장 6-7절에는 재산이 너무 많아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잦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과 소와 천막이 넘쳐 났지만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재산이 없어도 문제이지만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시편52,7-9에서는 재산이 많으면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를 천막에서 잡아채고
끌어내시어 생명의 땅에서 너를 없애 버리시리라.
의인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그를 비웃으리라.
보라,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지 않고
자기의 큰 재산만을 믿으며 악행으로 제가 강하다고 여기던 사람!”
바오로 사도도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으로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6,9-10)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로마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키케로는
인생을 망치는 6가지의 잘못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남을 깎아내리면 자기가 올라간다고 착각하고,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일을 고민하고 걱정한다.
어떤 일을 자기가 이룰 수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사소한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한다.
생각의 발전과 진보를 무시하며 독서하고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요한다."
2000년 전에 한 이야기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 되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는 임금님도 욕할 수 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남을 험담하고, 시기하고, 깎아내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머 특별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 시기와 질투로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4%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40%의 걱정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걱정이고, 30%는 지난 일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4%는 천재지변과 같이 어쩔 수 없는 걱정이고, 4%만이 의미 있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런 걱정 때문에 지금의 기쁨이 연기처럼 사라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야단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지 않으면서 남들도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라.’고도 하셨습니다.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너는 그것을 빼앗지 못한다.’
하늘에 있는 달을 보라고 하는데 그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처럼 작은 것에 매달려서 참된 진리를 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던 사람들,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던 사람들, 예수님을 조롱했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틀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의 규정과 율법을 절대시하던 시대에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던 시대에 안식일의 정신을 알려주셨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행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새 술’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의지는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날개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자유의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날개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을 속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 병자를 고치는 능력, 복음을 선포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파견하였습니다.
남을 깎아내리면 스스로 올라간다는 적자생존의 착각을 깨닫고
스스로 낮은 곳을 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걱정도 팔자라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일이라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고 고심 끝에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이룰 수 없으니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위대한 착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있으며,
사상의 진보를 위해 오늘도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나를 따르라는 구호 아래 모이지 않고
홀로 옳은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함께 합니다.
나의 삶이 인생을 망치는 삶인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삶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욕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가치 있는 것을 찾도록 합시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참혹한 고통과 슬픔 역시 잠시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세 개의 독서들은
우리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이탈과 초월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몸 담고 있는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 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것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참혹한 고통과 슬픔 역시 잠시뿐이라는 것.
그러나 깨지기 쉬운 질그릇같이 나약하고 연약한 우리,
이 세상 모든 것은 유한하다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자주 망각하는 우리이기에,
또다시 작은 것에 연연하고, 별것 아닌 것에 집착하며,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목숨을 걸며, 그렇게 쫌생이 처럼 팍팍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코헬렛의 저자는 반복해서 외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렛 1장 2절)
바오로 사도는 허무하고 유한한 이 세상에 목숨을 걸지 말고
또 다른 세상, 저 위의 세상을 희망하고 추구하라고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새서 3장 1절)
루카 복음사가 역시 오로지 지상 재물의 축척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우리에게 강력한 회심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복음 12장 15절)
천천히 코헬렛을 읽다 보면 열심히 한번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에게는
‘김새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인생 뭐있어? 적당히 즐기는 거야”라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하면서 읽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현자였습니다.
인생의 높은 정상에도 올라 봤지만, 가장 밑바닥까지 체험했던 인생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풍부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 길어봐야 80년, 90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더라도 세월 앞에, 죽음 앞에 장사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깔깔대고 웃고 즐기지만,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는 것,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 뛸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기뻐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며
그저 주어지는 순간순간에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오늘 하루를 만끽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젊음도 권력도 재물도 결국은 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갈 대상들이니
너무 집착하지도 말고 너무 아쉬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하신 분,
세세 대대로 인간 만사를 다스리실 분,
우주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 내어 맡기고 편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이 말씀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반향 되고 있다.
허무다(hèbhel)라는 단어가 코헬렛에 22번이 나온다.
그 본래 의미는 수증기, 숨을 의미하여
폐에서 콧구멍과 입에 이르자마자 없어지는 숨처럼 단기적이고 단명한 모든 것을 말한다.
인간에게 확실한 보증이 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코헬렛은 말한다.
돈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확실한 보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내일에 대한 수고와 걱정과 불안에 대해 돈이 과연 무엇을 보상해줄 수 있느냐고!
