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十嶺(70고개)
이재부
칠십령(七十嶺)을 빠르게 오르고 있다. 세월의 흐름은 숨도 안 차
는지 단숨에 고개 정상이 보인다. 삶의 대로에서 맺어진 인연의 끈이 무관심으로 가라
앉으며 흔들린다. 푸른 젊음이 길게 남아 있을 때는 당기면 탱탱하고 탄력 있었는데 60
고개를 넘어 퇴직의 문을 나오니 힘없이 느슨해진다.
떠내 보내고,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점점 멀어져 사라짐을 마음 아파하면서 전화 옆에
도 앉아보고, 대문에 걸어놓은 우편물 수취함에도 들려보지만 편지 한 통만 소식이 이
어질 뿐 물 빠진 겨울 바다 갯벌같이 텅 비어 있고 질척거리는 70고개에 비어 있는 자신
을 발견한다.
늙는다는 것 다 그런 것일 테지.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허무감에 빠져 구름을 헤치
고 별츨 찾듯 추억을 더듬는 버릇이 생긴다. 삶의 환호성이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인가?
맑게 개인 날 무리 지어 반짝이던 그 많은 별들이 퇴직이라는 고개 (嶺)하나 넘어왔는데
그리고 멀리 보이는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조각구름을 밀어내지 못한 업보인가. 70
고개엔 사람이 사람이 그리워진다.
세상 사람들은 다 사랑하고 어울려 춤추며 사는데 혼자만 멀리 떨어져 빈집 지키는 견
공같이 꼬리 내리고 눈감으면서도 행인을 응시하는 마음 상태가 노령고객(老齡孤客)의
평상시 정서인지 좁은 소견에 그늘이 진다.
전화벨이 울리기에 받았다. 지극히도 사랑하는 손자 녀석이 서울에서 전화를 했다.
말솜씨가 많이 늘고, 정이 넘치는 목소리다. 전화 한 통 받고 생기를 되찾아 이웃 분들
이 불러주는 동행주석(同行酒席)에서 작으나마 삶의 재미를 보태며 여생을 보낸다.
70령(七十嶺)고갯길은 오를수록 시계(視界)가 좁아짐을 실감한다. 퇴임 후 갑자기
좁아진 생활 범위에서 하루가 점점 길어지고, 여분의 시간이 많아지니 옛날 정 나누던
사람들을 마음에 담고 주변을 맴돌게 된다. 그들 주변에서 긴 시간동안 서성이다 서산
노을로 사라지는 70고개에 펼쳐지는 일상은 어둠만 계속되는 극야(極夜)인 듯 적도 아
래로 멀어진 태양을 그리워한다.
아직은 주저앉을 기력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도 칠십령(七十嶺)을 오르면서 인생 무
상의 속도감과 현기증을 겁내는 것이다.
맥놓고 오르는 70고갯길 일상에서 탈출해 보고 싶다. 그리운 사람, 색깔 고운 젊음을
찾아가 세월의 길섶에서 잃어버린 젊은 날개옷을 찾고 싶어지는 것이다. 등산가방 가득
세월을 잡아넣고, 여행을 준비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정 나누리라' 마음을 열면
서 춘천을 가기 위해 7시 40분에 출발하는 원주행 첫차 표를 샀다.
출발 시간이 남아있다. 매표소 앞 석유 난로에 불을 쪼이고 서 있는데 불혹에 가까워
보이는 신사 한 분이 성서를 믿을 수 있는 이유」라는 인쇄물을 내 손에 들려주며 가슴
을 노크한다. 대화의 문을 열까, 닫을까 망설이다 인생에 대한 화제로 마음을 열었다.
화제의 범위를 성서로 국한하려는 의도가 집요하지만 70령 삶의 길에서 주워들은 상식
으로 아호타천(我好仙賤)하는 종교의식이 다행스럽게 고쳐지고 있는 현실을 화제로 삼
았다.
그는 내 행색을 살피며 등산 가느냐 묻는다. 면회 간다고 대답하니 군대간 아들한테
가느냐고 재차 묻는다. 설명할 수 없는 질문이다. '칠십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군대갈
아들이 있겠는가' 속으로 웃으며 차에 올랐다.
중부고속도로는 내 가슴같이 비어있는 듯 드문드문 달리는 차들이 한계속도를 넘어
총알같이 달려간다. 차창에는 금시 성애가 끼더니 얇은 얼음으로 시야를 막는다. 싸늘
한 겨울 풍경 볼 것은 없지만 그래도 궁금하여 차창을 비비고 밖을 보려하지만 금세 차
단된다. 빠르기도 하다. 차량 속도, 늙는 속도, 결빙 속도 세상이 모두 빠른 것뿐이다.
11시도 안 되어 춘천에 도착하였다. 면회를 신청하기는 이른 시간이다. 전날 음주를
탓하며 칼국수 집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칼국수를 시키니 몇 명이냐고 묻는다. 혼
자라고 답하니 아직 준비가 안됐다고 문전 박대다. 또 딴 집을 찾아 들어갔다. 처음부터
이실직고했다. 한 명인데 칼국수 되겠느냐고 물으니 한 그릇이면 어떠냐고 되묻는다.
마수손님이라며 커피까지 흡족한 대접을 받았다. 문전걸식하던 김삿갓은 이 맛을 알리
라.
위병소에 찾아가 의리와 정성으로 나를 지켜주는 사랑하는 제자 면회를 신청하니 1시
30분 되어서야 뛰어나왔다. 손을 잡고 그리움의 회포를 풀면서 깨알 같은 정성을 담아
보내준 유일한 편지에 감사했다.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가져간 음식물을 펼쳐놓는다. 7대 독자를 거두는 모정으로 국
가에 맡겨둔 고귀한 자유를 찾아 편한 자세로 음식을 권한다. 모처럼 먹은 술이 취하나
보다. 곱게 잠든 군인 옆에서 젊음을 훔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훔쳐갈 수도,
얻어갈 수도 없는 젊음을 70령 빈 가슴에 염치없이 퍼 담고 싶은 심정이다.
'삶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힘들게 얻은 지혜를 저 젊음 가슴에 보물같이 담아주고,
70고갯길에 청순한 들꽃으로 다가온 사랑에 감사하리라' 순서 없이 꺼지는 춘천에 불빛
을 밤새 지우며 七十嶺에서 내 젊음을 돌아보고 있다.
2005/ 23집
첫댓글 공감하는 나이가 되어 가서인지 글쓴이와 동행하며 춘천에 간 느낌입니다.
아직은 사회에 있으나 십 수년전 30년 직장을 그만두고 나올때 느꼈던 감정이 올라옵니다.
조금있다 이제 여기서도 떠나면 나도 글쓴이와 꼭 같은 마음이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