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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릉 도 원 기 (武 陵 桃 源 記)
도 연 명 (陶 淵 明)
화창한 봄날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여느 때처럼 배를 저어 산골짜기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물고기를 잡다보니, 골짜기를 지나 얼마나 왔는지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한참을 헤매다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윽히 풍겨오는 향기에 취해 배를 저어가니, 마침내 골짜기는 좁고 산이 앞을 가로막아 배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골짜기사이로 조그마한 구멍이 있었고 그 구멍에는 희미한 빛이 있는 것같이 보였다.
어부는 배를 매어놓고 구멍으로 들어가니
처음입구는 지극히 좁고, 한 사람이 겨우 들어 갈만하던 굴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넓어지더니, 이내사방이 환한 넓은 세상이 나타났다.
부신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산에는 다른 나무라고는 한그루도 없는 온통 복사꽃 수풀이요, 새소리와 도원일색의 너무나도 곱고 향기로운 경치였다.
어부는 한동안 넋을 잃다 복숭아나무 숲 언덕으로 올라보니, 땅은 끝없이 넓고, 집들은 즐비하게 늘어섰으며, 멀리 가까이 호수사이로 기름진 논밭과 굽이치는 강변을 따라 복사꽃 숲 사이로 차밭, 뽕나무,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닭소리, 개소리가 들리고 누렁소와 논 밭일을 하는 사람과 마을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타국사람 같은 옷을 입었으며, 백발의 노인이나 어린이나 여자나 남자나 모두 즐거운 듯 웃는 얼굴이었다.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어부를 발견한 그곳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놀라며, 어디서 온 사람인가 물었다.
어부가 오게 된 까닭을 이야기하니, 그들은 곧 어부를 반가이 맞으며 어느 집으로 안내하고, 밥을 짓고 술과 닭고기를 내어 크게 환대하였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서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조상께서 처자와 함께 진(秦)나라 때 전쟁에 찌든 피폐로 과중한 세금과 부역의 폭정을 피해 멀고 험한 이곳으로 왔다가, 그 후로 구차하게 살며 한번도 바깥 세상에 나가지 않고 살았으므로, 다른 곳 사람들과는 사귀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세상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그들은 한(漢)나라도 모르거니와 그 뒤의 위(魏)나라, 500년 후의 진(晉)나라 일은 더더구나 말할 것도 없다.
어부가 아는 것을 하나하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들은 혹은 놀라며 감회가 깊은 듯 들었다.
유방과 항우의 싸움과 생매장, 유목민 흉노와 전쟁과 공주의 시집, 중국에 온 불교, 삼국의 피비린내 난세의 조조와 관운장, 사마염의 진(晉)나라 이야기...
어부는 이집 저집으로 초대를 받아, 향긋한 음식과 술을 대접받고 지내는 동안 어느 듯 며칠인줄 모르게 지나갔다.
오래 머물러 달라 붙잡는 마을사람들과 간신히 돌아가는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마을을 나와 배를 매두었던 곳에 이르러 선물로 받은 복사꽃을 잔잔한 강물에 뿌리며 흐르는 꽃잎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나올 때 촌로가 말하기를 “우리 동네 이야기는 남에게는 하지 말아주시오” 하는 당부를 들었지만, 어부는 지나오는 길에 군데군데 표적을 남겨 놓았다.
집으로 돌아온 어부는 곧 태수에게 가서 자기가 보고 온 진귀한 일을 이야기하였다.
무릉골짜기 도원향 마을의 그들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가르치고, 어려움에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며, 농사에 힘쓰고 해가지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집으로 돌아와 쉬며, 기록한 달력이 없어도 매화꽃 피면 때를 알아 농사에 서두르며, 바람 차가와 낙엽지면 추수를 하고도 세금 낼 걱정도 아니 한다.
꽃핀 후 열매 달리니 누구나 먹고, 아이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노래 부르고, 노인들도 역시 그렇다. 집집마다 쳐진 울타리가 없었으며, 자식이 성장하매 부자(父子)관계는 있어도 군신(君臣)의 차별이 없었다. 따라서 욕심의 흥망도 없다. 마을을 서로 왕래하며 흥겨운 잔치를 즐겨하고 술을 마셔도 다툼이 없었다.