그러므로 돈을 쌓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복음에 나오는 부자처럼 보통 두 가지 위험에 부딪히게 된다.
갑자기 닥치는 죽음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에 자기의 재화를 누릴 수가 없고,
자신의 고뇌를 행복과 평온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
즉 부자가 된 그는 이제 그렇게 애써 모은 재화를 지키기 위해
밤에도 마음을 죄어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헬렛의 내용은 세상의 것들의 일시성과 잠정성을 알게 함으로써
인간을 고통과 실망 속에 떨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부(富)에 들어가게 한다.
이렇게 복된 가난한 이들에 이르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재화 앞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재산분배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첫째로 인간은 그 내부로부터 이기주의라는 악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주의를 치료함으로써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고 폐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유산의 공평한 심판자처럼 행동하려 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를 요청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 필요한 가르침이다.
두 번째 가르침은 재화와는 관계가 없는 인격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관한 것이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15절).
많은 사람이 그들이 가진 재산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소중하게 여긴 그 재화가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생명을 잃게 한다.
즉 애덕과 사랑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개방하지 않고,
재화를 쌓는 일에만 몰두하여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21절)이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의 이기심은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이 되고,
스스로 자신을 자신이 지은 감옥에 가두는 결과를 내는 것이다.
여기서 그 자신 안에는 다른 사람은 전혀 존재할 수 없고 그의 재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은 그에게 허무를 안겨주는 모습이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20절).
생명과 재산이 그에게는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 보였던 그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나고 있다.
성경에서 어리석다는 개념은 하느님을 모르는 체하고(시편 14,1)
잘못된 근거에 자신의 신뢰심을 두는 사람으로
하느님을 거부한 후 스스로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이 부자는 아둔하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고
전혀 가진 것이 없는 어리석고 가난한 자이다.
자신이 죽는 순간에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을 전혀 갖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21절).
묵시록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3,17).
세상에서 재화와 재물에 집착하여 거기에 매여 노예가 되는 모습이다.
여기서는 재화와 재물이 하느님보다 더 섬김을 받게 되니 그것이 우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상에서 벗어나 올바로 주님을 섬기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해
신뢰심을 가질 것을 권고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9-31).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세상의 재화나 재물에 매여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으로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 재물이나 재화에 집착하고 거기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우상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재물이나 재화의 노예가 아니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 재물이 그것을 만드신 주님의 뜻에 따라서
올바로 사용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2-3).
하느님 앞에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한다.
돼지와 암소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은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닌 것을 남들과 나누는 나눔의 기쁨이 없다면!
저는 우리 삶이 허무가 되지 않을 이야기 하나 해 드립니다.
거의 모든 분이 어린 시절 읽거나 들은 이야기로 알고 있으니,
어린 시절을 추억하시면서 들으시기바랍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실려있었던 이야기이지요.
두 형제가 있었지요.
함께 농사를 짓고 추수 단을 반으로 나누어 형은 동쪽에 있는 자기 집 옆의 창고에
동생은 서쪽에 있는 집 옆 창고에 쌓아 놓았지요.
형은 결혼을 하여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고 동생은 혼자 살았지요.
형이 생각했어요. 나는 자식들이 있으니 훗날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허나 동생은 혼자이니 훗날을 생각하여 동생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여 형은 밤중에 몰래 곡식 단을 지고 동생의 창고에 갖다 부었지요.
한편, 동생이 생각했지요.
나는 혼자이지만 형님은 형수님과 조카들이 있지 않은가.
형님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가야 공평하리라.
하여 동생도 몰래 자기의 곡식 단을 덜어 형님의 창고에 갖다 부었지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분명히 곡식을 서로 덜어 주었는데 여전히 창고에는 같은 양이 있거든요. 참 이상했지요.
어느 날 달빛이 은은히 비치는 밤, 등에 곡식 단을 진 형제는 밭 한가운데서 만납니다.
형제는 그제야 곡식이 줄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지요.
여기까지가 교과서에 있던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집니다.
하늘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것을 내려다 보고 계셨지요.
하느님이 외치셨습니다.
“바로 이곳이다. 여기 나의 성전을 지으리라.
인간 가운데 사랑이 있는 곳, 거기가 내가 머물 나의 성전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는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읽으며 또 들으며, 얼마나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까?
