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징그럽게도 매서운 한파가 오가고 눈도 많이 왔던 올겨울. 이제야 한 걸음 물러서려나 보다. 아직 추위는 가시지 않았지만, 햇살만큼은 입춘이 지났음을 알려준다. 새해는 일찌감치 왔다고 해도, 사실 설 연휴가 지난 지금에서야 묵은 것들을 보낸다. 3월이면 무언가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학, 개학, 개강, 시무식 등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일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를 실감하듯 수많은 이별 속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우리 삶인 듯하다.
요즈음 6살짜리 딸이 유치원에 다녀와 시무룩하다. 선생님, 단짝친구와 헤어져야 하는 것이 어색하고 불안하다는 말을 한다. 이제 이 녀석도 슬슬 ‘이별’을 맛보게 되는 셈이다. 그야말로 졸업 시즌인 2월은 6살짜리 꼬마에게나 다 큰 언니 오빠들에게나 매한가지로 아쉬운 달이다. 헤어지는 일은 매번 그때마다 낯설고 아프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일 중 하나이다.
이별 앞에서 우아할 수 있을까
여기 18세기 인정세태를 진솔하게 묘사했던 이옥(李鈺: 1769~1815)이라는 문인이 있다. 정조의 문체 반정에 유일하게 맞선 개성 만점 문인이기도 하다. 그는 지위고하(地位高下)와 성별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충실하게 묘사하고자 했다. 이옥의 붓끝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근엄함으로 포장하거나 공론으로 그친 것들은 드물다. 마치 사람의 마음을 돋보기로 관찰한 듯 그 정(情)의 천변만화가 살아서 움직인다. 그는 「북관 기생의 한밤중의 통곡(北關妓夜哭論)」이라는 작품을 통해 만남과 이별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한 바 있다. 우연히 어느 객을 통해 함흥 기녀 가련(可憐)이 흠모하던 소년과 사랑을 맺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면서 통곡했다는 이야기 들은 것이 계기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별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다. 가련이 통곡한 이유는 단순히 사랑의 상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가련이 통곡한 것은 아마도 천고에 ‘만남’이 어려운 것을 울었던 것이리라……정성으로 매달리고 마음을 보내는 것이, 여자가 남자보다 간절하지 않을 수 없고 신하가 군주보다 간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정이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라 하였다. 이별이 슬픈 이유는 바로 그 만남이 가치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니 이별 앞에서 우아하게 참고 견뎌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천고의 가치 있는 만남이 이어지지 못하는 걸 통곡하는 것이 당연지사 아닐까? 이옥은 결국 함흥 기녀가 “참 제대로 통곡한 여인”이라 칭찬한다.
이별을 만끽해야 극복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거개의 실학자들은 그들의 ‘업’에도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내면이 외치는 소리에도 참 충실했다. 다산이 그러했고, 연암, 박제가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다. 연암이 친한 벗이었던 이덕무의 죽음 앞에서 그 영별의 슬픔을 처절하게 드러낸 구절은 유명하지 않은가. 지음(知音)이었던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던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에서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냥 줄을 끊어 놓은 것만으로 이별의 슬픔이 달래지느냐는 것이다. 연암은 백아가 분명 단숨에 그 거문고 줄을 끊고 부수고 밟아서 아궁이에 밀어 넣고 불태워버린 후에 통곡했을 것이라 한다. 백아의 슬픔에 자신을 투영했던 것이다. 그는 마음껏 슬퍼했다. 다산 역시 유배로 인해 자신이 겪은 이별, 자신이 목도한 이별 등을 소재로 많은 시작품을 남겼다. 박제가와 청대 유명 화가 나빙의 만남은 짧았지만, 나빙이 이별 선물로 준 박제가의 초상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만남도 이별도 정성스러웠던 이들이다. 모두 그렇게 이별을 극복했다.
시쳇말로 ‘쿨’하게 이별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니 어렵다. 크고 작은 이별들에 대해 연연해 한다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한다. 옛 선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 속에서 소리치는 아쉬움과 쓸쓸함을 실컷 위로하며 이별을 만끽해도 그다지 나쁠 것은 없다.
얼마 전에 결혼 생활과 새로운 공부를 위해 시애틀로 훌쩍 떠나버린 친구가 있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다 큰 어른이 참지도 못한다는 지청구를 들을까 그리움도 제대로 티내지 못했다. 옛글에서 이별을 만끽할 힘을 얻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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