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가을철에 나의 인생의 걸어 온 길을 책으로 발간하기 위하여 써 논 글중에 서울의 둘째누나 의 고마움을 남기고져 써 논 글이며 결코 글을 잘 써서 책으로 발간을 한것도 아니고 나의 살아온 나 의 삶의 글이며 둘째누나의 고마움의 글 임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
‘둘째 누나의 고마움’
나에게는 세분의 누나가 있다. 그리고 막네로 45세의 늦둥이로 내가 있으며 어떻게 어머니의 45세에 농경사회의 가난한 시절에 생겼는지 참 신통방통 하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에 광 한 칸의 조그마한 농가집이다. 어머니는 무남독녀의 외롭고 귀여운 외가 집에서 결혼을 한 후에도 외가집에서 살으셨다. 왜냐? 여기 본가에는 너무 가난하고 먹고 살수가 없어 외가집으로 가서 아들겸 딸겸 노릇을 하며 외가집에서 가서 살으셨다. 오죽하면 못 먹어서 어머니는 귀가 먹으셨고 겨울이면 동치미로 허기진배를 채우시곤 하셨단다 .집은 선영땅에 지어서 살고았다..누나들 두 분은 외가집에서 외할머니,외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받고 같이 살으셨다.그런데 특히 둘째누가 외가집에서 외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살으신 모양이다.
둘째 누나는 얼굴도 예쁘지만 머리도 좋고 똑똑하시다. 그렇게 가족들이 모두 외가집에서 거의 살았다. 결국에는 외가집에서 주신 논과 밭으로 그리고 조그마한 오막살이 집은 부모님의 노력으로 마련하여 가정을 꾸려 자녀들을 기르고 하여 가정을 이루어 오신 것이다. 누나들의 세 분 중에 한 분만이 초등학교만 나오시고 위로 큰 누나, 둘째누나 초등학교도 못 나오신 문맹인시다 그러나 둘째 누나는 본인 스스로 터득하여 한글을 깨우치신 것이다.
그때 오막살이 방한칸 집이어서 둘째 누나는 이웃집의 혼자 사는 친척이나 착한 과부집에서 같이 주무시고 아침이면 집으로 오곤 하였다.다 큰 처녀가 아버지,어머니 막네 누나 그리고 나 같이 잘 수가 없어 동네를 오가며 잠을 자고 생활을 하신 것이다. 둘째 누나는 나하고 12살 차이로 농촌의 우리집을 다 도맡아 거의 하시었다. 그러니 우리 집안의 일꾼이다. 아버지는 맨날 나주 향교나 문중일을 보시는게 하나의 직업이시다. 농촌에서 일이나 하시는 농부가 아니시다.그러니 어머니는 둘째 누나의 도움만 기다리는 것이다. 이미 큰 누나는 결혼을 하였다. 내가 4~5살정도일 때 둘째 누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 둘째 누나를 결혼을 시킨 뒤로 어머니는 맨날 저녁마다 남 몰래 우시는 것이다. 이제는 집안을 그렇게 잘 이끌어 가시고 하나의 일꾼이었던 둘째 딸을 기둥처럼 의지하다가 결혼하여 출가를 시키니 누구를 의지하여 살림을 하여 줄 사람이 없는것이다. 역시나 둘재누나는 똑독하시고 영리하시어 출가 한 시집에서도 인기가 좋고 대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주에서 둘째 매형이 인쇄소를 다니시다 서울로 올라가서 직장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그래서 둘째 누나도 서울로 올라 가시어 유일하게 서울에서 살고 계시는 누나가 생긴 것이다.
친정집에 막네로 아들 하나가 생긴 동생을 남동생이서 그런지 무척이나 귀여워 해 주시고 6십년대 그 귀한 손목시계도 사다 주시고 나이롱 양말도 사다 주시고 친정집에 궤종 시계도 사다 주시고 어머니의 겨울철의 따뜻한 쉐타도 손수 짜서 친정집으로 보내 주시고 어려운 친정집을 시집을 가서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살펴 주신 것이다. 서울에서 살다 보니 나주의 친정 집안의 농촌의 부모님이나 동생들이 어렵게 사는것이 둘째 누나의 눈에 보이신 것 같다. 이미 서울에서 깨어 있는 듯하다.