우리 형제들도 크면 그렇게 하리라고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어른이 된 지금 우리의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자신들을 돌아봅시다.
우리 형제들은 어떤가를.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제 형더러 저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 거절하시면서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말라.”고 하시며
사람이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나누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이웃에게 나누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지요. 우선 내가 성공하면 그다음에 나누리라고. 글쎄요.
어느 부자가 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을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하는데도
왜 사람들은 나를 구두쇠라고 비난하는지 모르겠어.”
친구가 말했습니다.
“글쎄. 내가 암소와 돼지 얘기를 하나 해 주겠네.
어느 날 돼지가 암소에게 자신은 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네.”
돼지가 말했어.
“사람들은 항상 암소의 부드럽고 온순함을 칭찬하지.
물론 너는 사람들에게 우유를 제공하는 것을 알아.
하지만 사실 내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제공 한다구.
베이컨과 햄, 털까지 제공하고 심지어는 발까지 주는데도 사람들이 날 좋아하지 않아.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암소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지.
“글쎄. 그건 아마 나는 살아 있을 때 유익한 것을 제공하기 때문일 거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거늘,
살아 있을 때 왜 지닌 것을 나누어 다른 사람의 가슴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히지 않는지요?
장자가 너무나 가난하여 그날 먹을 쌀이 없어
위나라 문후를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하고 쌀을 꾸어 달라고 하자 문후가 말했습니다.
“좋소. 금년 가을 세금이 걷히면 그때 황금 삼백 근을 꾸어 주리다.”
장자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제가 여기로 오는 도중에 어디선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수레바퀴 때문에 움푹 파린 진흙 창에서 한 마리 붕어가 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붕어야, 왜 나를 불렀느냐?”
붕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몇 되의 물로 나를 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했지요.
“내가 오나라 국왕을 만나 양자강 물을 범람시켜 너를 구해주마.”
그러자 붕어가 버럭 성을 내며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몇 되의 물이 없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형편이오.
몇 되의 물만 있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데 당신은 그런 말씀을 하시는구려.
그렇다면 차라리 나를 건어물 점에서 찾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나눔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훗날 커다란 것을 나누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로마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화는 마치 바닷물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탄다.”
지니면 지닐수록 더 지니고 싶은 것이 인간이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에서 어리석은 부자가 지니고 있는
둘째 문제는 그가 이 세상 너머의, 죽음 이후의 다가올 나라에 대한
혜안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말하지요.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놓았으니 몇 년은 걱정할 것 없다.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우리의 생명은 온전히 그분 하느님의 것,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부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이지요.
썩어 없어질 재화를 창고에 쌓아 놓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재화를 하늘에 쌓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지 않기 위해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여야겠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들어 우리의 주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우리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우리의 형제,
그리고 이웃에게 우리가 지닌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어릴 적 천 원만 있으면 꼭 사고 싶은 장난감이 있었습니다.
돈을 열심히 모아서 가게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제 눈이 삼천 원짜리 장난감에 꽂혔습니다.
또다시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돈이 모이자 이번에는
장난감을 사기보다 저금통장을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한참 뒤에 보니, 장난감은 구경도 못 하였고
저금통장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조금 더’가 부른 참사였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지금도 곧잘 그런 행동을 하는 저를 문득문득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 자체가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재물이 모든 것을,
곧 생명마저도 보장해 주리라고 믿은 나머지
그것에 집착하여 우상처럼 대할 수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우상은 참으로 오랫동안 힘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로 만들고 있습니다.
큰소리를 내지도 호들갑을 떨지도 않으며
조용히 사람들에게 ‘조금 더’라는 소리만을 흘려보낼 뿐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은 점점 남의 입과 주머니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자신이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재물을 모으기만 하는 어리석은 부자가 됩니다.
내 얼굴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 점점 웃음기가 사라지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조금 더’를 외치며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자신이 지닌 것에 만족해하며 감사와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탐욕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한 때입니다.
더 가질수록 더 불안해지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빅뱅의 지 드래곤은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춤 실력과 랩 실력으로
지금까지 꺾이지 않는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는 가수입니다.
아마 청소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화려함 이면에는 외로움과 공허함이 가득합니다.