어부의 이야기를 듣고 태수도 퍽 흥미로워하여, 어부를 따라 관병을 보내어 그곳으로 가보았으나, 돌아오는 길에 남겨놓은 표적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처음 갔던 길을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때 마침 남양에 사는 유자기라는 선비가 있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이상한 마을이 요순(堯舜)같은 태평성대의 평화선경(平和仙境)으로 알고 몸소 찾아가고 싶어 했으나, 수십 년 동안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그곳을 찾으려 나루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세 사람들은 무릉(武陵)의 도원향(桃園鄕) 그곳이 신선(神仙)이 사는 선경(仙境)이라고도 하고, 혹은 어떤 사람은 예전부터 도원을 말하는 자는 신선에 미혹한 이야기라고도 하고, 오직 도연명과 한유, 왕안석만이 사실이라 말하였다. 한빛농사꾼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욕심으로 평화를 깨트리는 전쟁이 있는 한 무릉도원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깊이 깨달아 이 지구가 무릉도원 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라 침이 마르도록 칭송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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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거 래 사 (歸 去 來 辭)
도 연 명 (陶 淵 明)
자! 돌아가련다.
이제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 향리 집으로 돌아가련다.
고향 전원이 오래 동안 손질을 하지 않아 어지러이 황폐한 잡초 밭이 되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요?
이미 스스로 고귀한 정신과 몸을 부질없는 욕심의 세파에 시달리게 해 상처로 남게 만들었으니, 어찌 후회하고 실망하며 홀로 슬퍼만 하리요?
지나간 일은 뉘우쳐 봐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다가올 일은 잘 가다듬어 바른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어리석어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주 멀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다행히 깨달아 참으로 바른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후회스럽고 그릇된 점을 알았다.
고향으로 가는 뱃머리 흔들흔들 경쾌하게 떠나가고, 바람은 살랑살랑 옷깃을 흩날리네, 지나가는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먼지를 물어보니, 긴 밤 잠 못 이루어 새벽빛이 희미해 아침이 늦은 것을 여러 번 한스러워한다.
마침내 저 멀리 정든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니, 심부름하는 아이가 길에 나와 반기고, 어린 자식들은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기다린다.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은 잡초가 무성해 거칠 대로 거칠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만은 아직도 그대로 남았구나.
눈물짓는 아내를 뒤로 한 채 어린놈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롭게 익은 술이 가득하다. 항아리를 잡아 당겨 스스로 잔을 들어 마시고, 뜨락의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기뿐 웃음을 지어본다.
남쪽 창가에 기대앉아 마음대로 행동하니, 무릎 하나들일 만한 작은 방이지만 마음은 이 얼마나 편안한가?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전원의 정취에 무르익어 젖어드니, 몸과 마음이 청아하고 즐거웁다.
문은 비록 달았으나 찾아오는 손님 없어 닫긴 채 그대로고,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여 발길 멎는 아무데서나 쉬다가도, 문득 고개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석양이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려는데, 나는 홀로 선 소나무를 어루만지고 상념에 잠겨 서성이며 돌아본다.
마침내 돌아왔노라!
원컨대 이제 세상과 사귐도 그만두고 세속의 교유도 끊어버리리라. 세상사와 나와는 서로 맞지 않아 인연을 끊고 잊어버리기로 하였으니, 다시금 수레를 타고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하리요?
동무와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하고, 거문고타고 책읽기를 즐기며 온갖 시름을 놓아버리리라.
농부가 나에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주니, 이제부터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어떤 때는 달구지를 몰고 험준한 산 언덕길을 지나기도 하고, 혹은 한 척의 쪽배를 저어 고요하고 깊은 골짜기를 찾으련다.
나무는 즐거운 듯 생기가 올라 꽃피려 야단이고, 샘물은 졸졸 솟아올라 전원을 흘러간다.
만물은 때를 얻어 저마다 즐거워하는 것이 부럽기만 한데, 누구나 그렇듯이 내 삶도 머지않았음을 느끼는 도다.
아! 세상 모든 것이 유구하나 인생은 끝이 있다.
이 늙은 몸을 세상에 붙여두어 남아있을 날이 얼마런가? 어찌 가고 머무름을 자연의 섭리에 마음대로 맡기지 아니하고, 이제 새삼 허둥지둥 분주하게 욕심내어 어디로 가려는가?
돈과 벼슬은 진정 내 원하는 것이 아니었고, 죽어서 신선이 산다는 곳에 태어날 생각도 아니 한다.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거닐어도 보고, 혹은 지팡이를 세워놓고 김도 매고 흙도 북돋우리라.
동쪽 언덕에 올라가 조용히 휘파람과 노래를 읊조리기도 하고, 맑은 시냇가에 나아가 시를 지어보기도하며 산수를 즐기리라.
애오라지 잠시 자연의 조화에 맡겨 살다가, 마침내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주어진 천명에 기쁘게 따를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歸去來兮 귀거래혜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舟遙遙以輕颺 주요요이경양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乃瞻衡宇 내첨형우
載欣載奔 재흔재분
僮僕歡迎 동복환영
稚子候門 치자후문
三徑就荒 삼경취황
松菊猶存 송국유존
携幼入室 휴유입실
有酒盈樽 유주영준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影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歸去來兮 귀거래혜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世 與 我 而 相 違 세여아이상위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或命巾車 혹명건차
或棹孤舟 혹도고주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已矣乎 이의호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或植杖而耘耔 혹식장이운자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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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
가을날이었습니다.
