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포로 엉덩이를 서로 보겠다는 인간 막장에서 박현 사장의 베트남 참전 이야기 이민복(대북풍선단장)
대북 전단을 보내느라 수고한다고 소고기 택배를 보낸다기에 감사하여 직접 받으러 갔다. 서울 종심에 빌딩을 소유하신 부자여도 언제나 가보면 에어컨을 켜지 않고 계신다. 그 아들도 마찬가지이다. 손님이 와야 켜는데 에어컨에서 나오는 물도 버리지 않고 화분에 연결에 놓았다. 정주영 현대 회장 방에 도둑이 들었지만 가져갈 것이 없어 난감했다는 정신과 일맥상통하다. 만났다고 푸짐한 점심 식사를 대접하신다. 식사 자리에서 베트남 참전 이야기가 나왔다. 탈북한 나도 생사를 넘었다고 하지만 전쟁의 생사를 겪어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 들었는데 영화로서 글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1969년 베트남에 도착하여 전투를 처음 참가했을 때이다. 베트콩이 점령한 마을을 포위 섬멸하는 전투였다. 전호를 파고 대기하는데 적이 새까맣게 밀려온다. 각오한다고 했지만 정작 닥치니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이빨이 서로 부딪치고 머리칼이 쭈뼛 선다. 잠시 후 죽을 수도 있기에 사형당하기 전의 사형수가 따로 없는 것이다. 경직되어 총을 쏠 수가 없을 정도이니 참호에 함께 있던 고참 두 명이 수류탄이라도 빼 들고 있으라고 한다. 수류탄 한 발을 안전 고리를 뽑고 한 손에 다른 손으로 한 발을 더 뽑았으나 안전 고리를 아무리 해도 뽑을 수 없다. 사시나무 떨 듯하며 우왕좌왕하는 신참이 저러다가 안전고리 뽑힌 수류탄을 놓치면 다 죽을 판이니 고참들이 던지라고 다그친다. 그래서 있는 힘껏 던지느라 했지만 3 m밖에 안 갔다. 얼마나 경직되었으면 멀리 못 갔을까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이게 사는 길이 될 줄이야. 머리맡에 떨어진 수류탄에 죽을 뻔하였지만 이 폭발을 보고 베트콩들이 다른 곳으로 밀려 가는 것이다. 중대장이 그들을 향해 사격하라고 소래기 친다. 하지만 모두 조용히들 있다. 군법으로 사형시키겠다고 해도. 왜냐면 어차피 도망는 자들이니 그냥 가는 것이 서로 좋다는 것이다. 죽을 각오로 도망치는 자들에게 총을 쏘면 자신들에게 총구를 돌려 죽을 수도 있기에 군중 심리로 볼복종하는 것이다. 전투가 끝나도 이들 모두를 처벌할 수도 없다. 다 살아남자는 본능이 지배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며칠 밤을 새면서 베트콩이 있는 마을을 포위하고 있다. 눈 앞에 무엇이 얼씬하면 그냥 총을 갈겨댄다. 마을 여인들이 백기를 들고 나오다가 죽기도 한다. 양민 학살이라고 입 놀리기 쉽지만 전투를 못해본 이들의 소리이다.죽을 판에 다 잠까지 못 자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전투가 끝나면 수백 구의 시체들이 더운 날씨에 부패가 된다. 시체 썩는 냄새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역하다. 300여 구의 시체를 모아 놓으니 산더미 같다. 배가 부풀어 나기에 이렇게 큰 산더미가 된다는 것이다. 포클레인 같은 장비가 없어 묻을 수 없으니 차에서 휘발유를 뽑아 태울 수밖에 없다. 이런 장면을 보았나?!라고 박현 사장은 자문자답한다. 인간의 존엄이 깡그리 사라진 상황을 다 표현을 못하는 것이다. 습격을 나가다가 남녀 베트콩을 생포하였다. 여자는 임신 3개월이지만 그래도 여자로 보인다. 배고품보다 더 힘든 것이 목마름이다. 고기 통조림보다 과일 통조림을 더 선호하기에 양보를 안 한다. 하지만 포로 여자에게는 준다. 동정 같지만 사실 성적인 관심과 배려인 것이다. 남자 포로가 소변을 보겠다면 바지 입은 채로 싸라고 한다. 하지만 여자 포로는 손을 풀어주고 보게 한다. 군인들 곁에서 볼 수 없으니 떨어진 곳으로 간다. 호송할 군인이 가야 하는데 서로 가겠다고 싸운다고 한다. 여자의 엉덩이를 보고 싶어서 싸우는 것이다. 다툼이 격해져 순번을 정해서 오줌 호송을 했다고 한다. 취침을 할 때이다. 정력이 넘치는 한창 나이의 군인들이 그것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씨를 남기려는 본능이 무섭게 작동한다. 