내가 처음으로 중학교를 다니면서 ‘서울’이라는 곳에서 둘째 누나와 매형이 사시니까 서울 매형 누나집으로 나들이를 가게 되었다 나주 촌놈의 맨 처음의 서울 구경이지 둘째 매형이 처남이 왔다고 남산의 케이블카도 태어 주시고 경복궁. 창덕궁등의 구경을 시켜 주시고 서울에서 둘째 누나 사시는 모습을 구경을 하게 된 것이다.그 어렷을적의 내 눈에 그렇게 어렵게 사시는 모습 같지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중학교 3 학년을 졸업을 하고 서울로 둘째 누나집에 가게 된 이유는 내가 여기서 대학을 다닐수 있는가 탐색전 이었다. 내가 나주중학교를 졸업을 하고 공부를 잘하여 광주의 명문‘광주고등하교’를 원서를 써 놓고 시험도 못 보고 시골의 농촌의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것을 알고 어머니하고 이버지하고 크게 싸움을 하신 것이다 어머니 말씀 왈 “지금까지 무엇을 하여 놓고 광주로 아들 하나를 가르치지 못하느냐?” 라는 부모님의 싸움이다. 이러한 사실을 서울의 둘째 매형과 둘째 누나가 다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둘째 매형이 나를 불러다 놓고“네가 광주로 네가 원하는 광주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은 가정 형편으로 도저히 다닐수 없으니 여기 나주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나중에 서울에서 어떻게 생각을 하여 보자” 라고 둘째 매형이 설득을 시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니기 싫은 농촌학교의 ‘나주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다.그러니 공부를 제대로 하겠으며, 매일 학교를 다녀오면 소깔이나 베어다가 소죽이나 써 주는 농촌에서 어떻게 공부를 제대로 하겠는가? 저녁밥을 먹고 나면 잠이 오기 시작하여 눈깝풀이 깜박깜박 거리기 시작한다. 그 때에는 다 큰 청년기라 하여 사랑방으로 쫒겨서 아버지하고 같이 침실을 같이 한 것이다. 농촌에서 사랑방이라고 하여 보아야 어두컴컴한 쾌쾌한 냄새에 여름이면 초가집에 비가새서 빨간 물이 벽으로 흐르고 소죽을 써서 먹이고 나서 나의 저녁밥을 먹고나면 졸려서 영어 사전을 찾다가 졸리기 일수이고, 수학의 어려운 미분.적분을 어떻게 풀수가 있을까? 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이 가르쳐 주실때에도 이해가 잘 가지를 못 하였다 이게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래 고등학교만 다녔지 공부는 뒷 처지고 그때 서울의 남산방송국, 그리고 M.B.S 임택근 아나운서 이광재 아나운서의 뉴스를 알리는 라디오 방송이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학교 공부시간에는 공부는 않하고 아나운서의 ‘뉴스’를 한다고 연습을 하다가 국어 선생님 한테 뺨을 맞기도 하였다.허기서 그래서 서울에서 남산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을 한 번 치른적이 있었다. 결과는 떨어졌지만 ........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만 하여도 어떠한 나의 미래에 대한 목표를 생각 해 본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나의 삶에 대하여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중학교때 둘째 매형과 둘째 누나가 말한 껏도 있고 하여 서울로‘대학’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그런데 농촌의 산골에서 어떻게 대학을 갈 것인가? 재산이라고는 겨우 논 몇 마지기 밭 몇 마지기로 어떻게 대학을 다닌 단 말인가? 일단 뒷 일은 나중에 생각을 하기로 하고 고등학교의 졸업식도 않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그 다음날부터 남산의 시립남산 도서관에서 대학 입시에 매진을 하였다. 나주의 시골의 촌놈이 시립남산도서관의 장서를 보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기껏해야 시골에서는 고등학교 교과서외에 무슨책이 있단말인가 그렇게 하여 나에게 불가능한 대학의 공부를 하겠다고 서울로 상경한 것은 둘째누나와 매형의 덕분이다. 그래서 대학 2학년까지 다니다가 부모님이 올라 오셔서 부양을 하였으며 주경야독으로 ‘인천교육대 단기 양성소’에서 초등학교 교사자격증을 취득 하였으며 발령이 나지 않아 모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여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3십 여녀 간의 서울시민을 위하여 봉사를 하였다고 자부를 하여 본다 그리고 놀 수가 없어 초등학교 계약제 교사로 남은 시간을 보냈으며 항상 책을 상대로 하는 직업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고 생각을 하여 보고 지금까지도 책을 놓지 못하고 사는 삶을 살아 가고 노후에 책과 글 쓰기를 취미로 하여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서울의 둘째 누나와 매형의 도움이며 고마움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살아 가면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자기의 삶을 개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는 부모님의 도움이며 저 같은 경우는 둘째 누나가 자기 자녀들과 시집의 눈치를 보면서 친정의 남동생을 그렇게 지극히 사랑을 하여 주시고 돌봐 주시고 마지막의 대학의 등록금까지 대어주신 둘째 누나의 고마움을 어찌 이 필설로 다 표현을 할 수가 있을까? 부모님도 할 수 없는 역할을 하여주신 것이다. 오늘날 내가 존재하는 것은 부모님과 그리고 둘째 누나 매형 그리고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아내의 도움이다. 인생의 삶이란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 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서울에 올라가서 세계적인 석학 중국의 ‘임어당’박사의 명강의를 어떻게 들을수가 있으며 이미 고인이 되신 안병욱 교수님의 평생 가슴에 새긴 강의를 어떻게 들을수가 있을까? 비록 서울시 공직을 내 인생의 직업으로 정년을 하였지만 내가 서울로 내 삶을 개척을 하지 않았다면 가능 할 것인가. 인천교대의 초등학교 교사자격을 가져 볼 수가 있을까? 서울의 역사와 문화 수 많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서 원 없이 책장을 넘겼으며 광화문 지하의 교보문고의 책들을 접할 수가 있었을까? 노후에는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서 매월 매월 꼬박꼬박 주는 연금으로 노후의 생활을 추레한 모습이 아닌 아직도 책장을 넘기는 삶을 유지 하는것도 모두가 다 저 세상에 두 분의 앞을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시고 동생을 사랑하는 눈으로 보살펴 주신 큰 은혜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면서 필을 놓고져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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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친구의 글을 대하니 마치 60년대 학창시절로
흑 백필림을 되돌리는 듯 합니다.
가난한 시절에
형제애가 더 깊었던 것 같고
효심도 더 깊었던 것 같습니다.
세월 참 빠르네요!
요즘 저런 가난도 없지만 저토록 지성껏 베푸는 형제애도 없지요
정말 너무도 대단하신 누님 매형이십니다
만장봉님의 지금이 있기까지 저 두분의 은혜가 하야같습니다
다소 ~ 긴글이었지만
1초도 쉬지않고. 숨도 쉬지않고 읽었습니다
참으로 ~ 감동적이고
훌륭한 누님을 두셨기에
지금의. 쓴님이. 계시는군요
자그마치 666편의. 글을. 언제 다 읽을수. 있겠냐마는
한번 해보겠습니디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