군부대 앞뜰에는 해변이 있고 뒷산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무성한 숲이 있었습니다.
봄에는 새소리와 벚꽃이 장관을 이루고 가을에는 들국화와 철새가 날아오는 곳이었습니다.
난 인원점검이 끝나면 악기연습 한다고 산속으로 들어가 혼자서 이리저리 돌아 다녔습니다.
갈대숲에 기대어 들꽃이 가득 피어있는 골짜기를 바라보았습니다.
가을에 겨워 이내 생각에 잠겨버렸습니다.
몸이 맑고 하늘이 맑고 꽃이 아름답고 나가 아름답다.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안개 속 같이 흐린 생각은 이어져 갈수록 환하여 졌습니다.
나의 손끝은 그것을 다 받아 적질 못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알 수 없는 어느 고을이었습니다.
해 저물어가는 초겨울 파장 때 숯장사가 짐을 챙겨 지게에다 지우고 있었습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 흙먼지를 날리었습니다.
그 때 장 구석에 어린애들이 떠들고 있었습니다.
파장이라 쉽게 눈에 띄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동네 코 흘리게 들이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숯장사 앞까지 왔을 때 꼬마들을 쫓아 버렸습니다.
방랑인 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숯장사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곧 겨울이 올텐데...”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다면 날 따르세요” 숯장사는 지게를 지고 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숯장사를 따랐습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져 산짐승 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멀찌감치 뒤따르던 방랑인은 서둘러 숯장사를 따라 걸었습니다.
산골짜기 개울을 돌아 나무다리를 건너 돌계단을 오르니 초가집이 있었습니다.
작은 마당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숯장사는 지게를 내려놓고 부엌에서 불씨를 가져와 방에 있는 등잔불을 밝혔습니다. 더운물을 데워놓고 그 사람을 광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지저고리를 광문에 걸어 두었습니다.
숯장사는 저녁을 지어 차려놓고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이 나자 숯장사는 방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아스라한 등잔 빛을 받으며 그 사람은 들어왔습니다.
숯장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방랑인은 어디 갔는지 없고 긴 머리의 아가씨가 숯장사가 걸어놓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다소곳이 서 있었습니다. 숯장사는 얼이 나간 듯 보고만 있다 간신이 밥 먹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산골 숯장사와 방랑인 아가씨의 이야기는 시작 되었습니다.
산골짜기에 눈바람이 몰아쳤지만
초가집 조그만 방은 작았기에 훈훈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숯장사 일어나보니 부엌에서 무슨 소리가 났습니다.
아가씨는 아침을 하기위해 불을 때고 있었습니다. 연기를 마셔 기침을 하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숯장사 밥 짓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가씨가 일찍 일어나 아침을 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아가씨는 빨래와 떨어진 옷을 바느질하여 기워 입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밤 숯장사는 숯가마에 밤이 새도록 불을 지폈습니다. 아가씨는 잠을 자지 않고 올라와서 숯장사 곁에 앉았습니다. 불빛은 따듯하여 얼마 못가 아가씨는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숯장사 숯을 한 지게지고서 고을로 내려갔습니다. 숯을 팔고 돌아오는 길에 눈을 만났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눈에 빠져서 걷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숯장사는 길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하여 조심스럽게 산길을 헤쳐 나갔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눈바람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습니다.
숯장사는 힘을 다하여 불빛 쪽으로 갔습니다.
그 불빛은 아가씨가 마중 나오며 들고 온 등잔불이었습니다.
아가씨는 길을 잃어 추위에 떨어 손이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서녘 하늘에 노을 져 기러기 줄지어 날아 갈 때면 일을 마치고 숯장사는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춥던 겨울도 가고 진달래 개나리 피는 봄이 왔습니다.
어느 봄날 숯장사는 아가씨와 같이 고을 장터로 숯을 팔러갔습니다. 장터에는 사람들이 많이 붐볐습니다. 약장수, 옷장수, 음식장수 날씨가 따듯하여 장꾼들이 많이 모인 것입니다. 숯장사는 지게를 내려놓고 아가씨에게 맡기고 숯이 필요한 집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숯장사의 숯은 깊은 산골 단단한 나무로 만든 것이라 잘 팔렸습니다. 숯장사는 남아있는 숯을 지고 장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건과 바꾸었습니다. 싸전에는 잡곡과 어물전에서는 고기 두 마리와 소금으로 바꾸었습니다.
숯장사는 아가씨와 같이 옷가게로 갔습니다. 그날 숯을 가져다주면서 한겨울 동안의 숯 값을 여러 집에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숯장사는 아가씨와 같이 옷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골랐습니다. 곱고 부드러운 옷을 주인에게 가져갔습니다.