이런 판에 여자가 있으니 <회식>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민간인 강간을 엄격히 처벌하는 군법이 있다. 중대장이 여자 포로에 끈을 묶어 곁에서 자며 보호한다. 이 끈을 끊고 강간 하려 입에 칼을 물고 포복 전진하는 자가 있었다. 들킬 것이 뻔하지만 암컷을 향한 수컷의 본능이 더 지독한 것이다. 그래서 헬멧으로 짐승 같은 자라고 두 들켜 팼다고 한다. 지뢰에 걸리고도 살아남았다. 거짓말 같지만 엄연한 현실 경험이다. 수색을 나가는데 뭔가 느낌이라는 것이 있어 갑자기 엎드렸다. 그 통에 모두 엎드렸다. 그래서 살아 남은 것은 아니었다. 국군이 먹고 버린 깡통에 기폭제를 꽂아 놓고 인계 선을 늘어놓은 것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불발이어서 모두 살아남은 것이다. 전투 도중 영어를 좀 한다고 뽑혀 미군 통역사로 헬기 타고 몇 달 다녔다고 한다. 그 통에 미군 부대 안을 보았고 선진국의 면모를 강하게 느꼈다고 한다. 제대 후 선진국에 가려는 열망이 여기서 생겼다고 한다. 서독 광부로 가려고 그렇게 무진 애를 썼지만 못 갔다고 한다. 영화 <국제 시장>을 보다가 애국가 열창하니 합격시켰다는 장면에서 분노했다고 한다. 애국가 열창해서는 어림도 없고 당시 30만 원 로비를 하지 않으면 못 갔다는 것이다. 월급이 1만 원도 안되던 시기 30 만원이 어떤 가치인지 알기나 하나. 서독 광부로는 못 갔지만 차후 중남미에 진출하여 사업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옷을 만들어 미국에 파는 사업인 것이다. 좁은 한국에서 머리 터지며 있다가 세계에 나가니 그렇게 넓었다고 한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우중 대우 회장의 말대로이다. 세계 무대에서 뛰면서 미국 사업가들이 얼마나 신사이고 신용가들인지 때마다 감탄을 한다. 미국의 저력이 정직과 신용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도 강하게 느끼는 실례를 든다. 맏아들이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데 35억 가량의 코로나 지원금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 전후의 3년 간 세금 낸 것을 근거로 코로나 기간 손실 본 액만큼 보상을 해 주더라는 것이다. 베트남 파병을 통해 돈도 벌었지만 군 장비를 미군 수준으로 올렸다고 한다. 북한군에 크게 밀렸던 상용 무기와 전투기를 개선시킨 것이다. 엠1 소총에서 엠16으로 국군을 무장시켰고 펜텀기를 도입하여 북한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생생한 베트남 전투 경험을 가진 국군으로 만든 것이다. 625 때 인민군 주력이 중국 국공 내전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이었던 것을 뒤집은 것이다. 당시 미군이 철수한다고 해도 북한은 남한을 이길 수 없었다. 자다가 공격당한 625 전쟁 때와 양상이 확 달라진 것이다. 인도지나 공산화의 바람이 세찼던 1975년까지 한반도에서도 전운이 매우 짙었다. 남침용 땅굴도 이 시기에 파내려 왔던 것이다. 군사가, 정치 경제가로서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제 2의 625 참변이 났을 것이다. 특히 1967년 유일 지도 체제를 확립한 북한에 대응하여 1972년 유신 체제를 도입하여 대응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1971년 김대중이 만약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큰 일 날뻔했다는 것이다. 북한에 먹히지는 않았더라도 무기가 좋아지고 남한도 힘이 세졌을 때이니 막상막하 남북은 초토화될 뻔 했다는 것이다. 박현 사장은 지나온 생애에 대한 책을 남기겠다고 했다. 너무 생생한 소리를 담았기에 사모님은 질색을 하지만 그래도 진실은 진실이기에 반드시 남겨야 한다고 나 역시 종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