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 죽은 나무상자이다 / 이수종
거실이 마땅치 않아 제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피아노가
안방으로 끌려들어가 후미진 구석 끝에 처박힌 꼴 뻘쭘하다.
죽은 나무상자에서도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걸 오늘 아침
에서야 알았다 옥수수 알갱이같은 음의 치열齒列을
가지런히 감추고 자폐아처럼 소리를 제 속에 빨아들이며
멎어버린 심장을 두드리지 못한 소리의 박동들이 나무상자
안에서 녹슬고 있었다. 피아노에게서 음계를 빼앗아도
소리의 원천은 죽지 않는다는 걸 왜 몰랐을까.
소리라는 것은 찾아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울지 않는다.
소리가 침묵으로 삭여진 후 뚜껑이 열리고 두들겨주어야
소리를 내 볼 양인데 내가 벙어리를 모시고 산지
십수 년이 갔고 벙어리와 교감을 이룰 수 있게 되기까지
난 귀머거리가 되었다 호두나무여 침묵의 소리여
네가 깊어지던 그 무게만 한 음계의 침묵으로 방안에서
정적 하는 동안 무수한 소리들이 화음으로 피아노 페달을
두드렸을 것이고 방안에서도 덩달아 침묵을 만들었을
것이나 호두나무는 베어져 피아노로 다듬어지기 까지
제 소리를 내세우지 않았다. 호두나무는 자라오는 동안
천둥소리까지도 제 속에 잘 새겨두었으므로 누가 두드리며
안부를 물었을 때 그 깊이를 환상의 음계로 되돌려 주고자
가장 엄숙한 무거움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아침에
나무상자뚜껑을 열고 몇 가닥의 건반을 두드려주자 그동안
흩어지지 못한 소리들이 미처 죽지 못한 하루살이처럼
방안 가득 흩어졌다. 고이지 못한 소리들은 침묵할 때와
달리 유폐된 음계가 바람처럼 소리를 잃었을 때가 되어서야
호두나무는 피아노 소리를 동경하며 방안 가득 퍼져
나갔으리라. 바람소리까지도 끌어안고 저 혼자 깊어지는
공복을 감춘 채 무수한 소리를 견디며 공중에 뿌려지지
못한 공명共鳴은 꺾이고 날지 못하는 소리로 호두나무의
알몸을 흔들어 깨웠으나 호두나무상자에서는 아드리느를
위한 발라드의 선율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출처] 이수종 시인 6|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