주인의 말을 듣고 봐두었던 다른 옷을 다시 보여주었습니다. 옷가게 주인은 여기 있는 옷은 먼 곳에서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숯장사와 아가씨는 그 가게를 나와 다른 옷가게에서 겨우 치마와 저고리를 살 수 있었습니다.
장터를 나와 산길을 걸었습니다. 숯장사는 지게를 지고 힘없이 터벅터벅 걸었지만 뒤따라오는 아가씨는 한손엔 생선 두 마리를 엮어들고 한손에는 옷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산골짝 초가집에서는 생선 굽는 냄새가 났습니다.
어느 날 숯장사 일을 하다 점심을 먹으려고 초가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아가씨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물 긷는대와 빨래하는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숯장사는 초가 뒤 언덕에서 아가씨와 같이 먼 곳에 있는 고을을 바라보던 곳이 생각났습니다.
그곳에도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부르려 해도 이름이 없었습니다.
산마루에 올라 석양을 바라보던 곳에 가보니 저 멀리 봄 아지랑이 속으로 수많은 산봉우리만 아른 그릴 뿐이었습니다. 먼 산을 바라보던 숯장사는 산을 내려 왔습니다.
초가 뒤의 양지바른 언덕에 다 이를 쯤 되었을 때 숲 풀 사이로 하얀 것이 보였습니다. 숯장사는 숲 풀을 헤치며 그곳으로 갔습니다. 가까이 가서는 소리 없이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가씨가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팔베개를 하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맡에는 봄나물을 가득담은 바구니가 있었습니다. 숯장사는 곁에 앉아 아가씨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달래, 쑥, 냉이로 오늘 밥상 맛있게 차려야지...’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바람이 서늘하게 불었습니다. 아가씨는 그제 서야 부스스 눈을 떠 숯장사를 보았습니다. 아가씨는 숯장사에게 얼굴이 왜 그런지를 물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다 돌부리에 넘어져서 하도아파서 그랬다고 하였습니다. 산을 내려오다 함께 본 연보라 빛으로 물든 그날의 석양은 더없는 장관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숯장사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아가씨는 부엌 앞에서 무엇을 열심히 씻고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에 비친 모습은 곱고 향기로 왔습니다. 간밤에 비가 왔는지 마당은 촉촉하게 젖어있었습니다.
어느 날 숯장사 일을 하다 갑자기 힘이 빠지고 현기증이나 쓰러질 뻔하였습니다.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일찍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마당에서 아가씨가 쓰러져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창백하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방으로 옮겼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곁에 앉아 밤새도록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날은 산골짜기 숲 속 산짐승도 조용히 숨을 죽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가씨는 숯장사 하듯이 도끼를 들려고 하였으나 들지를 못하였습니다. 숯장사는 아가씨 바느질 하는 것처럼 해보려고 하였으나 손가락만 찔렀습니다.
어느 날 아가씨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숯장사는 보았습니다.
장날이 되어서 숯을 한 지게지고 아가씨와 같이 산을 내려갔습니다. 갑자기 장꾼들이 웅성 그리며 길옆으로 도망치듯 비껴 섰습니다. 숯장사도 얼른 짐을 당겨 뒤로 물렀습니다.
곧이어 말발굽소리 요란하게 나더니 머리에 깃을 꼽고 쇠로 장식하고 칼을 찬 한 무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습니다. 아가씨 또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흙먼지를 털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숯장사 해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일을 마치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집은 비어있었습니다. 개울가 목욕터와 초가 뒤의 언덕에도 아가씨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숯장사는 산을 내려가는 작은 나무다리는 넘지 않았습니다.
해는 저물어 불을 밝혀들고 온 산을 찾았습니다. 빛나는 별과 흐르는 은하수는 침묵하건만 산골짝은 슬픔이 가득하였습니다.
어느 날 초가집 뒤의 양지바른 언덕에 숯장사는 앉았습니다.
산 아래 작은 숲길과 흐르는 구름과 하늘을 보았습니다.
숯장사는 언덕에 기대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세월은 구름처럼 흘렀습니다.
어느 봄날 새가 울고 푸른 풀잎 동산에 돋아날 때 똑, 똑, 똑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올라오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개울을 돌아 나무다리를 건너고 힘겹게 돌계단을 오른 노인은 초가집을 보았습니다. 지붕은 썩어 기울어져 있고 마당엔 낙엽이 가득 쌓여있었습니다.
노인은 숲 풀 사이 햇볕 따듯하게 내려 쬐이는 언덕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텅 비어있는 두 눈과 다물지 않은 입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지팡이를 놓고 곁에 앉더니 그 노인도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산 하늘엔 구름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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