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최초의 안동도호를 설인귀로 알았습니다.
이는 구당서 설인귀전의 "高麗既降,詔仁貴率兵二萬人與劉仁軌於平壤留守,仍授右威衛大將軍,封平陽郡公,兼檢校安東都護."라는 대목을 여과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안동도호는 魏哲입니다.
唐右將軍魏哲神道碑라는 묘지명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乾封元年詔加明威將軍,本官如故。大風遺孽,叛渙青邱;小水殘魂,憑陵碧海。率百官於文祖,尚興彭蠡之師;會萬國於塗山,猶有防風之戮。是歲也,詔公爲遼東道行軍總管。軍營對日,兵氣橫天。開玉堂而按部,坐多城而勒陣。闕鞏之甲,犀兕七重;ゴサ之船,舳艫千裏。駕鼉梁於聖海,秦皇息鞭石之威;泛鼇釣於仙洲,愚叟罷移山之力。然後風行電卷,斬將屠城。塞丹浦之遙源,伐黑林之奧本。王孫公子,名г皂隸之臣;深穀大山,境入樵漁之囿。
二年詔加上柱國,仍檢校安東都護。導之以德,齊之以刑,威振六官,風揚五部。兵戈載戢,無勞尉候之虞;桴鼓希聞,寧有穿窬之盜?仰太陽而湛露,方預四朝;臨逝水而急寒風,俄悲一去。齊孟嘗之下淚,高榭曲池;魯司寇之悲歌,頹山壞木。長安杳杳,還符日近之言;京兆悠悠,竟絕天高之問。玉關生入,自判無期。繡服晨還,竟知何日?總章二年三月十六日,遘疾薨於府第,春秋五十有四。嗚乎哀哉!詔贈左監門將軍,禮也。"
위철은 건봉원년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行軍總管)으로 참전하였고, 건봉2년(667)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가 되었으나 총장2년(669) 3월 16일 54세의 나이로 안동부 관사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679년 연남생도 관사에서 사망하였는데 안동부 관사에는 귀신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마도 독살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고?????)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위철이 안동도호로 참전하였으나 고구려 멸망 후 바로 설인귀가 안동도호가 되고 위철은 그를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 둘째 위철이 사망하고 난 후 설인귀가 안동도호가 되었을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묘비명을 보면 “威振六官,風揚五部”라고 하는 점, 그리고 안동부 관저(府第)에서 사망한 점으로 볼 때 위철이 안동도호였던 것이 분명해 보여 두번째 가능성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구당서 설인귀전을 다시 살펴보면 앞에 인용한 부분 바로 뒤에 “移理新城”이라고 하여 최초의 안동도호부가 마치 신성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되게 하는 부분이 있어 많은 사가를 혼란스럽게 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최초의 안동도호 위철은 평양에서 안동도호로 근무하였고, 설인귀는 전략적 요충인 신성을 지키고 있었다. 669년 3월 갑자기 위철이 사망하자 설인귀가 2대 안동도호가 되었으나 전략적 요충인 신성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여 신성에서 안동도호의 업무와 군사적 업무를 함께 보게 되었다.
가장 타당해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아마 이 시점 (669년 3월) 평양이 고구려 부흥군에 의해 점령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674년 고구려 부흥군이 패배하는 시점까지 평양을 점거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금귤님의 조언에 따라 찾아 본 결과 배진흥교수의 '중국 소재 한국고대사 관련 금석문 자료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논문에 위철이 소개 되었습니다. 다만 배교수는 건봉 2년을 총장 2년으로 보아 설인귀가 떠나고 난 후 안동도호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위철이 사망한 시점(총장2년 3월 16일)을 고려하면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 묘비명에 따라 최초의 안동도호는 설인귀가 아니라 위철이라고 역사서를 바로 잡아야합니다.
첫댓글 청골님은 어디서 이런 귀한 자료들을 속속들이 찾아내시는지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듭니다.
좋은 자료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국내 최초 공개는 아니고, 묘지명이 발견된 것은 아닙니다.<
唐右將軍魏哲神道碑>는 <문원영화>와 <전당문>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배근흥 교수의 논문에서 이미 언급이 되어 있고 최근에는 이를 받아들여 노태돈 교수의 <삼국통일전쟁사>에도 잠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배근흥교수의 견해는 제가 저녁에 다시 올려드리겠습니다. 참고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배교수의 논문은 꼭 좀 올려주십시오.
--- 찾았습니다. 본문 수정하였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