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백
오계자
소슬바람이 속으로 스며든다. 점점 속으로.
해마다 만나는 가을이거늘 이 가을은 유난히 짙고 가라앉는다.
한 인생이 봄과 여름 다 보내고 시월에 도착해서 계절의 10月과 만났다. 예고된 만남
이지만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에 해후(逅)처럼 느껴진다. 저쪽은 풍요의 상징 10月이
요, 이쪽은 굽이굽이 삶의 파도 다 건너고 이제는 금잔디 마당에서 새싹들의 재롱에 함
박꽃을 피워야 할 시월이 아닌가. 그런데 이리도 쓸쓸하고 가슴이 시리다.
그와 나, 청 냉한 하늘을 바라보며 절반은 이미 말라버린 잔디 위에 누웠다. ‘싸그
작’하고 가랑잎이 등에 깔려 바스러지는 비명에 온 몸이 미세하게 움츠러짐을 느꼈다.
전에는 낙엽 밟는 소리를 참으로 좋아했건만, 이제는 신록의 매무새가 조금만 변해도,
보내기 싫어서 떠나기 싫어서 가슴속부터 멍이든 채 이별을 준비하는 아픔이 보인다.
그가 말한다. 10月이라면 풍요의 한가운데서 시작해 풍요로 마감한다는 외형만 보고
모두들 넉넉함으로 여기는데, 풍요롭던 논밭에 그루터기만 남겨야하는 심정을 몰라준다
고. 나는 알지, 어디 들판뿐이겠나 진통을 감추고 온 세상에 색동 이불 만들어 덮어주
면 속이야 어떻든 알 바가 아니라는 듯 겉모양만으로 풍유에 젖어 마냥 좋아하는 것을.
저 곱디고운 color 축제의 무대 뒤에는 쓰리고 아린 이별의 아픔이 있음을. 축제가 끝나
고 裸木이 되어 세찬 얼음바람에 윙윙 울고 있을 때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안다. 속으로 속으로만 흘리는 눈물이 얼마나 뜨겁고 숨막히는지, 얼마나 세상이
원망스러운지도 안다.
불그락 푸르락 피멍이 든 잎새 하나가 감나무에서 손을 놓고 흩날리더니 내 가슴 위에
떨어진다. 갑자기 그날 밤에 귀청을 울리던 그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소름이 끼친다.
까만 허공에서 고요를 깨트리고 성능 좋은 확성기 소리처럼 쩌렁쩌렁 울려서 나를 경직
시키던 그 소리. 0시 45분 이였다. 불안과 초조의 도가니인 중환자 가족 대기실에서 잠
시 넋을 놓고 대답조차 못했던 그 천둥 같은 부름에 이끌려 중환자실로 갔다. 이제는 우
리도 손을 놓으라고. 5년 동안 버티고 매달리던 나의 모든 것이 스르르 풀려버리는 순간
에, 그이는 회갈색이 된 채 숨을 놓았다.
오늘 내 가슴에 떨어진 피멍이든 잎새 하나가, 그날 밤 가슴에 전기 충격으로 남은 자
국과 흡사하다. 아니 그 상처를 가을바람에 실어 내게로 보내 온 듯하여 가슴을 후빈
다.
드높은 하늘에 보일 듯 말 듯 반짝이는 은빛 새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하얀 꼬리를 하
늘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남겨 놓았다. 그 꼬리가 점점 흐트러지고, 한참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봄과 여름, 그리고 지나간 나의 모든 것, 좀 더 붙잡을 수는 없었을까. 외롭고 시려도
이 10月에 좀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붙잡아야겠다. 내년에도 지금처럼 시월인 채로 계
절의 10月 당신을 만나리라. 털고 일어났다.
가을 바람이 전해준 멍든 잎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히고 돌아오려는데 몇 시간 후면 마
감하고 달력에서 찢겨지고 버려질 그가 내년을 약속하잔다.
그러마."
대답하는 입술에 힘이 주어진다.
2005/23집
첫댓글 봄과 여름, 그리고 지나간 나의 모든 것, 좀 더 붙잡을 수는 없었을까. 외롭고 시려도
이 10月에 좀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붙잡아야겠다. 내년에도 지금처럼 시월인 채로 계
절의 10月 당신을 만나리라. 털고 일어났다.