한국 콘서트와 일본에서 진행한 지 드레곤 인터뷰의 요약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덕분에 너무 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상당히 어릴 적부터 꿈이었고, 계속해서 쉼 없이 달려오다 보니까
제가 지금 꿈속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 너무 좋은데,
뭐가 꿈인지 현실인지 잘 모르겠는 그런 기분이 가끔 들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뭐가 현실이고 뭐가 꿈인지, 그런 것이 헛갈리는 순간이 엄청 많이 와요.
방송적으로 잘 안되는 것들도 다 경험해 봐야 하는 것들인데
너무 좋은 경험만 하고, 계속 좋은 인생을 살아와서…. 어…. 미쳐가는 것 같아요.
외로워요. 많이 외로워요. 그냥 인생이 너무 외로워요. 그러니깐 화려해서 너무 외로워요.
며칠 전에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다가 제가 스스로 편지를 쓴 적이 있는데 제가 조금 읽어드릴게요.
‘잘하고 있고, 다 잘 될 거야, 니가 그렇게 만들고 있어.
그런데 너도 좀 쉬어라. 널 위해 살아.
니가 없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아, 다 알아서 돌아가는 거니깐.
자연을 보렴. 인간은 정말 작은 존재란다. 오버하지 말고, 일단 올해만 버텨보자.’”
4개월 동안 진행된 월드투어가 끝난 이후 그는 갑자기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켭니다.
원래 라이브를 하는 사람도 아니었던지라 팬들은 매우 의아했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콘서트가 끝나고 오랜만에 한국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고 외로워서 라이브를 켰어요.”
이는 지드래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 전 BTS도 데뷔 9년 만에 잠시 쉬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전엔 음악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짜내야 하는 삶에 너무 지친 것입니다.
단체 활동 잠정 중단을 선언하며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게 맞나? 싶어 무섭기도 하고 정답인지 고민이 많았어요.
내가 쉬고 싶다고 하면 미워하실까 봐 사실은….”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형이 유산을 가로챘다고 자신에게도 좀 나누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돈을 갖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며 부자의 비유를 해주십니다.
부자가 곡식을 두기 위해 곳간을 확장하지만 결국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 12, 15)
예수님은 모든 탐욕은 결국 생명을 유지하려는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욕구는 ‘생존 욕구’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는 게 두려워서 돈을 모읍니다.
그러다 돈이 많으면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은 죽음과 함께 썩어버립니다.
돈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돈과 쾌락과 명예는 가지면 가질수록 공허하게 합니다.
예전에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작업하는 인부들이
작업 중 추락하여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돈을 들여 아래에 그물망을 설치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에도 떨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인부들이 떨어졌던 것은 생존을 월급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이 생명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생존을 책임져주는 그물망이 있으면 오히려 돈도 더 잘 벌립니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것은 그물망이지 돈이 아닙니다.
돈에 의지할수록 그물망이 필요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물망을 설치하기 전까지는 돈을 많이 받을수록 더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그물망 앞에서 돈을 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 의지하면 돈은 저절로 오게 됩니다. 안 오더라도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게 이젠 생존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놀이가 됩니다.
그런데도 세상 대부분은 예수님께 나아오면서도
아직도 재물에 의존하고 그런 것을 청하러 옵니다.
영원한 생명을 책임져주실 분 앞에서
단 몇 년을 책임질 재물을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만 원만 달라고 하며 부모는
그런 역할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 자체가 안전망입니다.
김준호 씨는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에 진학하여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복무 19개월이 되던 10월 어느 날 부대에서 관물대 위에 올라가
물건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척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추를 크게 다쳐 전신마비 환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신체장애를 탓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러자 입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는 네 가지가 감사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전신마비 환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고 믿게 된 것이 무엇보다 감사하고,
둘째는, 군대에서 다쳤기 때문에 치료비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셋째는 원호병원에 입원하는 중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는데,
아내는 그때 병원의 실습생이었습니다.
넷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구필화가(입으로 그리는 화가)가 된 것이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인당이라는 화명으로 붓을 입에 물고 글씨나 그림을 그렸고,
1981년도에는 세종문화회관 전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감사가 아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일단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 감사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줄 안전망을 만났을 때 나옵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지 맙시다. 그런 것들은 다 생존을 위해 내가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의존할수록 공허하고 불안하고 외로워집니다.
우리는 그런 공허함의 늪에 빠지며 인생을 허비하지 않도록
영원한 생명의 안전망을 쳐놓고 살 수 있어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