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움과 비움
아침에 냉장고 문을 여니 냉기가 없었습니다. 냉동고에 있던 음식도 다 녹아 버렸죠.
깜짝 놀라서 서둘러 음식을 꺼냈습니다..
김치냉장고로 옮길 것은 옮기고 수도 없이 들어찬 것들을 꺼내니 버려야 하는 음식이 산처럼 쌓입니다.
언제부터 냉장고가 돌지 않았는지 감이 안 잡힙니다.
불은 들어오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오래되어서 모터가 나간 것일까하고 코드를 뺏다가 다시 꽂아보았습니다.
헉! 웅~ 하면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속이 너무 들어차서 과부하가 걸린 것입니다.
아까운 음식들을 버리고 망연자실 텅텅 비어버린 냉장고를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깨닫는 순간이었죠. 미지근해진 물을 마시면서 집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주방도 방도 거실도 물 건으로 들어차있었습니다.
얼마나 욕심을 부렸는지 더 이상 둘 수 없을 지경으로 물건으로 좀 막히게 둘러쳐있었죠.
멈춰 버린 냉장고와 물건으로 들어찬 집안이 꼭 나 자신 같았습니다.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이 수도 없이 쌓이고 허둥지둥 하루를 견디면서 여유를 찾은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바쁘면 짜증이 나고 불만에서 오는 심술이 고개를 듭니다.
이러다간 몸과 마음에 과부하가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움이 필요한 때입니다.
냉장고에 여유 공간을 두고 집안을 비우고 나또한 뭔가를 비워야 건강히 살 수 있을 것 같았죠.
오랜만에 지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실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말이 울립니다.
거실은 구석에 난 화분 하나가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 깨끗했죠.
짐이 별로 없고 트여진 공간에서 느끼는 울림이었습니다.
머리부터 청아해지는 맑음이 느껴지고 다가오는 신선함에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둘이 마주앉아 신선이 바둑을 두듯이 여유와 함께 차를 마십니다.
거실은 그리 넓은 편도 아니고 베란다 쪽 창에서 작은 빛이 들을 뿐입니다.
비어있는 공간에서 생기는 소리의 울림과 몇 줄기의 빛이 어우러져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생각나게 합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신선한 기운이 한참 지속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집 모든 곳에 비움이 필요합니다. 거실에 앉아 둘러보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죠.
거실은 피아노와 운동기구, 소파와 테이블, TV와 수족관이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틈이 필요한데 어떻게 하면 될까를 며칠 곰곰 생각했죠.
먼저 안방의 작은 운동기구를 버리고 거실에 있는 것을 안 방으로 옮겼습니다. 작은 방을 정리하고 피아노를 옮겼죠.
사람을 불러야하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치움을 반복하면서 공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거실에서 대화를 하다가 작은 울림이 느껴졌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손뼉을 치고 싶은 심경이었죠.
공간은 비워지기 시작했는데 마음은 답답해져 갑니다. 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내 마음도 꽉 차면 누군가의 마음이 못 들어오고 남을 생각하지 않게도 되고 건강에도 안 좋습니다.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가지나무처럼 될까 우려됩니다. 음악이 묘합니다. 헛된 바람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사람도 상통한 느낌이 듭니다. 완벽해 보이고 많은 것이 갖춰진 사람은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위축되고 열등감이 고개를 들고 뭔가 흠을 보이기가 싫게 되죠.
완벽하게 보이는 사람은 숨이 막힙니다. 뭔가 허점이 보이는 사람이 다가가기가 수월하고 편해 보입니다.
그에게선 빈틈이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공간과 냉장고는 자꾸만 채워지겠지만 어느 한 순간 그 것이 느껴질 때 다시 비움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틈과 비움은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주며 빈틈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도 나름 허허롭게 사는 방법일 것 일테니까요.
-행복한가에서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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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열셋 가족이 다 모인 거실은 북적이는데 열기를 식혀줄 에어컨은 구식벽걸이형이라 제기능을 다 못합니다
급하게 선풍기를 2대 더 구매해서 이 방 저 방에 골고루 배치한 덕분에 그럭저럭 버틴 주말이었습니다
어제 아침 처갓집에 먼저 들렸다는 막내가 손녀애가 열감기로 다시 체온이 39도를 오락가락한다기에
차례걱정하지 말고 24시간 운영되는 어린이병원이 있는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 했습니다
부부는 일찌감치 맏딸과 함께 선산으로 가 입향조부터 찾아뵙고, 차례차례 성묘를 했습니다
제수가 든 작은 아이스박스를 들고 45도 경사진 선산에 오르는 게 힘에 부치더군요
그래도 32대조부터 여섯분의 조상을 한 군데에 모으고 36대인 우리 부부 비석까지 세웠으니 더 돌볼 곳은 없습니다
37대손인 막내에게 두 딸 뿐이니 대대손손이란 말도 마무리해야 할 형편이 되었네요^*^
이 또한 현세를 살아갈 적절한 방법을 찾는 기점이 될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 세대가 끝난다고 해서 조상을 기리는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가 사라질까요?
세 시간 만에 집에 오니 막내네도 도착해 있고, 꽤 오랫만에 온 탓에 둘째손녀가 낯설이를 하네요
올 설날에 봤을 때는 재롱을 피우며 이 품 저 품으로 나비처럼 날아다녔었는데...
일단 추석날 당일 아침 차례를 생략하기로 했으니 가족들끼리 즐거운 시간만 누리면 됩니다
첫째네가 오후에 먼저 떠나고, 막내도 올라갈 테고, 둘째네는 연휴 마지막날까지 머물겠다고 합니다
두내외만 살던 집에 열셋이 복작거리다가 다시 하나둘 떠나고 고요함을 되찾겠지요
채움과 비움이 계속되는 삶이 이런 것 아닐까요?
본격 추석 연휴 시작일 하룻길도 천천히 걸으며 자주 웃으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